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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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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2
글자수 :
1,713,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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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8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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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집결

DUMMY

프냐르에서는 꽤 떨어진, 연방군이 점거한 레윤케의 소도시.


소도시의 함락 이후에는 간부 말고는 드나들지 않게 된 허름한 술집에 군복 차림의 남자가 발을 들였다.


“오, 살아있었네요 소령.”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금발 여성ㅡ일레느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눈인사를 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한 테일러가 바 뒤를 슬쩍 보니 나오키가 의자 몇 개를 붙여놓은 것 위에서 용케도 쿨쿨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명이 질긴 모양이야, 대위. 여기에도 기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걱정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네.”


“뭐, 피차일반이니까요.”


일레느는 그렇게 넘겼지만, 그녀의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마왕군과의 싸움에서는 역시 상처 없이 돌아오지는 못한 것이겠지.


“소령이야말로 더 의무대에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은 거예요? 이쪽은 천사한테 광역기를 맞아버려서 한동안 누워있었는데.”


“나는 그런 곳보다는 이런 데서 술 한잔하는 게 좋아서 말이야. 레이는 역시 피곤한지 아직 숙소에서 쉬고 있어.”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 테일러가 눈에 띄는 부상이 없이 돌아온 데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사실 팔 한쪽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마왕군이 붙여줬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뭐한 것이었다.


일레느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테일러는 술을 따르려다 그만두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예카테리나 말인데.”


평범하게 인사하며 들어온 것 치고는 갑작스러운 화제다. 술을 홀짝이던 일레느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 반응을 보니 너한테도 소식은 전해졌나보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와 레이는 찬성이야. 놈들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술집에 그들밖에 없다고는 해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조차 민감한 주제다. 하지만 일레느는 짧은 스커트 아래 드러난 다리를 바꿔 꼬았을 뿐, 큰 표정 변화 없이 다시 술을 홀짝였다.


“정면으로 싸워서 무사할 확률은 꽤 낮다죠. 그걸 알면서도 아쉽기는 해요. 손을 잡으면 그런 멋진 실험체들을 날리게 될 테니까.”


“그래도 죽으면 말짱 꽝이잖아.”


하품하며 바 뒤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나오키가 경례 대신 손을 들어올렸다.


“오, 중위. 깨어있었네.”


나오키는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크게 폈다.


“말해두지만 놈들 장난 아니라고, 소령 나리. 이번에는 정말 죽을 뻔했어.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말하는 거랑은 다른 표정인데, 나오키. 네 성격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덤빌 거라고 생각했어.”


쓴웃음을 지은 테일러가 건드리던 잔에, 나오키가 눈치 좋게 위스키를 채워주었다.


“그거야 그렇지. 그런 강한 놈들이랑 싸울 수 있는게 얼마나 짜릿한데. 그런 싸움이라면 죽어도 좋지. 하지만.”


“하지만?”


“나는 기왕이면 일레느가 살아있었으면 해서.”


의외의 말이 나온 것에 놀라서 테일러가 표정을 바꿨다. 그걸 신경 쓰지도 않고 나오키는 다시 바 뒤의 의자에 늘어졌다.


“소령이 있었던 연대 기지도 날아간 거지? 내가 싸웠던 천사도 괴물이었어. 그런 놈들이랑 싸우다가 일레느가 죽기라도 하면 나는 이 멋진 가슴을 더는 못 보는 거잖아.”


“뭐야, 따뜻한 말이랍시고 하는 거야? 퍽이나 감동하겠다.”


포옹하는 자세로 다가오던 나오키를 가볍게 쳐내며, 일레느가 코웃음을 쳤다.


테일러는 나오키에 대한 평가를 속에서 수정했다.


앞뒤 없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전투광적인 면만 보아왔는데, 사실 가정적(?)인 면모도 있는 꼬맹이였다.


일방적인 사랑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일레느도 꽤 이 꼬맹이를 귀여워해 주고 있는 거겠지. 취미로 산 사람을 해부하는 미친 과학자가 진심으로 사람을 아끼는 건 무슨 농담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오키가 일편단심으로 부딪히는 게 썩 나쁘지는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 나오키가 일레느에게 자꾸 들러붙은 이유라고 한다면.


테일러는 슬쩍 일레느의 풍만한 굴곡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옷 너머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파괴력이 있다. 하지만 같은 동료로서 그녀의 뒤틀린 내면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결코 일 외적인 부분으로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가슴인가. 소년에게 멀리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산인 건가.


