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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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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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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9,600

작성
20.04.1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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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7. 때 아닌 던전탐험 (3)

DUMMY

던전은 판데모니엄의 악마가 다른 차원에서 불러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친 일종의 가상 차원이다.

밖에서 본 던전은 지름 10m, 높이 50m 정도의 탑이었다. 천천히 둘러봐도 10분이면 나올 수 있을 만한, 던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크기였다.

하지만 문 안쪽, 던전의 본모습은 좁은 길이 끝없이 이어진 미궁이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높은 벽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지름 10m짜리 탑 내부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의 왜곡.

심지어 던전의 내부는 탑조차도 아니었다.

휘적휘적 걷는 리치의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에 생전 처음 보는 별들이 떠 있었으니까.

베테랑 모험가라도 던전에 들어설 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리치는 태연했다.

우우웅.

저 멀리서 마나를 회전시키는 소리, 뒤이어 거대한 무언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던전을 울렸다.

[bacek dxatn!]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기계음으로 알 수 없는 문장을 뱉어낸 것은 다섯 개의 우람한 팔에 다섯 개의 무기를 든 기계 골렘이었다.

콰아앙!

골렘이 휘두른 살벌한 크기의 메이스가 던전의 벽을 때렸다. 엄청난 소리가 울렸지만 벽에는 흔적조차 없었다.

우우우우웅.

뒤이어 골렘은 포효하듯 마나 엔진을 회전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팔을 휘둘렀다.

부우웅.

리치는 골렘의 다섯 팔에 쥐어진 다섯 종류의 무기를 피해내고는 허공에 화염구를 만들어냈다.

화르륵.

[파이어 볼]

리치의 손을 떠난 화염구가 골렘에게로 빠르게 쇄도했다.

[xety giom vayum!]

하지만 화염구가 골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골렘의 몸 주변으로 빛의 문자가 수없이 배열되더니 맹렬하게 불타던 화염이 사라졌다.

리치가 혀를 찼다.

"마법 방어진? 이거 구리 등급의 던전이 아닌 것 같은데."

모험가들은 던전이 안개의 장막 근처에 있기에 구리 등급이라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구리 등급의 초짜 모험가들은 몇 명이 모이더라도 마법 방어진을 탑재한 2m짜리 기계 골렘을 상대할 수 없었다.

골렘의 무기에 눌어붙은 피딱지들과 던전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사람의 뼈들.

던전에서 무력하게 죽어간 수많은 모험가의 흔적이었다.

[batoo, batoo!]

기계 골렘이 함성을 내질렀다.

함성은 동료를 부르는 신호였다. 곧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슷한 모습의 골렘들이 좁은 통로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쾅!

쿠구궁!

[batoo!]

[batoo!]

"확실히 구리 등급 던전은 아니군."

하지만 리치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 정도 능력에 마법 방어진까지 탑재한 기계 골렘이라면 동력은 마나석일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조루 마나를 걱정할 필요도 없겠어."

리치의 눈이 빛났다.

들어 올린 리치의 양손에서 냉기가 흘러 안개처럼 바닥을 덮었다.

[프로스트 노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한기가 좁은 던전을 뒤덮었다.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안개가 낀 것처럼 얼음 조각들이 날아다녔다.

빠직. 빠지직.

만지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듯 차가워진 던전의 강철 벽에는 빠른 속도로 성에가 끼었다.

[ka'ohm.]

골렘들의 엔진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리치의 예상대로였다.

골렘들의 마법 방어진이 인식하는 것은 직접적인 공격마법뿐이었다. 마나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마나 엔진의 특성상 모든 마법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batoo!]

쿵 쿵.

쿵 쿵.

당황한 골렘들이 다섯 개의 팔을 휘두르며 리치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느려진 속도였다. 얼어버린 마나 엔진은 골렘에게 충분한 동력을 전달하지 못했다.

골렘들이 땅을 밟을 때마다 쩌적 쩌적 하며 얼어버린 금속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리치의 양손에서 흘러내리던 냉기가 열기로 바뀐 것은 그때였다.

[batoo!]

지척까지 달려온 골렘이 철퇴를 들어 올렸지만 리치는 피하지 않고 캐스팅했다.

"불꽃이 내 손끝에 머물러 쥐는 것들마다 재로 화하리라."

[버닝 핸드]

화르르륵.

리치의 양손이 벌겋게 물들며 강렬한 빛과 열을 냈다.

쉬이이익.

리치의 손에 닿은 공기 중의 얼음 조각들이 비명을 지르며 증발했다.

리치가 뻗은 손이 골렘의 강철 팔뚝에 닿았다.

파캉.

극한의 냉기에 얼어있던 골렘의 팔은 급격한 온도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bo'xehn!]

끼기긱.

무기물에게는 어울리지 않게도 골렘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달려든 골렘들이 리치에게 팔들을 연신 휘둘러댔지만, 관절이 얼어버린 골렘들의 공격은 매섭지 못했다. 리치는 가볍게 팔들을 피해냈다.

"읏차."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리치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골렘들을 해체했다.

[ew···.]

팔다리를 잃고 꿈틀거리던 마지막 골렘의 안광이 점멸하다가 사라졌다.

"흠."

남은 마나량을 재본 리치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간당간당했군."

끙끙대며 골렘을 뒤집은 리치가 골렘의 흉갑을 뜯어냈다.

우우웅.

마나 엔진 한가운데, 영롱하게 빛나는 하급 마나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지."

리치가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마나석을 뜯어낸 마나 엔진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나 엔진은 골렘과 마찬가지로 차갑게 식어버렸다.

하급 마나석 하나면 방금 했었던 싸움을 다섯 번 반복할 수 있었다.

