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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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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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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글자수 :
139,600

작성
20.03.2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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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DUMMY

스윽. 스으윽.

가죽 주머니를 잡아끄는 소리가 리치의 지하던전을 울렸다.

[으··· 무겁다.]

박쥐와 개를 합쳐놓은 모습, 금속질의 피부. 주먹만 한 크기의 가고일이었다. 가고일은 조막만 한 양발로 자신보다 큰 쥐를 질질 끌고 있었다.

[쥐, 너무 무섭다.]

타락의 대지에서 마기를 받아 흉폭해진 쥐들은 몬스터로 분류된다. 다섯 마리가 모이면 사람도 뜯어먹는다. 가고일은 쥐와 벌였던 사투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털썩.

가고일의 목적지는 던전 중앙에 그려진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위에는 성인 남자 한 사람분의 백골이 놓여 있었다. 백골은 깨끗했지만 군데군데 생기다 만 빈 공간이 눈에 띄었다.

가고일이 조심스럽게 쥐를 마법진 위로 올렸다. 마법진에 닿은 쥐는 파르르 떨더니 순식간에 미라처럼 말라가기 시작했다. 마법진 근처에는 그렇게 말라버린 생쥐의 사체가 한 수레였다.

[이걸로 충분해야 한다···.]

장장 18년에 걸쳐 쥐를 잡아 온 가고일은 날개 끝에 달린 양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파직··· 파지직···.

생쥐의 생명력과 마나를 게걸스럽게 흡수한 마법진은 스파크를 튀기며 백골의 빈 부위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제발.]

찍··· 찌이익.

생쥐의 눈에서 빛이 꺼짐과 동시에 미동도 없이 쓰러져있던 해골의 눈에 붉은 안광이 돌기 시작했다.

[허어억!]

다음 순간, 의식을 되찾은 리치는 뼈를 달그락거리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

주변을 살피던 리치의 눈에 띈 것은 텅 빈 자신의 던전, 그리고 먼지 덮인 바닥에서 깨방정을 떨고 있는 작은 가고일이었다.

[됐다! 됐어!]

[···이고르냐?]

리치는 자신의 패밀리어, 이고르와 마법진 옆에 잔뜩 쌓인 쥐의 미라를 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부활의 감흥 따위는 없었다. 그는 바로 던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허.]

예상하고 있었지만 던전은 리치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던전이 엉망이군. 엉망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없군. 내 장비···. 마법 도구까지···. 용사 놈들이 다 털어갔나?]

텅 빈 던전을 둘러보던 리치가 허탈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고르가 주먹을 꼭 쥐고 리치를 격려했다.

[아직 목숨이 남았다.]

리치는 피식 웃었다. 가끔은 이고르의 몬스터다운 간단한 사고방식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 목숨이 남았지.]

리치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은퇴하기로 했으니까 전부 짐이야. 내게 필요한 건 비루한 몸뚱아리와 라이프 포스···.]

불안한 기운이 불현듯 리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기랄.]

리치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던전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점점 다급해지던 리치가 괴성을 지르며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을 때쯤 이고르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리치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이고르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땅을 파봤자 그가 찾는 물건은 여기에 없다.

[뭘 찾나?]

결국 바닥에 누워버린 리치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라이프 포스 베슬.]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는 말을 들은 이고르가 작게 신음했다.

[···오.]

리치의 생명력이 담겨있는 용기, 라이프 포스 베슬.

리치는 제한적인 불사의 언데드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 멀쩡하다면 설령 몸이 소멸하더라도 마나를 흡수해 부활할 수 있다.

반대로 라이프 포스 베슬의 파괴는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을 뜻했다.

리치는 목숨줄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양심 없는 놈들.]

이고르가 리치의 어깨뼈에 손을 턱 얹었다.

[던전에 있으니까 아티팩트인가 싶어서 가져간 거다. 지금까지 리치가 멀쩡한 걸 보면 멍청한 인간들은 그게 뭔지도 모른다.]

[흠···. 네 말이 맞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큰 금속 펜던트.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타락의 대지에서 가져온 물건이니만큼 교단이나 어느 귀족 집 창고에 다른 비싼 잡동사니들과 함께 처박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은퇴하고 할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거지.]

어차피 은퇴를 결심한 몸. 시간은 말 그대로 썩어난다. 얼마가 걸리더라도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리치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몸이 소멸한 지 얼마나 지났지? '지금까지' 라고 한 걸 들으니 꽤 오랫동안 의식이 없었던 것 같은데.]

먼지를 날리며 뽈뽈 날아와 리치의 다리뼈 위에 앉은 이고르가 손가락을 꼽더니 대답했다.

[18년이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리치가 턱뼈를 크게 벌렸다.

[18···?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렸어? 마왕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모른다. 한 번도 온 적 없다.]

[온 적이 없어?]

[없다.]

설마 진짜로 마왕이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18년 전, 리치의 관점으로는 방금 전에 용사 일행에게 '너희는 못 이긴다.' 라고 확언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이야 어찌 되었건 리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빨리 나가야겠군.]



---



고대의 도로를 지나는 마차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짙은 안개 때문에 바깥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스마엘은 욕을 내뱉으며 마차의 창을 닫았다.

"정신 나간 광신도 놈들···."

이스마엘은 마신교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값을 잘 쳐주는 고객들이기에 비위를 맞춰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판데모니엄의 악마를 숭배하는 이교도 집단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이런 땅을 성지라고 부르는 미친놈들의 머릿속이야 알 수 없지만 이건 정말 못 할 짓이야."

