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뒤"
"특이한 점?"
“네, 모든 마법과 마술에는 반드시 마나흔 이라는 흔적이 남아요, 마법이나 마나를 행한 시술자 근처에 마나의 잔재가 잔류한다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하지만 백작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계 내부를 아우르는 대형 마술과 아까 흰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에게 시행된 정체를 가리는 마술까지 마술의 규모를 본다면 분명히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마나흔이 있어야 하는데, 아까 본 이들에게서는 마나흔이 보이는 자들이 한명도 없었어요.”
"그럼 이오나의 생각은 최소한 이런 대규모 마술을 행한 자가 최소 한명 이상은 더 존재한단 이야기야?"
"네 바로 보셨어요, 아까 본 이들 이외에 최소 고위 마술사 혹은 마녀가 한명 이상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요."
어떻게 본다면 우리 중 가장 중요한 정보를 발견한 것은 이오나 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마녀답게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특이점보다는 마법 혹은 마술적 사항을 유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반드시 있어야 할 마나흔이 보이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까 보았던 이들 이외에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문 뒤의 서른명 정도만이 존재한다 생각하고 섣불리 움직였다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또 다른 세력이 등장했다면 아마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짓기 전 우선 종합된 내용을 가지고 마탑주와 상의하기 위해 '기다리는 자의 간절함'을 통해 마탑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마탑주의 이야기와는 달리 메시지를 보낸 지 몇시간이 지나도 마탑주의 회신은 없었다.
그렇게 답신을 기다리며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가 결계 안으로 들어와서 동굴에 들어가기 전을 비롯해 이미 몇 번 마탑주에게 메시지를 보냈었지만 단 한 차례도 회신이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이오나, 아티팩트가 혹시 고장이 나기도 해?"
"네 물론이죠, 마나석이 손상될 때도 있고 룬어가 훼손돼도 작동하지 않아요.
“그럼 이거 고장이 난 거 아니야? 메시지를 몇번이나 보냈는데 답신이 오질 않아.”
“음... 아티팩트는 이상 없어 보여요, 아마도 결계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강한 마나 유동이 잦다 보니 아티팩트에 실린 마나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것 같아요."
나는 그저 마탑주가 바쁘기에 회신을 못 했다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답신이 없었기에 조금 의아한 마음으로 아티팩트가 고장이 나는 경우도 있는지 물어봤다.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첫째 지금 결계 밖으로 나가 마탑주의 의견 및 지원을 기다린다. 이건 안전한 방법이지만 이 기현상은 시간이 길어지면 앞으로 어떠한 더 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어."
"다른 한 가지는요?"
"조금은 위험하겠지만 우리가 제대로 조사를 마저 하는 거야. 이들을 처단하지 않아도 규모, 목적 등을 파악한다면 차후의 처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지금과 같이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마탑주의 조언을 듣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웠지만, 더 나아가 조사를 지속하던 이곳에서 멈추어 딱 도리만 하고 마무리하던 이제 우리는 방향을 결정지을 순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알프와 이오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셋이라는 인원으로 이만큼 조사해낸 것도 꽤 큰 수확이기에 이대로 딱 우리 수준에서 할 도리만 하고 빠진다고 하여도 우리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내부 공동의 크기와 비어있는 석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기현상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우리가 빠지고 마탑이 들어오는 동안 골든타임이 지난다면 어떠한 더 큰 사건으로 번질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우리끼리 조사를 지속하는 것 또한 저 안에 얼마나 더 많은 세력이 숨어있고 고위 마술을 부리는 자까지 자칫 잘못한다면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백작님, 저는 계속 조사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어차피 이대로 우리만 빠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내부로 가서 조사를 마쳐야 합니다. 시간을 끌어 혹여 이들의 세가 더 커지면 후발대는 더 큰 위협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저도 알프 경의 말에 동의해요, 조사는 우리가 지속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어, 그럼 해가 질 때까지 잠시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동굴에 들어가도록 하지."
