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384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1.03.11 02:11
조회
147
추천
4
글자
18쪽

인페르노

DUMMY

연방군이 대륙으로 원정을 떠난 지 어언 한 달 만에 만난 마왕군이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대륙의 강국들을 차례로 쓰러뜨린 가공할만한 적이었다.


마왕군의 무기는 강력했고, 높은 긍지 때문에 웬만해서는 뭉치지도 않는 마족의 군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규율이 제대로 잡혀있었다.


빗발치는 총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습격에 맥을 못 추는 아군들.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연방군은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급급했을지도 모른다. 무식하게 수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큰 희생을 냈어야 했겠지.


하지만 연방은 마법은 쓰지 못할지언정, 대륙에는 없는 "마도"가 있다.


그리고 잠재된 고유스킬을 최대치로 발현하는 마도는 그 용도는 한정되지만, 현실개변에 한해서 마법에 우위를 점했다.


마도의 정상급인 아틀리치니가 전장에 발을 들인 순간, 그건 더이상 통상적인 전투가 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카옌사즈 콜드노바 소위가 지나치는 곳마다 신체를 잃은 적병이 쓰러졌다.


타타타타타타ㅡ


마왕군 기술의 집약체인 총기가 불을 뿜지만, 무슨 영문인지 납탄은 닿자마자 속수무책으로 먼지가 되어버리니 아무 소용없다.


어린 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적진으로 파고드는 카옌.


“뭣ㅡ”


방금만 해도 거리가 있었던 적이 가뿐히 자신 앞에 착지하는 걸 본 병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놀라운 신체 능력으로 접근한 뒤 날아드는 건 그 작은 손이 가하는 일격.


저런 가벼운 몸으로 휘둘러보았자 무슨 타격이 있겠느냐만, 그녀의 신체는 지나가는 곳마다 무차별적인 파괴를 흩뿌렸다.


아니나 다를까, 허리에 찬 권총을 뽑으려던 병사의 목이 뒤로 툭, 하고 떨어졌다.


단지 카옌이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아무 저항 없이 신체가 분리된 것이다.


오래간만에 운동이라도 한다는 것처럼 카옌이 어깨를 풀었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지켜보던 마왕군 병사들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건 압도적인 힘에 의지해서 벤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분해에 가까울까.


총기도, 신체도, 엄폐물도 예외 없이 카옌 앞에선 작은 입자들로 부서져 흩어졌다.


그건 이미 신체 그 자체가 막강한 병기.


살의 없이 휘두르는 손발에 아무 저항도 못하고 부서지는 건 이 세계의 모든 것.


소녀를 주위로 모든 것이 잘게 부서져 간다.


해안가의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부서지듯이, 강인하고 굳세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쉽고 어이없게 스러진다.


단지 그녀에게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역할과 긍지를 상실하고 '분해'된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은 아무리 갖은 강자들을 보아온 마왕군 병사라 해도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었다.


“뭐 저런 괴물이ㅡ”


뒷걸음질 치다 쓰러진 병사를 향해 카옌이 다가갔다.


아이다운 천진난만함을 띤 얼굴엔 여전히 살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살육을 즐기는 잔악무도한 표정도 없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군인이 있을 뿐.


“윽ㅡ”


웅크린 병사에게 카옌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뭔가를 본 카옌이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


그 순간, 간발의 차이로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파광ㅡ!


뼈를 울리는 소리였다.


묵직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잘 닦아놓은 프냐르의 거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까이 서 있던 병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뒤로 나자빠졌지만, 정체불명의 충돌로 인한 피해가 연방군에 그친 것도 아니었다.


정성껏 그려 걸어놓은 극장의 간판은 떨어져 와지끈하고 부서졌고, 정박하여있던 배들까지 뒤로 살짝 밀렸다.


소란에 놀라 허둥지둥 대피하던 항구 주민들 중 일부가 무너진 건물에 깔리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강하해 온 것은 단지 지면과 맞닿은 충격만으로 그만한 효과를 준 것이다.


“소위님!”


상황이 변한 걸 파악하고 뒤에서 달려오던 부하들은 카옌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은 것을 보고 멈췄다.


“내가 응전할 테니까 일반 전투원은 뒤에 있어.”


카옌이 육감으로 이해한 것이 전해지지 않는 연방군 병사들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카옌은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방금의 그것만으로 그녀는 이해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마왕군 간부라는 것이 개입해 왔다는 걸 말이다.


“이야~ 너무 부수지 말랬는데. 나중에 혼나려나?”