물론 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못 할 짓이라 여기는 건 저주받은 땅, 타락의 대지에 들어서는 일이었다.

그가 오래된 격언을 중얼거렸다.

"타락의 대지에 발을 들이지 말라.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그 영지를 침범하는 이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쩐지 스산해진 이스마엘은 눈앞의 '상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의 눈빛은 고요했다.

열 살짜리 어린아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모습.

이스마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암. 나는 네가 침착한 건지 아니면 벌써 미쳐버린 건지 알 수가 없구나."

보육원의 아이들 중에서도 미리암은 똑똑한 편이었다.

사실 이스마엘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시끄럽고 코나 흘리는 다른 고아들과 달리 미리암에게는 타고난 품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똑똑한 것도 죄가 되지."

이스마엘의 거래에 대해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그녀가 다음 상품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장님이 한 나쁜 일들, 언젠가 들키게 될 거에요."

이스마엘은 피식 웃었다.

똑똑하다 해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증거.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에 대한 증거 없는 맹신이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

죄인은 심판을 받고 선인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

현실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 거래니 그럴 일은 없겠구나."

이스마엘은 1년 동안 보육원의 고아 두 명, 그리고 성 아랫마을의 떠돌이 다섯 명을 팔아치웠다.

미리암이 눈치채지 않았더라도 곧 다른 왕국으로 도망칠 시점이었다.

"게다가, 내가 처벌을 받더라도 넌 볼 일이 없을 거다."

그의 고객들은 구입한 상품을 오랫동안 살려두는 종자들이 아니었으니까.



---



한 시간을 달린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마부는 유령처럼 마차를 멈춘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스마엘이 마차 문을 열고 그런 마부에게 눈을 흘겼다.

"꼴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거냐?"

마부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스마엘은 마부에게서 시선을 떼고 미리암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려."

미리암은 순순히 마차에서 내렸다. 이스마엘은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빌 때의 저열한 정복감을 원했다.

교단의 입양서류를 위조하고 몬스터를 마주칠 위험을 감수하는데 그 정도의 보상은 바랄 수 있지 않은가.

이스마엘은 미리암에게서도 만족할만한 반응이 나오길 원했다.

"아이들의 감이란 보통이 아니란다. 보통 이 쯤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채고는 해. 그리고 나를 귀찮게 하는 거야. '내리기 싫어요.' '저 사람들 이상해요.' '원장님, 입양 가는 거라고 했잖아요.' 하면서 말이야.

지랄도 가지가지 하는 거지.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고아 새끼들을 누가 입양한다는 말이냐?"

미리암의 표정은 아직도 변화가 없었다.

이스마엘은 허리를 숙이고 미리암의 옷깃을 정리해주었다. 미리암의 표정에서 어떤 변화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스마엘이 비릿하게 웃었다.

"한 번은 투견을 기르는 남작이 남자아이 하나를 샀지. 어쩐지 궁금해졌기에 나는 물었다.

'그 아이를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니?"

미리암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녹색 눈으로 이스마엘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이스마엘은 입가를 더 찢어 올리고는 말했다.

"투견을 잘 싸우게 하기 위해서는 피 맛을 보여주는 게 최고라 하더구나.

공포에 질린 상대의 숨통을 끊어서, 포식자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거라고 말이다."

미리암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 인형 같은 아이도 공포를 느낀다.

이스마엘은 만족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이봐,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화들짝 놀란 이스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기다리던 고객들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스마엘은 손사래를 치며 짐짓 미안한 척 말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아이가 무서워해서 말입니다."

상대는 셋. 하나같이 흉악한 무기를 찬 거한들이었다. 이스마엘은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인간 백정들임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한 달이 조금 넘었지요?"

거한들은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네는 이스마엘을 무시했다. 그들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 50실버를 주지. 물론 앞으로도 공급이 끊이지 않게 제물을 조달하고, 뒤를 밟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는 조건 하의 가격이다."

50실버.

고아 한 명의 가격으로는 높은 값이다.

마신교도들이 산제물로 사용할 아이들을 직접 조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법으로 인신매매는 금지되어있을뿐더러 성왕의 칙령으로 마신교도들에게는 꽤 높은 현상금이 걸려있다.

그런 그들이 성 아랫마을에서 어린아이를 납치하다가는 교단에서 보낸 성기사, 백사자성의 치안대, 성 아랫마을에 우글대는 모험가들을 모두 자극하게 된다.

어린아이 하나 납치하자고 마신교 지부 하나를 날려 먹느니 이상성욕을 가진 귀족들처럼 비싼 값을 치르고 사는 편이 깔끔하다.

'이정도 주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헤헤···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염을 기른 거한이 내민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든 이스마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미리암을 넘겼다. 민눈썹의 거한이 미리암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챘다.

"아얏!"

"얌전히 있어라."

민눈썹 거한이 미리암을 끌고 돌아서는데 흉터 거한이 이스마엘의 뒤쪽, 안개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잠깐, 저건 뭐지?"

타락의 대지의 안개 속에서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야 죽음을 피할 수 있다.

잔뜩 긴장한 수염 거한이 이스마엘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겼다.

"비켜봐."

"아, 예."

이스마엘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는 안개를 뚫고 시야에 들어왔다.

달그락대며 걸어오는 그것은 흰색의 인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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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57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82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7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30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49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3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70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194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11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4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4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27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4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2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4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1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4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16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2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86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19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4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2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64 13 12쪽
»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70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63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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