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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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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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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4
추천수 :
198
글자수 :
139,600

작성
20.04.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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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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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 승화 (1)

DUMMY

사제는 성 아랫마을을 습격한 마신교도들의 생환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제는 교도 전원이 모험가와 자경단, 치안군을 맞아 끝까지 싸우다 고통스럽게 죽기를 원했다.

성 아랫마을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자의로든 타의로든 한 번씩은 타락의 대지에 발을 디딘 이들이며 마신교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자신의 영지에 발을 들인 이를 곱게 놓아주지 않는다.

즉 마신교도와 성 아랫마을의 시민들은 모두 이미 제물의 낙인이 찍힌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성 아랫마을에서 벌어질 작은 학살극은 사제를 성인으로 만들 마지막 제례였다.

죽는 이들도, 죽이는 이들도 모두 사제의 승화를 위한 양식이 되는 것.

그것이 사제의 계획이었다.

사제의 실수는 단 하나.

이스마엘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모습을 한 리치는 사제의 계획을 통째로 불살라버렸다.

콰앙!

리치의 손을 떠난 화염구가 사제가 서 있던 땅을 사납게 긁고 지나갔다. 굉음과 함께 그을린 돌가루와 모래가 비산했다.

"사제님!"

하지만 그 자리에 사제의 모습은 없었다.

사제는 피처럼 붉은, 불길한 마기를 뚝뚝 흘리며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놈!"

사제의 얼굴에서는 미소는커녕 온화했던 가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사제의 주름투성이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져 정녕 사람의 얼굴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를 막았다고 생각하느냐? 네 놈이 망친 죽음의 수 만큼 직접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다!"

분노로 떨리는 마기가 넘실거리는 와중에도 사제의 안광만큼은 리치에게 고정된 채 형형하게 빛났다.

하지만 리치는 위축되지 않았다.

리치의 시선을 끈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사제의 주변에서 약동하는 마기였다.

"정말로 마기를 다루고 있군."

마기는 악마의 것.

다루고 싶다 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한낱 인간이 제물을 바치고 마기를 흡수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았다.

아리타는 마기에 오염된, 자기 자신의 마나를 다룰 뿐이었다.

인간성을 비틀어버리거나 미치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이 세상의 기운이다.

그러나 사제의 주변에 구체화한 붉은 기운은 마기가 확실했다.

직접 본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마기를 다루는 인간이 어떻게 싸우는지 한번 견식해 볼까?"

리치가 양손으로 각각 마법을 시전했다.

진심을 낸 리치의 캐스팅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헤이스트]

[스트렝스]

어느새 깨어난 두 마법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신교에 입적하긴 했지만 자유마법사로서 전통적 마법을 갈고닦은 이들이다.

리치가 아무렇지 않게 해낸 더블 캐스팅이 초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것임을 한눈에 눈치챌 정도는 되었다.

주춤거리는 마법사들을 보다 못한 사제가 가래 낀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엇들 하고 있느냐! 놈의 발을 묶어라!"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지팡이에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영혼을 묶는 악령의 손길로···."

"악령이여, 적의 영혼을···."

리치는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엑토플라즘 프리즌··· 한 번 썼던 마법을 다시 사용하다니. 창의적으로 싸울 수는 없나?"

리치처럼 천 년 동안 마법을 수련한 것이 아닌 이상, 전투에서 사용할 만큼 숙련된 마법이 그렇게 많을 리 없다.

신세대의 마법을 견식하고 싶은 욕심에 입맛을 다신 리치가 전황을 살폈다.

포박 마법을 캐스팅 중인 두 마법사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그 앞을 가로막은 집행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막아낼 것이 뻔했다.

'역시 빈틈이 없군.'

차라리 마법이 완성되는 시점을 노리는 것이 낫다 판단한 리치가 시선을 돌려 공중에 고정된 사제를 살폈다.

문제는 사제의 능력이 미지수라는 것.

사제는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마기로 이루어진 촉수 두 개를 다리 삼아 서 있었다.

총 여덟 개의 촉수에 둘러싸인 사제는 웬만한 집 만큼이나 커보였다.

"대머리에 여덟 개의 다리, 그야말로 문어로군."

피식피식 웃는 리치를 바라보는 사제의 두 눈이 분노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죽여라!"

[엑토플라즘 프리즌!]

[엑토플라즘 프리즌!]

사제의 외침과 함께 두 마법사가 다시 녹색의 투명한 촉수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스무 명의 집행자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사방으로 산개했다.

리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프로텍트 프롬 아스트랄 포스]

영적인 힘을 막아내는 방어막이 전개되었다.

두 마법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어··· 어떻게?"

"파훼했다고?"

엑토플라즘 프리즌은 두 마법사가 사제의 촉수에 영감을 받아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법.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 전부였다.

"뭐 대단한 마법이라고···."

하지만 리치에게는 한 번 본 데다가 캐스팅하는 모습까지 친절하게 보여준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두 마법사가 주춤하는 사이 리치는 양손을 뻗어 마법사들을 향해 조준했다.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이 마법사의 눈구멍을 파고들어가 뇌를 헤집고 경추를 꺾었다.

빠드득.

"쓸모없는 놈들!"

실이 끊어진 연처럼 쓰러지는 마법사들을 보며 이를 간 사제가 손을 쳐내자 마기의 촉수 두 개가 리치를 향해 쇄도했다.

쐐애액!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

리치는 서둘러 실드를 전개했다.

[실드!]

터엉!

수인을 맺은 리치의 양손이 촉수를 막아냈다.

