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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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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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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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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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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축제 1

DUMMY

리안이 케이드와 만난 이후 반년이 훌쩍 지났다.


그즈음 페리아에 가을이 찾아왔다.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은 쾌청할 정도로 맑은 푸른빛을 띠었다. 후덥지근한 밤 공기가 서늘하게 바뀌었다. 추수의 계절이 다가온 들판은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하얀 캔버스에 샛노란 물감을 뿌린 것 같았다.


여름이 끝나가는 페리아는 평소보다 더 활기를 띄었다. 그것이 고생했던 여름에 대한 반작용인지, 아니면 겨울을 코앞에 둔 찰나의 여유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사람들은 풍요로운 가을을 근심 없이 만끽했다.


활기찬 도시, 북적거리는 거리.


얼굴에 근심 하나 없이 웃음기 가득한 사람들과 여러 축제들.


그날 이후 엘리시온에서 일어났던 왕궁 침입사건은 서서히 잊혀졌다. 적어도 칼로스 왕국 최서쪽에 있는 페리아는 그랬다. 전쟁의 흉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사라져갔다. 제국과 브라알라스를 오가는 행상인들이 그 증거였다.


그 전에는 큰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대륙을 횡단하던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칼로스 왕국의 방패이자 관문 역할을 하던 페리아에 유동 인구가 부쩍 늘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두가 평화로운 계절을 누리고 있었다.


페리아에 거주하는 시민이든, 성벽을 수호하는 병사들이든, 교역을 위해 오가는 행상인이든.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랬다.


“으아... 왜, 왜 안 끝나는 거지? 분명 아까 세 더미는 해치우지 않았나...?”


집무실에 박혀 하루종일 펜을 놀리던 케이드가 책상에 얼굴을 묻고 침음했다. 그 말대로 케이드의 옆에는 아직 다 처리하지 못한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뭐긴 뭐야 가을이니까지. 축제가 얼마 안 남았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


케이드가 책상에 얼굴을 박은 채로 고개만 슬쩍 돌려 브레일 기사단장인 카일 로렌스를 노려보았다. 어렸을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이기도 한 카일은 케이드의 집무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들고 있던 서류더미를 추가로 책상에 내려놓았다.


축제, 축제 그놈의 축제.


“그러고 보니 오늘로 딱 일주일이군.”


지긋지긋하다 못해 끔찍하게까지 들리는 카일의 목소리에 케이드는 그만 눈을 꾹 감아버렸다.


조만간 페리아에서 가을 축제가 열린다.


모두가 기다려 마지않는 그런 축제가.


“다들 많이 기대하고 있던데.”


카일이 말했다. 추수를 기념하며 열리는 가을 축제는 온갖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한해의 가장 큰 축제이자 페리아의 명물이었다. 그때만큼은 검문도 느슨해져 시민들 뿐만 아니라 페리아에 묵고 있는 여행객들도 돈을 펑펑 쓰다 가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이때를 노려 페리아에 여행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흠 보자... 경비 배치랑 순찰 경로는 대충 끝난 것 같고. 이제 남은 건 중앙 광장의 노점 허가랑 검문 명단 정리인가.”


“.......”


“밤새서 작업한다는 가정하에 삼사일이면 대충 끝나겠군. 그 뒤에 남은 건 금방 해결 가능한 자잘한 일을 뿐이니. 불쌍하긴 하다면 좀 더 수고해라, 케이드. 애초에 서문 총책임자는 너잖냐.”


권리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안 그래?”


어쩐지 평소보다 얄미운 목소리로 카일이 말했다.


“그동안 실컷 놀았으니 이제 일할때도 됐지.”


“뭐?”


대꾸할 힘도 없어 얌전히 듣고 있던 케이드가 발작하듯 벌떡 일어섰다.


“놀아? 내가?”


붉은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튀었다.


“아닌가? 엘리시온에서 그 일이 있고난 뒤 또 며칠이 지나니까 방탕하게 놀면서 술을 아주....”


“놀긴 누가 놀아! 지랄하지 말라 그래!”


쾅!


케이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쌓여인던 서류가 잘게 흔들리고 가장자리에 있던 잉크병이 쓰러질락 말락 빙글 돌았다.


“성깔 하고는....”


카일은 익숙한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태도가 케이드의 심정에 기름을 부었다.


“내가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 망할 영감탱이가 날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알기나 해!”


“수정구로 너한테 질문 몇번 한 거? 설마 그거가지고 고생했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몇번? 몇번이라고?”


케이드가 갑갑해 죽겠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 리안 망할 꼬맹이 대신에 내가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그 썩을 영감이 나를 괴롭히다 못해 죽이려 들었다고! 사람 자고 있는데 억지로 통신이나 걸고...!”


