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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26 21:38
연재수 :
306 회
조회수 :
136,500
추천수 :
3,290
글자수 :
1,700,661

작성
21.01.3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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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추천
7
글자
17쪽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답게 퇴장한다

DUMMY

성채도시 살라잘에는 해시계가 걸린 시계탑이 있다.


오늘따라 그늘이 진 그 시계탑이 내려다보는 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


도시에 중요한 공지가 있을 때마다 모임 장소로 쓰였던 이 광장은 지금, 쿨란이라는 한 남자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음, 이건 안 되겠네.”


그 말에, 겨우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운명은 정해진 뒤.


서걱.


“다음!”


목이 덜렁거리는 여자의 시체가 핏자국을 남기며 질질 끌려나간다.


시청 건물에서 가져온 고급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건 니블족의 부족장, 쿨란이다.


그는 지금 최종적으로 누구를 살릴지 정하는 선별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헐벗은 여자들이 오들오들 떨며 한 줄로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쿨란의 부하들이 칼을 빙빙 돌리며 도망치는 이가 없도록 감시했다.


니블족에 여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약탈지에서 여자를 납치해서 아이를 만드는 걸 강제하는 수단을 즐겼다.


니블족의 눈에 임신은 단순히 미래의 병사를 만드는 것이었기에, 최대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튼튼하고 젊은 여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니블족 남자 전원에 돌아갈 성 노리개는 하나씩 정해두었다. 지금은 남은 여자 중 쿨란이 가질 여자를 정할 뿐이다.


“이런 할망구는 왜 살려놨어? 다음!”


서걱.


쿨란의 손짓 하나에, 또 하나의 목이 잘린다.


여자들은 제발 선택되어 살아남기를 바랐지만, 여기서 쿨란의 마음에 든다고 해도 죽음보다 더 끔찍하면 끔찍했지 별반 다르지 않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오, 이 년은 꽤 좋네.”


쿨란이 웃으며 일어나더니,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에게 다가섰다. 나이, 몸매, 하물며 얼굴까지 그의 취향에 쏙 들어맞는 암컷이었다.


“그렇게 가리고 있으면 섭섭한데. 좋은 걸 가졌으면 보여줄 생각을 해야지!”


“앗ㅡ”


쿨란은 겨우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있던 여자의 두 팔을 한 손으로 휘어잡아, 몸 구석구석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했다.


미래를 약속한 남편밖에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 야만적인 부족의 음담패설 소재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여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굴하지는 않겠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이 짐승...!”


“그래, 짐승이고말고.”


쿨란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천천히 더듬어 올라간다.


“드센 년, 별로 싫지는 않다고. 감도를 시험해볼까.”


그는 서슴없이 억센 손으로 여자의 가슴을 세게 쥐었다.


빨랫감에서 물기를 빼듯 강약을 조절하며 주무른다.


“아윽ㅡ”


여자가 저항하려하지만 다부진 몸의 성인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다.


“좋구만 좋구만.”


여자의 반응을 보며 계속 가슴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쿨란.


“어디보자... 오?”


여자가 꼬고 있던 다리를 강제로 벌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재미있군. 이런 상황에서 흥분한 암캐가 있다니.”


쿨란은 분한 표정으로 땅을 바라보는 여자를 보고 실실 웃더니 부하에게 손짓했다.


“이 년은 반응이 좋아서 괴롭히는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천막으로 데려가게 옆에 두고 있어라.”


“예에.”


“자, 그럼 다음ㅡ”


“이야, 오자마자 이게 뭐냐. 인간들은 정말 취미 한 번 고상하시구만?”


바로 뒤에서 들린 것 같은 남자 목소리에 쿨란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목소리의 근원을 찾으러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단순히 부하가 한 말로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그 목소리가 신경 쓰였던 것이다.


“쿨란?”


“너희들, 방금 이상한 목소리 들리지 않았냐?”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는 부하들.


“잘 모르겠습니다. 잘못 들은 거 아닙니까요?”