“뭐, 그런 소리야 소령님. 저도 승산이 없는 싸움을 걸 만큼 어리석지는 않거든요.”


테일러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전혀 모르는 일레느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것과 잔을 부딪쳤다.


“들어보니 마왕은 생각보다 얘기가 잘 통하는 것 같던데, 그쪽에서 영입해준다면 자유가 보장되는 하에 협력하죠.”


한번 칼을 맞대보니 놈들의 위험성을 파악한 것이겠지. 쉽게 백기를 들어올리는 일레느에게서는 일말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둘에게는 연방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다.


최고지도자 라트신은 존경을 살만한 인품이 아닌 데다, 비록 아틀리치니의 자리에 올려줬지만 결국 연방에서 그들에게 지운 건 강압적인 의무였던 것이다.


출신에 대한 차별 없이 인재를 발굴한다는 정책도 선택되는 자의 자유의지가 없다면 처음부터 선택지를 주지 않는 횡포나 마찬가지겠지.


이런 오지까지 와서 아직도 연방에 대한 애국심으로 움직이는 건 결국 철저히 당에 세뇌당한 말단뿐이다.


그 어두운 뒷면을 잔뜩 보아온 아틀리치니가 연방 정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힘들다. 무척이나 성실한 레이지스가 이상한 편에 속한다고 해야겠지.


그 자신도 지금의 연방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커봤자 한낱 모래성인가···”


테일러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마왕군은 어떤 식으로 조직되어있는지는 몰랐지만, 연방의 체계보단 견고하지 않을까.


“힘으로 세운 질서는 결국 힘 앞에 굴복하는 게 운명일지도.”


그는 술잔의 내용물을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 ◆ ◆ ◆ ◆ ◆ ◆ ◆ ◆ ◆


연이은 아틀리치니의 패배.


그건 크나큰 방해 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던 연방군의 사기를 통째로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피해가 큰 건 아니다. 고작 '연대급' 기지가 몇 개 날아갔을 뿐이다. 연방에서 데트르 대륙에 파견된 병력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새 발의 피다.


하지만 연달아서 패배한 부대를 선두지휘하던 게 바로 아틀리치니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틀리치니는 군 내에서 제일 강력한 마도를 가진, 한 명 한 명이 전략 병기로 취급되는 마도 사용자들. 승리를 불러와야 하는 그들이 오히려 마왕군에 패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실이 연방 본토에 전해진다면 당 차원에서 지휘관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고, 연방정부를 총망라하는 당에 찍히는 건 어쩌면 죽음보다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다급해진 연방군의 수뇌부는 느긋하게 진행하던 데트르 공략 작전을 급격히 가속했다.


마왕군에 의해 장악당한 레윤케 중앙정부는 일단 무시하고 비껴가는 식으로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그곳에 전략적 가치는 없으며 빈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윤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눈보라가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 이만한 대군을 계속해서 지체시키지는 못한다.


행군을 강행한 연방군이 레윤케를 벗어나서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다 마주한 건 과거 '황국'이었던 것.


엄밀히 따지면 황국령인 파흐 평야. 연방군은 주력부대를 이곳에 모조리 집결시켰다.


유디트 황국은 알트레아 왕국과 제국을 노리는 본 거점으로 하는데 절호의 위치다. 그것만으로 이곳에 주둔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황국의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저하된 연방군의 사기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한때 강대국이었던 것이 독기를 가득 품은 결계로 전락해버린 걸 보고, 저것이 그들의 미래가 아니라고 단언하기 힘들었으니까.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진지는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그새 먹어치울 것이 없어져서 자멸해버리고 만 것인지 결계 너머로는 소문의 유사 언데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뜯어먹힌 시체만 널려있었지만, 연방군은 마왕군이 황국 전역에 펼쳐둔 결계를 깨뜨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왕군이 살포한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고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황국의 말로가 세상 밖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선 마왕군과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주력부대를 모조리 끌고 온 결과, 자그마치 70만의 군대가 파흐 평야에 주둔하게 되었다.


수는 그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마왕군의 기습공격에 자꾸 당하기만 해서는 수의 이점을 살릴 수 없다. 대군을 먹여 살릴 물자도 마냥 풍족하기만 한 건 아니고, 현지에서 연료나 식량을 동원하는 것도 슬슬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로 알트레아 왕국을 치기로 했다.