적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자욱한 먼지 연기가 걷히기도 전에, 소녀 하나가 태평히 걸어 나와 모습을 보였다.


카옌과는 선뜻 다른 붉은색이 깃든 트윈테일이 흔들렸다.


머리에 나 있는 뿔과 엉덩이에 달린 꼬리는 명백한 마족의 것.


이 추운 겨울에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있었지만 추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스파세니예 최연소 간부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적의 모습을 보고 연방군이 잔뜩 긴장한 한편, 수세에 몰려있었던 마왕군은 살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다시 무기를 집어들었다.


“너, 재미있는 능력을 쓰네. 마음에 들었어!”


함박웃음을 지으며 웃는 소녀를 보고 카옌이 마찬가지로 웃으며 나섰다.


“칭찬은 고맙게 받을게. 나는 연방군 아틀리치니의 하나, 카옌 콜드노바. 너는?”


“아, 그래. 자기소개가 아직이었네!”


카옌이 자신의 대화를 받아준 것이 기쁘다는 듯 소녀가 활짝 웃었다.


“나는 로그! 일단은 드래곤이지만, 마왕군 친위대의 중위를 맡고 있어!”


놀이터에서 친구를 새로 사귄 여자아이가 지을법한 표정이지만, 내용은 그에 맞지 않는 살벌한 것이었다.


마왕군 친위대, 그리고 드래곤.


카옌의 명령을 따라 일단 뒤로 물러나 있던 연방군 병사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스파세니예 연방에 용은 없지만 그게 마의 종 중에서도 상위개체라는 지식 정도는 있었다.


용이라고 한다면 영겁의 세월을 살며 천지를 뒤흔든다는 괴물 아니던가. 입에서 불을 뿜고 발로 마을을 짓뭉개는 그들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관여했던 건 태초의 일이었을 텐데.


최강종을 마주 보고도 카옌은 주눅 들기는커녕, 예상하였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래곤을 보는 건 처음이네. 그렇다는 건 네가 이 부대의 지휘관?”


“음, 글쎄··· 어떨까~ 일단 그런 거로 해두자.”


로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다.


“오빠는 너희들이 손님이라고 제대로 맞이해야 한다고 했거든. 나는 그러려고 온 것뿐이야. 으, 잘 설명하기 어려운데... 대충 알겠지?”


어째서 그들이 손님 취급을 받는지는 몰랐지만, 로그가 말하는 환영이 통상적인 의미의 환영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오빠라고 한다면, 마왕?”


“그래, 정답이야! 그러고 보니 전언이 있었지. 너희에게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로그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따라 하려는 것처럼 과장되게 팔을 들어 올리고 표정을 바꾸었다.


“끝의 땅에 찾아온 사랑스러운 적의 노력에 보답해야 할 것은 우리들. 우선 첫 번째로 항구를 붉게 물들여라. 피의 꽃이 만발하여 화환을 대신할 것이다.”


그 말을 하는 로그의 얼굴에 살짝 잔인함이 스친 것 같았다.


“뭐, 나도 그 오빠가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전해는 뒀다구?”


다시 원래의 생기발랄한 태도로 돌아온 로그가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것처럼 방방 뛰었다.


“있지, 네가 싸우는 걸 봤는데 자꾸 찌릿찌릿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겠네! 네 몸은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드니까.”


“흐응. 그렇다고 해서 네가 그냥 물러갈 거 같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일하는 중이기도 하고.”


다가올 공격을 예상한 카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용이라고 해도 해야 할 일이 바뀌지는 않았다.


“너, 강하구나. 강한 놈이랑 싸우는 건 나도 환영이거든.”


“이해해줘서 다행이야!”


형식적으로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말은 없었다.


단지 한번 눈빛을 교환한 것으로, 둘 사이에는 공통적인 이해가 번졌다.


돌연 탁, 하고 카옌 앞에 스파크가 튀었다.


화아아아아ㅡ!


갑자기 나타난 거센 불길이 순식간에 카옌을 덮쳤다.


사납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조마조마하며 카옌을 보고 있던 부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유효범위 안의 적을 무조건 불태우는 고대 마법.


라드레이드에서 고대 마법의 정수를 배운 드래곤 중에서도 유독 화염 마법에 적성이 높은 로그만이 쓸 수 있는 마법이다.


거의 즉시 발동되는 발화 마법이기 때문에 회피동작을 할 수도, 제때 방어마법을 펼칠 수도 없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상시 방어마법을 두르고 있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는 사기적인 마법.


