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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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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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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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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엘리시온 4

DUMMY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을 알린 건 펠브릭 칼로스 의장의 축사가 끝에 달했을 즈음이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스러진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


“우리는 선언합니다. 다시는 제국에 굴하지 않겠다고. 그것만이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 당당히 기억 속에 남을 길이기 때문입니다.”


연회장 맨 끝, 단상 위에 선 펠브릭 의장이 잔을 들어올렸다.


“브라알라스 연방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찰랑거리는 붉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킨 펠브릭 의장이 자리에서 내려왔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어느새 창밖의 노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짙푸른 밤하늘과 대비되는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연회장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부드러운 바이올린의 선율을 따라 감미로운 관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웃는 소리, 즐겁게 떠드는 소리. 저마다 준비된 음식을 즐기며, 때때로 은밀한 밀회를 즐기기 위해 연인들이 연회장 바깥 정원을 오갔다.


“시니스터 공작.”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펠브릭 의장이 라이넬 시니스터에게 다가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폐하, 오늘도 훌륭한 축사였습니다.”


군 장성들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라이넬 시니스터가 작게 눈짓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한 장성들이 물러가는 사이 펠브릭 의장을 선두로 한 평의회 의원들이 라이넬 시니스터를 둘러쌌다.


“아첨은 그쯤 해두게. 그리고 폐하가 아니라 펠브릭 의장일세. 이제 브라알라스는 연합이 아니라 어엿한 연방이 아닌가.”


“그럼에도 제겐 여전히 칼로스 왕국의 폐하이십니다. 이 늙은이의 충심을 거부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미어지는군요.”


“하하, 자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사악한 글라우카 장군에 맞서 이 브라알라스를 지킬 수 있겠는가?”


몇마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라이넬 시니스터는 뒤따라 온 의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오, 시니스터 공작. 2년 전에 만나고 처음이군.”


“여전히 정정하시구려. 적어도 향후 100년은 브라알라스도 걱정이 없겠소.”


“마침 우리 둘째 딸이 올해 혼기가 차는데.... 어떻게,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훗날 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자의 옆자리가 3년 넘게 비었으니, 슬슬 재혼을 생각할 때도....”


라이넬 시니스터는 적당한 처세로 그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받아주었다. 저번달에 의결된 연방의 새로운 정책, 시대의 흐름에 따른 사업들과 가문에 관련된 지지부진한 이야기.


지루하군.


슬슬 가면처럼 뒤집어쓴 표정에 금이 갈 무렵 펠브릭 의장은 다른 의원들을 데리고 떠났다. 변함없이 눈치 하나는 빠른 노인이었다.


은색 쟁반을 들고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물을 받아 한모금에 넘긴 라이넬 시니스터는 빈 잔을 근처 테이블에 올려두고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지척까지 당도하자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어르신.”


시니스터 가문의 장남이자 친아들인 케네스가 라이넬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옆에 선 은발의 사내는 라이넬을 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됐네.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예의는 집어넣지.”


라이넬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에릭 브레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나야 늘 비슷하지. 오히려 요즘은 조금 따분해서 문제군.”


“매제가 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몇달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고.”


“그보다 카를린은 오지 않았나?”


라이넬 시니스터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릭 브레일이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


“오지 않았답니다. 올해도요.”


“...그런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니, 자네가 죄송할게 뭐가 있나. 전부 내 탓인 것을.”


라이넬 시니스터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때 가장 총애했던 고명딸이자 막내딸. 가문의 별철제 검을 훔쳐 가출한 이후에는 거의 접점이 없었다. 브레일 가문의 백작위를 물려받은 에릭 브레일과 결혼한 뒤에도 그랬다.


“케이드는?”


케네스가 말없이 연회장 어느 한 곳을 눈으로 가리켰다.


“허, 참. 여전하다고 해야 할지....”


와인잔을 손에 든 채 여러명의 여인에게 둘러쌓인 케이드는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볼이 살짝 상기된 것이 약간은 취한 것도 같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에릭 브레일이 제 이마를 짚었다. 라이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형제가 성격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지. 자네는 과하게 성실한 면이 있으니. 그보다 세레나는 잘 있나?”


“세레나야 항상 비슷합니다. 너무 잘 지내서 문제지요.”


