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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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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418,806
추천수 :
8,095
글자수 :
357,504

작성
24.08.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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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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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글자
21쪽

두 번째 보금자리 5

DUMMY

케이드가 던진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용병 생활을 하며 상당한 돈을 모아왔던 리안으로서도 보기힘든 거액이었다.


아니, 단순히 거액이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랐다. 주머니 속의 금화들은 일반적인 금화가 아니라 한닢에 금화 10개의 가치를 하는 대금화였으니까.


“이걸로 검을 바꿔오라고요?”


그렇기에 멋대로 반문이 튀어나온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리안에 손에 들고있는 주머니만 가지고도 웬만한 대도시의 저택 하나는 거뜬히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만한 금액을 오직 검을 구하는데 쓰다니. 리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 너 검 부러졌잖아?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케이드가 오른손을 휘휘 저었다. 리안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다시금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왜, 부족하냐?”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겨우 검 한자루 구하는데 이정도로 돈이 필요하지는....”


“필요해. 오히려 부족할 거다.”


리안의 말을 자른 케이드가 단언했다. 의자에 깊숙히 등을 기댄 그는 리안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보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리안의 검은 완전히 반으로 부러져있는 상태였다.


“그때 검기를 봐서 하는 말인데... 네 마나, 칼날을 갈아먹지?”


“...알고 있었습니까?”


“검이 닿는 순간에 바로 알았지. 뭣보다 그 검, 네가 기절해있을때 좀 확인해봤는데, 꽤나 고급품이더라. 어디 이름없는 대장장이의 작품이라기엔 상당히 실력이 좋아서 말이지.”


“.......”


“그런 만들어진지도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상등품의 검이, 칼날이 다 나가다 못해 반으로 부러졌다? 내가 마나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훈련용 가검으로 그렇게 될 리가 없잖아. 검신에 균열이 한두개가 아닌 것도 그렇고, 원인이라곤 네 그 보라색 마나밖에 없지. 스타 시커들의 마나는 각각 고유한 성질을 지니니까.”


“그래도....”


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지켜보던 케이드가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마라. 그거 공짜 아니니까.”


“.......”


“미리 가불했다고 생각해. 원래는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하고 나서 받아야 되는데....”


미약하게 눈살을 찌푸린 그가 얼버무렸다.


“어쨌든, 나중에 갚아야 하니까 그리 알아. 검은 검사에게 있어서 생명이나 마찬가지지. 네 그 지랄맞은 마나를 버티려면 초장에 비싼 놈을 구해야지, 검이 부러질까봐 마나도 제대로 못 쓰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이 어딨어?”


“.......”


“대장간은 저기 도시로 내려가면 강철 망치라고 페리아 제일의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곳이 있다. 그 늙은이가 성격은 더러워도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해. 일단 무조건 튼튼한 놈으로 구해오고, 정 안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따로 주문을 넣어라. 그쪽 방면은 전문가니까, 가면 알아서 해줄거야.”


“그 대장간이 어디있는지 모르는데....”


리안이 작게 항변하자 케이드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눈앞의 세 소년을 가리켰다.


“길 안내는 이놈들이 해줄 거다. 마침 나이도 비슷하니 잘 됐네.”


“단장님!”


난데없이 고함 소리가 들렸다. 리안과 같이 케이드의 말을 경청하던 검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목소리 좀 줄여라. 귀청 떨어지겠다.”


“전 안 갑니다. 절대로 안 가요!”


검은 머리의 소년이 씨근거렸다.


“진짜로 안 가, 에반?”


“자존심 부리지 마라. 새 친구다. 네가 아니면 나 혼자라도 안내한다.”


“.......”


양옆의 두 소년이 검은 머리의 소년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둘은 리안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흥미와 호기심이 더 컸다.


그러나 검은 머리 소년의 열은 식을 줄을 몰랐다.


검이라니.


그것도 막 들어온 신입 놈한테!


워커들 중에서는 창이나 다른 병장기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을 선호했다. 일반적인 보병에게는 창이 훨씬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마나를 각성한 시점부터 범용성이 좋은 검의 장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은 일반적인 무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름난 명장들이 만든 검을 평생 안고 갈 애검이라며 제 아내보다 소중히 여기는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임 직후 받는 검은 영혼의 동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그런 검을 이제 막 들어온 신입 놈이 가져간다?


