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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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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418,801
추천수 :
8,095
글자수 :
357,504

작성
24.08.16 21:20
조회
8,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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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글자
21쪽

두 번째 보금자리 7

DUMMY

리안이 정식으로 케이드의 종자가 된지 며칠이 흘렀다.


처음엔 낯설던 새 일상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익숙해졌다.


아침이 되면 시종이 찾아와 식사 여부를 묻는다. 제공되는 음식은 푸짐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용병들은 입에 대기도 힘들 정도로 영양이 높고 값비쌌다. 무엇보다 리안은 더 이상 휑한 여관방에서 하루를 시작하지 않아도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의뢰를 수주하지도, 살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새로운 인연도 많았다. 환경이 바뀐 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이 크게 변했다.


처음에는 악연이었지만 점차 마음을 열게 된 또래의 세 견습 기사, 그들이 모시는 명망 높은 기사들.


가문의 실세인 말괄량이 아가씨, 이상하게 대하기가 힘든 어머니를 닮은 백작가의 안주인.


하지만 개중에서도 제일 곤란한 게 있었으니.


—하... 검을 알려 달라고?


바로 케이드였다.


—나 바쁜 거 안 보이냐? 너 어차피 2위계잖아.


—기본기? 기본기라면 가르쳐 줄 기사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왜 여기까지 쳐들어와서 난리야.


—뭐? 어차피 술 마시러 갈 거 안다고? 양 옆에 여자를 끼고 놀아?


심지어 나태한 태도를 지적하니 역으로 화를 냈다.


—꼬맹아, 너 같은 어린 놈이 뭘 알겠냐. 노는 것 같아 보여도 엄연히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거다. 정신이 깨끗해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어?


—내가 언제 일 빼먹고 놀러간 적 있냐고. 어? 대답해봐. 내가 언제 그랬는데?


그쯤되니 리안도 할 말이 없었다.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연무장에 가서 검이나 한번 더 휘둘러라.


—그래도 내 검을 보고 싶다고? 하아... 나 다음가는 실력자를 소개해줄 테니까, 가서 검술 한 자락이라도 알려달라고 부탁해 보던가.


그리고 지금.


“네가 고생이 많구나.”


리안은 케이드 대신 다른 두 기사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한명은 이미 일면식이 있는 엘도르 기사단 소속 소서러인 엘리엇이었고, 다른 한명은 브레일 기사단장이자 에반의 아버지인 카일 로렌스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그 녀석이 정말 너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카일은 케이드와는 다르게 선한 인상의 기사였다. 나이는 서른 중반으로 케이드보다 조금 연상이었다.


그럼에도 두 기사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가문 내에서 인망도 높았고, 매사에 성실한 데다가 10년도 전에 가정을 꾸려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들까지 한 명 있었다. 지금쯤 술을 한바가지 퍼마시고 침대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 붉은 머리의 망나니와는 가히 차원이 다르다고 할만했다.


“아닙니다. 사실 기대도 안 했어요.”


“이해해라. 그놈이 할때는 하는 놈인데, 천성이 워낙 게으르고 방탕해서 참....”


리안을 처음 보자마자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반갑게 맞아주던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그러지는 마, 리안. 단장님이 이번 겨울 사냥에 실패하고 나서 한동안 격무에 시달렸었거든. 그 좋아하던 술도 한모금도 입에 안 댔었고.”


옆에 있던 엘리엇이 케이드를 두둔했다.


“백작님이랑 카를린님이 놔 두는 건 이유가 있는 셈이지. 그간 못했던 유희를 몰아서 한다고 할까... 저래 보여도 전시에는 엘도르 기사단장 뿐만 아니라 서문 방위군 총사령관직도 겸하니까. 아주 약간만 더 성실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중성적인 외모의 기사를 흘깃한 리안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딱히 밉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한 게 아니에요. 그냥 조금 아쉬워서....”


“뭐, 조만간 노는게 질릴 때쯤 검을 알려줄 거다. 정 뭐하면 내가 직접 끌고올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자, 자. 그러지 말고 얼굴 좀 펴봐. 내가 아주 좋은 놈으로 골라줄 테니까.”


리안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세 사람은 백작가의 마구간에 도착해 있었다.


거대한 마구간 내부에는 여러명의 마구간지기들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빗질을 하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히힝거리는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아, 카일 님!”


“휴고. 잘 지냈나?”


“물론이지요. 그보다 이른 시간부터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근처에서 책임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카일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혹시 남는 말 있어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인데....”