사건의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엘리시온에서 일어난 일의 전말은 대충 파악되었다. 범인은 단 한명. 불멸기사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3위계 마법사였다.


덕분에 그러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케이드는 열심히 라이넬 시니스터의 물음에 응답해주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증인인 세레나와 리안을 대신한 이가 바로 케이드였다.


“네 종자잖냐. 리안 뿐만 아니라 아가씨 대신이기도 했고. 아니면, 아가씨의 삼촌이자 리안이 모시는 기사로서 그 정도도 못해주는 건가?”


“그건...!”


뭐라 반박하려던 케이드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확실히 근래 일이 바빠 리안에게 신경을 못 쓴 것은 사실이었다. 세레나는 그렇다 쳐도 리안은 원래 주기적으로 하던 검술 교습도 빼먹고 있으니.


“하....”


답답함에 케이드는 애꿎은 한숨만 쉬었다.


“애 키우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썩을 꼬맹이. 요즘 사춘기라고 내 말도 안 듣는데, 내가 노년에 다 늙어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개고생을 하는지....”


“보험 하나 들었다 쳐라. 누가 아냐? 나중에 소드마스터로 출세해서 네 앞으로 금은보화가 막 떨어질지.”


“소드마스터는 개뿔이. 그전에 과로로 뒤지게 생겼구만. 애당초 난 기사인데 왜 이런 사무 작업을 하고 있는 건데? 원래 형님이 해야하는 일 아닌가?”


“백작님은 이런 일 말고도 항상 바쁘시니까 네가 해야지. 안 그럼, 내가 하냐?”


“어.”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케이드... 진심이냐?”


“쓸데없이 훈수만 늘어놓을거면 일손이라도 좀 보태주던가.”


“거절하지.”


“망할 새끼. 그럼 꺼져.”


다시 자리에 앉은 케이드가 휘적휘적 손을 내저었다. 이러나 저라나 불평해도 결국 전부 해야할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동안 일에 대한 불평은 매번 해왔지만 결국 케이드는 마지막까지 일을 마무리했다. 한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누리는 혜택과 약간의 방종은 거기서 나왔으니까.


“뭐, 열심히 해라. 하다보면 끝이 보이겠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펜을 놀리는 케이드를 응시하던 카일이 뒤로 돌아섰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고 멈칫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애들이 다같이 강철 망치에 간 모양인데.”


“.......”


“그렇게 힘들면 좀 도와달라고 하지? 실무쪽은 몰라도 간단한 순찰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리안 그 녀석은 원래부터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으니까. 저번에 보니 전보다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던데....”


***


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리안의 검을 훑어보았다. 폼멜부터 시작해 칼자루와 크로스가드 그리고 은빛 칼날까지. 얼마나 집중했는지 귀 밑까지 늘어진 하얗게 샌 흰머리가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이따금 수염만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흐음....”


“어떻습니까, 발터 어르신?”


“전보다는 낫군. 이 정도면 대충 손봐서 쓸 수 있겠어.”


“후우... 그렇습니까.”


리안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달에 한번꼴로 검을 깨먹던 리안이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검을 부숴먹지 않았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일전에 엘리시온에서 세레나를 구하기 위해 다른 기사의 검을 멋대로 뽑아 사용했기에 더 그랬다. 리안의 마나를 머금은 그 검은 균열이 가 케이드가 따로 사과와 함께 배상을 해주었다.


“진철도 꽤나 비싼 금속이지. 아무리 대금을 브레일 백작가에서 댄다고는 해도 눈치가 보였을 테고. 안 그러냐?”


덕분에 한껏 잔소리를 들은 건 덤이었다. 리안이 쓰게 웃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노력으로 될 게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검기를 아예 못쓰는 것도 아니고, 검이 부러질까 마나를 제대로 불어넣지 못하는 건 이 대륙에 너 하나뿐일 거다. 아니, 하나는 아닌가.”


“역시 별철은 구하기가 힘들겠습니까?”


리안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걸 구하려고 아는 인맥이란 인맥은 전부 동원했는데, 낌새도 없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영감님이 이쪽 바닥에서 유명하다고는 해도, 누가 별철제 검을 순순히 넘겨주겠냐. 바보도 아니고.”


리안의 뒤, 한발짝 물러나 있던 에반이 비아냥거렸다. 핀과 덩크 그리고 에반과 함께 시내로 내려온 리안은 지금 넷이서 강철 망치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순수 진철로 만든 검을 매달 부숴먹는 것도 능력이지.”


