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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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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418,782
추천수 :
8,095
글자수 :
357,504

작성
24.08.15 21:20
조회
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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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글자
21쪽

두 번째 보금자리 6

DUMMY

마법사들은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제어할 수 있는 마나의 총량이 늘어난다. 고농도로 압축된 순수한 마나를 사용하는 워커, 체외로 방출해 불가능한 현상을 구현하는 소서러 둘다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같은 위계의 마법사라도 막 새 경지에 오른 마법사와 다음 경지를 바라보는 마법사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똑같이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1위계 마법사와 2위계 마법사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노인이 리안에게 검을 던져주면서도 자신만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저 나이에 마법사라니.


거짓말이겠지. 세상 물정도 모르는 꼬맹이의 허세다. 노인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브라알라스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마법사들은 보통 열다섯 전후로 마나를 각성하니까.


설령 그게 진짜라고 한들 상관없었다. 기껏해야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는 정도일 것이고, 만에 하나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브레일 백작가에 제법 쓸만한 애송이가 들어왔다고 대충 검이나 한자루 만들어주면 될 일이었다. 그 어디에도 자신이 만든 검이 두동강나는 건 경우에 없었다. 진철보다 못할 뿐이지 순도 높은 은철도 내구성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 적당히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검이 약할줄은....”


리안이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 말대로 노인이 자신만만하게 건네준 검은 한순간에 반토막이 나 처량하게 바닥을 구르는 중이었다.


검이 부러진 탓에 형태를 잃어버린 보랏빛 마나가 허공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


뒤에서 지켜보던 에반이 작게 혀를 찼다.


“쯧... 영감님, 내가 말했잖아요. 2위계 마법사라고. 간 볼 때가 아니라니까?”


“발터 영감님. 이럼 곤란하다. 아무리 리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불량품인 검을 건네주다니. 다른 튼튼한 검은 없는 건가?”


“저기, 어르신...?”


제 몸집만큼이나 눈치가 없는 덩크가 에반에게 동조하는 사이 핀은 조심스럽게 노인의 안색을 살폈다. 페리아 최고의 대장장이는 여전히 갓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노인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던 리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어르신. 값은 제대로 치를 테니....”


“아니.”


노인이 리안의 말을 잘랐다.


“생각해보니 내가 실수했군. 네게 준 그 검은 습작이었다.”


“.......”


“시험용으로 만든 검일 뿐, 내 진심이 아니란 말이다...!”


“아, 예....”


경악을 삼키던 노인은 이제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이 성큼성큼 걸어나가던 그는 매의 눈으로 쓸만한 검들을 닥치는대로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리안은 그런 노인을 지켜보다가 뒤에 있던 세 소년에게 시선으로 말을 걸었다.


저대로 놔둬도 되나?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원래 영감님 눈 돌아가면 아무도 못 막아.


그럼, 구경만 한다고?


낸들 아냐.


에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숨을 내쉰 핀이 쓰게 웃었다. 덩크는 바보같다 싶을 정도로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노인이 아까와는 다른 검을 들고 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리안은 검을 받아 그대로 뽑았다. 말없이 눈빛으로 채근하는 노인을 애써 무시한 채 아까와 같이 마나를 끝까지 밀어넣었다. 결과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카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신 곳곳에 균열이 가더니 얼마 못가서 검이 부러졌다.


“이럴 수가....”


노인이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잘 보니까 들어간 금속이 문제군. 그럼 이건 어떠냐?”


떨떠름한 눈을 한 리안에게 노인이 세번째 검을 건넸다.


“무려 비리디스 강으로 만든 놈이다.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쨍강!


“이놈, 이놈은 다르다! 네 그 지랄맞은 마나도 충분히 견딜만한....”


쩅강!


“아니, 3개월이나 걸린 내 걸작이!”


쨍강!


“크아아아악!”


노인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절로 실소를 흘린 리안은 반토막이 난 여덟번째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건네받은 투박한 검부터 마지막 검까지. 하나도 예외 없이 리안의 검기에 균열이 가 부러졌다. 거의 혼절하듯 쓰러진 노인의 주위에는 처량한 검의 사체만이 수북히 남겨져 있었다.


“발터 어르신.”