뒤따라 들어온 엘리엇이 리안을 쑥 앞으로 내밀었다.


“신입? 아, 이분이 그 새로 들어오셨다는 케이드 님의 종자이십니까? 분명 이름이....”


“리안입니다. 잘 아시네요. 그리고 그냥 종자가 아니라 떠오르는 초신성이에요. 벌써부터 2위계 마법사니, 미리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놓으면 나중에 좋을 겁니다.”


“.......”


엘리엇이 호들갑을 떨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리안은 경망스럽기까지한 그의 언동에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하하, 마법사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얼굴도 아주 잘생기신 게, 몇년 뒤에는 여자 여럿 울리시겠군요.”


“아니, 아닙니다. 그 정도는....”


리안이 마구간지기의 악수를 받으며 말끝을 흐렸다. 분명 말을 내어준다길래 쫄래쫄래 따라왔건만, 이 수치심은 왜 자신의 몫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개인용 말은 서임 직후에 하사받는 거 아니었습니까? 검이랑 같이.”


리안과 가볍게 통성명을 한 마구간지기가 물었다. 카일이 대신 대답했다.


“원래는 규율상 그게 맞는데, 이 친구가 워낙 예외적이라 말일세. 일단은 명목상 종자지만 기사 신분이라 생각하면 편할 거야.”


“아, 확실히. 2위계 마법사를 종자 취급하기는 좀 그렇겠군요.”


“검은 임시긴 하지만 이미 구했다고 들었고, 나머지는 타고다닐 말인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저번에 괜찮은 녀석이 들어왔거든요.”


“남은 말이 있나?”


“예, 세 마리 있습니다. 마지막 녀석은 성격도 순하니, 리안 님에게 잘 맞으실 겁니다.”


그 말대로였다. 책임자인 마구간지기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새하얀 백마 한 마리가 있었다.


“이 녀석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아주 순해요.”


마구간지기가 백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기분이 좋은지 말이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태생부터 털이 흰 놈이라 늙어서 백마가 된 녀석들과는 힘이 차원이 다릅니다. 내년이면 딱 세살이 되죠. 다른 기사의 손을 탄 적이 없어서 군마로 쓰려면 제대로 훈련을 시켜야겠지만, 첫 서임을 받은 기사가 평생을 같이하기엔 이만한 놈이 없을 겁니다.”


“라는데, 한번 타 보는 건 어떠냐?”


“원하신다면 안장을 올려드리겠습니다. 말을 타보신 적 있으십니까?”


카일이 제안했다. 마구간지기가 근처 사람을 불러 안장을 가져오게 시켰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밖에 방목장이 있습니다. 제법 크니 말을 타고 달리기에는....”


그러나 마구간지기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보랏빛 눈의 어린 소년은 눈앞의 하얀 백마가 아니라 구석의 검은 흑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응?”


“저 녀석은 주인이 있습니까?”


“아, 저 놈이요....”


마구간지기가 눈을 찌푸렸다. 카일과 엘리엇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놈 저거 단장님이 저번 전쟁때 주워온 놈 아니에요?”


“...맞아. 케이드가 괜찮은 녀석을 주워왔다며 자랑했던 놈이다. 성격이 워낙 지랄맞아서 결국 한달을 못가고 타길 포기했는데.”


들리는 얘기를 종합해보니 딱히 주인은 없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이 절로 움직였다.


“어, 어. 리안!”


리안은 자신을 부르는 엘리엇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구석의 흑마에게 다가갔다. 지척에 서서 빤히 바라보니 아까의 순한 백마와 다르게 눈동자가 반항적이기 짝이 없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몸과 일반 말보다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큰 덩치.


살며시 손을 가져가자 녀석이 기겁을 하며 몸서리쳤다. 아니, 거칠어진 숨소리와 가늘어진 눈초리를 보니 오히려 화가 난 것 같았다.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반응에 리안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왠지 모르게 오기가 솟아올랐다.


“리안 님! 멋대로 만지시면...!”


“안장.”


“네, 네?”


“줘요. 고삐랑 같이. 빨리요.”


깜짝 놀라며 다가온 휴고와 다른 마구간지기들에게 리안이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한 마구간지기가 엉거주춤하며 고삐를 먼저 건네자 리안이 울타리를 휙 젖히고는 순식간에 녀석의 입가에 고삐를 걸어버렸다.


