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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무새 님의 서재입니다.

왕의 어사로 살아가는 법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추리

공모전참가작

상상무새
작품등록일 :
2024.05.08 10:41
최근연재일 :
2024.05.31 17:3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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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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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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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소설 속 세상에 적응하기

DUMMY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를 내줄게. 자자, 조슈아 오빠가 은팔찌를 10개 사왔어. 저택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을 때, 몇 명의 사람들이 쓸 수 있을까?”


“10명! 맞지? 이번엔 맞췄지?”


내 말에 앨리스의 어깨가 축 늘어지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고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이 반응은...! 내가 틀린 것 같잖아?!


“정답 맞잖아...! 왜 틀린 것처럼 실망하는 건데. 장난치는 거지?”


“아냐. 진짜 틀렸으니까 그러지.”


“뭣?!”


“정답은 5명이야.”


“어째서? 가족들이 5명이라고 하지만, 저기 지나가는 분들에게도 선물을 주면 팔찌를 낄 수도 있잖아.”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냐. 조슈아 오빠가 사온 팔찌를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 아빠, 오빠, 조슈아 오빠, 그리고 나 밖에 없어.”


“왜?”


“말했잖아. 그냥 팔찌가 아니라 은팔찌라고. 귀족이 아니면 은으로 된 장신구를 착용할 수 없어.”


“뭐?”


“오빠는 ‘팔찌’에 집중한 것 같지만... 내가 낸 문제의 핵심은 ‘은’이란 소재를 쓴 장신구를 법적으로 누가 쓸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거였어.”


“이게... 신분제 사회란 거구나...?”


당황한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내 상식과 이 사람들의 상식이 너무 다르다.


신분제 사회라는 거, 역사 시간에 말만 들어봤지 이런 식으로 차별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아, 생각해보면 신라시대에도 골품제에 따라서 많은 제약이 있었다고 한다. 여긴 이것저것 짬뽕되어 있는 정체불명의 유럽풍 판타지 세계관인 것 같지만, 어쨌든 신분제 사회인 건 둘 다 같지. 여기도 신분마다 법으로 정해진 사항이 많은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오빠...? 너무 심각해진 거 아냐?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오빠가 예전에 그랬잖아. 문제는 원래 많이 틀리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많이 틀려봐야 많은 걸 알게 된다고 말야.”


“아, 내가 그랬어?”


트로이안은 생각보다도 건실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나보다. 어라? 이거 조금 수상해지는데...? 틀리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어째서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까?


“응. 그러니까 틀렸다고 의기소침하게 있을 필요 없어! 새롭게 배운 게 있으면 그걸로 끝인 거야. 자자, 사나이답게 허리 딱 피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여동생이 또다시 내 등을 팡-! 하고 치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소리만 엄청 컸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아서 또 당황했다.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거였나? 그럼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아프게 때린 건 일부러...?


“왜 그런 눈빛으로 봐?”


“강도 조절을... ...아니야.”


“흐음. 사나이면 말을 명확하게 하라고. 그보다, 오빠. 지금 한가하지? 나하고 같이 차 마실래?”


“좋아. 할 일도 없는데.”


“그럼 옷 갈아입고 내 방으로 와. 기다릴게. ...내 방 어디인지 알지? 기억하지?”


“응. 진짜 이번엔 어딘지 알아. 그런데, 앨리스. 혹시 집에 서재 같은 곳은 없어? 내가 이 세상의 지식을 빠르게 배우려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


“그럼 내가 가진 책들을 빌려 줄까? 내 방에 있는데, 어떤 책을 보고 싶어?”


“뭐가 있는데?”


“종류별로 다 있어. 문학, 예법, 산수, 법률, 역사, 예술······.”


“역사하고 법률! 가지고 있는 책은 전부 다 빌려줘!”


자고로 세상의 문화를 이해하기엔 역사가 최고고, 현실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기엔 법을 아는 게 최고다.


“알겠어. 준비 해둘 테니까 옷 갈아입고 와~”


“옷을 꼭 갈아입어야 돼? 그냥 지금 바로 가면······.”


