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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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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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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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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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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다크엘프 대 신벌의 대행자

DUMMY

광맥지대의 제1계층의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훈련장은 그 용도를 감안해서 물리적ㆍ마법적 피해를 받아도 위 계층들에 피해를 주지 않게끔 설계되어 있다.


훈련장의 귀퉁이마다 설치된 돌기둥에는 정교한 마법술식이 새겨져 있고, 당직 간부가 마나를 주입하는 것으로 훈련장을 전부 담는 반구 형태의 배리어가 순식간에 형성된다.


1급 방어마법이라 따지고 보면 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미리 술식을 발동 직전까지 짜두고 그걸 돌에 새겨놓았기에,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나를 흘려 넣을 줄만 알고 있다면 해당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마나가 금방 고갈된다면 마법의 발동도 멈추겠지만.


마법술식이라는 건 꽤 생소해서, 보통 마법사들 사이에선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마법의 설계가 담긴 마법진을 만든다.

2. 마나를 그에 흘려 넣는다.

3. 현실개변의 에너지가 주입된 마법진은 해당 마법을 실행한다.


이렇게 보면 꽤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나 마음대로 펑펑 마법을 써대지 못하는 이유가 다 있다.


이 마법진을 구상하고 그에 마나를 주입하는 원리와 방법은 전부 머릿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내연기관이 탑재된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마법진이 자동차, 마나가 기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름을 넣은 자동차는 액셀을 밟음과 동시에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기름을 넣고 싶은데 주입구가 어딨는지 모르면 어떨까? 또는 기름은 성공적으로 넣었으나 운전하는 법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아예 자동차가 없는 사람이라면?


답은 간단하다.


자동차는 영원히 추진되지 않는다.


이럴 때 억지로 누군가에게 자동차를 몰게 하고 싶다면, 위의 모든 것이 포함된 세트가 편리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알아서 주유하고, 스스로 운전도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동차가 말이다.


피아넬은 바로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보통 대마법의 사용을 위해 쓰이는 마법술식에는 공급되는 마나의 흐름, 마법진의 형태, 그리고 최종적인 출력 결과가 모두 짜여져 있다.


딱히 마법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임의로 마법진을 쓰는 대신 술식을 쓰는 게 아니다.


대마법일수록 자칫해서 자잘한 실수가 섞이기라도 하면 큰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도록 안전성을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리 천문학적인 스케일의 대마법이라 해도 술식만 검토하고 마나를 넣으면 절대 엇나갈 일이 없다.


바로 여기에서, 마법연구원장 피아넬 비 코르니아스는 7~10급의 하위 마법도 술식으로 발동시킨다면 사용이 훨씬 간편해질 것으로 보았다.


경험 있는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불러내고 마나를 넣는ㅡ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작업이 워낙에 익숙하므로, 안 그래도 그냥 쓸 수 있는 걸 굳이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야 발동 자체는 쉽겠지만 그를 위한 준비작업이 쓸데없이 기니까.


허나 피아넬은 그 반대로, 마법에 특출나지 않은 평범한 이들을 겨냥했다.


마왕군 내 약한 마족의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내 의지를 따라준 것이다.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쓸 수 있는 마법술식, 이 그가 표방한 프로젝트명이다.


술식은 숙련된 마법사들이 고생해서 스크롤 따위에 미리 짜줘야겠지만 준비작업만 충분히 있다면 자신이 쓸 수 있는 마법보다 훨씬 위 단계를 가볍게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완성된 마법술식은 그 자체만으로 꽤나 귀하고 위험한 물건이다.


적의 손에 들어가서 대량생산된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아직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인원에 한해 실전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마법술식이 기록된 스크롤을 아무나 쓸 수 없게 봉인마법 같은 걸 걸어두면 슬슬 보급할 수 있겠지.


이미 언급했듯 마나를 충분히 흘려 넣을 능력이 있어야 그것도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극단적으로 자신의 체내 마나를 전부 한방에 써버린다고 가정하면 고블린도 중급마법을 쓸 수 있겠지. 높은 확률로 졸도하겠지만.


이처럼 마법에 재능이 없는 마족들을 위해 피아넬이 일전에 고안한 방식이 그대로 적용된 1계층 훈련장은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밖에서 지켜보는 이가 다칠 일이 없었다.


훈련 시작과 함께 배리어를 활성화하고, 그 어떤 공격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오늘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한파 말고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었지만,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는 제1계층에는 일과시간이 끝났음에도 꽤 많은 장병이 모여있었다.


나는 따로 공지하지 않았음에도 모인 군중에게서 시선을 돌려, 진지한 얼굴로 마주 보고 선 둘을 보았다.