심지어 길 안내를 자기보고 하란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평생 부족함 없이 자라 또래에선 적수가 없었기에 더 그랬다.


“삼촌, 나도 가도 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세레나가 눈치없이 툭 내뱉었다.


“안 돼. 그보다 지금 수업 시간 아니냐? 여긴 또 왜 왔어?”


“이 애, 내가 데려왔거든?”


세레나가 리안의 등 뒤에 서서 어깨를 가볍게 감싸쥐고 앞뒤로 흔들었다. 리안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얌전히 입만 다물었다.


“정 사람이 없으면 내가 갈게. 나보다 이 도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 그놈 핑계로 놀러다닐 네 생각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눈을 가늘게 뜬 세레나가 쳇, 하고 혀를 한번 차더니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할 말 다했으면 너희들도 어서 가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 없으니까, 부족하면 내 이름으로 외상이라도 달아둬.”


“.......”


“꼬맹아, 나머지 얘기는 돌아와서 해주마. 네 앞으로의 처우라던가, 내기의 내용이라던가... 알아들었으면 빨랑빨랑 나가. 나도 바쁘니까.”


귀찮은 듯 문밖으로 손짓한 케이드는 그 말을 끝으로 처리하던 서류를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네 명의 소년들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연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연갈색 머리의 소년이 검은 머리의 소년을 쳐다보았다.


“투덜대지 마라. 자꾸 늦으면 해 떨어진다.”


검은 머리의 소년이 침묵하자, 보다못한 덩치 큰 소년이 채근했다.


“덩크 말이 맞아. 가자, 에반.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자고.”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들었지? 강철 망치는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따라와.”


세 소년이 돌아섰다. 앞서나가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안은 케이드를 한번 흘기고선 집무실을 나왔다. 돈은 둘째치고 당장 쓸만한 검을 구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엘도르 기사단장이 직접 주선해준 대장장이.


겉으론 내색하지 않아도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소년들을 뒤따르던 리안의 걸음이 빨라졌다.


***


브레일 백작령의 수도인 페리아는 거대했다. 칼로스 왕국의 방패이자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세워진 도시. 마차의 창 너머로 본 풍경과는 또다른 생경한 느낌에 리안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이름은 핀이야. 그리고 이쪽 덩치 큰 애는....”


나이가 비슷한 네명의 소년은 나란히 도시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자신을 핀이라고 지칭한 연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나머지 소년들을 소개했다.


“덩크다. 잘 부탁한다.”


덩크가 큼지막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리안의 또래라면 십대 초반일 텐데, 겉으로 보이는 덩크의 체격은 도저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봐도 스물은 넘어 보이는데, 뭘 잘못 먹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리안은 쓸데없는 상념을 밀어냈다. 이 도시에 얼마나 머무르게 될 지는 모르지만 지금 리안은 브레일 백작가에 신세지는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사서 나쁠 건 없었다.


—아무튼, 네가 생각한 것보다 우리 가문이 대단하다는 이야기야. 적어도 손해볼 건 없으니까 그렇게 날 세우지 마라.


불현듯 케이드의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날 세우지 말라니. 내가 그렇게 까칠했나.


짧게 고민한 리안은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부드러운 어조로 덩크의 손을 맞잡았다.


“리안이야. 편하게 불러도 돼.”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이 자신처럼 거칠었다.


“그래, 리안. 손이 굳세군. 좋은 손이다.”


“......”


“전사의 손이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지.”


흐음, 흐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서 몇번이고 수긍한 덩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핀이 팔꿈치로 자신의 옆에 있던 에반을 툭툭 두드렸다.


“에반, 넌 안해?”


“하긴 뭘 해? 내 임무는 길 안내야. 잡담같은거 안 해.”


검은 머리의 소년 에반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태도였다.


“미안해, 리안.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너한테 한방에 나가떨어진 게 충격이 좀 컸나 봐. 이래 보여도 애는 착하니까....”


“착하긴 뭘 착해!”


“그럼 아니야?”


“에반, 나쁘군. 성격이 아주 꼬여 있어.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도 전사의 덕목이다.”


“아, 진짜! 착해, 착하다고! 인사하면 될 거 아니야!”


