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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비각

여인천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동방존자
작품등록일 :
2013.04.18 18:35
최근연재일 :
2013.05.2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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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0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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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혁천의 왕

DUMMY

13. 혁천의 왕


폐국 당시 겨우 살아남은 사태천의 반선들은 구주천의 집요한 추살을 피해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오지로 숨어 들었다.

오늘날의 사대금역.

풍주와 남주 일대에 웅거했던 풍운전의 잔존세력이 자리를 잡은 곳은, 그 중 흑천밀림이다.

흑천밀림은 사람이라 하기도, 짐승이라 하기도 어려운 이물들이 들끓는 땅. 수 백년간, 안으로는 흉신악살과도 같은 이물들과 주도권을 다투고, 밖으로는 구주천의 줄기찬 토벌 시도를 막아내며, 흑천밀림은 그렇게 일국의 세를 이루었다.

진인과 비인, 아니 여성과 남성의 대등한 어우러짐을 정천(正天), 곧 바른 세상의 참모습이라 믿고 장구한 세월 그 맥을 이어나간 그들이지만, 그렇다고 흑천밀림에서 영원히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옛 터전인 태화로 돌아가겠다는 이상도 이상이지만, 주민수가 어느덧 오백만에 가까워지며 실질적으로 흑천밀림에서의 삶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었음이다.

하여 오래 전부터 림의 여인들을 밖으로 내보내 태화 진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조심스럽게 그 거점을 만들어 가고 있던 중.

양대희와 남정인은 그러한 사명을 지고 구주천의 진인으로 위장해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양대희는 림의 재정을 총괄하는 성은전의 당주들 중 한 명이고, 남정인은 구주천의 동향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는 귀영전 소속의 세작.

허나, 그들과 달리 소황은 흑천밀림 출신이 아니다.

남궁시연에게 암시했듯, 당금 구주천의 황 무후(武后)의 태를 이은 일개 씨종.

헌데, 왜 양대희 등이 소황을 잠주라 일컬으며 아랫사람을 자처하는가?

그것은 초대 림주인 칠교신군(七巧神君) 영세휘의 유지(遺旨)에서 비롯된다.



- 무개옥합(無蓋玉盒)을 여는 자.. 그가 곧 신물의 주인이요, 혁천의 왕일지니. 그를 섬기고 따르라. 그리하여, 정천을 회복하라!


흑천밀림의 무상지보(無上之寶)이기도 한 무개옥합.

각 변의 길이가 반 자 남짓한 정육면체의 작은 옥합이고, 재질은 희귀한 온옥(溫玉)이다. 허나, 옥합이라 하니 속이 빈 상자일 것이라 추정할 뿐, 겉면에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미세한 틈도 없는 한 덩어리 옥괴로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 무개옥합이란 이름이 붙었을 터. 당연히 부수지 않고는 열 방법이 없었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 지도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허나, 바로 이 무개옥합 때문에 오늘날의 흑천밀림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상지보인 것. 무개옥합이 있는 곳으로부터 반경 수백 장 이내로는 흑천밀림에 서식하는 그 어떤 이물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한 공능에 기대 가히 성역이라 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 오백만이 거주하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무개옥합의 열쇠는 풍운전의 장령신부(掌令神符)였던 ‘풍운의 소성’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영세휘의 유지에서 언급된 신물은 응당 풍운의 소성일 것이며, 그 주인이 풍운전의 후신인 흑천밀림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을 가진 자임은 일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여 흑천밀림의 주민들은 언젠가 신물과 함께 찾아올, 혁천의 왕으로서 그들을 다시 태화로 인도할 구세주를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다.

그리고 이 년 전, 오랜 기다림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홀연히 등장해 신물주임을 주장하고, 실제로 무개옥합을 열어 스스로를 증명한 사내!

그가 소황, 바로 나후황이었다.


허나, 소황은 혁천의 왕이란 지위를 거부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했다.

풍운의 소성을 비롯해 사태천의 장령신부였던 네 가지 신물을 모두 얻고 천외천을 열어야지만, 비로소 진정한 혁천의 왕이라는 것.

아울러 흑천밀림만이 아닌 다른 삼대금역의 시조들 또한 동일한 유지를 남겼으며, 소황이 이미 ‘천룡의 섬광’을 얻어 무수마곡을 품에 안았음도 알게 되었다.

소황은 현 림주인 비천호(飛天虎) 영사표의 지위를 그대로 존중했으며, 무수마곡과 긴밀히 연계하고 자신이 나머지 두 개의 신물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줄 것을 주문했다.

