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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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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418,779
추천수 :
8,095
글자수 :
357,504

작성
24.09.03 22:20
조회
4,155
추천
89
글자
22쪽

가을날의 축제 3

DUMMY

엘리시온에서의 사건이 일단락된지 벌써 몇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리안의 일상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라이넬 시니스터의 말대로 백작가의 모든 사람들이 리안이 에스테반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만 같았다. 혹은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것 같기도.


“저녁 먹었어?”


“아니요. 군것질이라면 좀 하긴 했는데 저녁은 아직....”


“그럼 더 먹을 수 있다는 거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내 예상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세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리안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일행이라던가....”


“나는 애초에 일행같은 거 없는데?”


아예 모르는 것인지.


“그렇다는 건....”


“당연히 처음부터 너랑 같이 다니려고 했지. 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오려고 그래?”


“조금요.”


“정말?”


아니면 알고도 눈을 감아주는 것인지.


“가자. 어머니한테 용돈도 넉넉하게 받아왔어. 먹고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다 사줄 테니까.”


세레나에게 이끌린 리안은 떠들썩한 축제 거리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시야 옆을 스쳐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불빛 사이로 휘날리는 환한 백금발이 있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축제 전날까지 세레나는 딱히 축제에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주일 전 세 소년과 미리 선약을 잡아둔 리안이었기에 아마도 세레나는 제 시녀인 릴리과 같이 다닐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 비밀로 한 거라면.


불빛이 흐려졌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건 마치 몽환적이면서 아늑한 꿈속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손목을 이끌고 나아가는 세레나의 뒷모습에서 초봄의 기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그때의 세레나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챙이 넓은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얀색이 참 잘 어울리는 아이라고. 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사실은 그냥 멍하니 바라보았던 핑계를 찾았을 뿐인데.


엘리시온의 대연회때와 비슷한 푸른색을 바탕으로 한 세레나의 옷차림은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흔들리는 두 발을 따라 나풀거리는 저 백금발 때문인지, 이따금 자신을 돌아보는 저 깊은 호수같은 푸른 눈동자 때문인지.


어느 쪽이든 좋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을날의 선물처럼 다가온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지금의 리안에겐 그거면 족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께서 또 기사님을 데리고 오셨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세레나와 종종 들리던 단골 빵집이었다. 푸근한 인상의 여주인은 두 사람을 보고 갓 구운 쿠키를 비롯한 디저트를 몇개 내어주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세레나는 쿠키를 받자마자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전부터 느꼈지만 세레나는 단 음식을 좋아했다. 특히나 디저트를.


근데 나는 이미 빵 먹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것도 잠시 리안은 얌전히 받은 쿠키를 깨먹었다. 이전에 이미 꼬치 구이를 비롯한 군것질을 꽤나 한 리안이었지만 한창 클 나이라서 그런지 먹는 양이 예전보다 확연하게 늘었다.


조금 과식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얘기였다. 빵과 쿠키같은 디저트는 엄격히 다르니까. 무엇보다 리안은 괜한 소리를 해 분위기를 깰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렇지? 우리 아가씨 입맛은 내가 잘 알지. 옆의 기사님은 어때요?”


여주인이 장난기 어린 질문을 던졌다.


“저 기사 아니에요. 아직 서임도 못 받았는데.”


리안이 쓰게 웃었다.


“아니야? 내가 착각을 했던 건가?”


“아뇨, 아주머니. 기사 맞아요. 내 기사.”


“그렇다는데요, 기사님? 어떻게 내 신작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


“하하... 아주머니 디저트야 항상 맛있죠.”


“아이고, 이런 극찬을. 서비스로 몇개 더 드려야겠네.”


돈을 건넨 세레나에게 손이 큰 여주인이 예쁜 포장지에 쌓인 과자 묶음을 쥐여주었다.


“세레나 왔니? 마침 제국에서 제철 과일이 들어왔는데. 주스가 아주 시원해. 한번 마셔봐.”


그 다음은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늘어진 과일 장수의 노점이었다.


“와아... 신기하다. 전에는 못 봤는데 이건 뭐예요?”


“제국산 마도구지. 요상하게 생겼지? 이래 보여도 마석을 넣으면 알아서 냉각시켜주거든. 꽤 비싼 놈이야. 어떻게, 한잔 할래?”


“네. 한잔 주세요. 아니, 두잔 주세요.”


