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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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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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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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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시궁창 왕자 9

DUMMY

백작가로 돌아가는 귀환 행렬은 초라했다.


귀족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낡은 의전용 마차가 하나. 그를 둘러싼 말을 탄 기사가 여덟. 새하얀 눈의 침묵에 둘러쌓인 행렬은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나온 길을 따라 바퀴의 궤적과 말발굽이 죽 늘어졌다.


리안은 마차의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쩐지 마차의 내부는 냉기가 감돌았다. 17가문의 마차는 장거리를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데, 아쉽게도 이 마차는 그러지 못했다.


리안은 괜시리 몸에 걸친 망토의 양옆을 깊게 여몄다. 마차 안에는 3명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엘도르 기사단의 단장이자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케이드 브레일. 그리고 기사단의 단원 중 한명과 리안이 바로 그들이었다.


웨일 준장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린힐을 나온지 벌써 세시간이 넘었는데 그들은 제대로 된 인사 한 번을 나누지 않았다. 정확히는 친근하게 말을 붙이려는 단원들을 리안이 밀어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마지막 인사라도 하지 그랬냐.”


보다못한 케이드가 리안을 쏘아붙였다.


“그쪽이 걱정하지 않아도 이미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종일 창밖만 바라봐?”


“그보다는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어떻습니까?”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


“당신이요.”


케이드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반대로 그의 옆에 앉아있던 단원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관람하는 관중처럼 연신 키득거렸다. 애써 입을 가린 게 의미없을 정도였다.


“단장님... 설마 벌써부터 먹힌 겁니까?”


“......”


“오랜만에 재능있는 신참을 주워서 기분이 좋아보이나 했더니... 뭐, 그래요. 백작 각하께 변명하려면 머리가 아플 만도 하지. 리안이라고 했던가? 반가워. 나는 엘도르 기사단 소속 정예 기사인 엘리엇이야. 보다시피 검은 안쓰는 소서러고....”


중성적인 외모의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잠시간 고민하던 리안이 마지못해 손을 잡았다. 창밖으로 말의 고삐를 움켜쥔 기사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미 한번 리안에게 대차게 까인 마부석의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드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변명은 안 한다. 내 잘못이 맞으니까.”


그는 리안의 비꼬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보이는 성격과 다르게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조금 더 신중했으면 피해도 최소화 할 수 있었겠지. 뭐라 해도 겨울사냥은 엘도르 기사단장의 의무니까. 희생자들에게 지급될 위로금도, 후폭풍에 대한 책임도 전부 내가 질 예정이다.”


“일의 처리는 다 끝낸 겁니까?”


“어느 정도는. 웨일 준장이 제 마차를 내어줘서 다행이군. 빚을 하나 지겠어.”


“정확히는 내 빚이군요. 마차를 빌린 건 온전히 나 때문이니까.”


리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케이드와 엘리엇이 의외라는 눈길을 보냈다.


17가문 소속 정예 기사단의 정원은 대개 삼십에서 오십 사이다. 개중에서도 엘도르 기사단은 특히 전력이 막강하고 규모가 큰 만큼 인원이 많았다. 지금 백작가로 귀환하는 11명의 기사가 전부가 아니란 얘기였다.


리안은 추측했다. 늑대는 케이드 브레일의 일격에 쓰러질 정도로 약해져 있었고, 필요한 건 막강한 전력이 아닌 속도다. 소수의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인 만큼 그들은 마차가 아닌 말로만 이동했다. 부상을 입어 정상적인 거동이 어려운 리안만 아니면 이런 마차를 빌릴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릎 위에 내려놓은 검을 매만지던 리안이 물었다.


“몰라.”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뭐라고요?”


“나도 모른다고. 널 데려가는 건 순전히 내 독단이니까.”


이번엔 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한방 먹였다는 듯 케이드가 고개를 돌려 작게 조소했다.


“다, 단장님... 너무 쪼잔한 거 아니에요? 애 상대로 무슨....”


말은 그렇게 해도 엘리엇은 아까부터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다. 리안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케이드가 긴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엘도르의 정예 기사들은 자신의 종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 종자를 들인 적이 없어.”