“...오!”


불길이 꺼진 곳에는 그을린 흔적 하나 없는 카옌이 있었다.


로그가 감탄하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순식간에 카옌이 거리를 좁혔다.


동작이 큰 발차기에서 이어지는 짧은 잽.


카옌이 내지르는 팔을 뒤로 피한 로그가 곧바로 날아올랐다.


날개 따위 없는 소녀가 공중에 떠 있는 광경은 기이했지만, 원래부터 하늘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용이니 저런 것도 가능한 것이겠지.


아무리 카옌이라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상 저렇게 높이 날아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결과겠지만, 로그가 그 생각이 틀렸다고 알아챈 건 머지않아서였다.


“핫!”


20m는 족히 되는 높이를 손쉽게 뛰어오른 카옌의 발이 한 바퀴 돌아, 로그가 반사적으로 막으려고 들어 올린 팔을 가격했다.


캉!


그 소리는 항구 전체를 울렸다.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로그의 팔을 감싸던 금빛 막이 없어진 것이다.


의외라는 얼굴이 둘, 교차했다.


로그와 달리 공중에 오래 떠 있을 수는 없는 카옌은 날렵하게 한번 구르며 땅에 착지했다.


“지금 건...”


그녀는 방금의 일격이 로그의 몸을 보호하는 방어막을 벗겨냈다고 이해했다.


분해로 한 방에 끝내지 못한 것에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카옌의 마도는 태어나서 한 번도 무효화 된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마도와 상충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상대는 문자 그대로 드래곤이니까.


게다가 방벽을 잃은 로그가 다음번에도 카옌의 마도 앞에서 무사할 리가 없다.


“이건, 놀랍네...”


한편, 로그는 날아갈 뻔한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상시 자신을 보호하는 신의 가호가 아예 없어진 느낌은 아니었지만, 당장은 방어기능을 기대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접근전을 선호하는 로그에게, 닿는 것만으로 무엇이든 분해해버리는 카옌은 매우 성가신 적이다.


카옌의 능력의 원리는 불명이었고, 마법도 부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인지 명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로그는 불리한 상성에 불구하고 아직 한껏 들떠있었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강한 자와 싸우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건 둘의 공통점이었다.


“놀랐어, 인간이 그렇게 뛸 수도 있구나! 너, 마음에 들었어!”


파바바밧ㅡ


전투 도중인 것도 잊고 카옌을 칭찬하는 로그를 덮친 건, 가공할만한 크기의 빙창들이다. 인간에게 쏘면 꿰뚫기보다 뭉개버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클리페우스!”


가호가 일시적으로 무효화 된 것을 의식하고 있던 로그는 재빨리 주문을 영창했다.


이번엔 수동으로 방어마법을 발동한 로그를 주위로 보랏빛 막이 빛나고, 빙창들은 부서지거나 튕겨 나갔지만, 로그의 주의를 돌리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이런 공격이 가능한 건 연방군을 통틀어 단 한 명.


“자네가 응전 중인 건 알고 있지만 실례하겠네, 소위. 더이상 보고만은 있을 수 없어서 말이지.”


카옌이 바라본 곳에는 루웨인 대령이 장갑을 낀 왼손을 들고 있었다.

“좋아! 도와주는 김에 공중에 발판 좀 만들어줄 수 있어?”


카옌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가 뒤꿈치를 땅에 꽂자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그녀의 군화 밑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ㅡ공중전을 전제로 준비해두었던 장치다.


루웨인은 대답 대신 손을 휘둘렀다.


그의 고유스킬ㅡ빙결이 이끄는 대로 수많은 얼음판이 공중에 나타났다.


루웨인의 마도는 단지 얼음을 불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얼어있기만 한다면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다.


“이번엔 또 다른 능력? 용사가 아닌 인간이 마법도 아니고 고유스킬을 그 정도로 갖고 있다니, 정말이지 오길 잘했어. 흥미진진한걸!”


제자리에 부유하는 얼음판들을 신기하게 보고 있던 로그에게, 얼음판을 발판 삼아 뛰어오른 카옌이 접근했다.


닿기만 하면 그녀의 승리인 것이다.


자유자재로 공중의 발판들 사이를 넘나들며 공격하는 카옌의 체술은 로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제대로 자세를 잡지 않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방심하면 금방 발차기나 찌르기가 들어온다.


“좋아, 좋아! 너무 즐거운걸! 그러면 나도 새로운 걸 하나 보여줄게.”


