5화. 로제니악 - 2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방이 꽤나 맘에 들었나 보네.”
남의 일이다. 나랑은 상관없지. 라는 느낌이 온 몸으로 전해질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이제 론니악에서 로제에스테님께 함부로 할 악마는 거의 없을 텐데요?”
“함부로?”
“아, 저 이래봬도 나름 이곳에서 결투서열 2위였으니까요. 그러니 로제에스테님께 함부로 할 수계자는 이스에스테님 정도?”
아아, 그 얘기는 안했으면 한다.
“하지만 이스에스테님은 테라이스님의 성에 사니까....... 혹시 로제에스테님의 서열을 노리는 악마 아닐까요?”
“설마.......”
그럼 또 칸니악에서 결투를? 고개를 절레 저었다.
끔찍하다. 상상하기도 싫다.
“후후, 괜찮아요. 로제에스테님의 힘은 제가 인정하니까요.”
진심이야? 하는 얼굴로 돌아보니 루나에스테는 벌써 볼에 홍조를 띄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저, 저거 절대로 정상은 아니야!
“흐음, 재밌어 보이네. 좋아, 같이 가줄게.”
“응?”
하고 내 팔을 끌고 앞서가는 나스에스테.
“저도 같이 가요!”
잠깐만, 갑자기 왜 또 이런 식으로.......
.
.
.
해서 둘과 함께 다시 마주 선 130번 방.
“뭐해, 한마디 해줘야 할 거 아냐.”
네, 나스에스테님. 그 의견은 타당하다 생각되오나.......
통째로 녹여버린다잖아요....... 그런 건 베스파로제님도 못 살려 준다고.
“뭐해, 겁먹은 거야?”
그게 사실입니다만....... 푸훗 하고 비웃는 나스에스테의 얼굴을 보니 오기로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한 것뿐이라고.......”
아아,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라고 생각했었는데, 왜 또 일이 이렇게 까지 된 건지.
“왜? 어려우면 내가 대신 얘기해줄까?”
오오? 나야 당연히 그래주면 고맙.......
“아, 그럼 부탁.......”
“거짓말이야.”
........
“너, 역시 베스파로제님의 에스테가 맞는지 의심스러워. 상위서열악마의 수계자로서 자존심도 없는 거야?”
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 나스에스테가 무슨 잘못인가. 원래 성격이 저래 먹은 걸.
모든 원흉은 방안의 저 악마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아니, 여기에 저 악마만 없었다면. 아니 조용히 나가 줬었다면!
게다가 돌을 던지는 건 뭐야! 잘못 맞았으면 또 죽을 뻔 했다고!
“지금부터 셋을 샐 때까지 문을 안 열면.......”
아아, 이성이란 것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다.
“문 채로....... 날려버리겠다!”
오른 팔을 걷어 문을 향했다.
“하나!”
그래, 문도 날리고.......
“둘!”
“호오? 그래도 할 때는 하는 거야?”
너도 날리고
“꺄악! 로제에스테님! 그거 저도 옆에서 같이 맞으면 안돼요? 네? 네?”
그래, 너도 날아가라
“셋!”
“꺄아아아악!!”
오른 팔에 힘을 주자마자 힘이 빠져나가며 머릿속이 어질.
그리고 연달아 들려온 폭발음과 루나에스테의 비명소리.
조금 숨이 벅차오르긴 하지만....... 이제는 눈앞이 흐려지거나 팔이 부풀어 오르지는 않는다.
베스파로제님과의 수련 덕분이다.
하루 한발 뿐.......이지만 말이다.
“흐음, 꽤나 강한 방어마법이네. 벽보다는 단단하다는 말이니까.”
시야를 가린 먼지 사이로 나스에스테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물론 다치지는 않게 조심했지만 그래도 나름 방출의 공격범위에 넣었었는데....... 아니, 그보다.......
“아흐응....... 역시 최고야.”
루나에스테의 옆으로 보이는 흠집하나 없이 멀쩡한 문.
나름 부숴 놓을 자신이 있었기에 놀라고 말았다.
방어 마법이라고?
“안에 있는 악마. 방어 마법에는 꽤나 뛰어난가 본데? 이 정도까지라면 이쪽에서 힘으로 열고 들어가는 건 무리야.”
절망.
문도 날리지 못했고, 나스에스테도 멀쩡하고, 루나에스테는 또 반쯤 맛이 간 표정으로 웃고만 있고......
큰맘 먹고 저지른 일의 결과가 이토록 허망할 줄이야.
“.......그냥 포기 할랜다.”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 라니악에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다들 나한테 관심을 끄겠지.
사실 난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재밌는 녀석은 아니니까 말이다.
“잠깐, 나라면 이 문을 열 수 있을지도?”
“저, 정말?”
그래, 나스에스테도 ‘에스테’니까. 뭔가 대단한 힘이 있는 게.......
“거짓말이야. 네 방출로 안 되는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 포기해.”
.......힘이 없어서 이젠 화가 나지도 않는다.
.
.
.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래도 리아세스테가 웃는 얼굴을 보니 조금이나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게다가 피부에 와 닿는 지옥에서는 느끼기 힘든 상쾌한 차가움.
이것 때문에라도 란세르님의 수업은 무조건 참석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말이다.
“아, 나스미스테는?”
그러고 보니 나스미스테를 못 본지 꽤 된 것 같다.
그래도 칸니악에서 결투가 끝난 후 몇 번은 란세르님의 수업에서 볼 수 있었는데.
