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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대공가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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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418,807
추천수 :
8,095
글자수 :
357,504

작성
24.09.0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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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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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글자
21쪽

가을날의 축제 2

DUMMY

축제날의 아침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이른 시각부터 검문을 통과하는 이들이 많았다. 단순히 페리아를 지나 엘리시온으로 향하는 방랑자부터 가을 축제를 보러 온 여행객과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행상인들까지. 과로에 몸져 누운 케이드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수월하게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덕분에 아직 본격적인 축제는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도시는 밝은 활기를 띄었다.


저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가문의 사용인들도 평소와 달리 일찍 일을 마치고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사용인들이 제 할일을 하나 둘씩 정리했다. 세레나의 전속 시녀인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아가씨는 흰색이 참 잘 어울리네요.”


“그래? 그럼 이걸로 입고 갈까?”


“네. 근데 가끔은 파란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일년에 한번뿐인 가을 축제기도 하고.”


“뭐야, 그게. 확실하게 말해줘. 이쪽? 아니면 저쪽?”


거울 앞에서 세레나는 두가지의 옷을 번갈아가며 몸에 가져다대었다. 눈을 가늘게 뜬 릴리는 고민 끝에 긴 푸른색 치마를 골랐다.


“이걸로 가죠.”


“흰색이 어울린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러니까 이렇게....”


시녀 릴리는 정성스럽게 제 주인을 꾸며주었다. 다른 사용인들과 다르게 세레나만을 시중드는, 한때 남작가의 여식이었던 릴리는 이런 쪽에 있어서 감각이 좋았다.


덕분에 근사한 옷차림이 완성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흡족한 표정으로 세레나의 어깨를 두드린 릴리가 한발짝 물러났다.


“자, 다 됐어요.”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바라보던 세레나의 얼굴이 만족스러운 빛으로 가득 찼다. 역시나 이런 쪽에 있어서 릴리는 자신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푸른색 스커트, 그 위로 걸친 소매가 긴 새하얀 블라우스와 목깃의 칼라 한가운데 묶인 푸른 리본.


어깨 위에는 밝은 청색의 숄이 놓여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파란색 바탕에 흰색이 어색하지 않게 몹시 잘 어울렸다. 누가 봐도 절로 시선이 돌아갈 정도였다. 자신의 차림을 보고 깜짝 놀랄 보랏빛 눈동자의 소년을 상상하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모자를 쓸까 말까....”


근처의 모자를 주어든 세레나가 말끝을 흐렸다.


“쓰고싶으면 쓰시지 그래요?”


“아니야, 역시 안 쓰는 게 좋겠어. 저번이랑 다르게 어차피 밤이라 햇빛 볼 일도 없고.”


세레나는 집어든 흰색 모자를 침대쪽으로 휙 던졌다.


“근데 지금와서 물어보는 건데요... 같이 축제 가실 상대는 있으세요?”


“상대? 당연히 있지!”


“리안이요?”


“응.”


“만나기로 한 장소가 어디에요? 약속 시간은요?”


“약속 시간?”


“네. 리안이랑은 저도 며칠 전에 서로 안부를 주고받은 적 있는데, 딱히 아가씨랑 같이 축제를 간다거나 그런 낌새가 안보여서요. 어디서 만날지 약속은 하신거 맞죠?”


“아니? 안 했는데?”


“네?”


세레나의 치장을 끝마치고 나갈 채비를 하던 릴리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확히는 눈앞의 말괄량이 아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축제를 같이 다닌다니.


이게 뭔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그럼....”


“그러니까 깜짝 놀래켜줘야지. 아마 에반이랑 핀 덩크랑 같이 다닐 모양인데, 중간에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내가 딱 나타나는거야. 벌써부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걸.”


“.......”


장난기 어린 세레나의 표정에 릴리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 대차게 까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그런 시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레나는 여전히 거울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연신 콧노래를 불러댔다. 보아하니 자신이 거절당하는 상황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부러 어머니한테 용돈도 가불로 받았고... 오늘 밤은 사치 좀 부려도 괜찮아.”


“.......”


“돈이 모자라서 사고싶은 걸 못사면 또 분위기가 깨니까. 식당은 어디로 갈까... 저번에 거기가 좋을까. 아니면 새로운 곳?”


이쯤되니 릴리는 말문이 턱 막혀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음, 좋아.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은 세레나가 뒤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면 릴리는? 오늘 엘리엇이랑 데이트하는 거 아니야?”