뭣하면 내 스콰이어로 들이면 된다. 물론 개처럼 구를 건 각오해야겠지만. 부연한 케이드가 한결 후련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리안은 못마땅하다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


“오히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청탁하는 연방군의 장성이 한 둘이 아니니까. 자신의 경지를 위해서든, 자식의 성취를 위해서든. 17가문의 기사단장 중 누구도 날 이길 수 없어. 소드마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브레일 백작가도 브라알라스에서 항상 맨 앞줄에 꼽히는 명문가니까요. 마님의 친정이 그 유명한 시니스터 가문 출신이니.”


어떤 말을 해도 퉁명스럽던 리안이 그제서야 노골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니스터? 소드마스터 라이넬 시니스터?”


“몰랐냐? 형수님... 그러니까 내 형님의 부인이 소드마스터의 하나뿐인 고명딸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인데... 아, 그런가.”


의아해하던 케이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눈에 비치는 소년은 출신 불명의 이방인.


브레일 백작부인은 브라알라스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의 고명딸이자 막내딸이었다. 하나뿐인 막내딸을 라이넬 시니스터가 유달리 총애한다는 사실은 사교계에 발 걸친 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으나, 용병 생활을 오래한 리안이라면 모를 만도 했다. 귀동냥으로 정세를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아무튼, 네가 생각한 것보다 우리 가문이 대단하다는 이야기야. 적어도 손해볼 건 없으니까 그렇게 날 세우지 마라.”


검을 내려다보던 리안이 묵묵부답으로 수긍했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둘의 사이에 엘리엇이 쓰게 웃었다. 어느새 하늘 꼭대기에 해가 걸려 있었다.


남자는 리안에게 선택지를 주었고, 리안은 제 손으로 브레일 가문에 들어가길 희망했다.


그걸로 족할 일이다. 리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 소년의 다친 몸은 금새 수마에 빠져들었다.


***


“거의 다 왔다.”


케이드 브레일이 불쑥 그런 말을 꺼낸 건 그린힐을 떠나고 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보이냐?”


리안은 마차 옆에 난 작은 창을 열었다. 삼일간 마차로 이동한 덕분에 꽤나 몸이 회복되어 있었다.


“저건....”


“그래. 저게 백작령의 수도인 페리아의 중심이자, 우리 가문의 본성인 블러드스톤이다. 외적의 피로 쌓은 성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지.”


“블러드, 스톤....”


스치는 바람에 새까만 앞머리가 흩날렸다. 리안의 입술 새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한순간 리안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념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입으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며칠간 산맥을 넘고, 높은 언덕을 내려오자 거친 산등성이를 등진 커다란 도시가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도시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위용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눈앞의 펼쳐진 성벽이 찌를 듯이 높았다. 보증할만한 신분이 없어 대도시를 들어갈 수 없었던 리안에게 블러드스톤은 7년만에 다시 보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무역로였다.


“엘도르 기사단이다!”


“길을 열어라!”


검문을 기다리던 줄이 좌우로 벌어졌다. 엘도르 기사단을 알아본 이들이 여기저기서 수근거렸다. 채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봤냐?”


케이드가 어쩐지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


“그간 내 인생 경험으로 조언하건대, 줄을 잘 타는 것도 능력이다. 적어도 네가 잡은 줄은 반평생은 끊어지지 않을 줄이니 제발 날 세우지 말고 말 좀 들어라. 허식이라도 좋으니 가문 사람들에게 예의도 좀 차리고. 알아들었냐?”


“누가 보면 내가 못 배워먹은 무뢰한인 줄 알겠습니다.”


“그럼, 아니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습니다.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해요.”


“네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케이드를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년의 깊은 눈동자에 케이드가 짧게 혀를 찼다.


“잘도 믿겠군....”


“하하....”


쓴 웃음을 머금은 엘리엇의 시선이 둘 사이를 헤맸다.


도시의 내부는 리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소탈했다. 화려하고 장엄한, 겉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철저한 실용성 위주였다. 그러면서도 있을 건 다 있었는데, 군데군데 세워진 높은 건물들을 볼 때마다 이곳이 17가문의 중심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칼로스 왕국의 수도인 엘리시온보다는 당연히 작겠지만 그럼에도 크다. 리안이 느낀 이 도시에 대한 감상은 그랬다. 유리창 너머 흘러가는 풍경들을 고요히 응시하던 리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정 중앙에 위치한 백작가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양 옆으로 늘어진 수목들을 지나기를 잠시, 마차가 천천히 멈춰섰다. 케이드의 눈짓에 리안은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오십시오,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택의 현관에서 마중나온 한 노인이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듯 서던 기사들은 이미 제각기 흩어진 뒤였다.


