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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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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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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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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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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두 번째 보금자리 8

DUMMY

“어때, 어울려?”


흔들리는 발끝을 따라 새하얀 원피스 자락이 나풀거렸다.


“네, 아가씨. 엄청 어울려요.”


시녀인 릴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거울속에 비치는 소녀는 환한 백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호수를 닮은 닮은 푸른 눈동자와 별다른 장식 없이 쭉 뻗은 매끄러운 민무늬 원피스가 한 폭의 그림 같이 조화로웠다.


원피스처럼 흰색 바탕에 푸른 리본이 달린 챙모자를 쓴 세레나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아래로 입었다 만 옷가지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조금 수수한가? 역시 프릴이 있는 쪽이?”


돌연 돌기를 멈춘 세레나가 물었다.


“아니요. 지금이 훨씬 나아요 아가씨. 연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도시 구경을 가는 건데요, 뭐.”


“그렇지?”


폴짝, 폴짝.


거울 앞에서 여러가지 자세를 취하는 세레나를 보며 시녀 릴리가 쓰게 웃었다. 벌써 한시간 넘게 저러고 있으니 지칠만도 하건만 어렸을때부터 세레나를 보좌하던 릴리는 능숙하게 제 주인의 비위를 맞추었다.


엘도르 기사단장 케이드 브레일의 새 종자인 남자아이.


오늘은 리안에게 도시를 소개시켜주는 날이었다.


벌써 어린 꼬마 손님이 가문의 일원이 된지 한달이 훌쩍 넘었다. 해가 바뀌고 거리에는 완연한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세레나는 12살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래도 키가 조금 큰 것도 같았다. 리안에게 도시를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한 날이 12월의 겨울이었으니, 2월에 접어든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흐른 셈이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릴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철저히 흥미본위로 움직이는 이 말괄량이 아가씨가 먼저 도시를 소개시켜준다고 제안하는 광경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고두고 생각해보니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매일 후계자 수업으로 우는 소리를 하는 세레나에게 리안은 처음으로 친구라 부를만한 존재였다. 에반이나 핀, 덩크와 같은 또래 견습 기사들도 있었으나 그들과 세레나에 사이엔 신분의 벽이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가문의 견습 기사와 향후 백작위를 물려받을 유일한 후계자.


그러나 리안은 다르다. 백작가라는 안락한 울타리가 아닌, 외부의 용병으로서 활동한 리안은 그렇기에 더 특별했다.


“잠시만요. 리본이 비뚤어졌어요 아가씨.”


“고마워, 릴리.”


시녀 릴리는 세레나의 모자 위의 리본을 정돈하는 것으로 장장 한시간에 걸친 치장을 끝냈다.


“돈은요?”


“챙겼어.”


“마님 허락도 받았고... 이젠 정말 다 끝났네요. 어서 가보세요.”


“그래.”


세레나는 곧은 걸음으로 문 앞에 섰다.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릴리가 얇은 외투를 하나 걸쳐주었다.


“아직 초봄이라 추워요.”


“그런가?”


“네.”


릴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뒤를 돌아본 세레나가 마주 미소지었다.


“응. 다녀올게.”


***


인구 30만의 성채도시 페리아.


성벽에 주둔하는 방위군만 5000명에 달했다. 의무적으로 부과된 병역 덕분에 일정 이상의 군대를 상시 유지했다. 칼로스 왕국을 지키는 방패라는 이명만큼이나 중요한 무역로인 페리아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무엇보다 커다랗게 솟은 성벽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왕국의 수도인 엘리시온과 비교하면 규모도 볼 거리도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작은 도시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륙을 오가는 행상인들 덕분에 온갖 물건들과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 마음껏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까?”


“.......”


리안은 세레나와 단 둘이 전망 좋은 식당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돌아다니는 종업원들이나 손님들로 봐도 꽤나 고급스런 가게였다.


“아뇨, 이걸로 충분합니다. 애초에 둘이 먹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시킬 필요가....”


“배부르면 남겨. 먹다가 음식이 모자라서 다시 시켰는데, 뻘쭘하게 기다리면 좀 그렇잖아?”