“티타임에 맞는 복장을 하고 와. 그게 ‘예의’야.”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허리를 숙이고 있던 하녀의 이름을 불러 나의 환복을 도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녀와 함께 나란히 성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의 독자 경력에 따르면, 이런 소설 속 세상에서는 하녀와 하인들이 주인공의 든든한 아군이자 소식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과 친해지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다만 하녀가 자꾸만 내 앞에서 나를 등지고 걸으려고 하기에 그녀와 나란히 걷기 위해서 속도를 냈다. 그랬더니 하녀가 갑자기 더 걸음 속도를 높이기에, 나도 덩달아서 높였다. 그랬더니 어느덧 나와 하녀는 강변을 구보하는 아주머니들처럼 헛둘-! 헛둘-! 하고 소리 없는 구령에 맞추어 성을 가로질렀다.


구보를 하는 동안 나만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고, 하녀는 ‘네, 혹은 잘 모르겠어요’ 라고만 대답하는 치열한 대화가 이어졌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녀로부터 어색하고도 희미한 미소를 끌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녀가 구부정하게 걷고, 심지어 내 환복을 도와줄 때도 구부정하게 서 있어서 앨리스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 혹시 허리의 건강이 좋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녀가 우물쭈물하다가 헤어질 때 즈음에 대답을 해주었다. 귀족과 나란히 걷는 것도 불경한 일인데, 꼿꼿하게 서서 눈을 마주치는 것까지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몸을 낮춘 것이었다고. 그리고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해달라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소설을 보면 하녀들이나 하인들은 주인공에게 편하게 잘 해주던데. 주인공의 말에 태클도 적절히 걸어주고, 농담도 해주고...


나를 편하게 대해도 괜찮다고 말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현실은 다른 걸까? 조금은 씁쓸했지만, 그 마음을 빠르게 접어버리기로 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가 아니지. 그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나는 계속 다가갈 거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결국 상대도 마음을 열게 되어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랬으니까.


***


앨리스에게서 역사책과 법률서를 잔뜩 받았다.


소설 속 세상의 문화를 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다르게 역사책에서는 별 다른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내용이 너무 문학적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역사책은 문학과 다를 바가 없다더니······.


해괴망측하고 판타지스러운 전개. 심지어 비유와 상징이 너무 많아서 이해하기도 버거웠다. 해석을 도와줄 스승이 없다면 역사를 배우기엔 좀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했다. 책이 안 된다면 사람과 만나서 교류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저택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녔다. 신분과 연령, 직책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알게 된 점은 나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신분제 사회라고 하니까 귀족과 평민들은 노예를 완전히 개돼지로 취급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게 아니더라. 비록 신분제 사회였지만, 고용인들은 우리 모두가 같은 '신의 자손'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분과 관계없이 누군가가 죽으면 슬퍼했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함께 분노하고, 함께 아름다운 사랑을 주고 받고, 동정심을 가지고 함께 안타까워하고, 힘을 합쳐 약자를 지켜주었다.


다만, 이 선민 사상 때문에 '신의 자손이 아닌 인간'을 '야만족'이라고 부르며 우리들과 구별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야만족이 나타나면 신분 관계 없이 모두가 하나로 뭉쳐서 야만족을 배척하고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앨리스의 동화책에는 물에 빠진 야만족을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구해주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선한 일이며, 비록 그 대상이 야만족이어도 마땅히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보편적인 인류애도 있는 것 같다.


일단, 내가 알아낸 정보들을 모아서 도식화를 한다면 ‘가축 < 야만족 < 이방인 < 노예 < 농노 < 평민(자유민) <<< 귀족 < 왕’


이런 순으로 위상이 높으며, 단계마다 조금씩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정리했다.


사실 '이방인'은 도식화를 하기 애매한 포지션이었다. 저들은 야만족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신의 자손인데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다. 평민 이하의 이방인은 저 위치가 맞는데, 귀족 이방인이거나 왕족 이방인이라면 귀족 이상으로 대우를 해준다.


아, 그리고 조금 놀랐던 점은 왕의 위상이 생각보다 낮았다는 거였다. 정체불명의 유럽 언저리 어딘가의 중세 판타지풍의 소설이 배경이라면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라 놀라웠다.