"크윽···."

촉수에 담긴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촉수를 막아낸 두 개의 실드가 곧바로 힘을 잃고 사라졌다.

미처 다 막아내지 못한 충격에 손이 저릿했다.

하지만 리치에게는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리치의 틈을 노린 집행자들이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나무를 타고 넘어 허공에서, 단검을 꼬나쥔 집행자들이 각자의 공격을 리치에게 쏟아부었다.

[멀티플 실드]

채챙!

대부분의 공격은 리치의 몸을 가린 실드와 부딪혔지만 몇 자루의 비도가 실드 사이를 뚫고 리치의 피부를 긁었다.

"큭···."

부우웅.

틈을 놓치지 않고 사제의 촉수가 리치에게로 날아들었다.

리치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 피함과 동시에 실드를 움직여 집행자 한 명을 촉수의 궤도에 밀어 넣었다.

철퍽.

"억···."

촉수에 얻어맞은 집행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리가 접힌 채로 몇 미터를 굴러갔다.

온몸의 뼈가 흉하게 드러난 모습.

보나 마나 즉사였다.

"무식하게 강력하군."

"죽어라!"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사제가 무차별적으로 촉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공성이 대기를 찢고 하늘을 갈랐다.

촉수에 한 대라도 맞으면 리치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힘은 무자비할 정도로 강력했지만, 힘을 다루는 방식은 어린아이처럼 무지했기 때문에.

사제의 촉수는 리치를 건드리지 못했다.

"죽어!"

퍽.

"커흑!"

애꿎은 집행자들만이 고깃덩이로 변했을 뿐이었다.

리치는 사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사제의 촉수, 그리고 마법을 간간히 사용해 착실히 집행자들의 수를 줄여나갔다.

사제는 점점 초조해졌다.

분명 수적으로 우세한데도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스마엘도 상처를 입고 있긴 했지만 단검에 긁힌 자잘한 상처들뿐.

결정적인 타격은 없었다.

'어째서 죽지 않는 거냐!'

격렬한 공방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사제는 불현듯 이스마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웃어···?"

사제가 의문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 찰나.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붉은 안광이 빛나고, 리치의 두 손에서 뿜어져 나온 전격이 안개 속을 휩쓸었다.

단 한 번의 공격.

그리고 더 이상 서 있는 집행자는 없었다.

"어··· 어떻게···?"

단 한 순간의 틈이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촉수의 공격이 끊긴 한순간, 그리고 집행자들의 대열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정확히 노린 공격.

리치는 느물느물 웃었다.

"글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촉수에 주변의 땅이 패이고 작은 돌개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리치의 붉은 안광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의 패배다."

천천히 전진하는 리치의 앞에서, 사제는 양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사제는 갈등했다.

이스마엘은 괴물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게 되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벗어던져야 한다.

제물이 부족하더라도, 불완전한 승화일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크아아악!"

발작적으로 외친 사제가 품속에서 검은색 책 한 권을 꺼내 손에 들었다.

리치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책?"

사제는 여덟 개의 촉수를 쉬지 않고 휘둘러 리치의 마법을 막아내며 익숙한 동작으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clinva otmolpm. corpaed vectum.]

쿠르르릉.

사제가 책을 읽어내려감에 따라 주변의 안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하늘을 덮은 벌레의 무리와도 같은, 기분 나쁜 모습으로 사제에게 몰려든 마기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사제의 주변에서 춤을 췄다.

[플레임 스피어]

[썬더 브레이크]

[프리징 레이]

리치가 급하게 시전한 마법들은 마기의 벽을 뚫지 못하고 사라졌다.

몇몇 날카로운 공격이 사제의 피부를 찢고 뼈를 드러냈지만, 사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어나갔다.

[yunm. iop, ioen, boklm, kotevokl!]

사제가 책을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집행자들에게 명령했다.

"자살해라."

단호한 한 마디.

죽어가던 집행자들의 눈이 광기로 빛났다.

"사제의 명을 따릅니다···."

"사제의 명을 따릅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집행자들은 단검을 꺼내 들고 주저 없이 자신의 목을 그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집행자들은 혀를 끊었다.

그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라면 바위에 머리를 내리쳤다.

이미 늦었음을 짐작한 리치가 혀를 차며 이마를 짚었다.

"···빌어먹을."

순교자처럼 경건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집행자들의 시체에서 흐른 피가 안개를 따라 움직였다.

사제를 향해 흐르던 피는 점차 안개와 동화되더니 끈적이는 무형의 기운으로 변했다.

마기였다.

[네 놈에게 저주 있으라!]

부릅뜬 사제의 눈, 코, 입, 모든 구멍을 통해 마기가 흡수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사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자발적으로 바친, 아무 의미 없는 목숨에 악마는 기뻐하지 않는다.

집행자들의 순교는 잘못하면 악마의 눈 밖에 날 수도 있는 발악에 불과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제에게 흡수되는 마기의 양은 지금껏 바쳐온 어떤 제물의 대가보다도 더 많았다.

악마가 사제의 승화를 바라고 있었다.

'어쨰서?'

의문을 느낄 새는 없었다.

인간의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질적이고 파괴적인,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카타르시스를 주는 충만한 기운이 사제의 몸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영원인지 찰나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평온이 찾아왔다.

사제는 약속된 때가 도래했음을 느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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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8. 습격 (1) +2 20.04.22 151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7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73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200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17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7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9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31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9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6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9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4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9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21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3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90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26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8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8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72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76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73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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