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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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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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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글자수 :
139,600

작성
20.04.1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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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DUMMY

"끄응···."

리치가 침대 위에서 이불을 걷어찼다.

[조용히 좀 해라.]

이스마엘의 책상을 침대처럼 쓰기 시작한 이고르가 몸을 뒤척이며 리치에게 소리쳤다.

"끄아악!"

리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억··· 허억···.”

가슴이 답답했다. 리치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이고르가 뽈뽈 날아와 리치의 등을 두들겼다.

처덕처덕.

[땀을 얼마나 흘린 거냐?]

“마시는 물보다 흘리는 물이 더 많을 지경이다.”

이고르가 몸을 털어냈다.

[털이 녹슬겠다.]

“엄살 부리지 마라.”

요 며칠간, 리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익숙해지려 무던히 노력했다.

오래 앉아있으면 등이 배기는 것, 잘못 깎은 수염 밑의 피부가 아린 것, 실수로 책상 모서리에 찧은 발가락의 격통도 물론 힘들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리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잠을 이루는 일이었다.

리치는 잠드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1,600년간의 기나긴 기억 속에서 수면에 가장 가까운 기억은 다섯 번의 소멸과 재생성 사이의 과정뿐이었다.

그렇기에 리치에 있어 잠이 드는 과정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큼이나 섬찟했다.

눈을 감으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류의 자유를 되찾으려 모든 것을 다 바쳤던 1,600년.

그리고 1,600년의 실패.

그만큼의 허무함과 좌절감.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판데모니엄.

목표가 확고했던 만큼 맹목적으로 무시해온 감정들이 주마등처럼 어둠 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리치가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억눌렀던 광증이 이제야 도지기 시작한 건가?"

오늘은 특히 심했다. 주변이 조용하면 곧 낮의 일이 떠올랐다.

사제를 지하실에 매달아둔 것이 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목숨은 건졌지 않은가?

리치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부족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미리암의 풀 죽은 목소리였다. 그는 꼬맹이의 위축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젠장."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리치는 젖은 옷을 대충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식당 테이블에 앉아 촛불을 켜고 책을 읽던 코리 사제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리치인 걸 알아챘다.

"안 주무셨어요?"

"잠이 안 와서 말이네."

"수고하시네요."

리치가 사과 하나를 꺼내들고 코리 사제 건너편에 앉았다.

"···."

"···."

리치는 입을 벙긋거리며 사과만 뽀득뽀득 매만졌다.

결국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코리 사제가 책을 덮고 리치를 쏘아보았다.

"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할 이야기가 있긴 하네."

"뭔데요?"

리치는 갈등했다.

은퇴와 평온한 생활을 바라긴 했다.

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장황하게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리치가 갈등하는 이유는 사실 하나였다.

말하면 지는 느낌이라는 것.

코리 사제가 길고 검은, 커튼 같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원장님을 보고 있으니 고집을 부리는 아이들이 떠오르네요. 왜일까요?“

”···.“

”그러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자신에게 고집부리지 말고 말해보세요.“

코리 사제가 어린아이를 어르듯 리치를 다독였다. 리치는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부원장에게 전달할 말이네.

성외신전의 사제들, 마기에 오염되어 신성력을 잃은 사제들이 많은 것 같더군.

그대로 원정을 나가보았자 파티를 위험에 빠트릴 뿐이니 성내신전에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전해주게.

내지의 수도원에서 요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더군.”

코리 사제가 리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왜 직접 백사자성에 가보지 않으시고?“

굳이 성 안에 들어가 사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껄끄러워서.“

리치는 어떤 상황이던 끼워 맞출 수 있도록 두루뭉술하게 변명했다. 코리 사제도 이스마엘이 껄끄러워할 이유를 하나쯤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님이 이렇게 사려 깊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냥 꿈자리가 뒤숭숭했을 뿐이네."

"알겠어요. 파비안이 내일 백사자성에서 열리는 훈련에 참여한다니 파비안을 통해 전하도록 할게요."

”고맙네.“

집중이 깨진 코리 사제가 피곤한지 책을 들고 일어섰다.

”책은 다 보았나?“

”클라이막스였는데 원장님 덕분에 김이 다 새버렸네요.“

”뭐? 그거 요리책이잖나?“

”그러니까요.“

”어디에 클라이막스가 있는 거지?“

”죽은 닭의 시체에 수십 가지 향신료를 채워 넣고 오븐에 밀어 넣은 다음에 살아있다면 견디지 못할 화력으로 회복하지 못할 화상을 입히는 장면이요.

리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보육원에는 오븐도 없네만.“

”하나 사주시죠.“

”마법 도구는 비싸네.“

”돈도 많으시면서. 제국 아카데미 정품으로 하나 어때요?“

”그럴 돈이 있으면 보육원의 무너진 부분부터 메꾸는 게 낫지 않겠나?“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죠.“

”말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성외신전에 쌓여있는 나무판자들, 그거 우리 거네. 나중에 보내 달라고 하게.“

”···?“

”그런 게 있네.“

코리 사제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품을 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코리 사제가 없어진 자리에는 자다 깼는지 헝클어진 머리로 물컵을 든 미리암이 서 있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뭘 보느냐?"

미리암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친절한 거 맞잖아요."

리치가 미리암의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흥, 그래봤자 썩어 넘치는 하급 사제들에게 그 정도의 자원을 낭비하지는 않겠지.

모험가들도 마찬가지다. 죽어도 상관없는 이들이니 죽어도 상관없는 이들을 딸려 보내는 거야. 바뀌는 건 하나도 없을 게다."

미리암이 고개를 저었다.

"결과가 중요한가요?"

"···들어가서 자라."

"원장님도 피곤해 보이세요. 빨리 주무세요.”