“이번 연회에 세레나 말고도 또 한명 아이를 데려왔던데....”


곁눈질을 한 라이넬 시니스터가 본론을 꺼냈다.


“아, 리안 말씀이시군요.”


작게 끄덕인 에릭 브레일이 덧붙였다.


“작년 말에 케이드의 종자가 된 아이입니다. 겨울 사냥때 우연히 데려왔는데, 워낙 총명하고 재능이 있어 케이드가 직접 키우고 있습니다.”


“직접? 그 녀석이?”


불신의 눈빛을 한 라이넬 시니스터의 시선이 다시금 케이드를 향했다. 여전히 붉은 머리의 망나니는 여인들과 술을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예. 저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직접 보니 그제서야 이해가 되더군요.”


“그 정도인가.”


“적어도 제가 본 아이들 중에서는 제일입니다. 워커로서의 재능도, 검사로서의 재능도.”


“흐음....”


연회장 구석에서 세레나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검은 머리의 아이가 있었다.


선이 고운 이목구비. 균형잡힌 탄탄한 몸과 보랏빛 눈동자.


한 번 보면 쉽사리 잊기 힘들 만큼 인상적인 아이였다. 검은 머리의 아이는 손에 쥔 잔을 빙글 돌리다가 라이넬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찰나간 보라색 눈동자에 투명한 이채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아까도 그랬다. 자신을 보고도 주늑들지 않고 되레 탐색하는 듯한 저 눈.


“...어르신?”


당돌하다. 아이는 아주 잠깐 라이넬과 서로 응시하더니 먼저 머리를 숙이고 다시 세레나와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모습에 라이넬 시니스터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저 맑은 눈. 아주 잘 갈무리했지만 차마 다 숨기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마나의 파동.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과거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꼭 누군가를 다시 보는 듯한....


“그래서 감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상념에서 깨어난 라이넬 시니스터가 은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라이넬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라이넬 시니스터의 눈꺼풀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내려왔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아이는 어딘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이넬 시니스터의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연회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리안은 이유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타는듯한 갈증에 리안은 연거푸 포도 주스를 마셨다. 처음에는 달짝지근했던 음료의 맛도 어느 순간부터는 꼭 맹물을 먹는 것처럼 밍밍하게 느껴졌다. 결국 따로 시종을 불러 차가운 냉수를 부탁한 리안은 컵에 담긴 투명한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힘들어?”


시원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옆에서 들린 걱정 어린 목소리에 리안은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아요. 아직은.”


“그래?”


“케이드는 어떻습니까? 너무 취하면 안 될 텐데.”


“삼촌?”


몽롱한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장내를 느릿하게 훑었다. 똑같이 매의 눈으로 사람들을 살피던 세레나의 말끝이 살짝 높아졌다.


“어, 사라졌다.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백작님도 없네요.”


“아버지는 방금 전에 외조부님이랑 나갔어. 그리고 삼촌은... 에휴, 말을 말자. 어디 뭐 밖의 휴식용 방으로 갔겠지.”


“휴식용 방?”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런 게 있어. 하도 바깥 정원에서 이상한 짓을 하니까, 아예 따로 방을 만들어 줬거든.”


“...그거 큰일난 거 아닙니까?”


리안이 기억하기로는 분명 케이드를 데려간 그 여인들 무리에 반지를 낀 여자가 있었다. 자칫하면 연회가 끝난 다음 말같지도 않은 추문이 퍼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딱히 사고랄 게 없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때마침 물흐르듯 이어지던 피아노의 독주가 끝이 났다.


연회장 내의 공기가 변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연인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비어버린 피아노의 선율 대신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긴 드레스가 나풀거렸다. 왈츠의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수십의 연인들이 그렇게 장관일 수가 없었다. 세레나는 말아쥔 두 손을 꾹 잡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깊은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저, 리안. 있잖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세레나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브레일 백작 영애.”


난데없이 뒤에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세레나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자신의 앞에 선 소년 소녀들의 무리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세레나 브레일. 3년 만인가요?”


새빨간 머리칼을 한 소녀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아까 세레나가 쟤들이라며 손가락질하던 바로 그 무리였다.


“로크 호크윈드 공자....”