아무래도 그걸 들은 건 쿨란 뿐인 모양이었다. 이래선 그만 바보가 된다.


“에잇, 닥치고 있어봐라···”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던 쿨란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탑의 꼭대기에 인영 하나가 있었다.


“저기! 저기다! 빨리 가서 잡아와!”


손가락으로 시계탑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쿨란.


부하들이 달려가기 시작했지만, 굳이 시계탑을 오를 필요는 없었다.


시계탑의 꼭대기에 앉아있던 인영이 몇 계단을 점프하는 정도의 일이라는 것처럼, 망설임도 없이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이런ㅡ”


쿨란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보통은 저 높이에서 그냥 떨어지면 죽겠지만, 그의 생존본능이 지금은 다른 생각 말고 그저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시계탑에서 뛰어내린 그림자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콰앙ㅡ!


단단한 지면이 터져나가는 충격이 광장의 모두를 덮쳤다.


무거운 철 덩이라도 떨어뜨린 것 같은, 건물이 부서지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였다.


“도, 도대체 뭐가 일어난 거냐···”


크게 숨을 들이쉬던 쿨란은 곧 입안에 잔뜩 들어온 먼지 때문에 기침을 했다.


땅이 부서지며 잔뜩 날아오른 먼지와 파편 덕분에 당장 코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변에서도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부하 놈들은 일단 무사하다.


적에게 덤벼들게 할 전력이 남아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쿨란은 상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자기 몸으로 깨달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자욱한 먼지구름이 걷힌 뒤에 서 있는 건 마족 어린이를 한 손으로 안고 있는 남자였다.


“군인?”


그의 옷차림을 본 쿨란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어린이에게 보여줄 광경은 아니지 않냐? 이런 놀이, 인간치고는 신박하긴 하지만 말이야.”


옅은 미소를 띤 마족은 칠흑처럼 어두운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옷깃과 견장에 달린 별 하나를 데트르 대륙의 주요 국가들이 쓰는 군 계급으로 해석하자면, 이 자는 자그마치 준장의 계급을 가진 장성이라는 소리가 된다.


준장이라 함은 하나의 사단을 부리는 지휘관. 혀 하나로 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움직여 적을 짓밟을 수 있는 위치.


“아니···”


쿨란은 고개를 저었다.


정처 없이 떠다니는 니블족의 특성 덕분에 여러 나라의 군대와 마주쳐본 적이 있지만,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입고 있는 군복은 그가 본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다.


적어도 데트르 대륙의 어느 국가도 저런 군복을 쓰고 있지는 않다.


“... 단순한 허세용인가.”


쿨란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장성 정도 되는 군인이 아무런 호위 없이 이렇게 혼자 다닌다는 건 이상했던 것이다. 그런 고위 군인치고는 너무 어려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골똘히 생각하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돌려받을 게 있어서 말이지.”


남자는 허리에 매단 수수께끼의 은색 물건에 손을 얹으며, 태평하게 쿨란을 향해 걸어왔다.


쿨란이 남자와 말하는 걸 보고 있던 부하들이 하나같이 곡도를 빼 들었다.


그가 한 손으로 안아 올린 판테라 아이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남자 본인은 수많은 검이 자신을 향하는 걸 보고도 웃을 뿐이었다.


“다 좋으니까 얘기부터 끝난 다음에 하자고.”


그의 태도를 본 쿨란도 손을 들어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 일부러 싸움을 걸 생각은 없었다.


단순한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이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는 뭔가 께름칙했던 것이다.


“네놈... 우리를 아는 거냐?”


쿨란이 물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되찾을 물건이 있어서 말이지. 아마 네 목에 걸려있을 텐데?”


남자의 말에 쿨란은 그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얼마 전 어느 마족을 죽이고 빼앗은 목걸이라는 걸 깨달았다.


“... 왜 그걸 네놈한테 넘겨줘야 하는 거지?”


군말 없이 넘겨주면 체면이 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려주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는데 그 마족이 훔쳤다 정도의 설명을 기대하며 이유를 물어본 쿨란이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아~ 할 수 없구만.”