매일 있는 란세르님의 수업에서도 못 본지 꽤 되었으니.......
“요즘 스레나스님과 특별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하던데요?”
가끔 몇 명 다른 수계자가 오는 것 말고는 전혀 참여가 없는 수업이니까.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보죠.”
란세르님은 언제나처럼 평온하다.
그래선지 란세르님의 수업을 듣고 있자면 마음이 안정 되는게........ 어쩌면 이곳이 지옥에서 유일하게 내가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번에는 심상 이용법의 기초를 알려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리아세스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
나는........ 뭐, 대충은 기억난다.
방출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식인데, 그, 뭐였더라.......
“그래, 에스티. 뭐였을까?”
라는 란세르님의 질문에 세르에스테에게서 돌아온 것은 내가 더 부끄러워 질 정도의 싸늘한 눈빛과 무응답.
매번 이렇게 무시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물어보는 란세르님도 참 독종이다 싶다.
“하하, 그래. 요는 방출을 쓸 때 최대한 붙들어 둔다는 느낌으로.......”
란세르님의 손 아래로 둥글게 뭉쳐진 하얀 덩어리가 피어올랐다.
“이게 성공한 다음은 이제 마음속에 만들고 싶은 모습을 담는 겁니다. 그래, 저는 이게 좋겠군요.”
란세르님이 눈을 감고 잠시.
그 하얀 덩어리는 쭈글어들었다 펴지는 것을 반복하더니.......
“자, 어떻습니까.”
저번 수업 때도 본 것이지만 몇 번을 봐도 놀랍기만 하다.
전혀 상관없어 보인 그 하얀 덩어리가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조각으로 변해있다.
그것도 꽤나 멋들어진 용의 모습으로.
“처음에는 이렇게 시간이 걸리나. 숙달된다면 이렇게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하고 란세르님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용의 모습을 한 유리조각이 이번엔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충분히 조정이 가능하지요. 이는 마법과는 다른 성질을 갖습니다. 마법처럼 쉽게 깨어지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악마들은 마법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 란세르님은 악마들은 심상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마법 따위는 필요 없다고 수업 중에 몇 번이고 얘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베스파로제님도 그렇고 세르피리아님도 그렇고 실제 다른 악마들이 많이들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면 그렇게 지지받는 의견은 아닌 듯 싶다.
“뭐, 이론적인 것은 저번에도 충분히 했으니 오늘은 직접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봐 드리죠.”
라는 말에 리아세스테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지 막 이런저런 손짓을 해보이고 있다.
“로제에스테님, 로제에스테님은 뭘 만드실 건가요?”
“응? 아, 글쎄.......”
란세르님은 이걸 응용하면 옷이며 무기며 뭐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었다. 라는 말만 들으면 완전 만능이건만........
중요한 건 그 만들고자 하는 것의 완벽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넣어야 한다는 건데.
“저는 이거!”
하고 몇 번의 실패 끝에 리아세스테가 내게 보여준 것은....... 인간의 팔.......?
“임프였을 때를 생각하면 역시나! 저는 팔만 먹었었거든요. 살이 야들야들해서....... 아! 물론 지금은 안 먹지만요.”
그 순수한 미소로 전해온 끔찍한 발언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새삼스레 내 옆에 리아세스테가 악마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아.”
“로제에스테님?”
“결정했어. 뭘 만들지.”
그래, 저런 인간의 팔 같은 것도 된다면, 어쩌면 그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후우.”
일단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왼팔로 라크를 쏘듯 심상을 꺼내놓았다가 묶어둔다....... 좋아, 여기까지는 간단하다.
그 다음엔 눈을 감고 집중.
“뭘 만드시는 거예요?”
항상 옆에서 봐왔기에 만드는 과정은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셨던.......
“아, 좋은 향기!”
감았던 눈을 뜨고 나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내 손이 향한 곳 밑에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다는 양 놓여있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두파이.
“이게 뭐에요? 뭐에요? 엄청 좋은 향기가 나요!”
“호오, 로제에스테는 파이를 만들었군요.”
우, 우왁! 란세르님? 언제부터 옆에........
“파이.......요?”
“예, 인간들이 즐겨먹는 음식이지요. 이건 호두라는 게 위에 깔려있는 것을 보니 호두 파이겠군요. 맞나요? 로제에스테?”
“네? 아, 예!”
란세르님이 어떻게 호두파이를....... 아, 아니 그보다
“아! 그, 그게........ 베스파로제님을 따라 인간계에 갔을 때 봤던 건데 인상이 남아서.......”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이를....... 왠지 란세르님과 리아세스테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아 불길하다.
의심받는 건가? 의심받는 거겠지?
“요는 이거 먹는 거라 이거죠?”
“응? 아, 으응........”
파이의 한 구석을 살짝 뜯어다 입에 넣는 리아세스테.
근데, 저거 먹어도 되는 건가? 결국 심상으로 만든 건데?
“마, 맛있네요.”
“호오, 그렇군요. 달달한 것이.......”
어느새 란세르님도 파이를 한 점 가져다 입으로.
괜찮은 건가? 겁은 나지만 나도 한 조각.......
“........”
아, 이런.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똑같다. 기억 속 그대로의 어머니의 파이 맛이다.
그리고.......
“맛있네.”
떠올랐다.
내 방을 되찾을 방법이........가 아니라 언제 와 있던 거야 세르에스테는!
게다가 세르에스테가 말하는 거 처음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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