사실 나는 이미 조사를 지속하는 것으로 마음의 방향을 결정지은 상태였다. 마탑주는 내게 현상의 조사를 의뢰한 것이고 사실상 많은 정보를 얻었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본다면 아직 무엇 하나 명확하게 알아낸 것은 없었다. 마탑주가 내게 조사를 의뢰한 것은 엄밀 따지면 발생한 일의 조사가 아닌, 벌어진 일에 ‘흑마술’이 개입되어있는지 여부였다.
만약 이대로 조사를 마무리하고 마탑주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이것을 의뢰 완수로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설사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시간을 놓쳐 피해가 커진다면 나에게 했던 약속을 번복할 가능성도 있었다.
내 생각은 확고했지만, 이 안에 어떠한 위협이 더 있을지 모르기에 알프와 이오나에게 의향을 묻기도 해야 했거니와 이들이 나와 같은 생각인지도 궁금했었다.
알프와 이오나는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우리는 조금 휴식을 취하며 해가 진 뒤 동굴 안의 사람들이 빠져나오면 그때 다시 동굴로 들어가기로 하고 각자 휴식을 취했다.
숲의 어둠은 언제나 빨리 찾아왔고, 해가 떨어지자 동굴 안에서 웅성웅성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지만 어제와 동일하게 거뭇한 연기 같은 게 동굴에서 빠져나가 마을로 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횃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오나 또 한 번 강대한 소름이 끼치는 마나의 유동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결계안에서 이제 여러 번 겪어서인지 어제만큼 힘들어하진 않았다.
"다들 준비 됬지? 다시 동굴로 진입한다."
동굴에서 사람들이 모두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도 이동을 시작했다.
어제 조사 차 들어갔을 때는 들어가고 나오는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한나절을 소모했지만 이미 한번 왔던 곳이라 내부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보니 우리의 이동은 어제보다 훨씬 수월했다.
동굴 입구를 지나 통로를 통해 공동까지 길과 구조는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우리는 방심하지 않고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며 자세를 낮추어 조심스레 이동하였고 그렇게 우리는 제단 뒤의 문 앞에 섰다.
“즐탄(증폭) 사리운(소리)”
문 앞에 도착한 우리들은 바로 문을 열려 했으나 혹시나 문 너머에 있을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아직 잠들지 않았을까 싶은 걱정에 내가 문을 열기를 망설이자 이오나가 마법 주문을 외웠다.
허공에 손으로 룬어를 그리고 외우자 마술이 발현되며 문 너머의 소리가 확대되어 우리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은 이미 다들 잠들었는지 조그마한 잠꼬대와 숨을 몰아쉬는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부스스스'
이오나 덕분에 내부의 위협이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역시나 석재 문이 열리는 거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내부로 들어서자 다행히도 깨어난 이들은 없어 보였다. 이번에 우리는 더 안쪽의 방들을 조사하기 위해 자는 이들을 무시하고 방의 끝 쪽으로 향했다.
이 방의 끝에는 내가 어제 보았듯이 좌, 우로 나뉘어 두 개의 문이 있었으며 따로 친절하게 명패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에 어느 문이 어떠한 방으로 연결된 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문으로 갑니까?"
양 갈래의 문을 두고 선두에 서 있던 알프가 멈춰서 나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나는 좌우 문을 번갈아 보았다.
역시 내가 어제 본 것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던 듯 왼쪽의 문은 아무 이상도 없었지만, 오른쪽의 문은 확실히 아주 조금씩이지만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른쪽 문으로 먼저 가보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검은 안개가 훨씬 위협적으로 보이기에 피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이곳에 오고 난 뒤 내 눈에만 다르게 보이는 현상들이 주로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들로 이어졌었기에 조금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른쪽 문으로 먼저 가자 이야기했다.
'부스스스'
내 말과 함께 알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석재 문을 밀었고, 문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안으로 진입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이곳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내 눈에는 온통 검은 안개 투 성이었다.
"으음? 그대들은 누구지?"
