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사
22. 술사
“난인? 술사가 난인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난인 중에도 술사였던 자는 당연히 있겠지. 허나, 난형에 처해지는 순간 그의 능력 또한 빼앗길 텐데?”
“주기적으로 약물을 써 금제할 따름이지, 능력 자체를 봉폐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게 그 얘기 아닌가?”
“한 번 약을 쓰면 약효가 육개월간 지속된다는군요. 그러니, 약효가 다한 뒤 다시 약을 쓰지 않은 상태라면 법술을 사용할 수 있겠지요.”
“술사가 난인이 된다면, 아마도 별창에서 관리할 게다. 별창에서 그리 허술하게 방치할 리 없어.”
“물론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부득이한 예외가 있습니다.”
“……?”
“임신 중인 난인에게는 약을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임신 육개월 이상인 난인 술사라면 법술을 부릴 수 있다는 결론이지요.”
의념을 실은 부적(符籍)을 매개로 대자연의 원소력을 다루는 술사들은 태화에서 아주 귀한 존재들이다.
문사를 꿈꾸는 서인들의 초등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에 기초 법술 과정을 두는데, 법술을 가르칠 목적이라기 보다는 술사의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자질이 있다고 판명된 원생들은 서원을 마치는 즉시 천주에 있는 천교감(天巧監)으로 보내지며,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법술을 공부하게 된다. 한 기수에 보통 기백 명이 천교감에 들어가나, 십년 과정을 수료하고 정식 술사로 공인되는 이들은 백여 명 안쪽. 그렇다 보니, 태화에 존재하는 공인 술사는 전부 합쳐도 그 수가 귀인보다 적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무사들보다 훨씬 그 쓸모가 많은 자들이 술사들인 만큼, 천교감을 수료한 술사들을 유치하기 위한 귀인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허나, 가장 뛰어난 술사들은 아무래도 황의 신료로서 천주에서 지내기를 원하므로, 각 주에, 특히 풍주와 같은 변경에 속한 술사들은 극히 드물었다.
하여 비공인 술사들, 즉 천교감에서 중도 탈락된 이들이나 그들의 제자들에 대한 수요도 높았다. 하급 작위인 철경들의 봉토에 속한 술사들은 대개 비공인 술사들이고, 사실, 선남부에도 그런 자들이 둘 있었다. 다만, 비공인 술사들이 법술을 부리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그들을 고용한 귀인들도 공공연히 술사를 보유했다 공개하지는 못했다. 풍주에 있는 술사를 다 모아도 사, 오십 명에 불과할 것이라는 모윤진의 말도 공인된 술사가 그 정도란 뜻이다. 어차피 비공인 술사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의미 없다는 전제 하에.
허나, 술사가 아무리 귀해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법. 보통 죽이기는 아까우니, 난형에 처했다. 다만, 난형에 처해진 술사들은 여느 난인들과 마찬가지로 각지의 성리원으로 보내지나, 법술을 부릴 수 없도록 별창에서 특별히 관리를 한다. 법술에 필수적인 의념의 생성을 막는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다.
소황이 남궁시연에게 언급한 술사가 바로 그러한 경우.
난인에 대한 과거 기록은 별창에만 남고, 전부 말소되는 터. 그들을 관리하는 성리원에서조차 그가 술사였는지, 혹은 귀인이었는지 그 출신성분을 알 수 없었다. 죄인에 대한 특별 대우를 방지하기 위한 시책.
허나, 원칙은 그렇다고 해도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다. 선남부에서 가까운 풍주 제 7 성리원에 술사 출신 난인이 배정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에 소황이 귀영전에 의뢰해 그가 누구인지 파악해 두고 있었음이다.
소황과 뜨거운 밤을 지새운 남궁시연은 뇌령신조를 잡으면 소황이 원하는대로 그를 부측으로 삼겠노라 약속했다. 이에 소황은 일행에 합류시킬 술사와 사제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나름의 방법을 개진했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는 남궁시연은 소황의 생각대로 일단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하여, 남궁시연은 바쁜 하루를 예감하며 꼭두새벽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음이다. 다음 달 보름까지 채 스무 날이 남지 않았다. 매월 보름은 절맥으로 인한 한독이 극성에 달하는 날. 학연경이 지어준 단약으로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밀림 한 가운데서 한독이 발작하면 그 후과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그 날 전까지는 뇌령신조를 잡아 도심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남밀림의 중심권인 흑천밀림까지는 편도로만 열흘 가까이 걸린다. 따라서 내일, 늦어도 모레에는 출발해야 기일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급한 남궁시연은, 옥야각주 양대희를 무작정 깨워 소황을 사들이는 거래부터 진행했다.
매매는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양대희는 원가인 금자 다섯 냥에 겨우 한 냥을 더 보태 값을 불렀고, 남궁시연이 계산을 치르자 관종청에서 발급한 권리문서를 즉시 넘겨 주었다.
양대희와 소황의 관계를 알 리 없는 남궁시연은 ‘이 놈이 역시나 어지간히 골칫덩이였던 모양이군’, 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픽 웃었을 뿐이다.
어쨌든 소황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한 남궁시연은 일위 백세경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긴 뒤, 소황과 이위 신수영을 대동해 어제 허탕을 치고 돌아온 성리원을 향해 급히 말을 달렸다.
하루만에 다시 찾아와선 밑도 끝도 없이 난인 한 명을 지목하며 불러 달라는 남궁시연에게, 성리원주는 살짝 짜증이 났다.
성리원의 원사들은 비인인 사제이지만, 그 원주 자리는 이품(二品)에 해당하는 중앙 관직이다. 한직이지만, 나름 끝발이 좋은 자리. 주로 상대하는 이들이 고관대작 아니면 대부호들인지라, 눈이 이마에 붙은 작자들이 제법 많았다.
남궁시연이 찾은 풍주 제 7 성리원주도 그러한 자. 그러니, 남궁시연이 안중에 들어올 리 없었다. 모윤진조차 눈 아래로 볼 판에, 그의 주선으로 찾아온 일개 무사 따위야.
정신을 차린 것은, 틱틱거리는 그의 목젖에 검극을 갖대댄 이위가 남궁시연의 신분을 조용히 밝힌 뒤.
당장 이위의 검도 무섭지만, 그 뒤에 버티고 선 남궁세가는 더 무섭다. 마침 그도 동주 태생. 남궁세가의 위세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더 이상의 군소리 없이 남궁시연이 찾는 난인을 그의 앞에 냉큼 대령시켰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남궁시연은 방으로 들어오는 난인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가재미 눈으로 소황을 흘겨 보았다.
소황 또한 살짝 당황한 표정.
나이는 삼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에 곱상한 얼굴을 한 난인 한 명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들어와 남궁시연 앞에 부복했다. 가히 남산만한 배를 하고.
한 눈에 봐도 만삭이 가까웠다.
물끄러미 쳐다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남궁시연. 연신 쓴 침만 삼킨다.
과연 술사일까? 아니, 설령 그렇대도 이 꼴을 하고 밀림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남궁시연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난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남궁시연이 아주 작은 희망을 본 것은 그 때였다.
난인의 눈. 무저의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은 그 눈에 형용하기 어려운 빛이 깃들었다.
이런 눈을 가진 자는 평범할 리 없다. 평범하지 않은 자를 상식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
남궁시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대, 술사였다 들었다.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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