“예이, 알겠습니다. 자, 여기.”


손에 들린 과자가 아직 남아 있는데 난데없이 주스가 추가됐다. 리안이 빤히 세레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사실 근사한 식당을 가려고 했는데... 예약이 꽉 차있었거든.”


“식당이라면 예전에 갔던 그곳이요?”


“아니, 다른 곳. 거기도 예전에 갔던 곳만큼 평이 좋은 곳이거든. 똑같은 곳을 두번 가면 좀 그렇잖아?”


“.......”


“그런데 예약이 한달 전부터 다 차있더라구.”


“아가씨라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없던 자리도 만들어 줄 것 같은데.”


그 말대로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세레나에게 식당의 예약이 다 찼다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페리아의 실세중의 실세라는 세레나의 이름을 앞세우면 그깟 식당의 자리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까지 그 생각을 했는데.”


숨결이 간질이는 거리까지 다가온 세레나가 귓가에 대고 소근거렸다.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


“식당 안에서는 이렇게 손잡고 다닐 수가 없잖아?”


한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있는 사이에 세레나가 또다시 리안을 이끌고 축제의 한복판을 거닐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세레나에게 맞추는 게 아닌 순수하게 축제를 즐기는 자신이 있었다.


“역시 여기가 제일 사람들이 많네.”


중앙 광장에 들어서자 원래도 떠들썩한 분위기가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공간을 과하게 차지하지 않게 일정 간격으로 늘어진 노점들과 분수대 밑에서 노래하는 음유시인. 그리고 아이들에게 특히나 인기가 많은 광대가 신기한 묘기를 뽐내고 있었다.


리안은 그 풍경을 어딘가 멀리서 바라보듯 응시했다. 이 페리아라는 도시에서 거주한 지 어느덧 일년에 가까워지는데, 계절마다 변화하는 중앙 광장의 모습은 매번 색다른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저기....”


리안이 손가락으로 광장의 어떤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줍은 표정을 한 익숙한 얼굴의 두 남녀가 있었다.


“어, 릴리랑 엘리엇?”


“아가씨?”


“오, 리안!”


반색한 상대쪽에서도 리안과 세레나를 보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축제 잘 즐기고 있어?”


“네. 엘리엇은요?”


“나야, 뭐....”


엘리엇이 말끝을 흐렸다. 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세레나가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럼 그렇지. 뭐 하나 했더니 둘이 데이트하고 있었어?”


“예... 예?”


“아, 아니에요, 아가씨! 그냥 엘리엇 경이랑은 아주 우연히, 우연히 만나서....”


“흐음....”


엘리엇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뺨을 붉힌 릴리가 거세게 손을 휘저으며 부정했다.


침음하는 세레나가 둘의 행색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원래부터 옷을 입는데 감각이 있는 엘리엇이었지만 오늘 누가봐도 평소보다 멋부린 티가 났다.


릴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레나의 치장을 봐주기 전부터 데이트의 준비를 전부 마친 그녀는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절로 끌어모았다.


“수작부리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세레나가 엘리엇에게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오해입니다, 아가씨. 수작이라니요....”


“그럼?”


“그러니까 이건... 우연에 의한 거라고 할까, 운명이라고 할까....”


“우, 운명....”


변명하듯 중얼거린 엘리엇의 말에 릴리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리안.”


“네.”


“가자.”


“네?”


“여기 더 있어봤자 방해야.”


멍청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리안과 세레나는 분수대 근처의 음유시인 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지. 물러가라, 악귀야! 감히 이 땅이 어디인지 아느냐!”


“.......!”


“내가 있는 한 그 누구도 브라알라스를 침범할 수 없으리라. 내가 바로 브라알라스의 소드마스터, 라이넬 시니스터다!”


“와아아아아!”


때마침 이야기가 끝나고 있었다. 감미로운 음유시인의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기 무섭게 열중해서 듣고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 감사합니다. 이 미천한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구경하던 이들이 주머니에서, 또는 품안에서 동전을 꺼내 던졌다. 세레나도 그들의 행동에 동참했는데, 무려 동화가 아닌 은화를 던졌다.


“아가씨?”


“원래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아직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는데요.”


“미리 낸 셈치지 뭐.”


짧은 시간에 모자가 수북해졌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음유시인이 다시금 자신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류트를 품에 안았다.


“다음! 다음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럼 이번에는 끝내 복수를 성공한 한 복수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오오오!”