“네, 네에?”


“아니면 다른 남자 생겼어?”


“아, 아니에요! 제가 무슨....”


“헤에....”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릴리가 기겁하며 뒷걸음쳤다.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세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엘리엇 정도면 나쁘지 않은 남자지. 외모도 준수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한게....”


“아니라니까요, 아가씨!”


“바람끼가 많아보이는게 좀 흠이긴 한데... 릴리, 미리 말해두는데 남자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안 돼. 적당히 밀었다가도 떄가 되면 당길 줄도 알아야지. 자꾸 그러면 시시한 여자라고 버려진다? 특히 엘리엇은 다른 하녀들한테 인기도 많은 거 알지?”


붉게 달아오른 릴리의 낯빛이 삽시간에 푸르게 물들었다. 엘리엇과 데이트한다는 사실을 숨길 새도 없이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확실히 엘리엇은 인기 있는 남자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나이에 엘도르 기사단원이 될 정도의 실력. 귀족은 아니지만 엘리엇의 가문은 페리아에 기반을 둔 대대로 부유하기로 소문난 상인 가문이었다. 과거에는 어떨지 몰라도 17가문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이 작위를 회수당한 지금, 엘리엇은 한때 귀족이었던 유력 가문에서도 탐낼만한 준수한 신랑감이었다.


“역시 데이트하는거 맞나 보네.”


“으윽....”


“열심히 해봐. 엘리엇도 릴리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밀때는 밀고, 당길때는 당기고. 내 말 명심해?”


“.......”


할 말을 끝마친 세레나는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챙겨 문 앞까지 다가갔다.


“저기, 아가씨.”


“응?”


“그 밀때는 밀고 당길때는 당기라는 거... 직접 해보신 거예요?”


문을 열려던 세레나가 천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


릴리의 정신이 멍해졌다.


“그럼... 대체 어디서....”


“책에 그렇게 쓰여 있던데?”


“무슨... 책이요...?”


릴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집착하는 대공님과 거지 공주님.”


“.......”


***


축제날 당일. 리안은 동이 트자마자 부지런히 일어나 마구간으로 향했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그리고 간단한 몸단장을 마치고 마구간으로 향하는 것도 백작가에 들어오고 나서 생긴 하나의 일상이었다. 오늘은 가을 축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소 하던 일을 빼먹을 순 없었다.


익숙하다 못해 없으면 섭섭한 서문의 병사들과 인사를 하고.


노랗게 물든 가을 들판을 달려.


하루의 일과를 대충 끝마치자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재빠르게 저택으로 귀환한 리안은 지크를 이끌고 마구간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휴고가 리안을 반겼고, 투덜대는 지크를 그에게 맡긴 리안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정문으로 향했다.


“리안! 여기야 여기!”


“리안, 늦었군.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다.”


“좀 늦게 왔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에반과 덩크, 핀이 뛰어오는 리안을 보고 한마디씩 던졌다.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리안이 짧게 사과했다.


“미안. 지크가 생각보다 힘이 넘쳐서.”


“흠. 그런거라면 어쩔 수 없군. 이제라서 와서 다행이다, 리안.”


“그래.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막 시작할 때니까.”


“니들 약속한 건 다 기억하고 있지?”


에반이 말했다. 세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세명의 행색을 빠르게 훑었다. 에반과 덩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핀은 예외였다. 일년에 한번뿐인 가을 축제에 들뜨기라도 한 건지 꽤나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어...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왠지 평소보다 옷차림에 신경을 쓴 것 같아서.”


“그러고보니, 핀 너....”


“아, 아니야!”


“배신자...?”


덩크가 힘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유 모를 한기를 느낀 핀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붕붕 저었다.


“이건... 맞아, 기분이나 좀 내려고 입은 거야. 다름아닌 가을 축제잖아. 옷이라도 멋있게 입으면 기분이 좀 더 좋지 않을까 해서.”


“후우... 난 또. 리안도 아니고 네가 먼저 배신하는 줄 알았잖아.”


“.......”


“그럼 슬슬 가자. 해 떨어질라. 다들 예정대로 밥 안 먹었지?”


네 소년은 나란히 도시의 축제 속으로 스며들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자 거리의 곳곳에 주홍색 등불이 켜졌다.


“어서오세요! 오늘만 특별히 싸게 팝니다!”


“한번 맛보고 가. 아주 기가 막힌다니까?”