마왕의 지배를 제일 먼저 받았으며 지금도 그 핵심으로 기능하는 왕국에 총공격을 퍼부어 타격을 입히고, 제국 등 다른 지역에 주둔 중인 마왕군이 왕국 수호를 위해 자리를 비우면 그걸 기회로 삼아 나머지 병력으로 함락할 계획이었다.


또 패배한다면 얌전히 연방에 돌아가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번 전투에 걸린 판돈은 컸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흘렀지만, 드디어 마왕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없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허나 장교 전용 텐트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이렇게 모이게 된 내막ㅡ벼랑 끝까지 몰린 군의 실정을 더 자세하게 알고 있으니 이게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한 것이겠지.


텐트 안을 빼곡히 채운 기다란 테이블은 거의 자리가 다 차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식성 좋게 스푼을 놀리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 주위에는 앉은 이가 별로 없었다.


딱히 따돌리려는 게 아니라, 쉽게 다가가기 힘든 신분이라서 그런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진 자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그 힘을 본 타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으니까.


“카옌.”


안경을 쓴 소녀가 주위의 묘한 분위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붉은 머리칼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응? 리나!”

카옌은 입에 들어있던 삶은 감자를 꿀꺽 삼키고 탄성을 질렀다.


“언제 와있었어? 빨리 앉아!”


자매나 다름없는 자신의 친구를 보고 해맑게 웃는 소녀가 바로 아틀리치니의 전투능력 최고봉, 카옌 콜드노바 소위다.


카옌은 리나가 내려놓은 식판에 삶은 감자 두 개밖에 없는 걸 보더니 나무라는 얼굴을 했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안된다구? 잘 먹어야 그걸로 신나게 싸울 수 있잖아.”


“나는 마도 특성상, 너랑 다르게 몸을 그렇게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담담하게 대답한 예카테리나는 포크로 감자를 찍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그녀를 포함해 아틀리치니 전원이 올 예정이다.


어쩌면 '그것'을 쓰지 않고 연방군이 낼 수 있는 최대전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미리 세워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삶은 감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예카테리나는 여기서 꺼내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주제를 입에 담았다.


다행히 바로 곁에 다른 장교는 없는 상황이고, 오히려 이런 공공장소에서 얘기하는 편이 주의를 더 끌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다.


“카옌, 내가 보낸 편지는 잘 도착했니?”


“응, 받았어.”


편지의 내용은 일부 아틀리치니 멤버의 반발을 사기도 했던 것.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카옌의 표정 변화는 전혀 없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예카테리나의 의도를 잘 이해해준 것이겠지.


“그럼ㅡ”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그치?”


순진하게 말해온 카옌에, 예카테리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리나가 하는 일에는 동의하고 따를 준비도 되어있어. 하지만 그쪽도 그렇게 쉬운 싸움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야 우리 사령관도 납득해줄 테고, 그 언니를 꺼낼 거야.”


맛있게 홍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카옌은 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ㅡ까지가 내 생각인데, 리나의 생각이 다르면 그거대로 할게. 리나는 틀리는 적이 없으니까.”


카옌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타입이 아니다. 그녀는 단순명료하게 이 복잡한 사태를 요약했고, 그 결과 마왕군과 제대로 치고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었다.


“그렇구나.”


예카테리나는 감자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전력의 카옌을 내보내도 되는 걸까? 이쪽은 이미 마왕과 협력하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은 상태인데, 이번 전투의 패배라는 조건을 맞추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곧 벌어질 전투를 상상한 예카테리나는 몇 번의 고민 끝에 그 의문을 지워버렸다.


아니다. 적당히 싸워서 패배하고, 아틀리치니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리면 최악의 경우 본국을 더 쥐어짜서 추가병력을 보내올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려는 예카테리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카옌은 강하지만, 마왕군도 바보가 아니니 대책을 짜놓았을 것이다. 그쪽에도 카옌 못지않은 강자들이 있을 테니까.


예카테리나는 카옌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연기를 못하는 이 아이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리라.


“네 말이 맞아, 카옌. 우리가 원하는 전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필요할지도. 그러니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말아줘.”


“오, 그럼 내 전력으로 가도 돼?”


“물론이지.”


“잘됐네, 하던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소리잖아!”


카옌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눈앞의 적을 부술 뿐이니까.”