그 동작은 일반적인 사람의 눈으로는 한순간 놓쳐버릴 정도로 빨랐다. 자신을 가둔 울타리가 열려 좋아하던 놈이 제 입에 매인 고삐에 어리둥절했다. 그동안 리안은 재빠르게 남은 안장을 등 위에 얹고선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히히히힝!


놈이 발작하듯 앞발을 들어올렸다. 주위의 마구간지기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고삐를 잡아당긴 리안이 자연스럽게 놈을 마구간 밖으로 이끌었다. 느닷없이 등에 올라탄 불청객을 쫓기 위해 검은 흑마는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저, 저...! 리안 님! 안됩니다, 다쳐요! 내려오십시오!”


이쯤 되니 마구간의 책임자인 휴고는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저, 저...!”


“세상에, 이 뭔....”


“...화끈하군. 마음에 들어. 자고로 저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뒤늦게 리안을 따라나온 이들이 저마다 경탄을 토했다. 성격이 지랄맞다던 검은 말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방목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반쯤 안장 위에 서 있던 리안이 소리쳤다.


“정했습니다!”


아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놈으로 할게요! 제 말이요!”


***


“얼굴빛이 훤한게 아주 살맛 나지, 엉? 삼시세끼 재깍재깍 밥 나와, 매일 밤마다 따듯한 침대에서 잘 수 있어. 자잘한 일들은 시종이 대신 해주고, 근처에 널린게 17가문의 기사라 남들은 돈주고도 못배운다는 검술도 마음껏 배울 수 있고.”


“.......”


브레일 백작가의 뒤뜰.


남의 시선 하나 없는 조용한 곳에서 케이드와 리안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케이드가 검을 알려주기 시작한 건 리안이 정식으로 종자가 된 후 일주일이 훌쩍 넘어서였다.


데릭의 실종 이후 리안은 제대로 된 가르침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지만 이제라도 3위계 워커의 검을 배울 수 있으니 겉으로 자신의 아쉬움을 드러내진 않았다.


문제는.


“누군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 집중 똑바로 안 해?”


케이드는 끔찍하게 재능이 없었다.


정확히는 가르치는 재능이.


“천금같이 귀한 술 마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네요, 케이드.”


“너...!”


“알았어요, 케이드. 귀 아프니까 그만 좀 해요.”


“하....”


케이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른손에 들린 훈련용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걸 왜 모르냐고. 슈웅, 팍! 파팍! 휘잉 휘잉 툭!”


“.......”


“어렵냐, 이게?”


“하아....”


이번엔 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좋게 좋게 가보려 해도 자꾸만 뾰족한 말이 튀어나왔다.


“하아? 너 지금 한숨 쉬었냐? 답답해 죽는건 나인데, 왜 니가 한숨을 쉬어 이 망할 꼬맹아. 내가 대체 몇 번을 보여줘야 돼. 어? 척 보면 척. 한번에 따라하란 말이야.”


케이드가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갑갑해 미치겠다는 듯이.


“됐어요, 부탁한 내가 바보지. 그냥 카일 단장님한테 부탁할게요. 바쁘시겠지만 잠깐만 시간을 내 달라고 해야지.”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게 된 날, 리안이 케이드에게 부탁한 것은 세 가지였다. 어떻게 자신의 검을 그리 쉽게 받아칠 수 있는지. 어떻게 마나를 쓰지도 않고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 기본기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케이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설렁설렁 휘두르는 검격에 모든 해답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리안의 수준으로는 그런 움직임을 몇번 본 걸로 체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리안이 아니더라도 대륙에 내로라하는 2위계 워커들도 전부 똑같을 게 분명했다. 같은 3위계 워커가 아닌 이상.


케이드의 잔소리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던 리안은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저택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이 쌓인 백작가의 풍경은 온통 새하얀 흰색을 띠었다.


며칠이 더 지나면 해가 바뀐다. 거친 땅바닥과 외로운 여관방이 아닌, 따듯한 보금자리에서 맞이하는 새해였다.


상념이 길게 이어지는 사이 불현듯 한 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안이 첫번째 스승이자, 한낱 고아에게 자신의 밑천을 전부 보여줄 정도로 상냥한 사람.


데릭이라면 조금 더 잘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데릭은 이렇지 않았는데. 데릭은 더 친절했는데. 데릭은 훨씬 잘 가르쳤는데.


데릭은, 데릭은, 데릭은....


“됐다, 때려 치워.”


케이드가 훈련용 검을 내팽개쳤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한 표정이었다.


“시내로 내려가서 또 술이나 마시게요?”


