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골탈태
12. 환골탈태
으드득, 으득.
다소 섬뜩한 기음과 함께 소황의 몸이 커지고 있었다. 아니, 자라고 있다는 게 더 옳을까?
팔다리가 쑤욱 늘어나고, 앙증맞은 손발이 커지더니, 여윈 몸뚱이에 우람한 근육까지 붙기 시작했다. 발등을 덮었던 바짓단은 종아리까지 껑충하니 올라왔고, 치렁치렁 늘어졌던 소맷자락은 손목에 와 제자리를 찾았다. 심하게 넉넉했던 품은 외려 몸에 착 달라붙어 좀 끼어 보일 정도.
촌음간에 진행된 변화 후, 소황은 더 이상 방금 전의 왜소한 소황이 아니었다.
비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인 무사들 중에도 드문 칠척 장신의 거구.
비단 몸집만 커진 것이 아니라, 얼굴 또한 변했다.
전체적인 인상은 그대로이되, 앳된 미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선이 가는 계란형 얼굴에 뚝심 있어 보이는 각이 졌고, 푸른 빛이 감도는 짙은 눈썹은 곧게 뻗은 검미가 되었으며, 오종종했던 콧날은 태산준령이 버티고 선 양 우뚝했다.
호남(好男).
지금의 소황을 한 마디로 표현함에 있어 가장 적합한 단어일 것이다. 비록, 이미 오래 전 태화에서 사라진 말이지만.
가히 환골탈태(換骨奪胎)라 할만한 변화를 겪은 소황이, 가볍게 손발을 털어 몸을 풀고 접어 올린 바짓단을 쓸어 내렸다.
“그닥 개운치도 않군. 이젠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도 모르겠어.”
자조하듯 뇌까린 소황이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우거진 수림을 헤치고 몸을 날려온 두 사람이 소황 앞에 표홀한 신법으로 내려섰다.
살집이 투실투실한 궁장 차림의 진인과 훤칠한 키의 젊은 무사.
어둠이 깊어 면면을 또렷히 식별하기는 어려웠지만, 체형만 봐도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기에.
“성은전(成銀殿) 옥야당주 양대희, 잠주(潛主)를 뵈옵니다.”
“귀영 29호 남정인, 잠주를 뵙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궁장 진인이 치맛자락을 떨치며 한쪽 무릎을 꿇은 반면, 젊은 무사는 대뜸 오체투지하며 벌을 청한다.
헌데, 양대희와 남정인?
그렇다. 궁장 진인은 소황이 일하는 옥야각의 주인 양대희였으며, 젊은 무사는 지난 밤 화전(花錢) 한 냥을 아끼다 사달을 일으켰던 복호관 이대관도 남정인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그것도 일개 씨종인 소황 앞에 극공(極恭)의 예를 갖추며!
정녕 모를 일이다.
“과례는 거둬요, 양 당주. 그리고, 남 무사도 일어나세요. 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님, 혹시 진심이었습니까?”
소황이 엷게 미소지으며 건네는 말에, 남정인이 더더욱 어쩔 줄을 몰라하며 고개를 조아린다.
꽤 오래도록 함께 지내 소황에 대해 잘 아는 양대희가 히쭉 웃었다.
“됐어요, 귀영. 잠주께선 겉치레를 싫어하십니다.”
“그런 게 아니오라...... 지, 진정 괜찮으십니까?”
소황이 직접 남정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보다시피 큰 탈은 없군요. 그저 피를 좀 많이 흘려, 덕분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는 것 정도? 흠, 남 무사가 내비친 살기에 살짝 내상을 입었을 지는 모르겠네요. 살기가 어찌나 진하던지, 왠지 연기가 아니다 싶습디다.”
여전히 장난끼 섞인 농에 남정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런 남정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리는 소황을 향해, 양대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궁시연과는 얘기가 잘 되셨는지요?”
소황이 양대희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확답은 미루더군요. 하긴, 그녀 입장에서는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겠지요. 나도 실수한 게 있었고...”
“실수라 하시면?”
“부지불식간에 무공을 드러냈어요. 은자라 의심을 받았지요. 그런대로 넘어가긴 했지만. 헌데.”
쓴 웃음을 지으며 대꾸한 소황이 거꾸로 양대희에게 물었다.
“비위(譬衛) 두 사람의 신상은 파악이 되었습니까?”
“말씀 올리지요. 일위는 분뢰검(分雷劍) 백세경. 올해 나이 서른여섯으로, 641대 매화검수이자 중경 백가장주(白家莊主)의 동생입니다. 남궁시연의 비위로 봉직한 지만 벌써 십년이 넘었습니다. 반면, 이위는 철벽나찰(鐵壁羅刹) 신수영이란 자로 공동관 복마검수(伏魔劍手) 출신입니다. 나이는 이제 서른이고, 남궁세가에 몸 담은 지는 채 일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위하고도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해서 대역을 투입한다면, 이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그 역시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왜지요?”
“분뢰검은 물론, 남궁시연마저 상대하지 못하는 대단한 실력자라 합니다. 수주(水州)에서 꽤 오래도록 용병 생활을 했는데, 당시 해적단과 결탁한 사화진(沙花鎭)의 동경 감승아를 일검에 벴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수주를 떠나 남궁세가에 몸을 의탁했다는군요.”
“호오, 내공을 쓰는 동경을 베었다? 흥미롭군요.”
“감승아는, 게다가 청성관에서 무공을 닦은 자였답니다.”
“보기보다 대단한 고수군요. 역시 금 형님께 부탁을 드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소황의 말에 양대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철벽나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만금전장(萬金錢莊)에 전서응을 띄웠는데...”
말꼬리를 끄는 양대희를 보며, 소황이 피식 웃었다.
“오지 못하겠다시던가요?”
“네에... 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왜 못오신답니까?”
“저, 그것이...”
“말씀해 보세요.”
“귀찮으시다고...”
“귀찮다? 하하하하!”
양대희의 말을 곱씹은 소황이 돌연 고개를 쳐들고 통쾌하게 웃어 제꼈다.. 마치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듯.
그런 소황의 시선이 옆에 높이 선 느릎나무 우듬지를 흘깃거리고 돌아왔음은 양대희가 미처 보지 못햇다.
“이 건은 잠시 보류합시다. 어차피 금 형님의 의중이 중요하니까. 그보다 마곡에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뻘쭘하게 서 있던 남정인이 급히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귀영 1호가 다녀갔습니다. 마곡에선 소곡주를 위시해 장로 세 분이 나올 예정이라 했답니다.”
“흠, 회인이 폐관을 마친 모양이군요. 잘 됐습니다. 이왕이면 흑림에서도 소림주가 회동에 참석하는 게 좋겠다고 전하세요. 생각이 열린 젊은 사람들끼리 뱃포를 맞춰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겁니다.”
“존명! 헌데, 마곡주가 잠주께 전하라는 언질이 따로 있었답니다.”
“…?”
눈으로 묻는 소황에게, 남정인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답을 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 했답니다. ‘설봉승위(雪鳳承位), 사도향남(司徒向南)’이라고...”
남정인의 말에 소황의 입가에 은은히 맺혀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굳은 낯빛으로 눈을 지그시 반개하며, 먼산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아련히 떠오르는 한 진인, 아니 한 여인의 영상.
잊을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그녀.
천산설봉(天山雪鳳) 사도은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양대희와 남정인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닫고 안절부절 못했다.
진인과 비인의 처지가 뒤집힌 모습. 태화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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