아이들이 다같이 박수를 쳤다. 그러나 음유시인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자 약속이라도 한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윽고 줄을 튕기는 손가락의 흐름을 따라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옛날 한 아이가 살았네.


유달리 총명한 그 아이는 어렸을때부터 가문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


하지만 세상은 거친 법!


이웃 국가에 의해 아이의 가문은 한순간에 망해버리고 말았다네.


홀로 살아남은 아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슬픔에 잠겨도 메마른 현실은 바뀌지 않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이는 맹세했다네.


내 남은 삶을 복수를 위해 바치리라! 내 가문과 가족을 죽인 이들을 손수 심판하리라!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라.


어느덧 성인이 되었네.


아이는 어릴 적부터 뛰어났지.


금방 훌륭한 기사가 되었네!


명예를 쌓고, 이름을 널리 알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찾았네. 새로운 가족도 찾았지.


애정이 고팠을까,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을까.


그들은 그를 따듯하게 맞아주었네. 잃어버린 보금자리를 되찾은 기분이 들었지.


하지만 착각은 잠시일 뿐.


그렇게 행복을 찾는 줄 알았으나, 그는 그렇지 못했지.


그의 가슴 속 응어리진 분노는 평생 안고 갈 응어리이자 원죄였으니.


복수! 내 삶, 내 생명의 이름!


하루아침에 떠난 그를 누가 붙잡을 수 있었을까. 그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부디 길을 열어다오.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그의 가문을 멸문시킨 나라는 세력을 더 키워 제국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할까. 복수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네.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그 손에 묻혔지.


복수라는 일념 하에 걸어온 길은 피로 얼룩진 길.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그때 한 여인이 말했지.


살아요, 당신. 사랑해요, 당신.


정신을 차렸을 때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그녀는 죽어있었다네.


자신 대신 적의 창칼을 맞고 숨을 거두었지.


한순간에 벌어진 일, 두 눈에선 씻을 수 없는 피눈물이 흘렀네.


자신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


대체 어느 선택이 정답이었나. 복수를 잊었어야 했나.


하지만 신은 무심해 답은 돌아오지 않았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길은 하나.


죽을 때까지 죽인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생명을 불사르리라. 내 삶, 내 원죄여!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지만 희열은 찰나에 불과해.


남은 건 타다 남은 복수심과 온몸을 옥죄이는 회한.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돌이킬 수 없으니.


그는 끝내 복수를 이루고도 행복하지 못했다네.


더욱 더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


스러진 제국 위로 피어난 한 송이의 붉은 꽃.


그녀가 선물한 검 위로 피어난 그 꽃은 유독 새빨갰지.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꽃말 만큼이나.


“.......”


마지막 소절을 끝으로 채 사라지지 않은 음의 잔향이 분수대 주변을 맴돌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건, 여자건. 전과 달리 다들 이야기의 여운을 곱씹고 있었다.


“저, 저기! 그 기사님은 어떻게 됐나요? 다시 행복을 찾아 떠난 건가요? 아니면....”


한 아이가 손을 들어 물었다. 그 말에 공감한 건지 구경하던 이들이 하나같이 눈빛을 빛내며 음유시인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음유시인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끝을 흐렸다.


“이후의 이야기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잃은 그가 복수의 허무함에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었다고도, 아니면 검을 내려놓고 모든 마음의 짐을 덜어낸 후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고도 하죠.”


“.......”


“그러니까,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 아닐까요? 슬픈 결말도, 기쁜 결말도. 이 이야기의 끝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요.”


“죽었을 겁니다.”


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레나가 눈을 크게 뜨고서 옆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죽었을 거라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은 음유시인이 또다른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사는게 고통이니까요.”


“.......”


“살아있는게 고통이니까. 현실이 지옥이니까. 죽음이라는 이름의 안식으로 도망친 겁니다. 텅 빈 공허뿐인 끔찍한 미래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럼 처음부터 복수를 하지 않으면 되잖아.”


불쑥 튀어나온 의문에 세레나는 아차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소년의 옆모습은 어딘가 쓸쓸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게요. 처음부터 복수를 하지 않으면 될 것을.”


리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복수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인데. 끝내 남는 건 허무함 뿐인데.....”


때마침 불꽃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탄성 아래 사람들의 얼굴이 희게 물들었다.


