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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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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13,963

작성
21.02.0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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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연방

DUMMY

스파세니예의 겨울은 춥다.


사망자가 매년 발생하고 외출이 불가할 정도의 폭설이 내리는 일이 잦다. 지역에 따라선 온도가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빈번하다.


대부분의 지역은 추위에 맞춰 개발되어있기에 몸을 덥힐 곳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겨울 한정으로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스파세니예 연방의 수도도 예외는 아니다.


한파를 맞아 눈보라가 몰아치는 도심을 내려다보는 회색 건물의 옥상엔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계절이 계절 인만큼 굳이 추위를 감내하면서까지 밖으로 나올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 옥상엔 어린 소녀가 난간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한겨울에 입는 것치고는 너무 얇은 셔츠를 팔까지 걷어 올리고 바지도 반바지.

방한용품이라고는 자신의 머리색을 꼭 닮은 목도리를 두른 게 전부인 소녀는 추운 기색이 전혀 없이, 오른 손목에 맨 붉은 천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하얗게 변한 도심의 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이드 테일로 묶은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흔들릴 뿐.


기이하게도, 그 많고 많은 눈이 소녀의 머리에 쌓이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게 하얗게 되어버린 주위 속에서 혼자만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듯한 모습.


그것도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건 소녀가 입은 건 누가 봐도 군복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밖을 가득 채운 눈만큼이나 새하얀 군복이다.


철제 다이아가 옷깃에 하나, 견장에 하나 박혀있는 군복은 어느새 소녀의 일상복이 되어있었다. 처음엔 껄끄러웠지만, 자신의 이름 뒤에 계급이 붙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카옌 콜드노바 소위는 얼마 전 11살이 되었다.


그 어린 나이로 골똘히 뭔갈 생각하며 눈이 내리는 걸 보고만 있는 걸 주저 없이 방해할 사람은 카옌이 몸담은 조직에서 몇 되지 않는다. 방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콜드노바 소위. 곧 최고지도자가 소집한 회의가 열릴 시간입니다.”


가벼운 차림의 카옌과 달리 뒤의 소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울코트를 입었다.


코트의 견장에 달린 다이아는 카옌보다 하나 많은 두 개. 겨울에 군인에게 지급되는 롱코트다.


그걸 꽁꽁 여미고 있는 모습이 카옌과 대조되었지만, 소녀가 검은 단발에 머리핀 대신 붉은 천을 자른 것을 묶어놓은 것에서 묘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에이, 그런 말 하지 말고. 계속 지방만 쏘다니다가 얼마 만에 와보는 고향인데, 조금 있다 가면 안 돼, 리나?”


카옌이 상관을 친구 대하듯 대답하자 중위 계급의 소녀는 자신의 안경에 묻은 눈을 장갑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태도가 일변했다.


“카옌. 이런 눈 사이로 보이긴 보여?”


“응. 잘 보여. 잔뜩 늘어선 건물밖에 없는 도시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난 곳이야.”


존대가 갑자기 반말로 바뀌었지만 그건 소녀가 카옌의 상관이 아닌 친구로서 얘기하겠다는 신호다.


예카테리나 페르바크라는 친구는 딱딱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카옌에게는 언니와도, 동생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피는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가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해왔다. 스파세니예 연방군에 들어간 후로도 그 관계는 변함없다.


“나는 이 도시가 싫은데, 너는 참 특이해. 카옌. 너도 여길 좋아할 이유는 전혀 없잖니.”


예카테리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본인은 둘째 치고 카옌에게 나쁜 기억밖에 남지 않았을 도시. 정부로부터의 긴급 소집이 없었다면 일부러 이곳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어난 마을인걸. 가끔은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잖아, 리나.”


카옌이 해맑게 말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나는 이곳을... 아니, 스파세니예를 용서할 수 없어. 카옌 너를 저버린 연방이야. 마음만 같아선 불살라버렸으면 좋겠어. 너는 용서해도 나는 그럴 수 없어. 저주받은 곳이야.”


“그런 짓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걸. 이미 다 예전 일이고. 의미 없다는 건 리나도 잘 알잖아? 이젠 우리 둘 다 연방군에 묶인 몸이니까.”


카옌은 예카테리나의 어깨를 친근하게 쳤다.


“자, 슬슬 가자. 늦으면 그 돼지가 또 시끄럽게 굴 거야.”


◆ ◆ ◆ ◆ ◆ ◆ ◆ ◆ ◆ ◆


철컥, 우우웅ㅡ


승강기 위에 설치된 푸른 전구가 점등하고, 숫자 1을 가리키던 바늘이 13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띵ㅡ


카옌과 예카테리나가 내린다.