“너는 내가 술에 미친놈으로 보이냐? 나도 할 일이라는 게 있다. 당장 쌓인 업무 미루고 네 검을 봐주고 있는건데....”


“어차피 일 다 끝내고 마실 거잖아요. 그냥 지금 가시죠. 무려 엘도르 기사단의 단장이신데, 누가 말린다고.”


리안이 비아냥거렸다. 케이드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케이드라는 인간에 대해 대강 파악이 끝난 리안은, 저 붉은 머리의 기사가 지금 화를 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면 그거라도 보여주던가.”


리안이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뭘?”


“심계인가 뭔가....”


세상 따분해하던 케이드가 난데없이 크게 웃어젖힌 것도 그때였다.


“하, 하하. 하하하하! 심계를 보여 달라고? 너한테?”


케이드는 한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꼬맹아... 너 방금 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는 거냐?”


심계표상.


2위계 마법사와 3위계 마법사를 나누는 가장 명확한 기준선이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현재의 리안으로서는 그 편린조차 잡을 수 없는 높은 산이었다. 리안도 한명의 마법사이자 워커로서 심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번이고 3위계의 경지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으니까.


그렇기에 리안은 케이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이려고 했다. 반사적으로 맞받아치려던 리안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그의 분위기에 절로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무의식의 의식화. 마음의 세계. 2위계와 3위계의 벽. 소드마스터와 소서러 슈프림으로 향하는 첫번째이자 마지막 열쇠.”


“.......”


“심계를 부르는 말들은 많지. 실제로 전부 사실이기도 하고.”


리안의 눈을 내리깔았다. 발밑에 깔린 눈이 이상하리만큼 하얬다.


“3위계 마법사의 심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딱 두가지다.”


어쩐지 조금 춥다는 생각이 들 즈음, 케이드가 말을 이어나갔다.


“죽거나, 죽이거나.”


“.......”


“마법사들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심계는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든 무의식을 표면세계로 끄집어내는 거다. 사람마다 형태가 다 다른 것도 그 때문이지. 단순히 사용자의 내면을 현실에 표출하는 게 아니야. 열등감, 자격지심,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리안은 말없이 케이드의 설명을 경청했다. 처음으로 아주 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 보고싶다면 여기서 나랑 목숨 걸고 결투라도 해볼 테냐? 그럼 죽기 전에 한번쯤은 볼 수 있을 텐데.”


고개를 저은 리안이 순순히 사과했다.


“아니요. 미안해요, 케이드.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알면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니까, 가서 네 할일이나 마저 해. 나도 내 일을 할 테니까.”


땅에 떨어진 훈련용 검을 집어든 케이드 묻어있는 눈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손을 휘적거리며 몸을 돌렸다. 집무실에 쌓인 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케이드의 방종은 제 할 일을 전부 끝냈다는 전제 하에 묵인되었으니까.


워낙 영특하고 눈치가 빠른 놈이니 대충 알아들었겠지.


그렇게 병영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그러니까 나랑 거래해요.”


케이드의 발이 우뚝 멈춰섰다.


“일방적인 호의가 아니라, 정당한 거래.”


케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아이의 태를 벗지 못한 어린 소년은 한결같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놈.”


입술 새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내 심계를 보여주면... 네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돈? 명예? 권력?”


돈은 대륙에서 이름난 대부호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사치를 부릴 만큼은 된다. 명예도 17가문의 정예 기사단장으로서 차고 넘치게 누리고 있다.


권력 따위 친형에게 백작위를 양보한 시점에서 포기했다. 애당초 서른이 넘은 케이드는 가끔 술이나 퍼마시고 바람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이나 자면 행복한, 커다란 야망보다는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인간이었다.


“미래.”


리안이 즉답했다.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있었다.


“내 미래를 줄게요. 약속해요. 내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딱 한 번. 당신의 부탁을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네 목숨을 버릴지라도?”


“내 목숨을 버려서라도.”


“내가 너의 뭘 믿고서?”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안은 가만히 침묵한 채 케이드의 얼굴을 직시했다. 케이드의 붉은 눈동자에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비치고 있었다. 한번의 일렁임에 수많은 감정이 담긴,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없이 맑은 빛이 감도는 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그랬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누구보다 죽음을 바랐으면서 누구보다도 살기를 바랐다. 평소의 자신과 어울리지 않게 독단으로 아이를 데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사의 맹세는 무겁지.”