길 옆으로 마차가 한 대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그를 피한 에반이 두어번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내 이름은 에반 로렌스. 아버지는 엘도르 기사단이 아닌 브레일 기사단의 단장이고, 핀이랑 덩크의 아버지는 엘도르 기사단원 출신이야.”


브레일 기사단은 정예 기사단인 엘도르 기사단을 제외한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기에 리안은 내심 납득했다.


확실히 저 정도 실력에 엘도르 기사단의 견습 기사라면 친부가 기사가 아닌게 더 이상할 것이다. 마법사란 대대로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에반.”


“.......”


“좋은 이름이네. 편하게 불러도 상관없겠지?”


리안이 방금 덩크가 한 것과 똑같이 에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에반.”


찰나간 에반의 얼굴에서 갖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래... 뭐, 네가 그렇게까지 한다면 인사를 안 받아줄것까진 없지.”


에반은 못 이기는 척 리안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래도 착각하지는 마. 이전에 허무하게 진 건 단순히 내가 방심해서 그런 거니까. 물론 마나를 쓴다면 이길 수 없겠지만, 순수 검술이라면 나도 지지 않는....”


“다 왔다.”


덩크가 에반의 말을 잘랐다. 하던 말이 중간에 끊긴 에반이 덩크를 째려보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새 네 소년은 한 대장간 앞에 서 있었다. 나무로 된 간판이 투박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리안이 길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로 막 나왔을 땐 지나가는 마차와 사람으로 대로가 북적거렸는데, 꽤나 안쪽으로 깊게 들어왔는지 길도 작아지고 소란스럽던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가 강철 망치다.”


리안과 마찬가지로 가게를 올려다보던 덩크가 말했다.


“발터 영감님은 페리아 최고의 대장장이다. 실력도 확실하다. 분명 네가 만족할만한 검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덩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는 굳은 믿음이었다.


“확실히. 영감님이 딴건 몰라도 철 다루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긴 해. 브라알라스에서 어지간히 유명한 대장장이들도 영감님한테는 안 되니까.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그렇지....”


“지금 시간이 몇시지? 안에 계실지 모르겠네....”


에반과 핀을 포함한 세 소년이 중얼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리안은 한발짝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다 뒤늦게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조명빛 아래 죽 늘어진 매대에 병장기가 늘어져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을 둘러보던 리안은 근처 벽에 걸려있는 검을 하나 집었다. 조심스럽게 검을 쥐자 손안에 감기는 감각이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슬며시 칼자루를 당기니 맑은 은색 빛깔과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났다.


척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고급품.


“야! 넌 뭘 멋대로 만지고 있어?”


리안의 기행을 발견한 에반이 놀란 눈을 하며 기겁했다.


“미안. 만지면 안 됐나?”


“아니, 나야 상관은 없는데. 영감님한테 잘못 걸렸다간....”


“어르신! 계세요?”


카운터 앞까지 다가간 핀이 소리쳤다. 리안은 얌전히 칼날을 집어넣고선 전과 같이 벽에다 검을 걸어두었다. 감쪽같군. 리안이 혼자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가게 제일 안쪽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레 나타난 노인은 하얗게 센 머리를 귀 밑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집스런 눈매와 작은 체구와는 달리 걷어올린 팔뚝은 어지간한 장정들 못지않게 굵었다. 탄탄한 근육과 불거진 핏줄 위로 땀이 흥건했는데, 여기저기 난 오래된 흉터는 마치 전장을 수백번 전전한 역전의 용사같이 보였다.


“니미럴, 지금 시간이 몇신데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지랄은... 음?”


불평을 쏟아내던 노인의 눈동자가 가게 안에 들어온 네 소년을 보고 휘둥그레졌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발터 영감님. 오랜만이다.”


“니들이 여긴 웬일이냐?”


“그게....”


핀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꼴을 보니까 뜬금없이 마나를 각성했을리는 없고... 혹시 케이드 그놈이 심부름이라도 시켰냐?”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흥! 니들같은 애송이들 생각이야 뻔하다 못해 훤하지. 처음보는 얼굴이 껴있는 걸 보니 기사단에 새로 들어온 신참이라도 되나 보지? 장비 수리라도 하러 왔냐?”