리안은 노인의 이름을 불렀다. 안타깝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가게 내부에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제대로 자존심에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중간부터 힘을 조절하지 말고 끝까지 마나를 밀어넣으라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


부러진 마지막 검을 고이 검집에 납검한 리안이 품안을 뒤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


“값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대금은 치루겠습니다. 그 사람도 부족하다면 외상을 달아두라고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검은 아쉽지만 애초에 제 마나를 버티는 검은 본 적도 없으니, 딱히 신경쓰지 않....”


“그래, 인정하마.”


노인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리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내 눈이 틀렸다. 나이를 먹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괜한 아집이 생긴 모양이야. 미안하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철의 장인이 한수 접고 들어온다. 리안보다 훨씬 놀랐는지 세 소년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어르신.”


“스타 시커는 둘째치고, 그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이룩했다면 마땅히 한 명의 워커로서 존중을 받아야겠지.”


“.......”


“약속대로 네게 딱 맞는 검을 만들어주마.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네 마나를 능히 버티고도 남을 놈을 말이다.”


노인이 리안의 손에서 부러진 검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검의 잔해와 함께 구석의 나무통에 던져버렸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리안이 물었다.


“분명 3개월이나 걸린 걸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보니 세상 쓰레기가 따로 없군. 들어간 강철만큼은 비싼 놈들이니, 나중에 화로에 처박아서 다른 검을 단조할 때 써야겠어.”


“.......”


“하나 묻겠는데, 네 그 마나는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원래 그랬냐?”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네, 그렇습니다.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날부터 쭉 그래왔으니.”


아마도 리안의 마나는 처음부터 그런 성질이었을 터였다.


각각의 색을 지닌 다섯 가지 마나가 그러하듯이.


“흐음... 이거, 어쩌면 진짜 별철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아니, 별철이 아니면 안 돼.”


“뭣... 별철이요?”


“허.”


반응은 리안의 뒤에서 나왔다. 슬쩍 뒤를 흘기니 에반은 물론이고 핀과 덩크까지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리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이야?”


“아니, 별철이라고 별철! 너 진짜로 별철을 모르는 거냐?”


“들어는 봤는데....”


별의 금속 스텔라리움(Stellarium).


별철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한 스텔라리움은 절대로 부러지지 않으면서 마나 전도율이 백프로에 가까운 신의 금속이었다. 수백년 전에 그 제련 방법이 완전히 소실되어 몇자루 남지 않은 검들만 대대로 전해지는, 워커들로서는 한번씩 꿈꿀 수밖에 없는 그런 검.


리안도 한명의 마법사이자 워커로서 별철로 만들어진 검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극소수의 가문들이 제 작위와 명예를 비롯한 모든 것보다도 소중히 여긴다는 보물이라는 것도.


“애초에 구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리안은 세 소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구할 수도 없는데 놀랄 이유가 없었다.


“맞다. 지금 남아있는 별철제 무기들은 전부 17가문을 비롯한 극소수의 가문이 가지고 있지. 전부 수백년씩 가보로 내려오는 것들이고, 아주 가끔씩 새로 만들어지는 놈들도 기존의 무기를 완전히 녹여내 새로 단조한 것들이니까.”


“그럼....”


“하지만 아예 구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노인이 손을 들어올렸다.


“브레일 백작가에도 딱 두 자루 별철제 검이 있지.”


리안이 빤히 바라보자 노인이 짙게 웃었다.


“하나는 엘도르 기사단장인 케이드 브레일의 ‘붉은 해일’. 다른 하나는 안주인인 브레일 백작 부인의 ‘낙뢰’.”


노인이 손가락을 하나씩 펼쳤다.


“전자는 백작가 대대로 가주에게 내려오던 보물이고, 후자는 브레일 백작 부인이 된 카를린 브레일이 본가인 시니스터 가문을 나올 때 몰래 훔친 물건이다. 시니스터 가문에는 원래 별철제 검이 두자루 있었으니까.”


“.......”


“브레일 백작은 일찍이 무에 재능이 없음을 알고 백작위를 승계받은 직후 제 동생인 케이드에게 검을 넘겼고, 브레일 백작 부인은....”