남자가 한탄하는 것과 동시에,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악!”


쿨란이 점찍어둔 여자들을 감시하던 부하의 몸이 성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름에 불을 부은 것처럼 아낌없이.


“뭐, 뭐 무슨 일이...”


화염에 휩싸인 그는 도와달라는 것처럼 손을 뻗더니, 털썩 쓰러지고 나서도 계속 타오른다.


“한겨울에 장작으로는 아주 딱 맞지? 인간의 몸이라는 거는 말이야.”


쿨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손을 대지도 않고, 마법 주문을 외지도 않았음에도 인간 하나를 손쉽게 불태워버렸다. 대항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이다.


“다시 물어볼까.”


남자가 군모를 벗더니 귀를 긁적였다.


그게 인간의 것이 아닌, 개과의 귀인 것을 확인한 쿨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일단 그 목걸이는 지금 돌려받아야겠어. 인간 장작이랑 같은 꼴 나고 싶지 않으면 빨랑 움직여라.”


더 이상 체면을 차리고 말고할 상황이 아니다.


쿨란은 주저하며 목걸이를 풀고,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를 향해 던졌다.


“나이스 캐치.”


솜씨 좋게 받아낸 남자가 속삭인다.


“이, 이걸로 된 거지? 말해두지만, 니블족은 너와 적대할 생각은 없다.”


쿨란이 조심스레 묻는다.


부하가 하나 산채로 불타버리는 걸 실시간으로 본 시점에서, 이 마족과 싸우고 싶다는 생각은 쏘옥 들어가 있었다.


“안됐네, 인간. 내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까지는 일단 개인적인 일이고, 슬슬 공적인 용무로 넘어가 보자고.”


그는 다시 군모를 고쳐쓰고 팔짱을 끼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겁에 질린 이들을 보았다.


“나는 가름. 신ㆍ마왕군 준장이자, 군무부 총사령관 권한대행이다.”


“마왕군?”


“마왕군이라고 했지, 지금.”


부하들에게 명백한 동요가 퍼진다.


쿨란도 다시 마왕군이 생겼다는 소식은 전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레윤케 한복판에서 마왕군이 뭐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지경에 와서 눈앞에 놓인 사실을 믿지 않을 정도로 그는 우둔하지 않았다.


정말 저것이 마왕군 간부라면 부하들을 미끼로 써서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던 쿨란에게 멀리서 이상한 탕,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질적인 소리에 더 불안해진 쿨란에게, 가름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 저거 말이지. 내 부대가 지금 도시 내 니블족을 전부 죽이고 있거든. 지금 너랑은 별로 상관없으니 안심해두라고.”


쿨란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마왕군 간부ㅡ신ㆍ마왕군 준장이 혼자 온 게 아니라 부대를 끌고 왔다면 니블족은 독 안에 든 쥐다.


약탈이 전부 끝날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말라는 명령이었으니.


이대로라면 이 성채에 갇힌 채로 마지막 한 명까지 살해당한다.


“가, 가, 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이 새끼가!”


당장 도망치려 궁리하던 쿨란의 눈에, 검을 들고 가름이라는 마왕군 간부에게 달려드는 부하가 보인다.


공포에 판단력마저 흐려져 버린 것이겠지. 너무 무서워서 더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다음 찾아올 결과는 뻔했다.


우두둑ㅡ


가름이 손쉽게 그의 목을 낚아채어, 그대로 으스러뜨린다.


그것도 아이 하나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안심해, 리디아. 저놈의 목은 남겨줄 테니까.”


“네.”

마족 아이와 그렇게 대화한 가름이 대충 내던진 니블족 병사의 미동 없는 몸에 갑자기 뜨거운 불길이 솟았다.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구만. 냄새가 아찔한데?”


남은 부하들은 그 모습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인간을 음식 취급하는 것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감.


그리고 너무나 명백한 힘의 차이에 의욕이 단번에 없어진 모양이지만, 쿨란은 그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괴물에게 몇 번이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 수 있는 건 용사 정도다.