“수리는 아니구요. 검이 한자루 필요해서요.”


“검? 누가? 견습 기사라면 아직 훈련용 검으로 충분하잖아. 저번에 니들에게 내준 검도 일개 종자가 쓰기에는 차고 넘치는 물건이었단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니들 진짜 마나를 각성하기라도 한 거냐? 서임 예정이라도 잡혀 있어?”


“그게 아니라... 아, 리안!”


한꺼번에 몰아치는 노인의 질문에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하던 핀이 반색했다. 어느덧 뒤쪽에 있었던 리안과 에반이 핀이 서 있는 카운터까지 다가와 있었다.


“볼일이 있는 건 그쪽이 아니라 저입니다, 어르신.”


“넌 또 누구냐?”


“리안이라고 합니다.”


리안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리더니 대뜸 볼멘소리를 했다.


“이름을 물어본게 아니잖아, 이 썩을 애송아. 소속을 물어본 거다 소속을.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너도 이놈들처럼 엘도르 기사단 소속 견습 기사냐? 아니면 일반 기사단?”


노인이 어떤 질문을 하던 침착하게 대꾸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더 리안은 막상 노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리안의 신분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2위계 마법사, 스타 시커, 홀로 브라알라스를 방황하는 어린 용병, 브레일 백작가의 꼬마 손님.


전부 아니다. 리안은 속으로 자문했다.


난 대체 누구지?


“쯧.”


리안이 말없이 침묵하자 보다못한 노인이 혀를 찼다. 눈앞의 소년은 무슨 상념에 빠지기라도 한 건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유난히 시선을 끄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 가느다란 속눈썹과 선이 고운 이목구비는 기사보다는 저명한 학자에 가까웠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어디 지체 높은 명문가의 귀공자가 따로 없는데, 보라색 눈동자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빛은 몇번이고 사선을 넘은 백전노장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후우... 검을 한자루 구한다고 했냐?”


반응이 없는 리안 대신 핀이 말했다.


“네? 아, 네. 이 리안이라는 친구가 며칠 전에 새로 들어왔는데, 이전에 쓰던 검이 부러져서요.”


“검이라면 지천에 널린게 훈련용 검인데 뭘 또 여기까지 와?”


“그 지천에 널린 훈련용 검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서....”


“버틸 수가 없다? 일단 그 부러졌다는 검 좀 보자.”


노인이 리안에게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리안은 허리춤의 검을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지체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반으로 잘린 검신이 은은한 조명 아래 허물없이 드러났다.


“흐음....”


침음하던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 자체는 상당한 걸작이야. 근데 상태가 개판이군. 아주 구역질이 나와. 반으로 부러진 건 그렇다 쳐도 칼날은 왜 이 모양이냐? 어디 도축하는데 쓰기라도 했냐?”


“.......”


“대충 보니 진철로 만든 검이군. 보통 기사들의 검은 마나 전도율이 좋은 은철을 주로 사용하지. 진철은 마나 전도율이 나쁜 대신 내구성 하나는 기가막힌 놈이라, 군용으로 수요가 꽤 있는 놈인데....”


노인이 반으로 잘린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척 봐도 만든지 얼마 안 됐군. 쓴지 몇달이나 됐냐?”


“일주일 쯤....”


“일주일? 일주일이라고? 진철로 만든 검을, 일주일만에 이 꼬라지를 만들어?”


노인이 미간이 깊게 패였다. 떨리는 입가를 따라 수염이 요동쳤다.


“영감님, 걔 마법사야.”


“맞다. 마법사다. 그것도 검기를 사용하는 2위계 마법사.”


“어디 험하게 굴려서 부러진 게 아니라, 마나를 못 버텨서 부러진 거예요. 단장님이 저희를 직접 보내서 리안의 검을 구하라고 시킨 것도 그 때문이고요.”


세 소년이 각각 한마디씩 덧붙였다. 리안은 변함없이 뻔뻔한 눈으로 노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철 좀 다룬다는 장인들은 자존심이 굉장히 세다. 제프와의 인연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리안은 괜히 나서서 노인의 심기를 건드리기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그런 리안이 꼭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조금 치켜세워주니 세상 높은 줄 모르고 설쳐대는 철부지 어린애.