어쩐지 들으면 안될 것 같은 이야기에 리안은 소년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다 알고 있는 얘기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열심히 설명을 이어나가던 노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크흠! 아니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노인이 괜시리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별철을 구하는 건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겠지만 운이 좋으면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누가 아냐? 사상 처음으로 별철제 무기가 경매에 올라오기라도 할지.”


“그래도 가격이....”


“비싸겠지.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저기 칼로스 왕국의 수도인 엘리시온 중심지 거리 일부를 통째로 사고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네 마나를 마음껏 불어넣으려면 지금으로썬 별철제 검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냐?”


“.......”


리안이 침묵하는 사이 노인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살짝만 보였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광경이나 훅 끼치는 열기를 보아하니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으로 보였다.


“받아라.”


밖으로 나온 노인이 검 하나를 리안에게 던졌다.


“이건...?”


투박하다 못해 거칠기까지 한 검은 검집의 마감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칼날과 칼자루를 이어지는 크로스가드의 감촉이 까끌거렸다.


“어제 막 만든 따끈따끈한 놈이다. 순수 진철로 만든 검이지. 원래 따로 의뢰를 받고 군용으로 납품하려던 놈인데, 당장 쓸 검이 없으니 그거라도 써라. 합금이 아니라 적어도 아까 전 부러졌던 검보다는 훨씬 튼튼할 테니.”


고개를 끄덕인 리안이 품안의 주머니를 건넸다. 노인이 머리를 저었다.


“필요 없다. 정 부담스러우면 사과의 의미로 줬다고 쳐.”


“아니요, 이건 선수금입니다. 이 진철제 검에 대한 값이 아니라.”


“선수금?”


노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껄껄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선수금, 선수금이라! 별철제 검을 구하는 것 치곤 부족하다 못해 초라하기 짝이 없구나!”


리안에게는 저택을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지만 노인의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할 말도 없었다.


노인이 카운터 근처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제프가 만들어주었던, 이제는 부러진 리안의 검이 있었다.


“선수금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한 겁니까?”


반쪽짜리 검을 들어올린 노인이 피식거렸다.


“아니. 농담이다, 애송아.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이정도면 별철제 검에 대한 선수금으로는 나쁘지 않지. 것보다 네가 전에 쓰던 이 검, 혹시 만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냐?”


“네. 제가 아는 이름이 가명이 아니라면, 제프라고....”


“제프?”


노인의 몸이 우뚝 굳었다.


“혹시 그 놈, 눈밑에 찢어진 흉터가 있지 않았냐? 겉으로는 툴툴대는데, 실은 솔직하지 못해서 몰래 챙겨주는....”


“제프와 아는 사이십니까?”


이번에는 리안이 놀랐다. 노인은 믿기지가 않는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연히 알다마다! 예전 도제 시절에 나랑 같은 스승 아래서 배우던 녀석인데... 참, 그놈 지금 뭐하고 있는지도 아냐?”


“그린힐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린힐 대대에 무기도 납품하고 있고요.”


리안이 기억하는 제프는 그린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장장이었다. 시골 변두리의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군용으로 무기를 납품할 정도의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안은 제프가 새삼스레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준 검만 봐도 그랬다. 변종 다이어울프를 상대할 때도 마나를 한계까지 밀어넣었음에도 끝까지 버텼다.


별철제 무기만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리안을 거쳐간 수많은 검들 중에서는 최고로 좋은 검이었다. 순수 진철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걸 벼려낸 야장의 실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선물받은 겁니다. 이별 선물로 받은 검이요.”


리안이 노인이 들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선물? 하! 난데없이 소식이 끊어진 지 10년이 넘었건만, 어떻게 잘 살고 있는 모양이군. 왠지 만듦새가 보통이 아니더라니....”


눈살을 찌푸린 노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검을 선물로 줄 정도의 애송이가 다시 내게 찾아오고.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기묘해.”


노인이 반쪽짜리 검을 조심스럽게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검의 날이 나가거나 하면 다시 찾아와라. 이것도 인연이니 공짜로 손질을 해주마.”


그리고 귀찮은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나는 하던 일이나 마저 하러 가야되니까, 다른 볼일 없음 나가 봐.”