***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쪽이야, 이쪽!”


불꽃놀이가 시작되자 세레나는 리안을 데리고 어느 한 장소를 향했다. 축제의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불꽃놀이고, 그 불꽃놀이를 잘 보기 위한 명당은 남쪽 주택가의 언덕이라고 에반이 말했었다.


그런데 세레나가 향하는 곳은 남쪽의 언덕이 아니었다. 설마 하는 생각도 잠깐, 그 장소가 자신이 아주 잘 아는 곳임을 깨달은 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래도 됩니까?”


“괜찮아. 경비도 없는 걸.”


자연스럽게 열쇠를 꺼낸 세레나가 시계탑의 잠금쇠를 풀었다. 희끄무레한 달빛에 잠긴 내부는 축제의 열기가 닿지 않아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리안과 세레나는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하나씩 올랐다. 침묵 속에서 계단 오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약간은 서늘한 초봄의 날. 그때와 똑같이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리안은 까마득하게 보이는 바닥을 보고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세레나는 항상 그랬다.


나와는 다르게 늘 긍정적인 아이.


누군가를 죽여본 적도 없고,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도 없는.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이미 더럽혀진 자신과 정 반대인 그런 아이.


“거의 다 왔어. 힘내.”


세레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높이가 높아질수록 내려오는 달빛이 짙어졌다. 다시금 아래를 내려다본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가끔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되기를 갈망해왔다. 어린 자신은 너무나 무력했고, 성인이 되어 힘이 생긴다면 더 이상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발로된 욕망이었다. 마리가 죽고 나서 홀로 대륙을 방랑할 때도 그 욕망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12살이 된 리안은 전보다 강했고, 대담했고, 첫 살인 때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에 벌벌 떨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제국과 브라알라스가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고향인 에스테반 공국의 수도 그레이스터는 제국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 땅을 되찾아 죽어간 가문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건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낙인이자 원죄였다.


그러니까.


라이넬 시니스터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렀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꼭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저 두려움 속의 태연을 가장했다.


어린 소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브라알라스는 이제 연합이 아닌 연방이었지만, 여전히 군부와 평의회 내부의 파벌과 알력 다툼은 존재했다. 에스테반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생존자인 자신을 무작정 반기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당신들은 달랐지.


케이드는 엘리시온을 떠나기 전 말했다. 네 과거가 어찌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아무것도 묻지말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에 리안은 깨달았다.


다 알고 있었구나. 당신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했다. 케이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브레일 백작의 동의나 합의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정원에서의 일도 그랬다. 세레나는 그날 이후 변함없이 리안을 대했지만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의심이 피어올랐다.


너도 내가 에스테반의 후계자라는 걸 알고 있을까.


다 알고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걸까.


전자라면. 다 알고 눈을 돌리는 거라면.


그렇다면....


“와아....”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닥쳤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두 사람은 시계탑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탁 트인 밤하늘 위로 각양각색의 불꽃들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시계탑 꼭대기의 난간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주홍색으로 바뀌었다. 주홍색의 난간은 또다시 푸른색이 되었고, 푸른색의 난간은 다시 주홍색이 되었다가 새하얀 흰색이 되었다. 그 모든 순간의 한복판에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예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세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네요. 엄청 예쁘네.”


“역시 올라오길 잘했다. 바로 앞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 같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요.”


“그치? 꼭 우리 둘만의 전용 특등석 같아.”


“특등석?”


세레나가 리안을 돌아보았다. 리안 역시 마찬가지로 세레나를 돌아보았다.


퍼엉!


발밑에서 재차 불꽃이 솟아올랐다. 도시 곳곳에서 쏘아올린 불꽃은 페리아를 굽어보듯 세찬 빛을 뿌렸다. 세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노란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안은 어딘가 오묘한 빛깔을 띠는 그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떠날 거야?”


퍼엉!


다시 불꽃이 터졌다. 불어온 한줄기 바람에 세레나의 백금발이 휘날렸다.


“떠나다니....”


“또 같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중얼거림과 함께 세레나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불현듯 내던진 그녀의 질문에 리안은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흘러가듯 내뱉은 세레나의 마지막 말이 이상하리만큼 귓가에 오래 남았다. 스치는 바람 소리도, 터지는 불꽃의 소음도, 적막 속에 잠긴 이 나른한 분위기도. 멀게 느껴졌다. 단지 한없이.


모르겠다.