“아직도... 많이 남았군.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나를 위해서 아주 잘 모여줬어. 이거이거, 아주 황송할 따름이라고.”


가름이 과장되게 궁중식 절을 해보였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의 혼을 빼어가 저승에 속박시킨다고 한다는, 전설 속의 존재와 닮아있었다.


“어, 이제, 어, 어떡... 어, 어떡ㅡ”


몸을 달달 떨며, 병사 하나가 말을 더듬는다.


병사들은 이제 덤벼들지도, 도망치지도 못했다.


한 발짝 잘못 움직이거나 고개를 트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엄습해올 것 같은 기분은 그 자리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 모처럼이니까 연습 상대로 써줄게. 다른 마법도 연습해두라고 누님한테 한 소리 들었으니 말이다.”


한탄의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가름이 들어 올린 손에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한다.


“풀캐스트ㅡ슬래쉬.”


공간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참격이 날았다.


발이 굳은 채 서 있던 병사들의 상반신이 하반신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장기를 자랑하며 쓰러진다.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살점과 피의 웅덩이. 그곳에 비치는 병사들은 다음 피해자다.


가름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듯, 씨익 웃으며 검지로 어느 병사 하나를 가리켰다.


“메르팅 팟.”


잔잔하게 건넨 한마디에 한여름의 얼음처럼 맥없이 녹아내리는 건 인간.


피부가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형체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단순한 붉은 죽으로 변해 웅덩이를 만든다.


그곳엔 방금전까지 멀쩡히 움직이고 있던 인간의 모습은 없다.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녹아버린 고기의 잔해가 있을 뿐.


그 광경에 너무 놀라 뒤로 넘어진 쿨란이 발버둥 치듯 일어선다.


“뭐, 뭐하냐, 새끼들아! 한꺼번에 덤벼! 다 죽고 싶냐?!”


쿨란의 호통에 조금 정신을 차린 니블족 병사들이 일제히 가름에게 덤벼든다.


어안이 벙벙한 채 있어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걸 깨달았겠지.


“이 괴물새끼ㅡ”

“죽어라!”


젖먹던 힘까지 짜내 달려드는 병사들을 보고, 가름은 입맛을 다셨다.


“아, 아... 정말이지,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됐어.”


그 순간, 병사들은 거대한 입이 자신들을 향해 크게 벌려지는 환상을 보았다.


온몸에 불꽃을 두른, 거대한 검은 개의 모습을 한 괴물의 환상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들은 모두 어둠에 집어 삼켜졌다.


◆ ◆ ◆ ◆ ◆ ◆ ◆ ◆ ◆ ◆ ◆


“뭐냐, 뭐냐고...!”


쿨란은 홀로 광장을 빠져나와 달리고 있었다.


이미 적 부대가 살라잘에 침투했다ㅡ그 괴물 같은 놈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이미 이 도시에 남아있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자살행위다.


“젠장... 젠장! 이런 게 말이 되냐고!”


성채도시를 무너뜨려 인생에 복이 찾아오나 싶었더니 이 꼴이다.


나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저런 괴물이 이런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그것도 약탈 중에 갑자기 나타나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다행히 쿨란은 가장 가까운 출입구를 알고 있었다.


그곳만 지나기만 하면 이 빌어먹을 도시와도 안녕이다.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치느라 노리개를 못 데려온 건 아쉽지만, 아직 죽지 않은 계집들도 천막에 데리고 있다. 당분간은 너덜너덜해진 구멍으로 참아야겠지.


“그래, 괴물 새끼가 별거냐... 나는 살아남는 거야... 이번에도!”


억지로 웃음을 띠던 쿨란은 뭔가에 세게 부딪혀서 뒤로 넘어졌다.


얼얼한 머리를 잡으며 위를 올려다보자,


“어딜 그리 바쁘게 가냐?”


가름이 골목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언제 따라잡혔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직 나랑 할 얘기가 남았는데 섭섭하게 왜 그러시나.”