작업 효율이 세 배인 것이다.

"좋구나."

마나를 아끼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은 이상 굳이 효율적인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악하게 한 번 웃은 리치가 던전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muytte!]

던전을 지켜야 할 골렘들이 리치에게서 도망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크하하하! 도망가지 마라!"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리치를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골렘들은 미련 없이 뒤돌아 도망쳤다.

[neyu muytte···.]

양손에 푸른 뇌전을 두른 리치가 도망가던 골렘의 등을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골렘은 온몸에서 전류를 뿜어대며 말 그대로 벼락에 맞은 사시나무처럼 떨더니 쓰러졌다.

[tulvac!]

"어딜 가느냐?"

[muytte!]

"마나석을 내놔라!"

파지지직.

또 한 마리의 골렘이 리치의 손에 무참히 파괴되었다.

리치는 던전의 클리어 룸을 찾아낸 후에도 들어가지 않고 던전 구석구석을 뒤져 오들오들 떨고 있는 골렘들을 잡아 죽였다.

"크하하하!"

이왕 던전에 온 김에 본전을 뽑는 것이 리치의 목표였다.

당연히 골렘들에게는 감정이 없다.

하지만 열심히 도망치는 골렘들을 웃으며 쫓아가는 리치를 본다면 누구라도 골렘들에게 연민을 느낄만했다.

[천천히 해라, 천천히.]

이고르는 리치가 사냥한 골렘의 몸을 비집고 들어가 마나석을 꺼내 자루에 담았다.

몇 마리의 골렘을 파괴했는지 조그마한 마나석이 담긴 자루는 이고르의 몸통만해져 있었다.

[후아암.]

리치는 신나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날아다니면서 마나석만 주운 이고르는 어느새 지루해졌다. 심심해진 이고르는 차라리 이스마엘의 넓은 책상 위에서 낮잠을 자고 싶어졌다.

이고르가 뒷다리로 귀 뒤를 긁으며 쩝쩝댔다.

[꼬마 계집애가 쓰다듬는 건 잘하는데.]

어찌나 심심했는지 미리암의 손길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얼마 후, 조용해진 던전에서 이성을 되찾은 리치가 마나석 몇 개를 손에 들고 마나를 흡수했다.

"이 정도면 고얀 사제 놈에게 어른에 대한 예의범절을 가르치기에는 충분하겠구나."

리치는 사제의 궁둥짝을 때려줄 생각을 하며 광소했다.

하급 마나석 한 주머니.

이것만으로도 리치는 타락의 대지를 넘어 던전까지 들어온 목표를 달성하고도 남은 것이었다.

개미 던전에 갔다면 생명력을 흡수할 수는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마나석의 효율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리치는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아···. 스트레스가 좀 가시는 것 같군. 이제 나가자꾸나."

리치는 부서진 기계장치의 잔해 위에서 이제 다 웃었다는 듯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미궁 한 켠에 자리잡은 철문에서는 '여기가 끝이다.'라고 말하는 듯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궁.

리치가 손을 올리자 철문은 굉음을 내며 열렸다.

리치는 문 안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철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닫혔다. 실제로 어떤 수를 쓰더라도 철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던전이라는 다른 세계는 이미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던전을 공략한 모험가를 위해 악마가 준비한 선물뿐이었다.

클리어 룸.

특별한 것은 없었다.

던전과 같은 강철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철 상자 하나가 놓여있을 뿐.

리치는 감흥 없이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흠?"

리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고대의 금화도, 유물도, 아티팩트나 마법 무기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이 들어있었다면 리치는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상자 안에는 낡은 금속 끈 하나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건···."

하지만 리치에게는 그 어떤 재화보다도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리치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치의 눈은 차가운 분노로 가라앉았다.

리치가 금속 끈을 주워들었다. 서늘한 금속의 질감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

금속 끈은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에 걸려있던 목걸이였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네가 가지고 있었나?"

리치는 싸늘하게 웃었다.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그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

악마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너는 고통받을 것이라고.

리치는 악마에게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1,600년이다."

리치가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내 고통이 부족했나?"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그 영지에 인간을 끌어들여 고통을 준다.

악마는 인간이 느끼는 온갖 감정에서 힘을 얻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것은 고통과 공포이다.

그리고 판데모니엄에게서 가장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인간이 있다면,

그건 리치였다.

"천 년이 넘어도 너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포기하려 했다. 그런데 너는 내게 평온한 죽음마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건가?"

리치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세계의 낯선 하늘.

악마가 만들어낸, 거짓된 하늘이었다.

리치의 등은 세월에 짓눌린 노인의 그것과 같았다.

하지만 회한은 오래가지 않았다.

"좆 까라."

붉은 안광이 빛났다. 검은 마나가 리치의 손을 가득 덮었다.

리치의 손에 들린 금속 끈이 삐걱거리더니 마나의 격류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젠 네 꼭두각시로 사는 것도 질렸다."

리치는 남은 금속 쪼가리들을 비틀어 쥐었다.

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

배어 나온 피가 금속 파편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감각은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네가 내게서 무엇을 원하던지 상관없다. 너는 얻지 못할 테니까."

차라랑.

피 묻은 금속 파편을 바닥에 던져버린 리치는 미련 없이 던전을 나섰다.

쿠르르릉.

새벽이 가까워진 밤이었다. 리치가 던전에서 발을 떼자 던전은 곧 무너져내렸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락의 대지에서 빠져나온 리치는 곧장 빛의 집으로 향했다.

남은 것은 단 하루.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었다.


작가의말

감사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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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57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82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7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30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49 5 14쪽
»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3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70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194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11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4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4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27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4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2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4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1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4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16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2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86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19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4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2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64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69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63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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