물론, 그가 선조의 유지대로 혁천의 왕이 될 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붙은 칭호가 잠주.

아직은 아니나, 언젠가는 주인이 될 자라는 뜻이다.

양대희와 남정인이 소황을 섬기는 이유, 바로 그래서였다. 




한편, 긴 한숨으로 사도은아에 대한 상념을 털어낸 소황은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양대희와 남정인을 보고 머쓱해했다.


“잡생각에 빠져 괜히 두 분을 불편하게 해드렸군요.”

“아, 아닙니다. 잠주.”


두 사람이 동시에 손사래를 치며 입을 모았다.

씁쓸하게 웃어 보인 소황이 양대희에게 물었다.


“신조는 아직 운해곡(雲海谷) 부근을 떠나지 않았지요?”

“그렇습니다. 흑림 안으로 들어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지만, 용정(龍精)의 기운 때문에 두려워하는 눈치입니다. 보기 안쓰럽기도 하더군요. 짝을 찾아 수십만 리를 방황했을 터인데.”


용정. 달리 여의주(如意珠)라고도 불리운다.

상고시대 태화의 주인이었다는 신화적인 생명체, 용.

이제는 사라진 존재로 알려진 용의 내단이 용정이며, 무개옥합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이물들의 접근을 막은 무개옥합의 신비는 그 안에 있던 용정의 공능이었던 셈이다.

대자연에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었던 용의 기운이 용정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에, 태고의 본능을 간직한 이물들이 감히 그 주위에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익룡의 한 갈래인 뇌령신조 또한 마찬가지.

용과 익룡은 애초에 차원이 다른 생명체다. 용이 조화경에 이른 젌대의 고수라면, 익룡은 세 살박이 어린애 수준.

태고의 본능이 그 어떤 이물보다 생생한 뇌령신조는, 용기(龍氣)가 은은히 서린 흑천밀림에 부리조차 들이밀지 못하는 신세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궁에 남은 새끼들을 제외하고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뇌령신조의 암컷이 흑천밀림 안에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또한 뇌령신조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소황이 꾸민 안배였다. 본래 무수마곡에서 키우던 영물을 그가 이리로 옮겨왔던 것이다. 신조의 흔적이 한때 서황에서 발견되었던 것도, 추룡대가 그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도 다 그러한 까닭.


“어쩔 수 없지요. 남궁세가에 발을 들일 절호의 기회. 놓칠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남궁시연을 살려놓고 봐야지요.”

“지당하신 말씀이오나, 걱정은 됩니다. 운해곡은 저원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땅입니다. 간간히 무모성성도 출몰하고요. 송구하오나, 그것들을 상대하기에는 잠주의 화후가 아직...”


소황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하지요.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남궁세가에 들어야 합니다.”

“하오나, ‘사해의 수정’이 남궁세가에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차라리 사해의 수정은 잠시 잊으시고, 두 개의 신물을 먼저 완벽하게 흡수하시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요? 흑천밀림과 무수마곡만 온전히 발 아래 두셔도, 구주천을 상대로 능히 정천의 기치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럼, 지옥군도와 불귀사막은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굽히고 들어오겠지요. 이는 제가 아니라, 림주님의 판단이십니다.”


소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루라도 빨리 성전을 시작해 림의 동포들로 하여금 태화 땅을 밟게 하고픈 양대희의 심정은 이해한다.

허나, 림주 영사표의 속셈은 양대희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수마곡주인 혈붕(血鵬) 주태성이 그러했듯, 영사표 또한 소황을 흑천밀림의 왕으로 독점하고 싶은 것이다.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그들은 계산적이고 정치적이다.

소황이 천외천을 열어 구환을 얻는다고 한들, 그가 사대금역을 하나로 통합하고 진정한 혁천의 왕위에 오른다고 한들, 천년의 세월 동안 태화에 뿌리내린 구주천을 무너뜨리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이라 여기고 있었다.

남녀가 평등하게 어우러지는 정천의 시대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포화상태에 이른 흑천밀림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 태화에 자리를 잡는 것. 오로지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태화 전체는 필요 없다. 주(州)까지도 필요 없다. 그저 산물이 넉넉한 하나의 부(府) 정도만 확보하면, 림의 식구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흑천밀림의 전력을 쏟아 실력 행사를 한다면, 정치적 협상을 통해 구주천도 그 정도는 양보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 목적 하에서는, 공연히 사대금역을 전부 끌어들여 판을 키워봐야 유리할 게 없다. 구주천의 체제에 심대한 위협이 된다 판단하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예 궤멸시키려 들 것이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진작에 그리하지 못한 것은 명분이 약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림주라지만, 림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임의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 겨우 한 필지의 땅뙤기를 얻어내기 위해 막대한 희생이 불가피하다 하면, 일을 도모하기도 전에 림주 자리부터 위태로울 것이다.