***


가게를 나올 무렵에는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리안을 포함한 네명의 소년은 오던 길을 거슬러 저택으로 향했다. 허리춤에는 새로 구한 진철제 검을 매단 채였다. 거대한 백작가의 정문을 지나자 슬슬 눈에 익기 시작한 수목들이 죽 늘어졌다. 저택의 현관 앞에는 예상치 못한 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케이드?”


케이드 브레일. 강렬한 붉은색 머리칼을 본 리안의 눈이 커졌다. 에반, 핀, 덩크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망할 꼬맹이가... 내가 이 나이먹고 널 일일이 기다려야겠냐?”


대답은 옆에서 나왔다. 리안 대신 입을 연 에반이 되물었다.


“단장님이 왜 여기 있어요? 평소같았으면 저기 시내로 내려가서 대판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 사람이....”


“뭐?”


“맞다, 단장님.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은 여자가 없다고 술을 마시지 않는 건가?”


“애들아....”


핀의 어깨가 축 쳐졌다. 한발짝 떨어져있던 리안이 안쓰러운 눈으로 중간에 낀 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케이드의 입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후우....”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터지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쉰 케이드가 꾹 억누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 꼬맹이랑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니들은 빨랑빨랑 병영으로 돌아가라.”


“둘이 뭘 하려구요?”


“가라면 빨랑 가! 아니면, 연무장 뜀박질이라도 시켜줄까?”


“헉!”


과장되게 숨을 들이킨 에반이 병영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리안, 난 간다. 나중에 또 보자.”


“안녕 리안. 내일 봐.”


덩크와 핀이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멀어지는 에반을 따랐다. 잠시간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케이드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 시간이 다가온 백작가의 저택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용인들을 뒤로 한 채 리안은 조용히 케이드의 뒤를 쫓았다.


노을진 복도를 나아가던 중 느닷없이 질문이 들어왔다.


“그래서, 검은 구했냐?”


한발 뒤에서 걷고 있던 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그게....”


“검이 바뀐 걸 보니 어떻게 구하긴 했는데, 만족스럽진 않은 모양이군. 그 늙은이가 임시로 쓰라고 건네주기라도 했나 보지? 별철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어떻게 알았습니까?”


리안이 반문했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순수 진철로 된 검도 버티지 못한 시점에서 남은 거라곤 별철 하나지. 그리고 별철은 지금 억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금속이고.”


케이드는 여전히 리안의 앞에서 걷고 있었다. 보폭은 컸지만 걸음걸이는 느긋했다.


창밖으로 붉그스름한 빛이 쏟아졌다. 흔들리는 발을 따라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움직였다. 한동안 케이드의 등을 바라보던 리안의 시선은 그 밑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달린 짙은 선홍빛의 검집에서 멈추었다.


붉은 해일.


백작가에 단 둘뿐인 별철제 검 중 하나.


“갖고 싶냐?”


“......!”


불현듯 리안의 발걸음이 멎었다. 조심스럽게 고개을 들어올리니 어느새 멈춰선 케이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불순해, 꼬맹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안봐도 다 알잖아.”


“...그렇게 심하게 안 봤습니다.”


“준 돈은 어쩌고?”


“전부 썼습니다.”


“그래? 검 한자루 값 치고는 과하게 들어있었는데... 미리 선금이라도 내고 왔냐?”


“선금?”


“모르는 척 하기는.”


몸을 돌린 케이드가 다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야 별철제 검에 대한 선금이지. 그리고 그 어중간한 말투, 낯간지러우니까 당장 때려 쳐라. 설마 전의 내기를 벌써 까먹었을리는 없을 테고....”


잠깐 주위를 둘러본 리안도 마찬가지로 발을 옮겼다. 내기.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일전의 대결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케이드는 리안이 졌을 경우 존대를 때려치우라 조건을 걸었고, 결과적으로 리안은 패배했다.


“네 처우에 대해서도 대강 결론이 났다.”


리안의 심정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케이드가 덧붙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거야 이제부터 네 귀로 직접 들을 일이고.”


어느덧 케이드는 한 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한발자국 늦게 다다른 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케이드가 본채 곳곳을 소개해줄때 한번 보았던 곳이었다.


“여긴....”