“어라, 라트신 없네? 불러놓고 어디 간 거지, 그 돼지.”


회의 테이블까지 마련되어있는 넓은 집무실을 빙 둘러보더니, 소녀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리나, 최고지도자가 이렇게 자꾸 방을 비워도 되는 거야? 하는 것도 없으면서 어딜 자꾸 가있는 거지?”


“그 얘기, 본인 앞에서는 하지 말도록 해. 카옌 네 말엔 나도 동감이긴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카옌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코트를 벗어 반으로 접어 무릎에 놓은 예카테리나는 반바지를 입은 카옌과 대비되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쪽은 활동이 잦은 업무, 그리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은 업무를 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음~”


카옌이 기지개를 켰다.


연방 각지에서 소집을 받고, 오늘 라트신의 집무실에 모이기로 한 건 아틀리치니ㅡ연방군에서도 제일 우수한 능력을 보여준 간부들이다.


오래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보니 같은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석에서는 이미 서로 불편 없이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사이로 발전했다.


아틀리치니는 비록 군 산하기관이긴 하지만 최고의회의 의원과 동일한 면책특권이 있었고, 최고지도자에게 직접 보고를 올릴 권한도 있었다.


그들이 부리는 ‘마도’는 스파세니예 연방군의 최대 전력을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같았으면 각자의 업무를 수행하느라 연방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아틀리치니의 7인 전원이 소집됐다는 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슬슬 누가 또 오나 본데?”


카옌이 승강기가 점등하는 걸 보며 말했다.


“여, 늦었잖아?”


카옌이 손을 들어 인사하는 거에 화답한 건 군복을 불량하게 풀어헤친 소년이다.


“이야, 웬일이야? 이 둘이 제일 처음 와있다니. 어디에 머리라도 부딪힌 거냐?”


“나오키, 오자마자 시비 걸지 말고 앉기나 하렴.”


옆에서 핀잔을 주는 건 백의를 걸친 금발 여성이다. 군의관으로 착각할만한 차림이지만, 그녀는 사실 연구직을 맡고 있었다.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심각하게 인권 문제가 있는 실험 따위를 주도하는 건 거의 그녀라고 보아도 좋았다.


“예, 예~”


따분해 보이는 여성과 장난스러운 웃음을 띤 소년이 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레~느. 오늘도 꽤 풍만하고 섹시한데, 역시 나한테 보여주려고ㅡ악!”


그는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일레느의 어깨에 팔을 감으려고 하다, 딱밤을 맞고 울상을 지었다.


일레느는 한숨을 쉬며 팔짱을 풀었다. 안 그래도 큰 자신의 가슴이 강조되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겠지.


“중위. 장난은 그쯤 하도록 해. 놀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나오키에게 면박을 준다.


띵ㅡ


“숙녀분들, 벌써 와있었군.”


상큼하게 웃으며 등장하는 청년과 그를 따르는 소녀가 뒤이어 승강기에서 내렸다.


청년의 이름은 테일러 에스먼드 소령.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레이지스 휴버 중위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그는 하품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하음. 이렇게 한꺼번에 모이는 건 오랜만이라 들뜨는걸, 레이.”


“그러게요. 꽤 중요한 일인가 봐요... 아앗, 사탕을 맘대로 꺼내먹지 말아주세요 소령님! 여긴 라트신 최고지도자의 집무실이라고요.”


띵ㅡ


“오오, 대령. 그 돼지는 만나고 온 거야?”


아틀리치니의 마지막 멤버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래. 슬슬 오신다고 하니, 너무 소란 피우진 말아 주게.”


그는 아틀리치니의 최고령인 루웨인 대령.


긴 코트를 입은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가 슬슬 나올 나이로, 연방에선 매우 존경받는 군인이었다.


그의 전략이 있었기에 수많은 내전을 겪으면서도 스파세니예 연방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게 평균적인 인식일 정도로 말이다.


띵ㅡ


“오신 모양이군.”


소파에 늘어져 있던 아틀리치니의 멤버들이 일어섰다. 아무리 무능하고 악한 인간일지라도, 지금부터 나타나는 건 스파세니예 연방의 최고 지도자니까.


“음, 음. 다 모여있군.”


살이 얼굴까지 오른 중년의 남자가 승강기에서 내리며 땀을 닦았다.


일부 부하들 사이의 별명인 돼지처럼, 킁킁대는 그것에 권력자의 위엄이라는 건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생리적인 이유로 1m 이상 가까이는 다가가기 싫은 오오라를 풍겼다.