금전 감각이라는 게 없는 건지, 귀족 아가씨라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건지. 단순하게 도시나 한바퀴 둘러볼 심산으로 나온 리안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택을 나오기 전, 며칠만에 다시 본 세레나는 새하얀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본채에 지내면서 종종 얼굴을 맞대긴 했으나 이렇게 단 둘이 외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리안은 문을 열고 나오는 세레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입만 다물고 있으면 한결같이 인형같은 아이였다. 환한 백금발도, 푸른 눈동자도.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에 무릎 밑까지 내려온 긴 원피스 자락이 하늘거렸다.


—밥 안 먹었지? 가자.


멍청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리안의 손목을 잡아챈 세레나의 첫마디는 그랬다. 조금은 신이 난 듯한 발걸음을 따라 향한 곳이 바로 이 고급스런 식당이었다.


나름 드레스코드도 있는 것 같은데 좀 신경써서 입을 걸. 리안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볼 무렵 식당 입구를 지키는 남자는 시원하게 길을 내주었다. 보아하니 이곳에 한두번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 입으로 아주 맛있는 곳이라 했으니 전에도 여러번 와봤을 터였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리안은 사양하지 않고 식기를 들었다. 첫 입으로 근처의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브레일 백작가의 일원이 된 뒤로 용병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식사를 누렸지만 그래도 이런 유명한 가게의 음식은 또 달랐다. 고기뿐만 아니라 혀에 닿은 모든 음식이 훌륭했다. 말도 안 되는 혜안으로 이만큼이나 음식을 시킨 세레나가 새삼 달라 보일 정도로.


“맛있어?”


턱을 괴고 있던 세레나가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네. 아주 맛있네요.”


“그치?”


“아가씨는 안 드십니까?”


“나는 괜찮아. 딱히 배가 안 고파서.”


세레나가 자기 앞에 놓인 요리들을 리안의 근처로 밀어넣었다.


“대신 네 용병시절 얘기 좀 해줄래?”


갑자기 왜 이러나 했더니 이거였나.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 없을 겁니다. 흔해 빠진 이야기라서요.”


“그래도 해줘. 정 말할 게 없으면 삼촌이랑 처음 만났을 때라도. 아니면 계산 안 하고 나가버릴지도 몰라?”


진담 반, 농담 반인 귀여운 협박에 리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이 리안은 괜찮은 이야기 몇개를 약간의 각색을 통해 풀기 시작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하나 배운 점이 있다면 어지간해선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방금 네가 말한 그 다른 용병들 때문에?”


“네. 돈 때문에 사람 죽이는 일이 흔하니까요. 전쟁 전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과거나 잔인한 이야기는 적당히 빼두었지만 세레나가 그간 고아로 살아온 리안의 삶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혹시라도 사람을 죽였다거나 해도 난 별로 상관없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급격히 굳은 리안의 안색을 보고 세레나가 말했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환멸했다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세레나가 역으로 되물었다.


“환멸? 내가? 잠시 잊은 모양인데, 이래봬도 나는 브레일 백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야. 명색이 칼로스 왕국의 방패인데,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써서야 되겠어?”


당장 우리 삼촌만 해도 베어넘긴 제국군이 세자리수는 거뜬히 넘을 텐데. 세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삼촌이랑은 어떻게 만났어? 변종 다이어울프도 리안 네가 잡았다며?”


“맞습니다. 저도 죽을 뻔했구요. 다 죽어가던 찰나에 단장님이 절 구해줬습니다. 그 부분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 뒤로 실없는 대화가 몇번 이어졌다. 창밖으로 흘러드는 햇살이 차츰 기울어질 즈음 여기저기 빈 접시를 응시하던 세레나가 먼저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갈까?”


거리로 나왔다.


초봄의 대로는 순백의 겨울과는 또다른 정취가 있었다. 페리아 최고의 대장장이인 발터에게 진철 검을 받은 뒤로 몇번인가 재방문한적이 있었기에 리안은 대강 도시의 구조를 꿰고 있었다.


“우리 본가가 있는 부지는 도시 한가운데 있어. 북쪽은 상업 구역이, 동쪽은 귀금속같은 사치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지. 남쪽에는 주택가가 몰려있고, 서쪽은 제국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이라 방위군 절반 이상이 주둔하고 있거든. 행상인들이 제일 먼저 들어오는 문이 서문이기도 하고.”