“서운하군요. 저희 사이에 로크 호크윈드 공자라니. 편하게 로크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뒤이어 다른 소년 소녀들이 세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 군 장성이나 거대 상회의 주인을 아버지로 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세레나는 그들을 모질게 내치지 않으면서도 표정은 리안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훨씬 더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


“아니요, 괜찮아요. 신경쓰지 않아요.”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브레일 백작 영애의 여린 마음을 신경쓰게 했다는 게.”


“그보다 옆에 분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17가문의 일각인 레베노 후작가의 여식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리안을 쳐다보았다. 소년 소녀들의 무리가 여기까지 직접 걸음한 진짜 이유.


“.......”


일곱명의 시선을 한번에 받아넘기면서도 리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귀찮아 한다는게 맞았다.


“흠... 혹시 사정이 있어 따로 말을 하시지 못한다거나?”


이런 차가운 대우는 처음이었기에 늘 여유롭던 로크 호크윈드의 표정이 조금 흐트러졌다. 수려한 외모와 몽환적인 분위기의 보라색 눈동자. 겉으로 보이는 체격은 호리호리한데 자세히 보면 탄탄한 근육이 두드러지는 어린 소년.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저의 좁은 식견으로는 알 수 없는 분들이라.”


리안은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곳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시선을 돌려 로크 호크윈드를 직시했다. 전신을 꿰뚫는듯한 보랏빛 눈동자에 한순간 로크 호크윈드의 몸이 움찔했다. 리안은 짜증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로크 호크윈드. 옆의 이 분께선 17가문의 일각인 레베노 후작가의 삼녀 오필리아 레베노. 그리고 여긴....”


가까스로 한숨을 삼킨 로크 호크윈드가 제 일행을 소개했다. 하나씩 나와 리안에게 악수를 청하는데, 리안은 앉은 자세 그대로 거만하게 악수를 받아주면서도 시선은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마치 너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이 정도면 저희 소개는 다 끝난 것 같군요. 무명객 씨.”


“그쪽의 이름은 뭐죠?”


이쯤되니 두 사람도 최소한의 예의를 생략하고 있었다.


“리안입니다.”


리안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리안...?”


“혹, 성씨가?”


“정식으로 서임을 받지 않아 아직은 없습니다.”


“성이 없다고...?”


로크 호크윈드의 표정이 분노로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하나는 저리 거만하게 나오길래 무슨 뒷배가 있나 했더니 한낱 평민에 불과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평민 하나의 눈치를 보느라 세레나 브레일에게 지금까지 말을 걸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기존의 귀족 가문들은 17가문의 기사 임명권에 따라 서임을 받더라도 원래의 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로 성씨를 하사받는 건 평민 출신의 기사들뿐이다.


“리안은 삼촌의 종자예요. 작년 겨울에 정식으로 종자가 됐어요.”


지켜보던 세레나가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브레일 백작 영애의 삼촌이라면... 케이드 경의 종자?”


“헤에....”


실망감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특히 리안이 성이 없다는 걸 알고 경멸하는 눈빛을 하던 오필리아 레베노는 이젠 완전히 리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케이드 브레일 경이라면....”


“엘도르 기사단장이자 브라알라스에서 한손에 꼽히는 3위계 워커시지. 예전에 로크가 종자로 들어가려다 대차게 까인 적이 있지 않았나?”


“대차게 까인 수준이 아니야. 방에 틀어박혀서 몇날 며칠을 울었으니까.”


“애초에 케이드 경은 여태껏 단 한번도 종자를 들이지 않았는데....”


수근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분노로 달아오른 로크 호크윈드의 얼굴빛이 이제는 수치심으로 새빨개졌다.


“그래요, 리안.... 아직은 성이 없는 ‘견습’기사군요.”


“.......”


“이해합니다. 아주 가끔씩 평민 출신으로도 두각을 드러내는 기사들이 종종 있었죠. 맨손으로 아득바득 기어올라오는 그 열정도.... 저는 인정합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니까요. 흔히들 말하길, 노력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로크 호크윈드가 특정 단어 몇몇을 강조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부들거리는 입가를 애써 숨긴 로크 호크윈드가 재차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리안.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어쩐지 저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리안은 그런 로크 호크윈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연회장의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았던 샹들리에의 불빛에 물에 잠긴 듯 서서히 번져나갔다. 눈꺼풀을 감았다 떠도 보이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가씨.”