분노인지 당황인지 모를 표정으로 검과 리안을 번갈아보던 노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니들... 단체로 뭘 잘못 쳐먹기라도 한 거냐? 2위계 마법사라고? 이 애송이가 검기를 사용하는 2위계 마법사?”


“.......”


“하, 하하... 하하하하! 미친 놈들. 케이드 그놈이 날잡고 단체로 두들겨 패기라도 했다냐? 어디 머리라도 맞아서 정신이 오락가락 해? 2위계 마법사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흔한 용병 수준도 아니고, 이런 꼬맹이가 마나를 각성한 것도 모자라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2위계 워커라고?”


2위계 마법사는 17가문 직속의 정예 기사 수준이다. 그리고 자줏빛 눈동자를 가진 눈앞의 소년은 잘 쳐줘야 열다섯이 될까 말까해 보였다.


다채롭게 변화하던 노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애송아, 너 올해로 나이가 몇이냐?”


“...열둘입니다. 내년이면 열셋이 됩니다.”


“검이 필요하다고 했지?”


분위기를 살피던 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어르신.”


“이 진철로 된 검도, 니들 말대로라면 험하게 굴려서 이꼴이 된 게 아니라 네 마나를 못 버텨서 그런 거고.”


제 분에 못이긴 건지 카운터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노인이 검 한자루를 꺼내 던졌다. 리안은 얼떨결에 날아온 검을 낚아챘다.


“뽑아라.”


노인이 말했다.


“은철로 만든 검이다. 2위계 워커의 검기도 거뜬히 버티는 물건이지.”


“.......”


“저놈들 말이 사실이라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겠지. 2위계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진짜 기사라면 말이야. 규율대로라면 정식으로 서임 후 검을 하사받는 게 원칙이지만, 케이드 그놈이 직접 부탁했다고 했으니 특별히 예외적으로 네게 딱 맞는 검을 만들어주마.”


하지만.


딱 잘라 덧붙인 노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가 입만 산 가짜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감히 내 앞에서 기사를 사칭한 애송이였다는 셈이니. 생각이 바뀌었다면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해라. 특별히 몇대 쥐어박는 걸로 봐주마. 대신 네가 진짜 마법사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노인이 팔짱을 끼고선 허리를 쭉 폈다. 리안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세 소년은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브라알라스에서 손꼽히는 명장의 검을 얻을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마나를 버틸 수 있는 검이라면.


결심한 리안은 손에 쥔 검을 천천히 뽑았다. 가게 벽에 걸린 검들과 다르게 별다른 장식이 달려있지 않은 투박한 검은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베일 정도로 칼날이 날카로웠다. 리안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고서 검신을 위로 세웠다.


화아악!


의지에 따라 일어난 마나가 검날을 타고 선명한 자줏빛 광채를 피워냈다.


“스타 시커...? 진짜로 2위계 마법사라고?”


새하얀 수염 사이로 떨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 곳곳에 균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검이 부러지는 건 찰나였다.


쨍강!


맥없이 부러진 칼날의 반쪽이 삐걱거리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 실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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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엘리시온 9 +14 24.08.31 5,918 142 16쪽
38 엘리시온 8 +10 24.08.30 6,023 155 17쪽
37 엘리시온 7 +17 24.08.29 6,408 157 15쪽
36 엘리시온 6 +16 24.08.28 6,957 148 15쪽
35 엘리시온 5 +14 24.08.27 7,254 213 15쪽
34 엘리시온 4 +23 24.08.26 7,377 227 19쪽
33 엘리시온 3 +11 24.08.25 7,450 197 16쪽
32 엘리시온 2 +12 24.08.24 7,608 169 14쪽
31 엘리시온 1 +13 24.08.23 7,988 155 14쪽
30 두 번째 보금자리 10 +10 24.08.22 8,053 169 16쪽
29 두 번째 보금자리 9 +12 24.08.19 8,048 168 16쪽
28 두 번째 보금자리 8 +13 24.08.17 8,243 167 17쪽
27 두 번째 보금자리 7 +8 24.08.16 8,374 181 21쪽
26 두 번째 보금자리 6 +9 24.08.15 8,611 162 21쪽
» 두 번째 보금자리 5 +12 24.08.12 8,859 179 21쪽
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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