“싸구려 연극같은 일이 되었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지.”


그 넓디넓은 훈련장에 선 건 단 둘 뿐이다.


리우 에스타. 유디트 황국의 뒤 처리반 천벽인광의 두 번째 빛으로이자 부단장.


그에 맞서는 건 카니앗 이그ㆍ시피아. 마왕군 소령이자 마도궁병단장.


나는 현장 스카우트(?)라는 명목으로 리우 에스타와 리겐스 루드게이트를 데려온 직후의 일을 떠올렸다.


가브리엘의 깃털로 전송되어 그대로 검역소에 붙잡힌 둘에 대한 처우를 현장의 간부진에게 설명해주었을 때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예상대로 카니앗은 둘이 살아있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일단은 휘하에 넣겠다는 결정을 들었을 때는 더더욱.


“저년은 위험한 황국의 개입니다, 살려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은 보스의 판단을 거스르겠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린이 싸늘한 시선을 던진 것에 조금 주눅이 든 카니앗이지만, 그대로 꼬리를 내릴 생각은 없는지 활을 꼭 붙들고 있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카니앗은 광맥지대에 잠입한 리우를 보기 좋게 놓치고 만 것에 여태 끙끙 앓았고, 제도의 전투에서는 거의 빚을 청산할 뻔했다.


참으로 운이 나쁘게도 어느 전 용사가 리우와 동행하고 있어서 한방에 리타이어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다크엘프는 긍지높은 종족이다.


이렇게 됐으니 화해하라고 해서 아 예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천벽인광은 오랜 역사 동안 마족을 사냥해왔다.


그리고 그중에 다크엘프는 분명 포함되어있다.


단지 마족이라는 이유로 쫓기고 죽임당하는 삶을, 카니앗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배경을 아는 와중에 단지 받아들이라고 기대하는 건 불합리하다.


“미안하게 됐군, 카니앗. 하지만 황국의 대처에 흥미가 동한 것도 사실이다.”


“마, 마왕님께서 사과를... 당치도 않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카니앗에게, 나는 아껴두었던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네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한번 그걸 갚을 기회를 주지.”


당사자들도 동의한, 아무런 제약 없는 1대1의 결투.


바로 오늘, 마왕군의 많은 병사들이 휴식시간을 마다하면서도 구경하러 온 건 바로 성기사와 다크엘프와의 대결이었다.


이만한 인원이 모였음에도 소리 높여 응원하거나 고함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건 해묵은 감정을 끝내고자 내 주관하에 진행되는 결투였으니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제약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한쪽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하면 된다.


이 결투에서 항복은 없었다.


전력으로 맞부딪혀서 끝을 보지 않으면 카니앗은 절대 납득하지 않겠지.


“인간, 저번처럼은 안 될 거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선 카니앗은 활활 살기를 불태우며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반면 리우는 별 표정 변화 없이, 도신 없는 검을 들었다. 목숨을 건 전투라고 하는데도 긴장감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말이다.


지켜보는 관중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도신 없는 검으로 어떻게 다크엘프를 상대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거겠지.


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은 다음 순간 해결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검의 손잡이 윗부분에 갑자기 불타는 도신이 생긴 것이다.


그건 어느 대주교가 최후의 저항으로 썼던 성마법과 비슷하게 눈부신 흰색의 불꽃이었다.


천검.


신벌을 대행하게 해주는 유디트 황국의 국보.


나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걸 뜯어보았다.


천벽인광의 둘을 살리게 된 건 마치 엉겁결에 나온 결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속내를 말하자면 천검을 쓰는 저 계집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고유스킬을 발동한 상태에서 다른 물건을 잡을 수 없기에 마나로 구현하는 검과는 종류가 다르다.


어찌 보면 저 천검은 마법술식과 닮아있다.


고도의 술식이 짜인 아티팩트에 전원이 들어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피아넬과 키루아에게 넘기면 혹시 작동원리를 알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전투가 시작되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천검을 든 리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신벌 그 첫 번째ㅡ유황과 불의 비.”


그건 영창이 아니었으며, 마법진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신벌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곧 확실해졌다.


훈련장의 위에, 뜨겁게 달구어져 활활 타는 암석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난다.


그 압도적인 위용은 화산이 성대하게 폭발하는 걸 보는 것 같았다.


뒤이어, 훈련장을 전부 덮을 크기의 뜨거운 유황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 말도 안 되는 기술은 신이 과거에 지상에 내렸다는 벌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배리어 밖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매섭게 불타는 유황은 절대 눈속임 따위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닿으면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온몸이 한 줌의 재로 변해 없어지겠지.