◆ ◆ ◆ ◆ ◆ ◆ ◆ ◆ ◆ ◆


착ㅡ


조금 거리를 둔 곳에서 연방군이 기지를 짓는 걸 관찰하던 나는 망원경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키루아가 만들어준 군용 망원경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탐지마법을 쓸 수 없는 병사들을 위해 기술연에서 개발한 물건으로, 앞으로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지.


나는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눈에는 연방군 놈들이 조심해서 옮기는 중인 상자가 비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보스?”


오늘도 충직하게 나를 따라온 린이 늑대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아아, 저번에 그 인간이 해주고 간 이야기가 생각나서 말이지.”


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카테리나가 해준 이야기는 린도 전해 들었다. 관용을 베풀어준 인간들에게 역으로 배신당해 도구로 전락해버린 연방의 ‘국모’에 대해서.


“추악한 인간들이 어디까지 격이 떨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첫 라그나로크 때 확실하게 멸하였다면 그런 씨앗을 뿌리지도 않았겠지요.”


나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너는 인간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을 터인데, 의외로군.”


“보스도 참, 제 과거는 잘 아시잖아요.”


린이 살짝 토라진 얼굴을 했다.


“저는 라그나로크 이래 수천 년을 어둠에 갇혀있었습니다. 배은망덕한 인간 놈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그녀도 마찬가지의 신세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인간이라 해도 처지가 비슷하니 동정이 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린은 인간이라는 생물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린은 원래 인간이었던 나도 아껴주니 말이야. 꽤 융통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보, 보스의 경우는 특별합니다...!”


내가 던진 농담에 린은 얼굴을 붉혔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역시 쑥스러운 것이겠지.


사역마인 린은 나와 항상 연결된 존재나 마찬가지면서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묶어두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나의 과거를 전부 보고도 린이 나를 섬기기로 스스로 결정했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겠지. 전설의 늑대에게 주인 자격을 얻은 나는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떨거지들이 많이도 모였네요. 마치 저희와 대등하다는 듯이 서 있는 게 불쾌합니다.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잔뜩 집결한 연방군을 보며 린이 읊조렸다.


린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푸른 머리칼의 소녀. 하지만 그 정체는 태초의 대전ㅡ라그나로크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늑대다.


태양과 달을 집어삼켜 이 세계에 어둠을 내리게 했고, 오딘을 죽인 늑대인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군대쯤 한 번에 짓뭉개버리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린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것도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


아틀리치니는 이 전쟁을 우리 군의 승리로 조기 종결시켜주는 대가로 연방 정부의 재수립, 그리고 나는 연방군이 잔뜩 끌고 온 막대한 물자와 기술을 온전한 상태로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군은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겠지. 언젠가 그 칼끝이 저 하늘에 닿을 때까지.


“너무 조바심내지 마라, 린. 이 전투만 끝나면 최종조건이 성공적으로 맞춰진다.”


나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 코트자락이 펄럭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꿈을 끝내러 가자.”


작가의말

북유럽에 잠시 다녀오게 됐습니다. 비행기 일정이 하도 많이 잡혀있어서 시간 나면 미리미리 써보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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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그리고, 또다시 작별 +2 22.05.28 126 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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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스비엣, 첫 번째 불꽃의 예찬자 +1 22.04.12 127 6 18쪽
206 흉조의 완성 +1 22.03.30 123 5 19쪽
205 환상을 부수는 번견 +1 22.03.25 123 4 15쪽
204 의지는 얼어붙지 않는다 +1 22.03.03 123 5 18쪽
203 격돌 +1 22.02.22 114 4 17쪽
» 집결 +1 22.02.08 111 5 17쪽
201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2 22.01.15 116 5 18쪽
200 패배, 그리고 지켜보는 눈 +1 21.12.31 124 4 18쪽
199 카디널 보이드 +2 21.12.24 123 4 17쪽
198 마도 vs 마법 +3 21.12.08 130 3 18쪽
197 망설임을 잠재우지 않으면 +1 21.11.29 125 3 16쪽
196 어둠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1 21.11.16 119 5 18쪽
195 엔딩의 서막 +3 21.11.02 127 7 16쪽
194 시계 바늘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돌아간다 +3 21.10.17 132 5 18쪽
193 예카테리나 페르바크 중위 +1 21.09.28 103 5 18쪽
192 이곳은 죽음이 백색을 띠고 있다 +1 21.09.03 105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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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여름 바다, 휴가 +2 21.07.24 112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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