끝내 리안이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나의 미래를 모른다. 내가 어디 있을지, 뭘 하고 있을지.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조차 모른다.


단지 과거에 매여 살았다. 언젠가 있을 복수를 위해 살았다. 내 것을 두번이나 앗아간 제국에 대한 증오로 살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죽지 못해 살았다.


그래서 7년간 날카롭게 벼려온 증오가 무뎌질 때 리안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을 품어준 브레일 백작가에 대한 감사함과 은연중의 기쁨과는 별개로 어딘가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했다. 참으로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아가씨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세요?”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고?”


“네. 아무거나 좋아요. 멋진 숙녀가 되고 싶다던지, 아니면 브레일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어 이 백작령을 훌륭하게 다스리고 싶다던지....”


“글쎄...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면 딱 잘라 대답하기가 그런데.”


“왜죠?”


“너무 많아서. 꿈이 너무 많아서 하나만 고를 수가 없어.”


“그 꿈에 제 미래도 있나요?”


한순간 세레나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저도. 저라는 존재도 아가씨의 꿈 속에 존재하나요? 옆에 있나요?”


단 한 번.


“브레일 백작가라는 그림 안에 제가 들어가도 되는 걸까요? 같이 설 수 있는 걸까요? 아주 작게나마라도. 아니, 희미하게라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세레나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리안이라는 소년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리안은 어떻게 생각해?”


“솔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그럼 그걸로 좋다고 생각해.”


리안이 조금은 놀란 눈으로 세레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가족은 한번도 널 거절한 적 없어. 내친 적도 없고.”


세레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말대로 밀어내는 건 리안 한명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그걸로 좋다고 생각해. 어찌됐건 여지가 있는 거잖아. 나도, 우리 가족도, 우리 가문도. 네게 돌아올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면 그걸로 좋아.”


“.......”


리안은 몇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세레나의 눈이 맑았다.


눈이 부실 만큼이나. 첫 만남 때 그랬던 것처럼. 초봄의 기억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내년에도 또 같이 왔으면 좋겠네.”


퍼엉!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최후의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그 불꽃은 이전까지의 모든 불꽃을 합한 것만큼이나 크고 밝게 타올랐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울려퍼졌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리안은 한동안 도시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랐다.


내년에도 이 풍경을 같이 볼 수 있기를.


부디 이 평화가 영원하기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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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소드마스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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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제목바꿉니다-대공가의 소드마스터 24.09.01 519 0 -
공지 매일 저녁 10시 20분 연재입니다. +1 24.08.10 6,118 0 -
48 겨울 사냥 2 +14 24.09.10 2,730 54 19쪽
47 겨울 사냥 1 +12 24.09.08 2,961 77 18쪽
46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4 +10 24.09.07 3,037 84 18쪽
45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3 +10 24.09.06 3,258 85 17쪽
44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2 +11 24.09.05 3,435 108 18쪽
43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1 +7 24.09.04 3,756 98 15쪽
» 가을날의 축제 3 +12 24.09.03 4,156 89 22쪽
41 가을날의 축제 2 +15 24.09.02 4,640 113 21쪽
40 가을날의 축제 1 +11 24.09.01 5,651 124 19쪽
39 엘리시온 9 +14 24.08.31 5,918 142 16쪽
38 엘리시온 8 +10 24.08.30 6,022 155 17쪽
37 엘리시온 7 +17 24.08.29 6,407 157 15쪽
36 엘리시온 6 +16 24.08.28 6,956 148 15쪽
35 엘리시온 5 +14 24.08.27 7,254 213 15쪽
34 엘리시온 4 +23 24.08.26 7,376 227 19쪽
33 엘리시온 3 +11 24.08.25 7,449 197 16쪽
32 엘리시온 2 +12 24.08.24 7,608 169 14쪽
31 엘리시온 1 +13 24.08.23 7,987 155 14쪽
30 두 번째 보금자리 10 +10 24.08.22 8,052 169 16쪽
29 두 번째 보금자리 9 +12 24.08.19 8,048 168 16쪽
28 두 번째 보금자리 8 +13 24.08.17 8,241 167 17쪽
27 두 번째 보금자리 7 +8 24.08.16 8,373 181 21쪽
26 두 번째 보금자리 6 +9 24.08.15 8,610 162 21쪽
25 두 번째 보금자리 5 +12 24.08.12 8,858 179 21쪽
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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