리안은 그 모든 것을 막 상경한 시골 사람처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어깨를 두드리는 감촉에 고개만 슬쩍 돌리니 엘리엇이 눈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정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 도보로 5분이 넘을 정도로 부지가 넓으니 아마도 가문의 사병들을 위한 병영이 따로 있는 듯했다.


노인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케이드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걱정이 아니라 어떻게 구워삶을까 안달이 난 거겠지.”


“마님도 그러셨습니다. 다치지만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형수님께선 여전히 근심이 많으시군. 내 나이가 몇인데.”


“이쪽의 어린 신사분은 손님입니까?”


노인의 흥미 어린 눈길이 리안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처음부터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꼈기에 리안은 담담하게 그 호기심을 받아들였다.


“아, 이놈?”


케이드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오다가 주웠어.”


“예?”


“종자... 는 아직 아니고. 일단은 손님인가. 한스, 지금 저택에 남는 방이 있나?”


“여분의 방이야 항상 있지요.”


“그럼 아무 방 하나 골라서 이 꼬맹이한테 내줘. 이왕이면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을텐데, 괜찮으십니까?”


“뭘 하든 변방의 싸구려 여관보다는 낫겠지. 안 그러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였기에 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난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나머지 안내는 한스한테 마저 들어라. 약속했던 대로 사고는 치지 말고.”


케이드가 엘리엇이 사라진 방향으로 떠나갔다. 서로 눈이 맞은것도 잠시, 그가 현관의 커다란 문을 밀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리안은 순순히 노인의 뒤를 따랐다.


1층의 너른 홀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복도를 오가는 사용인들의 눈빛에서 노인과 같은 흥미가 엿보였으나 아주 찰나였을 뿐, 그들은 주어진 할일에 열중했다. 과연 대가문의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 즈음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 저택의 집사장을 맡고 있는 한스라고 합니다.”


그는 리안을 돌아보지 않고 걷는 그대로 말을 건넸다.


“한스? 성은 없으십니까?”


“예. 제가 평민 출신이라서요. 이런 저를 집사장이라는 중책에 앉힌 주인님의 은혜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


“도련님과는 올해로 30년이 넘은 인연인데, 저래 보여도 할때는 확실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너무 미워하지 마시길.”


리안은 노인의 귀를 대충 흘려들었다. 할때는 확실하게 하는 분. 리안이 가지고 있는 케이드의 인상과 어느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리안입니다.”


“성은... 아니,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군요.”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도련님께서 워낙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종자를 데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삼십이 넘은 나이에도 결혼할 생각이 없으신 분이라.”


은근히 나무라는 말투인데 그 안에서 숨길 수 없는 경애가 묻어나왔다. 리안이 진지하게 케이드 브레일이란 인물에 고민하고 있을 즈음 노인이 발을 멈췄다.


“이곳입니다.”


“......”


“청소는 되어있지 않지만 기본적인 정리는 해놓았으니 하룻밤 묵는 데는 문제없을 겁니다. 내일 따로 하녀를 시켜 청소를....?”


문고리를 돌리던 노인의 손이 굳었다. 불현듯 노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마님? 여기는 어쩐 일로....”


노인을 따라 옆을 돌아본 리안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기억 속 어머니를 빼닮은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


여인의 손에 홀리듯 이끌린 리안이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다름아닌 넓은 욕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안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누군가를 닮은 음색이 혼란스러웠다. 리안은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채, 다만 여인의 손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밝은 백금발을 가진 여인 위로 어머니의 환영이 겹쳤다. 씻기를 마치고 안방으로 나올 때까지 리안은 줄곧 입을 다물었다. 형언할 수 없는 격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휘몰아쳤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도 그랬다.


“미안하구나.”


“......”


“우리 집에는 여자아이 하나밖에 없어서, 남자아이 옷은 시종 아이들 것밖에 없단다. 조만간 근사한 옷을 구해 줄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리안의 옷을 손수 갈아입힌 그녀가 말했다. 소년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보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여인의 눈동자는 호수를 닮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어머니와 같았다. 단 한 가지, 티 한점 없이 맑은 눈빛만이 달랐다. 자수정을 닮은 어머니의 눈동자는 이보다 더 따듯했고, 간지러웠고, 친숙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질서했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아 침잠했다. 떨리는 심장도 차분한 본래의 박동을 되찾았다.