천천히 도시를 구경하면서 세레나는 리안이 궁금해하는 점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국적인 물건들이 많겠네요. 서쪽 부근에는.”


“그렇지. 페리아를 거쳐 엘리시온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예전이면 모를까, 제국이랑 휴전 협정을 맺은지도 꽤 됐고.”


제국산 물품들은 하나같이 상급의 품질을 자랑했다. 실용적인 물건이건, 사치품이건. 고가의 가격에도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제국산 물건을 주로 취급하는 행상인도 흔했으니.


“근데 이제와서 하는 소리지만... 호위라던가 데리고 다니지 않으십니까?”


“호위?”


“엘리엇 경이라던가.”


앞서 나아가던 세레나의 발이 뚝 멎었다.


“글쎄....”


“......?”


“만약에... 날 노리는 암살자가 나타난다면. 도망칠 거야?”


리안이 쓰게 웃었다.


“제가 미쳤다고 도망치겠습니까?”


“그렇지? 그럼 됐어. 어머니도 허락했고, 우리 든든한 기사님도 있으니까.”


세레나가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이번엔 상점가였다.


지나가는 가게의 주인마다 약속이라도 한듯 세레나를 알아봤다. 한발짝 뒤에서 검을 차고 그녀를 호위하던 리안은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가씨!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세레나 아가씨. 이리 와 봐요. 방금 한 빵이 아주 잘 됐어.”


“옆에는 기사님입니까? 아주 잘 어울리시네요.”


“아가씨 여기....”


“새로 들어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레나는 먹을걸 한가득 들고 있었다.


“아까 배부르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럼, 버려?”


말문이 막힌 리안은 얼떨결에 꼬치구이 하나를 받아버렸다. 식당에서 배불러서 음식을 못 먹은 게 아니라 군것질이나 하려고 그런 게 분명했다.


어느덧 둘은 커다란 광장에 들어서 있었다.


다가오는 봄을 맞는 사람이 많았다.


막 싹이 돋으려는 가로수 아래 앉아있는 가족들과 연인들.


그 한복판에 분수대가 있었다. 뿜어지는 물줄기에 밝은 햇빛이 오색 빛깔을 퍼뜨렸다. 잠시간 그 풍경을 지켜보던 리안은 분수대에 모인 사람들을 사이로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악기로 보이는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음유시인이네.”


세레나가 말했다.


“음유시인이 페리아에선 흔합니까?”


“응. 네가 있었다던 그린힐에선 아니야?”


“모르겠습니다. 항상 일하기 바빠서.”


“뭐야, 그게.”


“먹고살기 바빴으니까요. 음악을 즐기는 건 사치였습니다.”


뭔가 말하려던 세레나는 한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꺼냈다.


“어쩔 수 없네.”


손목을 잡힌 리안이 어리둥절하는 가운데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물 하나 줄게. 따라와.”


***


해가 저무는 도시의 풍경은 온통 주홍빛으로 가득했다. 그 뒤로도 세레나에 의해 도시 이곳저곳을 탐방한 리안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한 시계탑이었다.


“아가씨...? 여긴 어쩐 일로?”


시계탑에 올라가는 1층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이 세레나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들어갈 수 있지?”


“아, 아니요. 이제 곧 문을 닫을 예정입니다. 애당초 관리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데....”


변명하듯 중얼거리던 경비병이 세레나의 뚱한 표정을 보고는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아가씨라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진짜?”


“아, 아니 무조건 된다는 건 아니구요. 저도 윗선에 허가를 구해야....”


“한 시간만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텐데, 언제 허락을 구한다는 거야. 금방 내려올게. 30분이면 돼.”


“그러시다면야....”


가문의 권위를 앞세운 극악무도한 꼬마 아가씨는 그렇게 리안을 끌고 시계탑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커다랬다.


천장 하나 없이 뻥 뚫린 시계탑 안쪽에는 나선으로 계단이 나 있었다. 혹여나 추락하는 사고를 염두한 건지 층계마다 철제 난간이 세워져 있었다. 저 끝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노을이 벽을 타고 비스듬히 내려오는데, 얼핏 몽환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걸... 올라가는 겁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올려다보던 리안이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자신 없어?”


“그럴리가요.”