“으엑ㅡ”


“쉿.”


카옌이 그걸 보고 질린 얼굴을 했지만, 옆에서 예카테리나가 주의를 줘서 별말이 나오진 않았다.


광활한 스파세니예 연방의 최고 권력을 지닌 자ㅡ최고 지도자 라트신은 창가에 있는 자신의 의자까지 가서 작은 안경을 쓰더니,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서 읽었다.


“루웨인 뮬러 대령. 테일러 에스먼드 소령. 일레느 코르투와 대위. 레이지스 휴버 중위. 예카테리나 페르바크 중위. 나오키 쿠로사와 중위. 카옌사즈 콜드노바 소위.”


작은 안경 너머로 라트신이 눈을 찡그렸다.


“전원 있겠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뒤, 라트신은 스위치를 내려 실내조명을 껐다.


위잉~ 하고 돌아가며 빛나기 시작하는 건 묵직한 프로젝터.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찰칵ㅡ


벽면에 비친 건 스파세니예 연방이 아닌, 전혀 다른 지역의 지도였다.


“이게 뭔가요?”


일레느 대위가 먼저 흥미를 보이며 물어보았다.


“데트르 대륙의 지도다.”


그 말에 아틀리치니의 인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스파세니예에게 데트르 대륙은 아주 오랜 역사 동안 관심 밖의 일이었다. 굳이 그들을 소집해놓고 이 지도를 보여주는 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이건 최고의회에서 결정된 지 얼마 안 된 일이니 자네들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 연방은 데트르 대륙을 침공하기로 했다. 자네들은 그 주축으로 가줘야겠어.”


정적이 흘렀다.


“... 최고지도자님.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루웨인 대령이 정중하게 묻는다.


“그만한 시간과 인원을 할애하면서까지 데트르 대륙에 얻을만한 게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해도ㅡ”


“흥,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은 잘하는군.”


라트신은 루웨인 대령의 말을 끊었다.


“대륙에선 지금 인마전쟁이 발발했다. 마왕군이 이미 쓰러뜨린 나라는 왕국, 제국, 황국.”


찰칵ㅡ


프로젝터가 다음으로 넘어가며 지도에 큼지막한 X표시가 나타났다.


“벌써 그렇게...? 언제부터 전쟁이 일어난 겁니까?”


레이지스 중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1년도 채 안 되었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대륙을 쓸어버린 거나 다름없지.”


“호오... 이번 마왕은 꽤 강력한 놈으로 나왔나 봅니다.”


테일러 소령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거들었다.


“도와준다기보다는, 약해진 먹잇감을 가로챈다는 느낌이네.”


나오키가 중얼거렸다.


별로 내키지 않는 그의 기분을 반영하듯 철제 계급장에서 전기가 찌릿찌릿 튀고 있었지만, 라트신은 못 들은 척하고 말을 계속했다.


“우리 연방이 인마전쟁에 참전한 적은 없었지만, 사태는 아주 위중하다. 내가 제출한 안건을 최고의회가 검토한 결과, 5개 사단을 항로로 보내기로 이미 결정했다.”


아무리 연방이 500개 사단ㅡ천만이 넘는 병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무턱대고 5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보내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최고지도자는 데트르 대륙에 제대로 숟가락을 얹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자세한 건 앞으로 전달될 작전 내용을 확인하도록. 당장 내일부터 선발대가 출발하기로 되어있다.”


“마왕군의 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말입니까.”


백전노장인 루웨인 대령은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륙의 강국들은 절대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쓰러졌다는 건... 저희도 주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봤자 대륙 놈들이 뭘 할 수 있겠나? 연방이 자랑하는 마도가 있다면 그딴 마왕군 놈들 몇만이 있어봤자 적수가 되지 않는다.”


라트신은 오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므로 아틀리치니 전원을 보낸다. 마도의 전문가인 자네들이니 마족쯤은 쉽게 박살 낼 수 있겠지.”


“그 말 정말? 믿을 수 있는 거ㅡ에요?”


카옌이 눈썹을 올리며 묻다가, 예카테리나의 눈초리에 재빨리 존댓말로 바꿨다.


미지의 힘에 대항하는데 그만큼이나 국력을 할애하는 건 연방답지 않았다. 적어도 사전조사를 끝낸 후가 아니면 참전하는 게 납득이 안 된다.


데트르 대륙을 오래간 지배하던 강국들을 차례로 쓰러뜨린 마왕군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내 뜻이 곧 연방의 뜻이다... 잊었나, 콜드노바 소위?”