“이거 예쁘다. 얼마에요?”


“아빠, 나 저거....”


여기저기서 들뜬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의 밤바람은 여름과 달리 서늘하면서도 시원했다. 리안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주위의 모든 것을 시야에 담았다. 5살 이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제대로 된 축제였다.


평온 속에 깃든 활기. 근심 하나 없는 사람들의 얼굴. 왜인지 모르게 그것이 좋아서 리안은 눈을 감고 거리를 걸었다. 분명 소음에 불과했을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웃음 소리가 이 순간만큼은 거슬리지 않았다. 반갑게 느껴졌다.


“오, 에반! 핀이랑 덩크, 리안도 있구나. 놀러 온 거냐?”


“필립 아저씨.”


선두에서 세 소년을 이끌던 에반이 가장 먼저 멈춘 곳은 바로 한 꼬치 노점이었다.


엘리시온으로 떠나기 전날 먹었던 바로 그 노점.


“여전히 장사가 잘 되시네요. 외부에서 상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좀 적을 줄 알았는데.”


긴 줄을 기다린 끝에 꼬치를 시킨 에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나야 늘 똑같지 뭐. 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단골이고.”


“필립 아저씨 꼬치는 페리아 제일이다. 아니, 브라알라스 제일이다. 내가 보장한다.”


“말이라도 고맙다, 덩크. 근데 서비스는 안 줄 거야.”


“하하....”


“자, 다 됐다. 소금맛하고 후추맛. 그리고....”


네 사람의 손에 꼬치 구이가 들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에반, 덩크, 핀은 물론이고 리안도 지크와 산책하면서 자주 들린 노점이었기에 맛은 익숙하면서도 중독성있는 맛이었다.


“이 아저씨는 날이 갈수록 어째 실력이 느는 것 같네.”


“필립 아저씨 최고다. 은화를 내도 사먹을 맛이야.”


“리안은 어때? 맨날 소금맛만 먹다가 매운맛은 처음 먹는거잖아. 먹을만 해?”


“조금 맵긴 한데 괜찮네. 여기 노점이야 항상 맛있으니까. 나도 지크 데리고 자주 들리고....”


네 소년은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상점가를 거닐었다. 꼬치 구이건, 갓 구운 빵이건, 시원한 음료건. 원래라면 이런 군것질은 저녁 때문에라도 조절하는 편이었지만 가을 축제인 지금만큼은 거리낄 게 없었다.


“덩크... 그거 다 먹을 수 있냐?”


“아직 배가 다 안 찼다. 더 먹을 수 있다.”


덩크는 정말 미친듯이 먹어댔다. 에반과 핀 리안이 먹는 양을 혼자서 먹고있으니 더 그랬다.


“좋아. 배도 찼겠다, 슬슬 광장 쪽으로 가 볼까.”


이변이 일어난 건 그 즈음이었다.


“어, 핀이다!”


“어디?”


네 소년과 마찬가지로 축제를 즐기던 여자아이 두명이 이쪽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필립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안녕, 핀. 너도 축제 즐기러 온 거야?”


“어? 어어. 그렇지....”


“있잖아. 우리가 방금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심지어 한번도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돌아다니는 거야?”


“오늘도 멋있네, 핀.”


“핀, 잘생겼어! 최고야!”


“혹시, 따로 시간 있으면....”


“.......”


다섯번째 만남을 뒤로한 핀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등 뒤로 눈을 부릅뜬 덩크가 죽일듯이 핀을 노려보고 있었다.


“핀....”


“.......”


“배신자는 죽음 뿐이다. 용서하지 않는다....”


“아아아 아니야 덩크! 오해야. 오해라고!”


거리 한복판에서 때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는데도 핀은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이 망할 바람둥이 새끼! 대체 여자가 몇 명이야, 어? 양다리도 모자라 삼다리, 사다리, 오다리를 걸쳐?”


보다못한 에반이 핀의 뒤로 다가가 목을 팔로 걸었다.


“악! 에반! 자, 잠깐...!”


“잠깐은 뭐가 잠깐이야 이 변절자 놈아! 남자들끼리 축제 가는데 이따위로 옷 입을 때부터 알아봤다. 죽어!”


“켁, 케헥... 내 내 옷이 뭐가 어때서....”


“누가 이렇게 차려입으래. 아니면, 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얼굴이 문제냐?”


“그렇게 따지면 리안도 마찬가지잖아! 나보다 더 심한데!”