소설을 읽으며 얻은 독자경력에 따르면, 보통 이런 판타지 소설에서는 왕권을 강하게 잡는 경우가 많았다. 말로는 중세 판타지라고 하지만, 실상 왕권이 절대왕정 시기보다도 더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뭐, 작가들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왕의 위상이 높고, 귀족들조차도 스스로 왕과 자신의 격차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주인공이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 독자들이 대리만족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왕이 되는 결말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가 주인공을 인정한다면 대리만족감을 줄 수 있고 혹은 권력자가 주인공의 동료가 되어 도움을 준다면 여러가지 잡다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서 주인공의 영웅적인 활약을 빠르게 보여줄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생각보다도 왕권이 낮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왕이 누구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느낌이었다. 성품이나 능력이 뛰어난 왕이라서 여러모로 인정을 받고 있다면 왕권이 강했고, 그저 그랬다면 왕권 역시 그저 그런 위치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의 왕은 어느 정도의 위상일까? 뭐, 그건 살아가다보면 알게 되겠지.


이런 미묘한 인식의 차이는 앞으로 경험을 쌓아가며 더 구체화 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어쨌든 역사를 독학하는 건 포기하고, 지도를 펼쳐놓고 지명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나름대로 객관적인 서술을 하려고 노력한 역사책을 발견해서 지도와 함께 공부했다. 앨리스가 스승으로서 나를 도와주었지만 이것도 곧 한계에 부딪혔다. 지도를 펼쳐놓고 책과 비교하면서 읽는데, 언제는 여기라고 했다가 언제는 저기라고 했다가······. 심지어 지도와 책이 말하는 지명의 오류도 많았고, 주석도 엉망진창이었다.


책과 지도가 모두 엉망인 것 같다. 내 스승을 자처한 앨리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결국 내가 보기로 한 것은 법률서였다. 이건 백작님에게 빌렸다. 5년 전에 국왕이 새로 즉위하면서 법을 개정했다고 한다. 새로 개정한 법을 봉신들에게 보급을 했는데, 당연히 백작님도 봉건계약의 구조상 봉신이었으므로 그 법률서를 받았다는 거였다.


현(現) 국왕은 의외로 여러 기사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선왕이 정복전쟁을 하던 도중에 전사하고, 뒤를 이어서 즉위했는데 그러면서 2년 동안 기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고 한다. 생사를 오고가는 전투 속에서 국왕의 활약을 기사들이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에, 국왕에 대해 다른 건 잘 몰라도 검술 실력과 근성 하나는 대단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작님 역시 그 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왕이란 사람은 단행본 1권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국왕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셨다. 아, 그리고 칼을 빼두면 전혀 왕 같은 느낌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덧붙이셨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작님은 추억에 젖은 눈으로 꽤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백작님의 뒤를 잇게 된다면 주종계약을 하기 위해서 수도에 갈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내가 아니라 주인공이 백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작님은 나에게 전쟁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봉건 계약을 한 현 국왕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왕이 폭군이면 어쩌나 했는데, 멀쩡한 사람인 것 같아서 안심했다.


어쨌든 백작님에게 법률서를 빌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딱히 나를 찾아온 자객도 없었고, 누군가가 보낸 협박 편지를 받지도 않았다.


아주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워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내가 한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백작님에게서 받은 법률서를 전부 외워버리는 일이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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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1화. 평화로운 하루 24.05.31 4 1 13쪽
20 20화. 돌아가자 24.05.30 5 0 13쪽
19 19화. 폐정 24.05.29 6 0 13쪽
18 18화. 조각상 24.05.28 8 0 13쪽
17 17화. 원점? +1 24.05.27 7 1 13쪽
16 16화. 관문에 대해서 24.05.24 5 0 14쪽
15 15화. 그 사건? 24.05.23 6 0 13쪽
14 14화. 흉기 24.05.22 8 0 12쪽
13 13화. 조사 결과 24.05.21 8 0 13쪽
12 12화. 체포한 근거 24.05.20 5 0 12쪽
11 11화. 개정! 24.05.17 6 0 13쪽
10 10화. 의심과 단서 24.05.16 5 0 13쪽
9 9화. 조사 시작 24.05.15 8 0 12쪽
8 8화. 이방인의 정체 24.05.14 9 0 13쪽
7 7화. 진실을 밝혀봅시다. 24.05.13 11 0 13쪽
6 6화. 억울한 사람 24.05.10 8 0 14쪽
5 5화. 마중을 나가다 24.05.10 10 0 15쪽
» 4화. 소설 속 세상에 적응하기 24.05.09 13 0 13쪽
3 3화. 왜 그랬을까요? 24.05.09 11 0 11쪽
2 2화. 후회와 의문 24.05.08 14 0 12쪽
1 1화. 후회와 빙의 24.05.08 32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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