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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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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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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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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9,600

작성
20.04.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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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 수도사 아리타. (2)

DUMMY

"드디어···."

리치는 신발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쏟아지는 졸음 앞에서는 마법사로서의 자존심도, 보육원장으로서의 체면도 소용이 없었다.

[내 거는 없나?]

이고르가 볼멘소리를 했다.

"뭐?"

[맨날 책상 위에서 잠만 자니까 심심하다.]

리치가 실소를 흘렸다.

"부럽구나. 맨날 잠만 자는 게 이제 내 소원이다."

[은퇴하더니 게을러졌다.]

"네가 애들 데리고 나갔다 왔느냐? 방구석에서 편하게 있었으면 이불이라도 정리해놓든가 해야지. 감히 누굴 보고 게으르다는 게냐?"

[잔소리.]

"네놈은 잔소리를 들어도 싸다."

[리치.]

"왜."

[누가 온다.]

이고르가 책상 밑으로 쏙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라."

리치는 침대에 엎어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손님을 맞을 때는 앉거나 서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움직일 기운이 나지 않았다.

"···뭐해?"

파비안의 목소리였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보아 먹을 걸 들고 온 것 같았다.

"너야말로, 뭘 가져온 거냐?"

"구운 닭인데. 사제님들이 고맙다고 갖다주라셨어."

벌떡 일어난 리치가 책상에 앉았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닭을 보니 너무 피곤해서 잊고 있었던 시장기가 올라왔다.

리치가 잘 익은 닭 다리 하나를 뜯어냈다.

"오늘은 보육원에 머무르느냐?"

"시장이 열리면 경비 때문에 일주일 정도 훈련이 없거든."

"그렇느냐? 푹 쉬도록 해라. 사제들에게는 고맙다고 전해 다오."

"응."

"···."

"···."

"더 할 말이 있느냐?"

주저하던 파비안이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 지난번에는 심한 말을 했어."

"심한 말?"

"고블린이 나왔을 때 말이야.

솔직히 원장님이 미리암을 팔아넘기러 간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어."

"아, 그것 말이냐? 신경 쓸 것 없다. 나라도 의심했을 테니."

리치는 실제로 파비안의 의심이 적중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리암이 사정을 설명해줬어. 원장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더라."

"그거 다행이군."

"아무튼,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미안하면 존댓말이라도 써라. 열다섯이라면서 어떻게 여섯 살 먹은 카인과 똑같느냐?"

"응? 웨이브에서 같이 싸운 용병이 약해 보이고 싶지 않으면 반말하라던데."

리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놈 말은 듣는 게 아니다. 그놈이 웃어른 앞에서도 반말을 찍찍 하더냐?"

"몰라, 그날 죽었거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파비안을 보니 리치는 기가 막혔다.

"여기 아이들은 어디 하나씩 얼빠진 구석이 있구나."

파비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튼, 미안했어."

리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내밀었다.

"같이 먹겠느냐?"

"아니, 오늘은 피곤해서."

"알았다. 자거라."

"···."

문을 닫고 나가려던 파비안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남았느냐?"

"오늘 한 말, 진심이야?"

"내가 말을 좀 많이 해서. 정확히 집어주겠느냐?"

"아버지 비슷한 거라고 했잖아."

"보육원의 원장이면 아버지 비슷한 게 아니냐?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사과하지."

닫히는 문 사이로 중얼거리는 듯 뭉개지는 파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리고 문이 닫혔다.

리치는 닭 다리를 씹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미묘한 분위기로 감정을 파악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거냐?"

책상 밑에서 기어 나오던 이고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아나?]

눈썹을 한 번 까딱한 리치가 닭 다리 하나를 뜯어 이고르에게 건넸다.

"아까 네 건 없냐고 물었었지. 이거라도 먹을 테냐?"

이고르가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청광석만 먹는다. 동물 사체를 왜 먹나? 역겹다.]

리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닭 다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



모험가 길드에서는 10인 이하, 가능하면 8인 정도의 파티를 짜는 걸 권장한다.

타락의 대지에서 대규모의 일행을 꾸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열 명을 넘는 일행은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머릿수가 커지면 공포심은 줄어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타락의 대지는 대규모의 무리를 가차 없이 배제했다.

악마는 언제나처럼 경고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험가들은 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악마가 강요하는 규칙을 깨달았다.

10인 이하의 파티.

경험에서 만들어진 철칙이었다.

하지만 타락의 대지 내부에도 그 법이 강하게 적용되지 않는 중간 거점은 있었다.

모험가들끼리 정보나 물자를 교환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며 고된 여정의 휴식처가 되는 이정표.

'아이스킬로스의 등대.'

언제, 그리고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타락의 대지 곳곳에는 아이스킬로스의 등대라 불리는 거대한 등대가 서 있다.

등대 주변의 마기는 매우 낮아, 등대의 빛이 닿는 좁은 구역에는 타락의 대지 초입처럼 안개가 펼쳐져 있었으며, 강한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잘 접근하지 않았다.

"늦지는 않았겠지."

온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마티아스는 안개 속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끼이익.

등대의 낡은 문을 열자 때아닌 날벼락을 맞은 모험가들의 시체들이 보였다.

무기를 뽑지도 못한 시체들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마티아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향해 외쳤다.

"이빨, 불꽃, 꿈."

의미 없는 단어의 배열.

하지만 암호에서 뜻을 찾을 필요는 없다.

집행자들의 암호를 알아들었는지 어둠 속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책, 기하, 전쟁터."

그제서야 마티아스는 안심할 수 있었다.