물컵을 주방에 던져놓은 미리암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은근한 미소를 입에 건 채였다.

”허.“

리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련했다.

리치는 그런 감각이 혼란스러웠다.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아이의 미소였다.

겨우 그런 것에 1,600년의 고뇌가 누그러진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확고했던 리치의 기준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머리 안쪽을 쇠 숟가락으로 벅벅 긁어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리치는 자기 자신에게 되새기려 중얼거렸다.

“약속했으니 지킨 것뿐이다.

약속했으니 지킨 것뿐이야.”

마르다 못해 수척한 뺨을 번갈아 가며 때리던 리치가 벌떡 일어섰다.

“바람이나 쐬러 가야겠군.”

리치는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



빛의 집은 레온 영지의 북서쪽 끝에 있었다. 서쪽 숲과 성 아랫마을, 그리고 타락의 대지가 맞닿은 곳이었다.

서쪽 산맥에 산다고 전해지는 드래곤의 기운이 산맥에서 뻗어 나온 숲까지 영향을 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서쪽 숲에는 마기가 퍼져있지 않았다.

빛의 집이 지금껏 서 있는 이유였다.

빛의 집과 서쪽 숲이 맞닿는 지점, 숲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바위 밑에는 집행자 루서가 숨어 보육원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3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선임 집행자 마티아스의 명령을 묵묵히 수행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군. 3일 내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루서는 집행자의 일원이었고 감시는 완벽했다. 그렇기에 더욱 지루했다.

루서는 이스마엘이 정체를 숨기고 마신교에 잠입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이스마엘은 인신매매에 가담하면서까지 완벽하게 유지해온 위장을 포기하고 피니언을 죽였다.

루서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제의 승화를 막으려는 거냐?”

루서는 아리타의 수행원으로서 제례를 여러 번 목격했다.

비명을 지르는 어린아이.

차분하게 아이를 고문하는 사제.

아이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마다 사제의 불길한 기운은 점점 더 강해졌다.

루서는 마법과 약물로 강화된 인간.

그리고 집행자로서 마기에 익숙했기에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악마가 제물이 충분하다고 판단하게 되면 사제에게 악마의 힘을 나눠줄 것이다.

인간에서 마신교의 성인으로.

‘승화’하게 되는 것이다.

“서신 한 장 쓰지 않고 마법을 사용해 누군가와 연락하지도 않았다.

신전에 한 번 들르긴 했지만, 고작 사과 한 상자와 옷가지를 얻어왔을 뿐이고···.”

혼자서 마신교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연락을 취할 것이다. 루서는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다음 제례가 열리기 전에 집행자들이 이스마엘을 습격할 것이다.

집행자들은 고문의 달인.

이스마엘은 알고 있는 걸 모두 털어놓은 후에 사라질 것이다.

루서와 집행자들이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사제의 승화는 막을 수 없다.

“정체가 뭐냐?”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3일 동안 이스마엘은 피곤한 표정으로 느지막이 일어났다.

낮 동안에는 보육원 어딘가에 앉거나 누워있다가, 해가 지면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서 끙끙거리다 잠들었다.

그뿐이었다.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지?”

루서는 답답했다.

어찌나 답답했는지 보육원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을 모두 추적해 떨어트렸다.

물론 전서를 매단 새는 한 마리도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루서는 3일 전과 같은 집중력으로 창문 너머 이스마엘의 침대를 응시했다.

사각사각.

“딱히 누구라고 알려줄 것도 없다만.”

리치는 그런 루서의 등 뒤에 걸터앉아 사과를 씹어먹고 있었다.

사각사각.

“맛있잖아? 한 상자 더 뺏어와야겠어.”

은잠술이나 마법을 사용해 기척을 지운 건 아니었다.

그저 사과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와 편해 보이는 바위 위에 걸터앉은 것뿐이다.

하지만 루서는 리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루서는 침대 위에 누워 잠든 이스마엘의 환상을 보고 있었으니까.

“반영구적인 환상 마법은 조금 까다롭지.”

리치가 다 먹은 사과를 등 뒤로 던졌다.

“귀찮은 암시를 걸어야 하거든. 내가 3일 동안 피곤함에 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만 보여준 것도 그 때문이야.”

사실 리치는 정말로 피곤함에 절어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집행자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스마엘의 행동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착각하는 것이었다.

“뭐, 그럴 가치는 충분했다만.”

리치가 루서에게 건 환상 마법은 특수한 종류였다.

암시라는 매개물이 반드시 필요한 마법.

일단 루서가 리치의 행동 패턴을 파악했다 여기게 되면 암시에 걸려드는 것이다.

루서는 리치가 어떤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한다.

리치는 루서의 인식 밖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고 트릭]

어지간한 마법 저항력으로는 자신이 마법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 수 없으며, 더 강한 충격으로 암시를 부수기 전에는 해제할 수 없는 고위의 마법이었다.

몸의 이상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리치가 둘 수 있었던 최상의 수.

에고 트릭의 가장 무서운 점은 무의식에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시전자는 자각도 없이 시전자의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한 가지만 더 대답해라."

루서는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리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어째서 어린아이를 고집하지? 타락의 대지를 돌아다니는 모험가들이나 범죄자들이 더 편하지 않나?"

루서는 혼잣말을 하듯 대답했다.

"순수한 공포와 고통만을 바치기 위해서.

어른들은 불순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더러운 영혼으로는 승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순수한 고통과 공포만을 느끼는 아이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리치는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한참을 앉아 루서와 같은 보육원을 바라보던

리치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래."

리치는 누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알았다."

밤보다 더 어두운 마나를 본다면 누구라도 알아챌 테니까.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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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57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82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7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30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49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3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70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194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11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4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4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27 7 13쪽
»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5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2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4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1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4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16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2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86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19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4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2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64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70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63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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