케이드가 말했다. 막 집무실로 돌아가려던 그는 다시 리안을 보고 마주섰다.


“지금까지 내 심계를 본 놈들은 딱 세명이었다.”


“어떻게 됐죠?”


“전부 죽었다.”


케이드의 손에 들린 훈련용 검이 떨어졌다. 떨어진 검이 눈 밑으로 얕게 박혀들었다.


“마법사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심계를 일으킬 때는 공통적으로 트리거를 사용한다.”


내뱉는 목소리가 전과 달리 진지했다.


“일종의 의식이지.”


눈을 감거나, 검례를 취하거나, 특정 행동이나 단어를 중얼거리거나.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내면의 무의식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트리거라 불리는 의식이 필요했다. 본래라면 불가능할 이적을 일으키는 건 그만한 시간과 대가가 필요한 법이었으므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륙 최고의 워커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


케이드가 느릿하게 칼자루를 쥐었다. 리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이야 이모양 이꼴이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가로막는 걸 전부 불살라버릴 그런 힘을 원했거든.”


천천히 잡아당기자 별철제 검인 붉은 해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리안은 숨죽여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채애앵!


케이드의 오른손에서 검이 완전히 뽑혀나왔다. 핏빛을 닮은 새빨간 칼날이 환한 햇빛에 아롱졌다.


“두번은 없으니까 잘 봐라.”


발검과 동시에 이어지는 것은 하나의 검례였다. 그건 수백번이고 연습한 것처럼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리안은 그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숨소리마저 요란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케이드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오른손으로 검을 세우고, 왼손을 등 뒤로.


“타올라라.”


올라가는 눈꺼풀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화아아악!


발끝에서부터 불길이 일었다.


타오른 불꽃이 전신을 삼켰다. 얼굴마저 뒤덮은 검붉은 불길이 휘날리는 깃발처럼 일렁였다. 그건 단순한 불꽃이라기 보다 지옥에서 올라온 겁화에 가까웠다. 살갗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내뱉는 숨이 데일 듯 달아올랐다.


리안은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겨울이 밀려나고 있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온통 새하얗던 겨울의 세상이 붉게 칠해졌다.


발밑을 간질이는 불의 잔디, 눈이 부셔 제대로 올려다보기 힘든 하늘.


그 한복판에 살아있는 불꽃이 있었다.


온통 불길로 뒤덮여버린 세계 속, 홀로 빛나는 고고한 태양처럼.


“봤냐?”


후욱—


불이 꺼졌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선을 내리자 아까와 같은 하얀 눈이 지르밟히고 있었다. 한동안 자신이 호흡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던 리안은, 그제서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계는 보통 이런 식이다.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내보이는 비장의 한 수.”


케이드가 발검할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검을 집어넣었다. 칼날을 휘감은 검붉은 불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할 수 있겠냐?”


케이드의 물음에 리안은 주저없이 답했다.


“스무 살.”


어린 소년의 두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스무 살이 넘기 전까지 심계를 완성시킬게요. 오래걸리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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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1 +7 24.09.04 3,758 98 15쪽
42 가을날의 축제 3 +12 24.09.03 4,157 89 22쪽
41 가을날의 축제 2 +15 24.09.02 4,640 113 21쪽
40 가을날의 축제 1 +11 24.09.01 5,652 124 19쪽
39 엘리시온 9 +14 24.08.31 5,918 142 16쪽
38 엘리시온 8 +10 24.08.30 6,023 155 17쪽
37 엘리시온 7 +17 24.08.29 6,408 157 15쪽
36 엘리시온 6 +16 24.08.28 6,956 148 15쪽
35 엘리시온 5 +14 24.08.27 7,254 213 15쪽
34 엘리시온 4 +23 24.08.26 7,377 227 19쪽
33 엘리시온 3 +11 24.08.25 7,450 197 16쪽
32 엘리시온 2 +12 24.08.24 7,608 169 14쪽
31 엘리시온 1 +13 24.08.23 7,988 155 14쪽
30 두 번째 보금자리 10 +10 24.08.22 8,053 169 16쪽
29 두 번째 보금자리 9 +12 24.08.19 8,048 168 16쪽
28 두 번째 보금자리 8 +13 24.08.17 8,243 167 17쪽
» 두 번째 보금자리 7 +8 24.08.16 8,374 181 21쪽
26 두 번째 보금자리 6 +9 24.08.15 8,611 162 21쪽
25 두 번째 보금자리 5 +12 24.08.12 8,858 179 21쪽
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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