익숙하게 발판들을 사용하며 자신을 향해 계속 파고들어 오는 카옌을 보고 즐겁게 웃던 로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런ㅡ”


카옌에 맞춰 부유하는 얼음판들의 위치를 조절하던 루웨인은 뭐가 임박했는지 깨닫고 소리쳤다.


“전원 대피하라!”


로그가 입을 벌리고, 부둣가를 전부 덮을 정도로 거대한 화염ㅡ드래곤 브레스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용이 도시 하나를 송두리째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격언을 허무맹랑하다고 코웃음 치는 자들이 그걸 보았다면, 자기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고 놀란 얼굴을 만들었을 것이다.


세상이 붉게 변했다.


섭씨 수천 도에 달하는 용의 숨결은 마치 거대한 파도 같았다.


로그가 입을 다문 뒤에도 밑에서는 화염이 넘실거렸고, 평화롭던 항구의 모습은 돌변해 마치 지옥의 풍경을 그린 것 같았다.


그녀는 밑을 훑어보고는 살짝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대중한 거로는 역시 부족했나. 하지만 뭐 됐어. 이 정도만 해두라고 했으니까.”


가볍게 착지한 그녀는 아직 대기 중인 마왕군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군에게 브레스가 닿지 않도록 신경 쓴 보람이 있어서 군복이 살짝 그을린 자는 있어도, 큰 피해는 없었다.


“슬슬 돌아가자~”


로그의 말을 끝으로 전이마법이 발동하고, 마왕군은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드래곤 브레스를 직격으로 맞은 항구는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뚝 서 있던 부두는 비참하게 타버렸고, 불이 옮겨붙은 선박도 적지 않았다.


항구에 들어선 여러 시설도 말려들어 절반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다. 제때 대피하지 못한 항구 주민들은 뼛조각도 남기지 않고 타버렸다.


화염의 거인인 수르트가 지나갔다고 해도 믿을 만한 광경이었다.


그야말로 대참사, 라고 해야겠지.


그나마 피해를 면한 건 브레스의 유효범위 밖에 있던 병사들이다.


응전하던 카옌과 하선한 연방군을 직접 노린 공격인 만큼 대량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끝난 건 신속하게 얼음으로 불길을 막은 루웨인 대령 덕분이었다.


연방군에 의한 진화 작업과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치우는 작업은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스파세니예는 앞으로도 이 항구를 쓸 테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야, 큰일이었다고 들었어요 대령?”


레이지스를 대동한 테일러 소령이 어깨를 으쓱하며 회의실 대용인 간이 천막에 들어섰다. 생각에 잠겨있던 루웨인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를 포함한 아틀리치니 7인 모두가 진지하거나 심각한 얼굴을 띠고 있었다. 시작부터 일이 꼬여버렸으니 당연했다.


“칫, 오자마자 이게 무슨 꼴이야. 드래곤? 일레느라면 그런 파충류쯤은 쉽게 처리했을 텐데, 대응인력을 잘못 뽑은 거 아니야?”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엄청 강했다구?”


시건방지게 다리를 꼬고 있던 나오키 중위가 묘하게 신경을 긁는 소리를 했지만, 카옌은 전혀 화난 기색 없이 화답했다.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한 나오키가 칫,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적의 규모를 제대로 모르는 이상 한 번에 아틀리치니 전부를 내보낼 수도 없었던 일이니 카옌과 루웨인 둘이서 드래곤을 상대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그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 용, 갖고 싶은걸. 생포하면 좋겠어.”


일레느가 메스를 휘리릭 돌리며 짤막하게 말했다.


아틀리치니에게 공식적으로 월권행위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연방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의견은 암묵적으로 작전에 최우선으로 반영된다.


지금 이들이 정하려고 하는 것은 탈선한 계획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방법이었다.


“우리 군은 제대로 대열을 갖추는 것도 여의치 않았어요. 우리가 오늘 프냐르에 도착한다는 걸 마왕군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미심쩍네요.”


아까부터 지도를 유심히 보고있던 예카테리나가 아일란즈 공국을 의심하는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쩌면 대륙의 협력자중 내통자가 있을지도 몰라요.”


“글쎄. 그렇다면 어째서 추가 공격을 퍼붓지 않았는지 설명이 되지 않네.”


루웨인 대령은 수염을 매만졌다.


“완벽하게 정보가 샜다면 항구에서 우리를 끝장내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깨달았을 걸세. 연방군을 휘말리게 하지 않고는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저쪽도 우리의 전력을 재보고 있다는 것이겠지.”


사망자 20명, 부상자 53명.