“에반. 설마 아직도 리안이 그때 선물을 사오지 않아 삐진 거냐? 남자가 쪼잔하게 담아두는 건 좋지 않다.”


“그래, 에반. 리안이 일부러 안 사온 것도 아니고, 왕궁에 그런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시간을 내겠어. 이해해야지.”


“야, 니들....”


에반이 배신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치 믿었던 우군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핀, 덩크 니들이 그런말을 하면 안 되지. 니들도 아침 댓바람부터 나와서 나랑 같이 선물 사오라고 했었잖아! 특히 덩크, 너! 통수는 용서하지 않는다 뭐다 제일 시끄럽게 굴었으면서...!”


“흠.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만.”


“뭐라고?”


“하하....”


에반과 덩크가 서로 투덕거렸다. 이제는 일상이 된 광경에 핀은 리안과 마찬가지로 쓰게 웃었고, 페리아 최고의 대장장이인 발터는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 그만!”


“.......”


“싸울거면 저기 밖에 나가서 싸워라, 이 망할 애송이들아.”


덩크와 핀이 변명하듯 대꾸했다.


“흠, 그건 곤란하다 발터 영감님. 오늘은 우리도 볼 일이 있다.”


“죄송해요, 어르신. 이번엔 저희 검을 수리해야 해서....”


“그럼 얌전히 있다 가! 가뜩이나 일주일 뒤가 축제인데, 뭐이리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발터의 호통에 에반이 네 소년은 약속이라도 한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소년들을 한번 흘긴 노인은 다시금 경고를 준 뒤 네 자루의 검을 들고 가게 안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에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네. 생각해보니 일주일 뒤면 그토록 기다리던 가을 축제였지, 참.”


“축제?”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리안이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축제라는 게 정확히 뭘 하는 거야?”


에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리안. 너 축제가 뭔지 몰라?”


“아니, 알긴 아는데. 정확히 뭘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축제는 축제다. 다같이 웃고 떠들고 먹는다. 그리고 즐긴다.”


“그게 끝? 다른 건?”


“그게 끝이야. 보통 축제라는 게 다 그렇지 않아? 페리아의 가을 축제는 다른 지역의 축제보다 규모가 훨씬 크긴 한데....”


핀이 말했다. 여전히 리안은 이해가 잘 안간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리안이 아는 축제란 5살 이전에 겪었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 이후에는 제대로 된 축제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안 되겠네, 이거.”


세 소년을 번갈아보던 에반이 어딘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한번만 설명해줄테니까 잘 들어. 페리아의 가을 축제라는 건....”


가을 축제는 비단 시민들과 여행객뿐만 아니라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유동 인구, 활발한 거리의 분위기.


자연스럽게 매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점상이나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대호황이었다. 다른 상점들도 그보다는 못해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제국을 오가는 행상인들이 노점을 열고선 물건을 막 팔거든. 가격이 좀 비싸긴 한데 운이 좋으면 싸게 좋은 물건을 얻을 수 있단 말이지.”


“흠....”


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보다못한 덩크가 끼어들었다.


“에반 말이 맞다. 나도 예전에 아주 좋은 부적을 단돈 금화 한개에 산 적이 있다. 제국의 유명한 마법사가 직접 만든 부적이었지. 그러니 기대해도 좋다, 리안.”


“부적?”


리안이 되물었다. 핀이 미간을 찡그렸다.


“덩크... 그거 사기당한 거 아니였어?”


“핀. 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건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걸 판 상인도 그렇게 말했었다. 며칠간 운이 아주 좋았지. 음.”


덩크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덩크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리안이 시선을 에반에게 돌렸다.


“크흠! 아무튼.”


“.......”


“먹거리도 많고, 살것도 많고. 특히 중앙 광장에 노점거리랑 공연들이 참 많단 말이지. 서커스같은 것들은 기본이고, 경품을 걸고 하는 게임이나 음유시인의 노래도 질리게 들을 수 있어.”


작년에는 중부 지역의 푸른 늑대의 기사를 주제로 한 슬픈 노래가 대세였다.


“이번에는 아마 엘리시온에서 있던 일을 주제로 노래를 부르려나...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페리아 가을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불꽃놀이지.”


“불꽃놀이?”


“그래, 불꽃놀이. 마나를 저장해둔 마석을 곱게 갈아서 술식으로 도화선을 만든 다음 그대로 하늘 위로 터뜨리는 거야. 원래 제국에서 유래된 놀이인데, 무역을 통해서 브라알라스로 전파됐거든. 브라알라스에선 잘 안하는데 페리아는 좀 특별하니까.”


제국의 문명은 브라알라스보다 한단계 위라는 평가가 많았다. 단순히 군사력이나 부유한 것을 넘어 향유하는 문화 자체가 달랐다.