나는 저 신벌에서 마법의 기척이 전혀 없다는 것에 주목했다.


웬만한 상급마법 수준의 규모와 위력이지만 그 실체는 마법이 아닌 것이다.


저 계집, 인간의 몸으로 신의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


주눅이 들 법한 광경이었지만, 카니앗은 전부 예상하였다는 듯 당황하는 일 없이 활을 들었다.


“풀캐스트ㅡ피지컬 실드.”


보랏빛 방어막이 그녀를 감싸며 생겨났다.


방어마법중에서도 마법보다는 물리적 공격에 탁월한 내성을 자랑하는 마법이다.


리우의 신벌은 마법이 아니니 알맞은 대처였다. 아마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이겠지.

카니앗을 삼킬 것처럼 쏟아지는 유황.


그것의 비가 겨우 그쳤을 때, 카니앗은 방어막 뒤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


“신벌 그 다섯 번째ㅡ대홍수.”


리우가 다음 신벌을 입에 담는 것과, 카니앗이 시위를 당기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유황의 비가 그랬었듯,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건 거대한 파도.


대홍수라는 이름에 걸맞은, 생물의 몸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들이닥친다.


피융ㅡ!


카니앗의 화살은 하나의 빛이 되어 그 큰물의 몸체를 가른다. 화살 하나에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것 같은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물살은 카니앗에게 닿지 못하고, 둘로 갈라져 양옆으로 힘없이 무너졌다.


남은 건 훈련장 전체가 무릎까지 잠길 정도의 물.


찰박, 하고 높이 도약한 카니앗이 영창한다.


“프리즈ㅡ”


액체를 얼리는 데 쓰이는 프리즈는 고작 9급 초급마법.


하지만 카니앗이 쓴 빙결 마법은 위력부터가 달랐다.


촤자자자ㅡ

훈련장에 가득 퍼진 물이 순식간에 얼어간다.


리우는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이 얼기 전, 살짝 뛰어올라 다리가 얼어붙는 걸 피했다.


그대로 넓은 빙상이 형성된 가운데, 카니앗의 시위에 두 번째 화살이 걸린다.


영창 없이 재차 보랏빛 광선이 발사되었다.


내가 검에 마력을 담아 휘둘러 참격을 쏘아 보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카니앗의 마나를 그대로 받은 화살은 보통 화살과는 다른 위력을 가지고, 일정 수준의 현실개변을 일으킬 수 있다.


리우가 몸을 숙여 화살을 피한다.


쏜살같이 뒤로 날아가는 보랏빛 일격.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던 리우는 뭔가 느낀 듯 바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굉장한 소리를 내며 천검과 맞부딪힌 건 다름 아닌, 방금 리우가 피했던 화살.


분명 쳐냈지만 마치 힘겨루기를 하듯, 리우의 천검을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마나로 강화된 화살은 부러지지도 않고 계속 내리꽂히려 하는 게, 마치 자신의 의지라도 가진 것 같았다.


“내 화살은 목표의 머리를 꿰뚫기 전에는 멈추지 않거든.”


카니앗은 조소를 흘리며, 이번에는 다섯 개의 화살을 시위에 한꺼번에 건다.


다섯 개의 광선이 동시에 발사.


리우가 있는 힘껏 화살을 쳐내고, 쏜살같이 그녀를 덮치는 위협을 인식한다.


“신벌, 그 두 번째ㅡ일곱 번째 천사의 나팔.”


리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땅이 울리기 시작하고 천둥이 요란하게 친다.


공중에서 만들어지는 건 하나하나가 날을 예리하게 세운 우박.


리우를 중심으로 번개가 땅을 타격하기 시작한다.


콰쾅! 콰쾅! 콰쾅!


가공할만한 속도로 내리꽂히는 우박과 번개는 호시탐탐 리우의 머리를 노리는 화살에 닿고,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거나 반 토막을 냈다.


“신벌의 대행자인가.”


카니앗이 급하게 방어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는 걸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위그드라실의 은혜를 입고 상급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된 카니앗을 상대로 저 정도다.


기술 하나하나가 너무 거대해서 섬세한 공격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저것만으로도 홀로 일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힘이었다.


천검에 의지하는 면이 있고, 블레이즈에 비교하면 개인의 기량은 다소 떨어지는 것 같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렇게까지 분투할 수 있는 건 놀라웠다.


저 어린 나이에 말이다.


만일 마족이면서 같은 기술을 구사했다면 카니앗에겐 절대 승산이 없겠지.


리우 에스타는 그만큼 우수했다.