고작 '이 정도'의 피해는 라트신 최고지도자가 코웃음을 칠만한 것이겠지.


하지만 갑자기 생긴 변수는 대령에게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마왕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대륙 침공 작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른다.


기왕이면 계획을 늦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실정이다.


뒤이어 도착할 본대가 매끄럽게 진군할 수 있도록 선발대가 미리 매끄럽게 발판을 닦아놓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곤란하게 됐군... 그럼 작전에 우리도 즉흥 요소를 조금 넣어보지.”


루웨인은 나오키와 일레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제안한 것은 이 둘이 반색할만한 것이었다.


“최소 인원으로 적 군사기지에 혼란을 줘야 하네. 둘이 나서줘야겠어.”


작가의말

바빠져서 업로드가 좀 늦었습니다. 할 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네요. 

린 관련 짤 몇개가 새로 나올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6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6 5 18쪽
209 그리고, 또다시 작별 +2 22.05.28 126 5 21쪽
208 빛 바랜 재회 +2 22.05.13 113 6 17쪽
207 스비엣, 첫 번째 불꽃의 예찬자 +1 22.04.12 127 6 18쪽
206 흉조의 완성 +1 22.03.30 123 5 19쪽
205 환상을 부수는 번견 +1 22.03.25 123 4 15쪽
204 의지는 얼어붙지 않는다 +1 22.03.03 123 5 18쪽
203 격돌 +1 22.02.22 114 4 17쪽
202 집결 +1 22.02.08 111 5 17쪽
201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2 22.01.15 116 5 18쪽
200 패배, 그리고 지켜보는 눈 +1 21.12.31 124 4 18쪽
199 카디널 보이드 +2 21.12.24 123 4 17쪽
198 마도 vs 마법 +3 21.12.08 130 3 18쪽
197 망설임을 잠재우지 않으면 +1 21.11.29 125 3 16쪽
196 어둠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1 21.11.16 119 5 18쪽
195 엔딩의 서막 +3 21.11.02 127 7 16쪽
194 시계 바늘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돌아간다 +3 21.10.17 132 5 18쪽
193 예카테리나 페르바크 중위 +1 21.09.28 103 5 18쪽
192 이곳은 죽음이 백색을 띠고 있다 +1 21.09.03 105 5 19쪽
191 하늘에서, 하늘로 쏟아지는 파괴 +2 21.08.01 118 3 17쪽
190 여름 바다, 휴가 +2 21.07.24 112 4 16쪽
189 소녀는 절대 잊지 않는다 +5 21.07.11 120 4 17쪽
188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전란 +3 21.07.05 129 5 19쪽
187 동전의 뒷면은 온도가 다르다 +2 21.06.21 121 6 17쪽
186 전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1 21.06.07 128 4 17쪽
185 종언의 천사 +5 21.05.24 138 5 15쪽
184 광기의 과학자 +3 21.05.15 139 5 18쪽
18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3 21.04.27 133 5 1쪽
182 천사, 인간, 그리고 광인 +4 21.04.25 173 5 18쪽
181 메스에는 피가 묻어있다 +2 21.04.12 134 4 18쪽
180 그것은 천천히, 하지만 치명적으로 +2 21.04.04 151 5 16쪽
179 뜻밖의 합심 +2 21.03.22 153 4 18쪽
» 인페르노 +1 21.03.11 148 4 18쪽
177 첫 번째 교전 +2 21.03.01 165 4 14쪽
176 겨울 비가 오기 전에 +3 21.02.21 168 8 14쪽
175 밤에 물들어버린 빛 +5 21.02.15 196 9 15쪽
174 손님 맞이 +2 21.02.12 169 7 17쪽
173 어둠은 꽈리를 틀었다 +4 21.02.10 180 7 15쪽
172 마왕의 방문 +3 21.02.07 184 4 16쪽
171 연방 +2 21.02.04 161 6 19쪽
170 기다리는 건 죽음 +3 21.02.02 179 6 16쪽
169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답게 퇴장한다 +5 21.01.31 163 7 17쪽
168 바람은 방향을 바꾼다 +3 21.01.27 149 7 14쪽
167 인과응보 혹은 불의 +5 21.01.25 167 7 15쪽
166 보복 +2 21.01.18 158 6 15쪽
165 우연은 필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 +5 21.01.16 167 6 14쪽
164 차가운 운명의 굴레는 오늘도 +1 21.01.14 158 6 16쪽
163 모든 게 얼어붙은 나라 +2 21.01.11 192 6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