앙칼지게 소리치는 라트신을 보고, 카옌도 입을 다물었다.


“그럼 다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자세한 건 작전 내용을 참고해라. 나는 전쟁에 대한 걸 국민에게 공표하지 않으면 안되니 말이지.”


불편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겨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라트신이 아틀리치니를 지나쳐 승강기에 탑승했다.


문이 닫히고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나오키가 불평을 뱉었다.


“우리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그냥 결정하는 게 말이나 돼? 대륙까지 얼마나 먼데, 귀찮게시리.”


“나는 딱히 싫지는 않은걸. 대륙의 샘플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연구에도 도움이 될 거야.”


어느새 백의 주머니에서 메스를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는 일레느. 그녀가 말하는 샘플의 정체를 상상한 이들은 하나같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 일레느가 즐기는 인체실험에 쓸 실험체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뭐, 일레느가 간다고 하면 나도 갈 거지만?”


나오키가 실실 웃으며 일레느에게 붙는다.


“으이구.”


발랑 까진 소년의 볼을 꼬집는 일레느.


“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한들 바뀌는 건 없겠지.”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테일러 소령이 입을 열었다.


“최고지도자가 결정한 일이니 말이야. 레이와 가는 바캉스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군.”


“소령님, 이건 전쟁이라고요...”


레이지스가 질타하지만 테일러는 만면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네. 드디어 마도와 마법이 맞부딪히는 날이 온 걸까. 대령 나으리, 마왕군 상대로 승산은 어느 정도로 보세요?”


질문받은 루웨인 대령이 수염을 매만졌다.


“알 수 없군.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 적으니 말일세.”


데트르 대륙.


마법이 살아있는, 인마전쟁의 무대에 그들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카옌은 벌떡 일어서며 몸을 풀었다.


“나는 어찌 됐든 좋아~ 싸움은 싫어하지 않으니까. 대륙에 강한 놈이 있으면 좋겠다.”


이 작은 체구의 소녀는 겉모습과 달리, 단일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아틀리치니에서 제일 강하다. 그녀가 제대로 할 맘을 먹었다는 건 데트르 대륙에겐 안 좋은 소식이었다.


“잔뜩 죽이고 돌아오자, 모두.”


전혀 해맑지 않은 내용을, 해맑게 말하는 카옌.


루웨인 대령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선을 두었다.


“다시 되돌아가는 건가... 그 그리운 전쟁터에.”



◆ ◆ ◆ ◆ ◆ ◆ ◆ ◆ ◆



데트르 대륙에 버금갈 정도로 큰 영토를 자랑하는 스파세니예 연방은 아주 오래전, 마법사들을 피해 뱃길에 오른 수백의 피난민들로 시작한 나라다.


마법 때문에 나라를 잃은 이들이 모인 만큼, 연방에서 마법의 사용은 개국 때부터 금지되었다.


모든 종류의 마법은 배척되었고, 그게 사악하고 위험한 힘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동의했다. 마법사를 사냥하는 조직이 따로 만들어진 것도 그 이유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조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아무도 그 행방에 대해 묻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원하는 대로 바꿀 힘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연방의 인간은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영원히 포기하는 대신,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기적’을 증폭시킬 능력을 얻었다.


데트르 대륙에선 고유스킬이라고 부르던가.


그들은 그것이 용사나 마왕 같은 강력한 존재에게만 부여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작은 기적을 품고 있다.


단지 너무 작아서 가진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 세상에 가득 찬 마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띤 이 기적의 근원은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라그나로크에서 죽은 신들의 육신이 새로운 세계에 녹아든 채 남아있고, 그 덕에 계속해서 이 세계의 주민에게 기적을 주는 거라고 주장했다.


마나처럼 에너지에 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실을 바꿀 뿐인 힘.


마나를 장시간 사용하고 그에 익숙해질수록 기적은 약해져 간다.


데트르 대륙의 사람이 강한 기적을 품더라도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죽는 건 이 때문이다.


단순한 몸의 단련부터 일상생활까지, 몸은 무의식적으로 대기 중 마나의 도움을 일정 부분 끌어오기에, 미미할 뿐인 기적에 대한 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혀진다.


사용방법을 잊는 것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도 잊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연방은 다르다.


기적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단련ㆍ개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스파세니예 연방은 마법처럼 현실을 개변할 수 있지만, 마나의 도움은 전혀 받지 않는 기적을 응용하는 기술을 확립시켰다.


물론 기적은 마법에 비하면 응용도가 낮다.