갑자기 이걸 나한테 떠넘긴다고?


리안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에반과 시선이 휙 돌아갔다. 간신히 빠져나온 핀이 목덜미를 부여잡고 컥컥거렸다.


덩크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세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셋 다 똑같은 거 아닌가?


“리안의 얼굴을 보라고! 나는 무죄야, 무죄!”


저기 저 열심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핀. 저 소년은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누가 봐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또래 나이대에서는 적수가 없는 인기 제일의 소년이었다. 페리아의 십대 초반 여자아이라면 한번쯤 짝사랑 상대로 핀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확실히....”


핀을 괴롭히다 말고 고뇌하는 에반도 핀만큼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성격과 아버지 카를 로렌스를 닮은 시원한 이목구비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세레나의 시녀인 릴리의 여동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백작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야, 니들 뭐 잘못 먹었냐? 갑자기 왜 그래.”


그리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는 리안. 이제 완전히 백작가의 일원이 된 저 보랏빛 눈동자의 소년이야말로 제일 악질이었다. 얼굴만 보면 어디 귀족가의 예쁜 여자아이처럼 생긴 놈이 키도 평균보다 크고 몸까지 좋으니, 몇달 전까지만 해도 졸졸 따라다니는 가문의 하녀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다. 리안은 핀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가 아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가라앉힌 덩크가 이성을 되찾았다.


“그거야 뭐... 아가씨가 있으니까.”


떠올리기도 싫은 건지 에반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핀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는 않았지.”


“그래. 리안은 순정이 있는 남자다. 진정한 남자지.”


“순정같은 소리하네....”


“저기, 애들아... 난?”


두 소년은 핀을 무시한 채 백작가의 한 말괄량이 아가씨를 떠올렸다. 리안이 외모와 다르게 말을 걸어오는 여자가 없는 것도 세레나가 틈만 나면 리안을 데리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기사라고 소개시킨 탓이 컸다.


일반적인 귀족가의 영애와는 많이 다른 아가씨.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 한번 떼를 부리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말괄량이.


가문의 사용인이나 가신들은 물론 페리아 시민들도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저번에 리안에게 얼굴을 붉히며 직접 만든 쿠키를 선물한 한 어린 하녀를 세레나가 따로 불러 눈치를 준건 이미 유명했다. 그 뒤로 리안에게 대놓고 들이대는 간 큰 여자아이가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후우... 그래. 사람이 살다보면 잠깐 눈이 돌아가고 그럴수도 있는 거지.”


“.......”


“안 그래, 덩크?”


“맞다. 한번은 용서해준다.”


“자, 다시 광장으로 가자.”


에반이 거리의 끝을 가리키며 다시금 선두에서 발을 옮겼다.


“루나?”


핀이 걸음이 또 멈춘 것도 그때였다.


“아, 핀....”


한 소녀가 핀을 발견하곤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에반과 덩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다가온 소녀는 작은 동물같은 사랑스런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핀과 마찬가지로 밝은 갈색 머리칼. 앙증맞은 키에 신경써 입은 것이 분명한 원피스가 그 사랑스런 외모를 배가시켰다.


무엇보다 에반과 핀을 경악시킨 건 바로 핀의 반응이었다. 허구한 날 또래 여자아이들이랑 어울리던 핀이 뺨을 붉히고 있었다. 아까 다섯번이나 여자아이들을 흘려보낼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애들아....”


사랑과 우정.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핀이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미안해. 용서해 줘! 벌이라면 나중에 달게 받을 테니까!”


“앗...!”


핀이 루나라 불린 소녀의 손목을 잡고 도망쳤다. 흡사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모습에 세 소년은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으, 으하하. 으하하하하!”


덩크가 미친놈마냥 웃었다.


“덩크, 정신 차려!”


에반이 덩크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야, 아직 우리 세명이나 남았잖아. 저런 배신자 한 둘 쯤은 없어도 돼! 리안, 너도 그렇지?”


“어? 어.”


“핀같은 배신자 없어도 우리끼리 잘 놀 수 있잖아!”


“그래, 뭐....”


“배신자는 죽인다. 대가는 나중에 충분히 치르면 될 일이다. 아직 셋이나 남았으니....”


과장스런 몸짓을 한 에반이 리안과 덩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등을 밀었다. 셋은 그렇게 다시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불행은 연달아 일어난다고 했던가.


“아가씨?”


돌연 멈춰선 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이거 큰일났네.