“어... 어?”


비어있는 물잔을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은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리안?”


몸을 돌린 리안이 재빨리 자리를 떴다. 반사적으로 리안을 잡으려던 세레나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등 뒤로 누군가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신경쓰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은 현기증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었다.


“쯧.”


“도망치는 건가....”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브레일 백작 영애. 아까는 차마 신청하지 못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저랑 어떻게 한 곡....”


연회장에서 멀어질수록 불빛이 흐려지고 밤이 다가왔다.


리안은 불길에 이끌리는 부나방처럼 무의식적으로 그 밤을 쫓았다.


***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자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쓸어내렸다. 난간에 기대어 선 리안은 그토록 갈망하던 맑은 공기를 만끽했다.


어지럽게 뒤섞이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었다. 흐릿하던 시야도, 빙글 돌던 세상과 지끈거리는 현기증도 모두 저 멀리 날아가 사라졌다.


시선을 내리자 난간 아래에는 왕실의 정원사가 정성스레 가꾸어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잎사귀와 가지각색의 꽃들로 이루어진 정원이 희미한 달빛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숨을 크게 들이쉰 리안이 난간에 걸친 두 팔 사이로 머리를 묻었다.


역시 무리인가.


“.......”


다시 생각해봐도 연회장이란 곳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가문에서의 자그마한 파티에서 느낀 감정과의 괴리감이 심한 탓이었다.


리안이 아는 연회는 이런 게 아니었다. 친한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왈츠의 선율 속에서 춤을 추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드는.


그런 게 리안이 아는 파티이자 연회였다. 어쩌면 진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상대가 없어서 그렇다고, 그래서 이런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리안은 속으로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쏟아지는 호기심과 의문 어린 시선 속에서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태연을 가장하는 건 굉장한 정신적 부하를 주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한동안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던 리안이 기대어 선 몸을 일으켰다. 힘들긴 해도 세레나를 그 하이에나 무리에 오래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아 보였다. 우리의 말괄량이 아가씨께선 가식을 지극히 싫어하시니까.


“여기 있었군.”


느닷없이 테라스의 입구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 즈음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리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라이넬... 시니스터....”


“.......”


“브라알라스의 하나뿐인 소드마스터를 뵙습니다.”


“됐네. 나는 허울뿐인 격식을 좋아하지 않아.”


리안이 다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라이넬 시니스터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곁으로 다가온 노인이 느릿하게 손가락에 든 시가를 입에 물었다. 손끝으로 황금빛 마나가 타오르더니 이내 시가의 끝부분에서 불이 붙으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역시 이런 자리는 성미에 맞지 않나?”


“아닙니다. 단지 잠시 피곤해서....”


“솔직하게 말해도 돼. 여기라면 따로 듣는 귀가 없으니.”


“실은... 예, 조금 그렇습니다.”


라이넬 시니스터가 시가를 입에 문 채로 피식거렸다.


“나랑 통하는 면이 있군. 사실 나도 그렇거든. 권력욕에 찌든 늙은이들을 상대하는 건 아주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지. 따지고 보면 나도 그렇지만.”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노인이 하얀 숨을 내쉬었다. 기이한 향이 나는 연기는 밤바람에 흩어져 하늘 위로 사라져갔다.


“이야기는 들었다. 케이드 그 녀석의 종자로 들어왔다면서?”


“예. 케이드 단장님께서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신 게 인연이 되어....”


“용병으로 꽤나 이름을 날렸다고 하던데... 중부 지역은 살기 좋은 곳인가?”


라이넬 시니스터가 돌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중부 지역이라면....”


순간 움찔했으나 재빠르게 감정을 수습한 리안이 모른 척 말끝을 흐렸다.


“그래, 리안. 네 고향 말이다.”


“.......”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라고 들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휴양지로도 유명한 곳이었으니.”


“시니스터 공작 각하.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네 아비의 이름을 안다.”


라이넬 시니스터가 말했다. 리안의 몸이 우뚝 굳었다.


“리안 루프스 에스테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리안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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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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