서로 마주본 두 소년과 소녀는 피식 웃고선 계단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한걸음 한걸을 나아갈 때마다 시야가 높아졌다. 중간 지점에 다다라서 아래를 내려다본 리안은 까마득하게 보이는 바닥을 보고서는 혀를 내둘렀다. 눈앞의 말괄량이 아가씨는 지치지도 않는지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물결치는 원피스 자락을 따라 붉은 노을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안은 묵묵하게 발을 옮겼다. 호흡이 흐트러질 즈음 둘은 거대한 시계가 위치한 꼭대기 내부에 올라와 있었다. 끼릭거리는 톱니바퀴의 소리 너머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그림자처럼 비쳤다.


“아직 끝 아니야. 한층 더 올라가야 돼.”


그렇게 말한 세레나는 마지막 한층마저 올라서 두꺼운 철제 문을 밀어젖혔다.


“어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아....”


리안은 반사적으로 탄식했다.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장관이었다. 저 멀리 산맥 너머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태양, 아스라한 노을빛.


저녁놀에 취한 도시는 새빨간 물감을 뿌린 것처럼 붉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 아래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사는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늘어져 있었다. 까만 점이 되어 저마다 오가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어?”


세레나가 천진하게 미소지었다.


“네. 엄청 예뻐요.”


어쩐지 비현실적인 감각에 리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원래 나만 아는 비밀 장소인데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여기가 제일 높아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무척 좋거든.”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가 리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난간 앞까지 다가간 리안은 고개를 내려 밑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올라온 계단만큼이나 그 높이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앞머리를 헝클이는 산들바람이 리안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저기 봐. 내가 아까 말했던 상업 지구가 저기야.”


세레나가 손을 뻗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느낌이 완전 다르네요.”


“그치?”


“네.”


“저기 뿐만이 아니야. 그 아래에는 귀금속 거리가 있고, 러스틴 왕국을 바라보는 서문에는....”


세레나는 리안의 옆에 붙어서 아까 설명했던 부분들을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리안의 눈동자가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북쪽, 동쪽, 남쪽, 서쪽. 마지막으로 한가운데 위치한 저택을 가리킬때까지 리안은 그 모든 이야기를 경청했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둘은 그렇게 시계탑 위에서 도시의 전경을 구경했다.


***


그 뒤로 평범한 일상이 지나갔다. 용병 시절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리안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새롭게 맺어진 여러 인연이 많았다.


에반, 핀, 덩크. 항상 셋이서 뭉쳐다니는 견습 기사 3인방은 리안과 나이가 비슷한 만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개중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제일 덩치가 큰 덩크가 리안보다 한살 연하라는 것이었다. 반대로 핀은 리안보다 한살 연상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케이드는 툴툴거리면서 꾸준히 리안의 검을 봐주었다. 대개는 혼자 검을 보여주고 이해하지 못한 리안이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그래도 이따금 아주 귀한 조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세레나는 여전히 수업 듣기를 싫어했다. 잊을 만하면 수업을 빼먹고 병영으로 놀러와 리안을 포함한 에반, 핀, 덩크와 어울렸다.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시녀인 릴리는 그런 세레나를 반쯤 포기한 모양이었다.


안주인인 카를린은 처음과 같이 늘 자상했다. 어머니를 닮은 여인은 항상 리안의 안위를 물었고, 불편한게 있으면 뭐든 들어주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가주인 에릭 브레일, 페리아 최고의 대장장이 발터, 집사장 한스, 마구간의 총책임자인 휴고, 케이드의 친우이자 브레일 기사단의 단장인 카일 로렌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안은 이곳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다. 마리의 죽음도, 데릭의 실종도, 가문의 복수도. 날카롭게 벼린 마음의 칼들이 시간의 풍파에 무뎌졌다. 슬픔도 점차 사라져갔다.


처음에는 그것을 경계했던 리안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죽음이 있어도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간다. 마리의 유언대로 리안은 행복해지려 애썼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고.


3월.


앙상한 나뭇가지가 푸르게 물들었다. 3월의 끝자락에 당도한 페리아에는 진한 꽃내음이 풍겼다.


어느새 리안은 13살이 되어 있었다. 새 보금자리에서 맞이하는 첫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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