“기다렸지?”


에반이 조심스럽게 옆을 흘겼다. 석상처럼 얼어붙은 덩크의 반대쪽에 무언가에 홀린듯 앞만 바라보고 있는 리안이 있었다.


“어울려?”


세레나는 리안의 몇걸음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쭉 뻗은 푸른 스커트 위로 새하얀 블라우스와 등불 아래 선명하게 빛나는 환한 백금발이 나부꼈다.


리안은 마치 시야가 좁아진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녀 한사람만 보였다.


“지금 시간 있어?”


“그게....”


“데려가도 괜찮지?”


세레나는 리안의 대답 대신 에반과 덩크에게 물었다. 에반은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브레일 백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리안을 데려간다는데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둘이 떠나자 저택을 나올때만 해도 넷이었던 인원이 둘로 줄었다.


“하, 하하....”


에반은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애써 웃었다.


“괜찮아, 덩크! 우리 둘이서 신나게 놀면 되지. 배신자 두명이 떠난 게 대수냐?”


“.......”


“자, 광장으로 가자! 광장에 가서, 그래서....”


“에반!”


“아.”


막 발을 떼던 에반의 몸이 우뚝 섰다. 단체로 짜고 치기라고 한 건지 이번에는 자신이 신경쓰고 있던 소녀이자 시녀 릴리의 여동생인 티라가 손을 흔들며 저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에반이 굳어버린 고개를 서서히 옆으로 돌렸다.


“에반.”


근엄한 표정을 한 덩크가 입을 뗐다.


“가라.”


“아니, 덩크. 내가 몰래 약속을 했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뭐?”


“가라, 에반. 난 이미 어렴풋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가라.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이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자비일지 모른다....”


“덩크....”


북받치는 감정에 에반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기다렸다는듯 티라의 손을 잡고 떠나버렸다. 앞서 도망친 배신자들이 그러했듯이.


홀로 남은 덩크는 가만히 서서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축제의 등불 때문인지 희미한 별빛이 주홍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꼭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


덩크는 눈을 감았다. 가슴 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핀은 물론이고 리안과 에반도 인기가 있으니까. 짝이 있으니까....


부모님은 항상 말했다. 자신이 제일 잘생겼다고. 장가 다 갔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어렸을때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덩크는 그게 전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슬프게도 경험으로 알았다. 당장 또래 여자애들이 즐겨 읽은 통속 소설만 해도 힘세고 강한 남자인 주인공은 자신같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아니라 핀이나 리안, 에반같은 호리호리한 스타일이었다. 그쪽이 훨씬 인기가 많았으니까.


상념에 잠겨있던 덩크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곳에는 여전히 한결같은 밤하늘이 자리잡고 있었다.


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울분이 솟아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끝내 마지막까지 남겨진 어린 소년이 거칠게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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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가을날의 축제 1 +11 24.09.01 5,652 124 19쪽
39 엘리시온 9 +14 24.08.31 5,918 142 16쪽
38 엘리시온 8 +10 24.08.30 6,023 155 17쪽
37 엘리시온 7 +17 24.08.29 6,408 157 15쪽
36 엘리시온 6 +16 24.08.28 6,957 148 15쪽
35 엘리시온 5 +14 24.08.27 7,254 213 15쪽
34 엘리시온 4 +23 24.08.26 7,377 227 19쪽
33 엘리시온 3 +11 24.08.25 7,450 197 16쪽
32 엘리시온 2 +12 24.08.24 7,608 169 14쪽
31 엘리시온 1 +13 24.08.23 7,988 155 14쪽
30 두 번째 보금자리 10 +10 24.08.22 8,053 169 16쪽
29 두 번째 보금자리 9 +12 24.08.19 8,048 168 16쪽
28 두 번째 보금자리 8 +13 24.08.17 8,243 167 17쪽
27 두 번째 보금자리 7 +8 24.08.16 8,374 181 21쪽
26 두 번째 보금자리 6 +9 24.08.15 8,611 162 21쪽
25 두 번째 보금자리 5 +12 24.08.12 8,859 179 21쪽
24 두 번째 보금자리 4 +13 24.08.10 8,917 171 16쪽
23 두 번째 보금자리 3 +11 24.08.09 8,815 183 17쪽
22 두 번째 보금자리 2 +12 24.08.07 8,985 175 16쪽
21 두 번째 보금자리 1 +11 24.08.06 9,375 17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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