“그거, 비싸지 않나? 마석을 갈아넣는다면.”


“당연히 비싸지. 제국에서 유래된 놀이라고 했잖아. 그쪽은 워낙 잘사니까. 근데 다들 좋아하니까 비싼 돈 주고서라도 하는 거야.”


“브레일 백작가가 레베노 후작가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부유하거든. 검문할 때 걷는 통행료만 해도 어지간한 영지 하나는 거뜬히 운영할 정도니까.”


핀이 에반의 말에 덧붙여 설명했다. 확실히 기본적인 유동 인구가 많은 만큼 페리아에서만 발생하는 세금이 꽤나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돌연 에반이 큰 소리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쪽 주택가에 근처에 큰 언덕이 하나 있거든? 거기가 옛날부터 불꽃놀이 명당이었어.”


“.......”


“여기서... 축제 당일날 따로 약속 있는 사람?”


리안과 같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매의 눈으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덩크는 늘 그랬듯 덤덤한 표정이었고, 리안은 상황 돌아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태연하게 서 있었다.


단 한 명. 핀만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에반이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친구다. 친구면 죽을때까지 같이 가는거, 맞잖아. 그래 안 그래!”


“맞다. 우리는 둘도없는 친구들이다. 죽을때까지 간다.”


“덩크 말 들었지?”


덩크를 지나 리안을 거쳐 핀까지. 곱상하게 생긴 연갈색 머리칼의 소년에게 시선이 멈춘 에반이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핀.”


“어, 어! 에반. 왜 불러?”


“너 혹시해서 묻겠는데... 이미 여자랑 선약이 있다던가....”


“어, 어어.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겠어. 나도 양심이 있는데.”


“흠....”


“덩크, 믿어줘. 나 정말 축제때 너희들이랑 같이 놀려고 했어. 하하... 우리 항상 넷이서 같이 다녔잖아. 축제때도... 응, 같이 다녀야지. 그래야지....”


“그렇지?”


애절한 핀의 호소에 에반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리안.”


“어... 나?”


난데없이 지목당한 리안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너. 축제 당일날 아가씨랑 약속 있는거 아니지?”


“아가씨랑 약속....”


여기서 아가씨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명확했다. 한순간 백금발의 소녀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리안은 재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덩크가 평소와 다르게 세상 진지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아주 잡아먹을 눈빛을 하고선.


“리안. 난 너와 내가 진정한 친구라고 믿는다. 우리의 우정을 깨트릴만한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 그래. 약속이... 없네. 맞아, 없어.”


“확실해?”


“어, 확실해. 아직은....”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쭉 그래야 될 거야. 좋아!”


짝!


가볍게 손뼉을 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한 에반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날짜는 정확히 오늘부터 일주일 뒤. 본격적인 축제는 해가 지고서부터 시작되니까 6시쯤에 백작가 정문으로 모인다.”


“.......”


“밥은 나가서 먹을 거니까 미리 먹지 말고. 상점가부터 중앙 광장까지 쫙 돈 다음에 마지막에 남쪽 언덕에서 불꽃놀이까지 딱 보고 오기. 이의있는 사람?”


있을 리가 없었다. 서로 멀뚱멀뚱 시선을 교환한 핀, 덩크, 리안이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자, 그럼 맹세의 의미로 기합 한번 넣고 가자.”


“기합? 에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


“당연히 해야지! 핀, 너 설마 배신할 생각이냐?”


“아니....”


“에반의 말이 맞다. 이럴수록 맹세를 해야한다. 배신자에겐 죽음 뿐이다.”


“.......”


“리안, 뭐해? 빨리 안 오고.”


이게 뭔 개같은 짓거리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지켜보던 리안이 분위기에 휩쓸려 모인 세 소년의 손등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얹었다.


“후우... 다 됐다, 애송이들아. 신경써서 손봐놨으니, 어지간하면 깨먹지....”


뒤늦게 네 자루의 검 손질을 끝마친 발터가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배신자는?”


“죽인다!”


“몰래 여자랑 만나는 양아치는?”


“두들겨 죽인다!”


“우리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에반의 말을 따라 덩크가 진심을 담아 외쳤다. 네 소년이 뭉친 손을 다같이 한순간에 들어올렸다. 등골을 타고 흐른 핀의 식은땀이 한층 더 진해졌다.


“이 뭔....”


여전히 입을 벌린 발터가 황당한 눈길로 네 소년을 바라보았다. 늙은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리안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기보단 그냥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가게 ‘강철 망치’에서 이뤄진 이 말같지도 않은 맹세가 깨진 건 정확히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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