'스컹'
방안을 둘러보던 우리는 방 안쪽 깊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조금 갈라진 듯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안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쪽 벽에 기대어 있는 듯한 한 인영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알프는 어느새 검을 뽑고 중단세를 취했고, 이오나도 짤막한 마법 지팡이를 들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만이 온 시야를 메웠던 검은 안개 때문에 뒤늦게 로날프가 준 기계식 쇠뇌를 꺼내 인영을 조준하였다.
"워워, 진정하고 무기들 내려놓게. 나는 그대들의 적이 아닌 듯하니."
이어지는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알프와 이오나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져 당장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오면 공격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나 또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 할 수 없는 정체 모를 자에 대한 경계심이 한없이 차올랐다.
잠시 뒤 방안을 가득 메웠던 검은 안개가 모두 한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 쪽에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인영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모두 무기 거둬, 당신 정체가 뭡니까?"
"백작님, 위험합니다. 저자를 어찌 믿고 그러십니까."
검은 안개 때문에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반응은 늦었지만, 이제 드러난 시야 속에 비친 정체불명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결과 나는 저자가 우리의 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알프와 이오나를 향해 돌아 그들의 모습을 보니, 벽에 기댄 남자가 아닌 다른 쪽 방향에 뭉쳐있는 검은 안개를 주시하며 마치 저곳에 누구라도 있는 양 잔뜩 긴장한 채 경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댄 정체불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 보인 그의 상태는 한눈에 보아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는 상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한쪽 다리는 거의 너덜거리며 간신히 붙어있었고, 한쪽 팔은 잘린 것이 아닌 거칠게 찢겨나간 듯한 상태였다.
또한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꽤 미남형의 얼굴인 듯해 보였지만 거친 상흔으로 가득했고, 한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눈알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모든 상처는 꽤 오랜 시간 방치된 듯 피딱지가 눌어붙어 있었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정체불명 남자의 처참한 몰골의 상태를 보고는 그 또한 어떠한 이유에서든 흰 로브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구금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위협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이 되어 알프와 이오나에게 무기를 거두라 지시하고 앞으로 한발 나섰다. 전방으로 나서려는 나를 알프가 걱정스레 제지했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그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 내가 보이는군? 해주(解呪)의 능력인가? 아니면 그저 특이체질? 뭐 그렇담 굳이 쓸데없이 이런 인형으로 나설 필요가 없겠군."
'화악'
"아니?!"
나와 마주친 그는 나를 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이내 자신이 위치한 자리를 내가 정확하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다 굳이 인형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과 함께 검은 안개가 뭉쳐있던 것이 사라졌다.
내 눈에 보이는 검은 안개가 사라지자 알프와 이오나는 당황해했고 인제야 자신들이 경계하던 것이 환상이라 눈치챈 이들은 주변을 둘러보다 진짜 그의 모습을 보고 다소 놀란 듯했다.
"내 소개부터 해야겠군, 내 이름은 제몬드 공, 지금의 인간들이 어찌 부르는지 모르겠으나 몽마들의 왕이다."
"엇?...! 옛 문헌에서 언뜻 본 적 있어요, 마왕의 시대 때 활동했던 마족들의 수장 중 하나라고..."
"호오, 지금의 인간 중에도 나를 아는 자가 있군."
그는 자신을 몽마들의 왕 제몬드 공이라 소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오나는 다소 놀라며 잠시간 침묵하다 오래된 옛 문헌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몽마, 그들은 흔히 서큐버스 혹은 인큐버스라 불렸던 마물들로 사람의 꿈을 좀먹으며 꿈속에서 그 사람의 소원을 이뤄주는 마물이라 했다.
그들이 꿈을 먹은 자들은 꿈속의 환상에 취해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육체는 몽마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마물이었고 마왕이 토벌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는 마물 이었다.
"나는 데일 볼든 백작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그대는 우리의 적이오?"
우리의 눈에 보인 그의 상태는 가희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상태였다. 나는 그런 그가 흰 로브를 입은 사람들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며 다시 한번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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