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재호소인
“할아버님은 언제 오시는 건데? 할머님은 안 오시는 거야?”
내 말에 루시는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할머니 다리 아파서 여행 못 합니다. 아마도 못 옵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래도 출발 당일에는 알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날짜 한 번 여쭤봐 줘. 먼 곳 오시는데 뭐라도 대접해 드려야지.”
“오오······ 역시 살아남은 이후를 생각합니다. 당신 자신감 대단합니다.”
이 녀석의 표정은 항상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농담이겠지?
“참, 너······ 인터넷 쇼핑몰에서 컴퓨터 제일 비싼 거 주세요 뭐 이렇게 한 거 아니지?”
나는 번쩍번쩍한 데스크탑을 보며 이 녀석이 호구 맞았을까 걱정이 됐다.
보조 장비들도 하나 같이 비싸 보인다.
대체 얼마를 쓴 거야?
“아닙니다! 나 다정한테 전화했습니다!”
“다정? 진다정? 게임 스트리머?”
루시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 완전 고수입니다. 어려운 컴퓨터 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통화 내역을 들려준다.
——그냥 제일 비싼 거!
‘······역시 호구 맞을 뻔했잖아.’
—— Oh, 이거 사면 청소기도 줍니다!
——그, 그런 곳은 저, 절대 안 돼요!
이후에는 사용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 등 꽤나 전문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쪽 지식이 전혀 없는 루시가 하는 말이 많이 답답했을 법도 한데, 화내지 않고 꼼꼼히 설명해 주는 게 참 고맙다.
나는 그녀에게 기프티콘 하나를 보낸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진다정 씨?”
「아, 안녕하세요······ 호, 혹시 제품이 마, 마음에 안 드셔서 전화하셨나요오······.」
“아뇨, 정말 마음에 듭니다. 루시랑 상담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어요. 크진 않지만 치킨 한 마리 기프티콘 보냈습니다.”
「헉, ㅊ, 치킨······ 감사합니다······.」
옆을 슬쩍 보니 루시가 기묘한 미소를 짓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죠? 서울도 하루는 넘게 걸리지 않나요?”
퀵으로 보냈다고 쳐도 반나절이 안 되어 모든 것이 끝났는데 굉장한 속도다.
「아, 아빠가 직접······ 힉!?」
「감사합니다!!!」
갑자기 전화기 주인이 바뀌었다. 우렁찬 목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딸한테 얘기 다 들었습니다! 다정이 도와주시는 분이라고요! 제가! 가장 좋은! 제품들로만······! 억!」
「아, 아빠 왜 그래 부, 부끄럽게······ 끄, 끊을게요. 치킨 감사합니다······.」
뚝.
통화가 끊어졌다.
“······.”
뭔가 요란한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다.
“Oh. 저 목소리 아저씨랑 다정이 와서 같이 설치해 주고 갔습니다.”
“두 사람이 직접?”
내 말에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딸이랑 성격이 정반대네.”
나는 말을 이었다.
“고마워 루시. 컴퓨터. 잘 쓸게.”
“좋습니까?”
활짝 웃는다.
이 녀석은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래. 좋네.”
루시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루시는 언제나 그랬듯, 깔깔 웃으며 내 손아귀에서 도망쳤다.
“덕분에 일할 시간이 많이 생겼네.”
“W, What!?”
내 말에 녀석이 갑자기 굳었다.
“왜 그래? 김장해야 한다고 했잖아.”
“김장? 김치 장기 보관 생산? 그게 오늘입니까?”
“말한 지 좀 되지 않았나?”
“No······.”
“선화 누나네 아줌마 여기 안 오셨어?”
루시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히도 일이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배추 절여서 갖다주기로 하셨는데······ 뭐, 일하다 보면 오시겠지.”
나는 목장갑을 찾아 끼었다.
“밖에 추우니까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이따 재료 다듬는 거만 안에서 조금 같이하자.”
나는 커다란 플라스틱 소쿠리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나가자마자 개와 고양이가 따라붙는다.
“읏차.”
꺼내뒀던 손수레를 밭으로 끌고 가 놓았다.
그리고 무를 뽑기 시작했다. 채를 썰어 넣을 것이었다.
——철컹!
그렇게 무를 제법 수레에 실었을 무렵,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려와 그쪽을 보니 루시가 나와 있었다.
“그냥 안에 있으라니까 왜 나왔어.”
“나 당신 일 돕습니다!”
옷들을 잔뜩 껴입은 걸 보면 제대로 작심을 한 모양이다.
“진짜 도와줄 일 없는데. 금방 끝나.”
녀석은 종종걸음으로 내 옆에 붙었다.
“오오······ 엄청 큽니다.”
커다란 무를 보고 루시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러게. 네 얼굴보다 크네.”
나는 무를 그녀의 얼굴에 재어보며 웃었다. 그러자 루시도 소리를 내며 킥킥 웃는다.
이 녀석 얼굴이 작은 건지, 무가 큰 건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럼······ 나온 김에, 무는 내가 할 테니까 저기 대파 있지? 저거 좀 뽑아다 여기 소쿠리에 담아줘.”
“OK!”
쪽파는 틈틈이 다듬어 두었고, 마늘도 다 빻아두었으니 사실상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무야 저렇게 많아 보여도 채를 썰면 금방이다.
우리는 금방 집 내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와······ 집 따뜻해서 좋습니다······.”
“집이 최고지.”