“맞아. 브레일 백작가의 주인이자 내 형님이 계신 곳이지. 나머지는 안에 들어가서 들어라.”


케이드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약간의 간격 후에 입실 허락이 떨어졌다.


“왔군.”


책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브레일 백작가의 가주, 에릭 브레일.


“이렇게 대면하는 건 처음이구나. 리안이라고 했나?”


리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에 물든 은빛 머리칼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어딘가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먼저 사과를 해야겠군. 내 못난 동생 때문에 고생이 많겠어.”


브레일 백작의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정도는.”


“그래도 가끔 힘들 때가 있을 텐데?”


“그거라면 확실히....”


“꼬맹아, 죽고 싶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리안이 뒤를 흘겼다. 바로 뒤에 서 있는 케이드가 눈을 부라리며 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 죽어가던 놈 겨우 살려서 데려왔더니. 백번 절해도 모자랄 판국에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고....”


“제가요? 언제 그랬습니까?”


“지금 네가 바로 말대꾸를 하고 있잖아. 그리고, 내가 아까부터 그 망할 존댓말 좀 때려치우라고 하지 않았나?”


“알았어, 케이드. 주의할게.”


리안이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태연하게 받아치는 리안의 태도에 케이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책상 근처에서 싱거운 웃음 소리가 새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막 열띤 설전을 이어나가려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브레일 백작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삽시간에 인상이 바뀌었다.


“아, 미안하군. 요새 웃을 일이 없어서.”


“.......”


“할 말은 다 했나?”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이렇게 부른 이유 말인데.”


브레일 백작이 책상 위를 뒤적거리다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아, 여기 있군. 이름 리안. 도시 그린힐에서 반년째 용병으로 활동 중. 이전에는 브라알라스 곳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고. 맞나?”


“...맞습니다.”


“자네에 대한 보고는 이미 받았네. 변종 다이어울프를 토벌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것도. 브레일 백작가를 대표해 감사를 표하지.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어. 고맙네.”


브레일 백작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 에릭 브레일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니.”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이 리안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 시간부로 용병 리안은 엘도르 기사단장 케이드 브레일의 정식 종자로서 브레일 백작가의 일원이다. 이는 엘도르 기사단장 케이드 브레일의 요청 하에 나 에릭 브레일이 보증하는 바이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그쳤다. 리안의 코앞에 선 브레일 백작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브레일 백작가에 어서오거라.”


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곳이 너의 새 보금자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참 기분도 이상하지.


“뭐해?”


리안이 멍하니 반응이 없자 보다못한 케이드가 재촉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케이드와 손을 내민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백작을 번갈아보던 리안은 가까스로 악수를 받아들였다.


“...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는 어린 소년에겐 낯설기 그지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따듯했다. 마리의 죽음 이후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을 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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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1 +7 24.09.04 3,756 98 15쪽
42 가을날의 축제 3 +12 24.09.03 4,157 89 22쪽
41 가을날의 축제 2 +15 24.09.02 4,640 113 21쪽
40 가을날의 축제 1 +11 24.09.01 5,651 124 19쪽
39 엘리시온 9 +14 24.08.31 5,918 142 16쪽
38 엘리시온 8 +10 24.08.30 6,022 155 17쪽
37 엘리시온 7 +17 24.08.29 6,407 157 15쪽
36 엘리시온 6 +16 24.08.28 6,956 148 15쪽
35 엘리시온 5 +14 24.08.27 7,254 213 15쪽
34 엘리시온 4 +23 24.08.26 7,376 227 19쪽
33 엘리시온 3 +11 24.08.25 7,449 197 16쪽
32 엘리시온 2 +12 24.08.24 7,608 169 14쪽
31 엘리시온 1 +13 24.08.23 7,987 155 14쪽
30 두 번째 보금자리 10 +10 24.08.22 8,052 169 16쪽
29 두 번째 보금자리 9 +12 24.08.19 8,048 168 16쪽
28 두 번째 보금자리 8 +13 24.08.17 8,241 167 17쪽
27 두 번째 보금자리 7 +8 24.08.16 8,373 181 21쪽
» 두 번째 보금자리 6 +9 24.08.15 8,611 162 21쪽
25 두 번째 보금자리 5 +12 24.08.12 8,858 179 21쪽
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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