허나, 소황이 앞장서면 얘기가 다르다.

군중은 우매하다.

선조가 예언한 구세주, 혁천의 왕이 일어설 때, 그 누가 감히 반기를 들 수 있을까?

내색하지 못할 뿐, 영사표는 바로 그런 심산 때문에 소황이 천외천을 여는 것도, 구환을 이루는 것도, 사대금역을 한데 아울러 혁천의 왕이 되는 것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음이다.

물론, 양대희에게 그런 내막까지 시시콜콜 들려줄 필요는 없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닙니다. 제가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이미 백여 년 전 무수마곡이 시도했던 바입니다. 당시 삼대금역은 어떻게 나왔던가요? 수수방관. 금역에 갇혀 있어 실정을 몰랐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태화에 거점을 만든 곳은 흑림만이 아닙니다. 소식은 다 듣고 있었어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어느 한 곳도 동조하지 않았지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사실이기도 하구요. 무수마곡과 흑천밀림의 힘을 합쳐도 다를 게 없습니다. 사대금역이 하나의 체계로 다 같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그것으로도 부족하지요. 태화의 비인들까지 같이 일어나야, 정천을 회복하는 일말의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겁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천외천을 열어야 하구요. 기다리세요. 이미 천년을 기다렸지 않습니까?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그래야 때가 도래합니다.”


담담하지만, 좌중을 사로잡는 강한 역도가 실린 음성.

양대희는 붉어진 얼굴로 감히 토를 달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천색을 살펴 시간을 확인한 소황이 조용히 덧붙였다.


“두 분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군요. 참,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매사에 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십시오. 최근 별창(別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주구(走狗)들을 태화 전역에 대거 풀었다고 합니다. 구주천에서도 막연하게나마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는 게지요. 특히, 양 당주.”

“네, 잠주.”

“소검이 옥야각에 오게 된 경위를 추적해 보세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지난 밤 소황과 함께 남정인의 방에 들었던 마음 여린 씨종, 소검.

갑자기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양대희가 눈을 빛냈다.


“그를 주구로 의심하십니까?”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허나,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대희가 미간을 좁혔다.


“서주 포청에 만야루(滿夜樓)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밀명이 떨어졌다 합니다. 헌데, 별창에서 주구들까지 내주었다는 설이 있지요, 혹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야루라면, 잠주께서 계셨던 그곳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것이구요. 허나, 조심하십시오. 만에 하나, 소검이 진정 주구라면, 양 당주가 위험할 수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양대희와 남정인이 소황에게 예를 표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적막한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소황. 허나, 온전히 혼자가 아님을 소황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황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둘러 돌려 보냈습니다. 이만 나오세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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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술사 +22 13.05.20 3,282 63 8쪽
21 내공의 위대함 +8 13.05.18 3,222 50 7쪽
20 전륜무사 +11 13.05.16 3,207 59 9쪽
19 격돌 +10 13.05.15 2,658 52 8쪽
18 밤의 시작 +7 13.05.14 4,044 57 9쪽
17 농락 +8 13.05.13 3,139 53 8쪽
16 모윤진 +11 13.05.11 3,324 58 10쪽
15 사람답게 사는 것 +12 13.05.09 2,791 59 11쪽
14 금지훈 +12 13.05.07 2,580 49 7쪽
» 혁천의 왕 +9 13.05.06 3,325 49 13쪽
12 환골탈태 +11 13.05.04 3,257 59 7쪽
11 거래 +13 13.05.02 3,433 56 10쪽
10 삼음절맥 +16 13.04.28 3,946 75 8쪽
9 뇌령신조 +21 13.04.26 3,645 55 7쪽
8 은자 +21 13.04.25 3,237 54 7쪽
7 남궁세가 +20 13.04.24 3,510 72 8쪽
6 남궁시연 +24 13.04.23 3,344 56 8쪽
5 준귀인 +20 13.04.22 3,347 55 9쪽
4 매화검수 +7 13.04.21 3,901 52 6쪽
3 옥야각 +3 13.04.20 4,773 51 7쪽
2 씨종 소황 +10 13.04.19 6,264 62 8쪽
1 서장 +10 13.04.18 8,728 84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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