천검을 유지할 정도로만 마나를 쓰면 되기에, 아무리 신벌을 퍼부어도 마나가 바닥날 걱정이 없다는 게 사기적이었다.


그에 반면 카니앗은 마나가 한정되어있다.

그렇기에 화살에 소량의 마나를 담아 쏘아 보낸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이래서는 언젠가 마나의 비축량이 바닥날 테니 지구전에서 그녀가 밀릴 수밖에 없다.


리우는 카니앗이 방어막을 해제하는 걸 보다가 몸을 숙였다.


그 작은 손에 들린건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카니앗의 코앞에 있었다.


촤라라라라락ㅡ


백색으로 발광하는 페이지들이 리우의 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친다.


“신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반역자들을 물리칠 힘을 내려주소서.”


리우가 국어책 읽듯이 외운 건 기도문. 신의 은총으로 신체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종의 자가버프 스킬이다.


“이런ㅡ”


화살을 걸고 있던 카니앗이 사태를 깨닫고 피하기도 전에, 몇 배는 커진 천검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콰과과과과과광ㅡ!


검이 낼 수 있는 소리라기엔 너무 큰 충돌음이 났다.


자욱한 먼지 안개가 걷히고, 보이기 시작한 건.


“... 윽.”


카니앗은 거리를 조금 벌리고 서 있지만, 그녀의 왼팔이 있던 곳에선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녀는 궁수.


접근전을 허용한 시점에서 리우가 훨씬 유리해졌던 것이다.


리우 에스타는 별말 없이 검을 쳐들었다. 그대로 적의 목을 베려던 찰나,


탁.


“어... 엇?”


리우가 갑자기 뒤로 쓰러진다.


그녀의 어깻죽지에 꽂힌 건 하나의 화살. 아무런 마나도 가미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눈치채지 못했던 카니앗의 함정이었다.


“검이 닿기 직전, 위로 쐈나...”


그 정도 부상, 별거 아니라며 털고 일어나고 싶지만 리우의 몸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리우가 화살을 거칠게 뽑아냈다.


“독...인가.”


피로 범벅된 그 촉에는 질척이는 독액이 묻어있었다.


순식간에 퍼지는 독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리우는 놀랍게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미 빈사의 상태일 텐데도.


비틀거리며 검을 들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저항하는 카니앗에게 리우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거기까지다.”


나는 한 손으로 천검을 받아내고, 다른 손으로는 카니앗의 단검을 잡고 있었다.


배리어는 그대로 활성화된 채, 나는 전이마법으로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천검이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내 손에 막혀있는 것에 리우가 눈썹을 올린다.


이 세계의 모든 걸 ‘거절한다는’ 내 고유스킬에 대한 걸 모르니까 어째서 맨손으로 막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


“마왕...님. 전 아직··· 죽일 수 있습니다...”


피를 너무 흘려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도 항변하는 카니앗.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독을 퍼뜨린 순간 리우의 죽음은 확정됐다, 성마법에는 체내의 독을 해독하는 마법 따위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그녀가 휘두르는 검을 막지 못하는 시점에서 네 죽음도 확정이다.”


“... 크읏.”


“너도, 납득했겠지?”


반대쪽을 보며 묻자, 리우는 순순히 천검을 끄고 뒤로 털썩 주저앉는다. 카니앗의 독이 치사량이라는 걸 점점 굳어가는 몸으로 느낀 것이다.


“이대로 두면 둘 다 죽겠지. 아쉽지만 여기선 무승부다, 카니앗.”


카니앗은 더 항변할 힘도 없는지, 손에 쥔 단검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그 감정의 배경을 알고 있는 나이기에 더욱더 보기 안타까웠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힐.”


은은한 초록빛이 떠오르고, 카니앗의 잘린 왼팔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리우의 혈색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카니앗 이그ㆍ시피아와 리우 에스타의 대결은 결과적으로 둘 다 생존. 의무병들이 들것을 들고 달려오는 결말로 끝이 난 것이다.


지켜보던 관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별 소란 없이 해산하는 중이었다. 본 것에 대해 들떠 이야기하는 자들이야 있었지만, 두 강자의 진귀한 싸움을 봤으니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겠지.


당연하지만 내 판정에 불복하는 자도 없었다. 그대로 두면 둘 다 죽었을 거란 건 누가 봐도 명백했고, 신벌을 직접 보고도 리우 에스타를 인간이라고 얕잡아보는 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리겐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숨이 가쁜 리우가 겨우 물었다. 함께 끌려온 부하의 행방은 아마 싸우는 내내 신경 쓰였겠지.