그렇게 오래 나가 있지 않은 것 같은데, 확실히 날이 춥긴 춥다.
나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이것저것 도구들을 셋팅하기 시작했다. 이따 어머니가 퇴근하면 같이 속을 만들 것이다.
——사각, 사각!
채칼에 무가 나가는 소리가 시원하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돼서 계속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HA HA! 재미있습니다, 이거!”
“손 안 다치게 조심해. 덩이 조금 남은 거 억지로 밀지 말고 그냥 냅둬.”
“알았습니다!”
녀석은 고무장갑을 낀 채 내가 잘라주는 무를 채칼에 밀고 있었다. 안에 목장갑도 끼워주긴 했지만 불안하긴 매한가지다. 초보들은 손을 다쳐먹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무를 잘라달라고 했는데, 루시의 힘이 너무 약해서 바로 일을 바꿨다.
——철컹!
현관문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셨어요?”
어머니였다. 그녀의 품에는 역시 김장 재료들이 가득이었다. 김장용 소하, 새우젓, 그리고 황석어젓이다.
“엄마! 나 일합니다! 칭찬ㅎ······ Aㅏ?”
——서걱!
루시가 자기 손을 썰어버렸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재료들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뛰어왔다.
“나, 피······ 피납니까?”
루시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도 놀라서 다가가 살피니 다행히 고무장갑만 찢어져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괜찮아. 목장갑 끼워주길 잘했네.”
어머니 또한 안도하며 루시를 살짝 안아주었다.
“헉······ 저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루시가 경악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황석어젓이었다.
“······외국인들 우리나라 장어젤리 욕하지만 저것도 생긴 것 진짜 별로입니다······.”
웬 플라스틱 통에 손가락만 한 물고기들이 가득 들어있으니 확실히 그렇게 보기 좋지는 않다.
“부정할 수 없군. 하지만 저걸 그냥 넣는 건 아니야. 불에 팔팔 끓여서 으깰 거거든. 감칠맛을 더해줘.”
“Ek! 물고기 냄새!”
어머니가 그녀에게 통을 열어 보여주자 루시가 질색을 하며 혀를 내밀었다.
“그렇지? 냄새가 심해서 안에선 못 끓여. 밖으로 가야지. 어머니, 밖에 냄비랑 스토브 내놨어요.”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는 앞치마를 둘렀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렀다.
“마늘 됐고······ 쪽파 됐고······ 갓 됐고······ 무 됐고······ 양파 됐고······ 대파 됐고······.”
“흐윽······ 또······ 또 있습니까?”
루시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양파와 대파를 썰었기 때문이다.
“불닦보끔면 생각납니다······ 이번에는 눈을 공격합니다······.”
그녀가 콧물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 이겨냅니다······ 결혼해야 합니다······.”
루시의 말을 들은 어머니도 울먹거리며 그녀를 껴안았다.
여기서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나쁜 놈이 되지 않을까?
내가 적절한 말을 고민하고 있는 사이,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니 익숙한 트럭이 보인다.
“아, 배추 갖다주러 오셨나 보다.”
나는 후다닥 아주머니를 반기며 나갔다.
“아이고, 기인이 색시 언제봐도 참 곱네.”
아주머니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안쪽에 보이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주머니, 저희 아직 결혼 안 했거든요.”
“호호호, 이미 같이 사는데 그런 게 중요한가?”
“맞습니다! 우리는 사실혼 관계입니다!”
루시가 언제 따라 나왔는지 옆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런 어려운 말은 또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겠다.
“요즘 혜자가 아주 입이 찢어져 찢어져. 사람들 볼 때마다 너희 사진 보여주면서 자랑하고 다닌다니까. 너희 그 뭐 유튜브도 한다면서?”
“합니다!”
“배추 정말 감사합니다. 배추 뽑고 절구고 하는 게 제일 힘든 건데······.”
그러자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호호 웃었다.
“뭘, 우리 김장하는 김에 좀만 더 하면 되는데. 대신에 우리도 김치 조금 주는 거다, 알았지? 집마다 김치 맛이 달라서 골라 먹는 맛이 쏠쏠해.”
나는 김치들을 트럭에서 내려 옮겼다. 양이 많지는 않아 금방 일이 끝났다.
“얘, 기인아!”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고 몸통을 내밀었다.
“예?”
“따뜻할 때 날짜 잡으려면 지금 예약해야 돼! 예식장!”
예기치 못한 공격이었다.
“아, 아주머니 진짜!!!”
그녀는 호호호 웃으면서 트럭을 몰고 사라졌다.
“후후. 역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의 편입니다. 빨리 혼인 신고서에 손가락 찍습니다.”
“너 비자부터 어떻게 해결해야지. 할아버님 오시면 같이 이야기 나눠 보자.”
내 말에 갑자기 루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살아남아야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수련 힘냅니다.”
또 이 소리다.
······농담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까.”
“?”
“나 아까 대장장이 어르신이랑 사냥을 갔었거든.”
“사냥? Hunt?”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배추를 집안으로 옮겼다.
“그때 스태프가 없었는데도 서버를 열 수 있었어. 혹시 이유를 알아?”
“???”
나는 한참동안이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왜 그래? 빨리 들어와. 추운데.”
“당신 말이 정말입니까? 스태프······ 마력석 없이 서버를 열었습니까?”
“어? 어······ 멧돼지가 상대이긴 했는데.”
이어지는 녀석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거 100년 산 마법사도 못 합니다. 당신······ 당신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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