“이, 이... 괴물새끼!”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도망칠 수 없다고, 인간.”


넘어진 채 뒤로 기고 있는 꼴사나운 쿨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가름.


쿨란은 문득 바꿔치기 마법 아이템을 생각해냈지만, 몸을 바꿀 수 있는 부하가 아무도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꼴 좋다는 듯 웃고 있는 그건 마족 따위가 아니라 전승에 나오는 악마처럼 보였다.


“으, 으아악! 저리 꺼져!”


일어나서 반대쪽으로 도망치려던 쿨란의 가슴팍에, 뭔가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세상이 뒤집히고, 그대로 뒤로 발랑 쓰러진 쿨란은 가슴팍을 만지다, 단검이 꽂힌 걸 깨달았다.


겨우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비치는 건 그를 노려보는, 작은 판테라 소녀.


“... 아버지의 원수.”


그의 머릿속에서, 그가 죽인 판테라 남자와 이 소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럼 이 지경이 된 것도 전부 그 별 볼 일 없는 마족 하나 때문에ㅡ


“끄, 어억.”


차갑게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는 쿨란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작가의말

warrior 2020 보고 썼습니다. 영상 마지막의 그 데마시아가 보이는 압도적인 힘에 뒷걸음질치는 사일러스 외 부하처럼, 적한테는 이건 뭐 ㅅㅂ 답도 없는 상황을 그리면서요


마왕군 간부 (친위대 포함한 장성) 은 혼자서도 “용사가 없는 대륙의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지원군을 데리고 물건너 찾아올 스파세니예 연방은 얼마나 버텨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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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빛 바랜 재회 +2 22.05.13 112 6 17쪽
207 스비엣, 첫 번째 불꽃의 예찬자 +1 22.04.12 126 6 18쪽
206 흉조의 완성 +1 22.03.30 122 5 19쪽
205 환상을 부수는 번견 +1 22.03.25 123 4 15쪽
204 의지는 얼어붙지 않는다 +1 22.03.03 123 5 18쪽
203 격돌 +1 22.02.22 113 4 17쪽
202 집결 +1 22.02.08 110 5 17쪽
201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2 22.01.15 116 5 18쪽
200 패배, 그리고 지켜보는 눈 +1 21.12.31 124 4 18쪽
199 카디널 보이드 +2 21.12.24 122 4 17쪽
198 마도 vs 마법 +3 21.12.08 130 3 18쪽
197 망설임을 잠재우지 않으면 +1 21.11.29 121 3 16쪽
196 어둠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1 21.11.16 112 5 18쪽
195 엔딩의 서막 +3 21.11.02 123 7 16쪽
194 시계 바늘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돌아간다 +3 21.10.17 122 5 18쪽
193 예카테리나 페르바크 중위 +1 21.09.28 99 5 18쪽
192 이곳은 죽음이 백색을 띠고 있다 +1 21.09.03 102 5 19쪽
191 하늘에서, 하늘로 쏟아지는 파괴 +2 21.08.01 113 3 17쪽
190 여름 바다, 휴가 +2 21.07.24 111 4 16쪽
189 소녀는 절대 잊지 않는다 +5 21.07.11 119 4 17쪽
188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전란 +3 21.07.05 128 5 19쪽
187 동전의 뒷면은 온도가 다르다 +2 21.06.21 120 6 17쪽
186 전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1 21.06.07 123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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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겨울 비가 오기 전에 +3 21.02.21 167 8 14쪽
175 밤에 물들어버린 빛 +5 21.02.15 192 9 15쪽
174 손님 맞이 +2 21.02.12 166 7 17쪽
173 어둠은 꽈리를 틀었다 +4 21.02.10 177 7 15쪽
172 마왕의 방문 +3 21.02.07 182 4 16쪽
171 연방 +2 21.02.04 160 6 19쪽
170 기다리는 건 죽음 +3 21.02.02 176 6 16쪽
»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답게 퇴장한다 +5 21.01.31 161 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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