"후우···."

집행자 두 명이 웃으며 마티아스를 반겼다.

"마티아스 형제, 어째서 지부를 나왔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마티아스가 장비를 끌러내며 동료에게 대답했다.

"그 무엇보다 시급하네."

마티아스의 심각한 표정을 본 집행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웃음을 거두었다.

"레온에서 일이 생겼군."

"수도사께서는 어디 계신가?"

"사제와 함께 위에 계시네. 올라가 보게."

"고맙네."

사흘 동안의 강행군에 지쳤지만, 마티아스는 바람처럼 계단을 뛰어올랐다.

등대의 상층에는 집행자 다섯 명과 석상처럼 서 있는 아리타가 등을 돌린 채 벽난로 앞에 앉은 왜소한 그림자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미천한 종복이 곧 성인이 되실 악마의 사제를 뵙습니다."

마티아스가 그림자 뒤로 부복했다.

그림자가 고개를 슥 돌려 마티아스를 반겼다.

"집행자, 혼자 등대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감사합니다."

낮고 평온한, 옆집 노인과도 같은 목소리였지만 마티아스는 평온함 뒤에 숨은 사제의 본모습을 잘 알았다.

사제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제. 마티아스가 저에게 용무가 있는 듯하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공경한 말투였다.

하지만 사제를 내려다보는 아리타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렇게 하게, 수도사."

아리타는 사제를 향해 공손히 예를 표하고는 마티아스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티아스. 피니언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지켜보라는 명령을 내렸을 텐데?"

"수도사, 피니언은 죽었습니다."

아리타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저 마티아스가 타락의 대지까지 들어온 이유를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을 뿐.

"자네가 죽였나?"

"아닙니다."

"그러면?"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이스마엘이 죽였다고 판단됩니다."

아리타는 그제서야 조금 흥미가 동했다.

"이스마엘? 보육원장이?"

"예. 열 명의 하급 교도들과 피니언은 마법에 의해 살해당했고, 부상을 입었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스마엘이 현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마법사라."

아리타는 고민했다.

이스마엘이 마법사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겨우 범죄자 열 명을 처리하고 부상을 입을 정도라면 그리 강한 마법사는 아니다."

피니언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겼을 리는 없었다.

그는 그럴 만한 위인이 되지 못했으니까.

중간 관리자의 은신처는 언제라도 발각될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시기가 지나치게 공교로웠을 뿐.

어차피 일이 끝나면 폐기할 생각이었으니 피니언의 생사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제례의 진행이다.

"제물은?"

"···현재로서는 한 명도 없습니다."

아리타가 걸음을 멈췄다.

"수··· 수도사."

멈춰선 아리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티아스는 아리타의 등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명도 없다?"

"···예."

아리타가 씹어뱉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목줄기를 잡아 뜯는 것만 같았다.

마티아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리타가 손만 뻗으면 자신은 고깃덩이로 변할 것이다.

저벅.

다행히도 아리타는 마티아스를 죽이지 않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티아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늦지 않았다 하심은?"

"제례는 일주일 후.

타락의 대지 초입의 지부로 돌아가는데 3일.

레온 영지 각지에 퍼져있는 집행자들을 소집하는데 2일.

서두른다면 충분히 시간이 있다."

"제물의 조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리타가 고개를 돌려 마티아스를 쳐다보았다.

마티아스는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피니언이 한 가지는 맞았다."

"···예?"

"다른 건 몰라도 습격할 곳은 정확히 짚었다는 말이다."

"보육원 말입니까?"

아리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한 아리타는 마티아스에게 못한 화풀이를 하듯 널부러진 모험가의 시체를 발로 찼다.

철퍽.

그리 강하게 찬 것도 아닌데 시체는 훨훨 날아가 등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마티아스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수도사. 루서에게 보육원과 이스마엘을 감시하라 명했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직접 길러낸 집행자를 바라보는 아리타의 시선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래야지. 책임을 물을 이가 죽었으니 이번에 차질이 생긴다면 마티아스, 자네와 루서가 대신 죽어야 하니까."

애초에 피니언의 지하실에 이스마엘이 들어가는 것을 놓친 두 사람의 잘못이다.

마티아스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이스마엘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입니다."

아리타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감정이 격해진 아리타의 주변으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마기에 오염되어 거칠고 파괴적인 마나였다.

마나가 호응하는 단계의 무위.

마티아스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의 증거였다.

쿠우우우.

"만약 또다시 실수하게 된다면 백사자성과 전쟁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피니언의 실패로 인해 승화가 미루어졌을 때, 사제는 아리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집행자 다섯을 그 자리에서 증발시켰다.

"빌어먹을 늙은 괴물이···."

사제를 보필해온 15년의 시간동안 아리타가 사제에 대해 이해한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

"성 아랫마을 전체를 피의 제물로 바쳐 악마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제를 겨우 말렸는데···."

"예?"

"다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라. 살고 싶다면 말이다."

"예."

"먼저 출발해라. 루서에게 연락해 일에 지장이 없도록 사전 준비를 해두어라."

"그리하겠습니다. 수도사께서도 함께 가십니까?"

아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마엘은 두 번이나 제례를 방해했다. 정체가 무엇이던 상관없다. 놈의 뒤에 숨은 배후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어."

아리타가 안개 너머에 시선을 맞췄다.

"내가 직접 죽이겠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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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55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81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7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29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48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2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69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193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09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4 5 12쪽
»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4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27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4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1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4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0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4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15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1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85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19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3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2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64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67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63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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