“숙소에 연금되어있다. 네 처우도 결정됐으니 당분간은 같은 곳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지.”


그 말에 리우는 만족했다는 듯 눈을 감고, 카니앗의 뒤를 따라 들것에 실려 갔다.


“정말 이걸로 좋았던 걸까요.”


후련한 듯, 후련하지 않은 듯한 마음을 살피는 와중에 종처럼 울리는 맑은 목소리.


어느새 내 옆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보는 린에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두운 감정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겐 대단히 미안하지만, 결착을 짓는 건 후일로 미뤄야겠군.”


작가의말

쓰고 보니 또 역대급 분량 갱신...?


어찌됐든 이렇게 해서 리우 에스타와 대주교님의 조카는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특히 리우는 아끼는 캐릭인데 살아남아서 다행이네요, 덕분에 루드게이트는 죽었지만.


그건 그렇고 다음화에 야스신이 예정되어 있는데... 다 써놓고도 이거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고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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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빛 바랜 재회 +2 22.05.13 112 6 17쪽
207 스비엣, 첫 번째 불꽃의 예찬자 +1 22.04.12 126 6 18쪽
206 흉조의 완성 +1 22.03.30 122 5 19쪽
205 환상을 부수는 번견 +1 22.03.25 123 4 15쪽
204 의지는 얼어붙지 않는다 +1 22.03.03 122 5 18쪽
203 격돌 +1 22.02.22 112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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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2 22.01.15 116 5 18쪽
200 패배, 그리고 지켜보는 눈 +1 21.12.31 124 4 18쪽
199 카디널 보이드 +2 21.12.24 122 4 17쪽
198 마도 vs 마법 +3 21.12.08 129 3 18쪽
197 망설임을 잠재우지 않으면 +1 21.11.29 121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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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엔딩의 서막 +3 21.11.02 123 7 16쪽
194 시계 바늘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돌아간다 +3 21.10.17 122 5 18쪽
193 예카테리나 페르바크 중위 +1 21.09.28 99 5 18쪽
192 이곳은 죽음이 백색을 띠고 있다 +1 21.09.03 102 5 19쪽
191 하늘에서, 하늘로 쏟아지는 파괴 +2 21.08.01 113 3 17쪽
190 여름 바다, 휴가 +2 21.07.24 111 4 16쪽
189 소녀는 절대 잊지 않는다 +5 21.07.11 119 4 17쪽
188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전란 +3 21.07.05 128 5 19쪽
187 동전의 뒷면은 온도가 다르다 +2 21.06.21 120 6 17쪽
186 전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1 21.06.07 122 4 17쪽
185 종언의 천사 +5 21.05.24 136 5 15쪽
184 광기의 과학자 +3 21.05.15 136 5 18쪽
18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3 21.04.27 130 5 1쪽
182 천사, 인간, 그리고 광인 +4 21.04.25 168 5 18쪽
181 메스에는 피가 묻어있다 +2 21.04.12 129 4 18쪽
180 그것은 천천히, 하지만 치명적으로 +2 21.04.04 150 5 16쪽
179 뜻밖의 합심 +2 21.03.22 150 4 18쪽
178 인페르노 +1 21.03.11 142 4 18쪽
177 첫 번째 교전 +2 21.03.01 155 4 14쪽
176 겨울 비가 오기 전에 +3 21.02.21 167 8 14쪽
175 밤에 물들어버린 빛 +5 21.02.15 192 9 15쪽
174 손님 맞이 +2 21.02.12 166 7 17쪽
173 어둠은 꽈리를 틀었다 +4 21.02.10 177 7 15쪽
172 마왕의 방문 +3 21.02.07 182 4 16쪽
171 연방 +2 21.02.04 160 6 19쪽
170 기다리는 건 죽음 +3 21.02.02 176 6 16쪽
169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답게 퇴장한다 +5 21.01.31 160 7 17쪽
168 바람은 방향을 바꾼다 +3 21.01.27 147 7 14쪽
167 인과응보 혹은 불의 +5 21.01.25 163 7 15쪽
166 보복 +2 21.01.18 153 6 15쪽
165 우연은 필연의 모습을 하고 있다 +5 21.01.16 165 6 14쪽
164 차가운 운명의 굴레는 오늘도 +1 21.01.14 156 6 16쪽
163 모든 게 얼어붙은 나라 +2 21.01.11 188 6 15쪽
162 구원 요청 +1 21.01.10 187 6 15쪽
161 결국 놀이라고 하면 그것 +6 21.01.09 196 7 20쪽
» 다크엘프 대 신벌의 대행자 +4 21.01.07 239 7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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