운이 좋아 특정 기적을 이미 갖고 있고 수련한 후라면 모를까, 평균적인 사람은 허공에서 물을 만들어낼 수도 없고, 손을 대지 않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도 없다. 기적은 한 사람당 한 종류에 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마법에 의존하지 않으며 발전한 결과, 연방은 기적 말고도 원래 마법으로 굴리던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었다.


그 예가 연방에 널리 보급된 증기기관이다. 하늘을 나는 마법 따위가 없어도, 증기기관이 탑재된 기차나 자동차로 사람과 물자를 나를 수 있었다.


기적과 기술이 결합한 힘.


그게 바로 마도.


그리고 그 마도의 정점에 선 것이 바로 스파세니예 연방 아틀리치니의 7인이다.


마법과 마도가 맞부딪히는 게 서로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가운데, 새로운 전란의 그림자가 대륙에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가의말

연방 캐릭은 이전에 쓰던 소설에서 설정을 좀 갖고 온 거라 이미 디자인이 다 있습니다. 공지로 올렸으니 궁금하시면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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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6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7 5 18쪽
209 그리고, 또다시 작별 +2 22.05.28 126 5 21쪽
208 빛 바랜 재회 +2 22.05.13 113 6 17쪽
207 스비엣, 첫 번째 불꽃의 예찬자 +1 22.04.12 127 6 18쪽
206 흉조의 완성 +1 22.03.30 123 5 19쪽
205 환상을 부수는 번견 +1 22.03.25 124 4 15쪽
204 의지는 얼어붙지 않는다 +1 22.03.03 123 5 18쪽
203 격돌 +1 22.02.22 114 4 17쪽
202 집결 +1 22.02.08 111 5 17쪽
201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2 22.01.15 116 5 18쪽
200 패배, 그리고 지켜보는 눈 +1 21.12.31 124 4 18쪽
199 카디널 보이드 +2 21.12.24 123 4 17쪽
198 마도 vs 마법 +3 21.12.08 130 3 18쪽
197 망설임을 잠재우지 않으면 +1 21.11.29 125 3 16쪽
196 어둠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1 21.11.16 119 5 18쪽
195 엔딩의 서막 +3 21.11.02 127 7 16쪽
194 시계 바늘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돌아간다 +3 21.10.17 132 5 18쪽
193 예카테리나 페르바크 중위 +1 21.09.28 103 5 18쪽
192 이곳은 죽음이 백색을 띠고 있다 +1 21.09.03 105 5 19쪽
191 하늘에서, 하늘로 쏟아지는 파괴 +2 21.08.01 118 3 17쪽
190 여름 바다, 휴가 +2 21.07.24 112 4 16쪽
189 소녀는 절대 잊지 않는다 +5 21.07.11 120 4 17쪽
188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전란 +3 21.07.05 129 5 19쪽
187 동전의 뒷면은 온도가 다르다 +2 21.06.21 121 6 17쪽
186 전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1 21.06.07 128 4 17쪽
185 종언의 천사 +5 21.05.24 139 5 15쪽
184 광기의 과학자 +3 21.05.15 139 5 18쪽
18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3 21.04.27 133 5 1쪽
182 천사, 인간, 그리고 광인 +4 21.04.25 173 5 18쪽
181 메스에는 피가 묻어있다 +2 21.04.12 134 4 18쪽
180 그것은 천천히, 하지만 치명적으로 +2 21.04.04 152 5 16쪽
179 뜻밖의 합심 +2 21.03.22 153 4 18쪽
178 인페르노 +1 21.03.11 148 4 18쪽
177 첫 번째 교전 +2 21.03.01 165 4 14쪽
176 겨울 비가 오기 전에 +3 21.02.21 168 8 14쪽
175 밤에 물들어버린 빛 +5 21.02.15 196 9 15쪽
174 손님 맞이 +2 21.02.12 169 7 17쪽
173 어둠은 꽈리를 틀었다 +4 21.02.10 180 7 15쪽
172 마왕의 방문 +3 21.02.07 185 4 16쪽
» 연방 +2 21.02.04 162 6 19쪽
170 기다리는 건 죽음 +3 21.02.02 179 6 16쪽
169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답게 퇴장한다 +5 21.01.31 163 7 17쪽
168 바람은 방향을 바꾼다 +3 21.01.27 149 7 14쪽
167 인과응보 혹은 불의 +5 21.01.25 167 7 15쪽
166 보복 +2 21.01.18 159 6 15쪽
165 우연은 필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 +5 21.01.16 167 6 14쪽
164 차가운 운명의 굴레는 오늘도 +1 21.01.14 158 6 16쪽
163 모든 게 얼어붙은 나라 +2 21.01.11 192 6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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