급격하게 변한 환경에 잠시 착각을 했다.


이 여자는 내 어머니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본 노인은 분명 마님이라고 했었다. 이 브레일가의 저택에서 그러한 경칭을 들을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집안의 안주인이자 브레일 백작 부인이며, 소드마스터 라이넬 시니스터의 하나뿐인 고명딸인 카를린 브레일.


“머리를 빗어줄 테니, 이리와 앉아 보겠니?”


어떤 호기심의 발로일지는 모르나 리안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이 감정이 착각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리안은 이 거짓된 온기에 조금이라도 좋으니 몸을 맡기고 싶었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단다.”


“......”


“그 애는 겉으로는 방만해 보여도, 책임감이 강한 아이니까. 겨울사냥의 실패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거든.”


“케이드 브레일... 그 사람이 말입니까?”


“응. 그래서 더 놀랐단다. 짝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고, 진지하게 종지를 키우지도 않았던 녀석이 처음 보는 남자 아이를 데려왔으니까. 멀리서 볼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예쁘게 생겼구나. 꼭 여자아이 같아.”


머리빗의 가는 살이 새까만 머리카락 틈으로 흘러내렸다.


“특히 그 눈이.”


리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부드러운 적막 속에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여인이 다시 말을 이어나간 건 당황했던 리안이 평온을 되찾고 나서였다.


“케이드와는 그린힐에서 만난 거니?”


리안이 작게 대답했다.


“...네.”


“평범한 아이를 데려왔을리는 없으니, 필시 네가 고생을 했겠구나.”


“아니요, 딱히....”


“중부 지역에서 브라알라스까지는 혼자 온 거니?”


진정됐던 리안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검을 쥔 건... 살기 위해서 그런 거고.”


손등을 스치는 감촉에 리안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뜬 눈으로 돌아보았으나 여인은 태연한 얼굴 그대로였다. 오히려 리안의 손을 꼭 쥐는데, 반쯤 잊어버린 누군가의 온기가 이질적이었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의 온기.


그리고 굳은살이 박히고 심하게 휘어진 자신의 손.


왠지 모를 수치심에 리안은 발버둥쳤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었다. 짓누르는 여인의 힘은 리안의 상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2위계 마법사인 자신을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귀부인이 힘으로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체가 뭐지?


그보다 내가 중부 지역 출신인 걸 어떻게 안 거지?


나름 현지인 수준으로 브라알라스어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억양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웠나?


대체 뭘 하려고.


“괜찮아.”


놀란 리안과 반대로 여인은 미소는 자상했다.


“봐. 나도 너와 같단다.”


내보인 그녀의 손은, 리안과 같이 흉측했다.


“아....”


오히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17가문의 안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침음한 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여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반응에도 여인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네가 필사적으로 살아온 증표니까. 그건 자랑스러워 했으면 했지, 절대 숨길 일이 아니란다.”


리안은 입술을 뗐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여인의 손바닥은 리안과 같이 몇번이고 사선을 넘어온 검사의 손이었다. 귀족가문의 귀부인이 가질 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목욕을 끝마치고 환복에 머리를 빗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뭘 기대한 걸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살기를 바랐으니까.


—그때 네가 살아갈 이유를 갈망했으니까.


스스로 자문한 순간 케이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살기를 바랐다. 살아갈 이유를 갈망했다. 복수라는 족쇄에 얽매여 살아가던 아이에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욕망이었다.


죽고 싶다던가, 편해지고 싶다던가. 실은 스스로 그렇게 최면을 걸었을 뿐인 거짓에 불과했고 본심은 누구보다 살기를 갈망했다고.


결국에는 죽지 않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제대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전투의 피로와 죽음이라는 원초적 공포에서 풀려나자 긴장이 풀린 몸이 축 늘어졌다. 그건 마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무형의 껍질이 한꺼풀 벗겨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아이의 작은 입술 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열심히 했구나.”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마디.


여인은 혼란스러워하는 리안을 자상한 미소로 꼭 안아주었다. 가슴 속 깊은 둑이 무너졌다. 리안은 참아온 눈물을 남김없이 쏟아냈다. 방 안이 울음 소리로 가득 찼다.


창가를 넘어온 노을이 저물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여인은 하염없이 리안의 등을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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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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