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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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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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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3
추천수 :
198
글자수 :
139,600

작성
20.04.08 18:15
조회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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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DUMMY

"이랴!"

마티아스는 안개를 헤치며 달렸다.

집행자 부대의 중견, 마티아스는 이스마엘에게 감시역을 붙인 후 바로 말을 달려 타락의 대지로 들어갔다.

이스마엘이나 피니언이 어떻게 되던지는 상관없다. 하지만 제물 공급에 더는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 제례에서 사제가 '승화'를 장담했기 때문이다.

제례는 진행되어야 한다. 몰래 빼 올 수 없다면 무력으로라도 제물을 보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제, 그에 앞서 아리타가 마티아스를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

푸르르륵!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말이 갑자기 투레질하며 멈춰 섰다.

"워! 진정해라!"

마티아스는 발광하는 말에 익숙했다. 말을 타고 네 시간이나 안개 속을 달렸으니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슬슬 말의 근육이 뻣뻣해진다. 마기가 짙어지고 있어.'

타락의 대지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안개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타락의 대지라고, 타락의 대지는 모두 안개에 싸여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모험가라면 실소를 흘릴 만한 이야기다.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슬슬 안개가 걷힐 때가 되었군."

안개는 마기가 옅을 때만 발생한다.

안개로 덮인 타락의 대지 초입은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몬스터들이 사회에서 쫓겨난 인간들과 공존하는 곳일 뿐이다.

너무나 짙어 마치 벽처럼 보이는 안개를 뚫고 나가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는 끝이 난다.

안개의 장막 뒤에는 거짓말처럼 고요한 평원과 숲, 나무, 풀. 어딜 보아도 평범한 초원이 펼쳐진다.

평화롭고 조용한 땅.

타락의 대지에 발을 들인 모험가는 곧 그 조용함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다.

그건 조용함이 아니라 침묵이다.

'죽음의 땅.'

노련한 집행자인 마티아스는 평온함 뒤에 숨겨진 무서움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도저히 익숙해지지를 않는구나."

타락의 대지에서 말은 달리지 못하고 새들은 노래하지 못한다.

던전과 보물들, 악마가 제련한 아티팩트는 모험가들을 꾀어낸다.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불나방처럼 자신의 영지에 들어선 모험가들을 고립시키고, 시험하며, 결국은 파멸시킨다.

악마가 즐기는 유일한 유희.

그것은 인간의 고통이다.

"후우···."

타락의 대지에 발을 들이는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잔뜩 긴장한 마티아스가 전설로 전해지는 노래를 낮게 읊조렸다.

"북부에는 악마의 도시 판데모니엄.

남부에는 인간의 제국과 왕국들.

판데모니엄의 악마는 그 영역을 침범하는 이를 놓아주지 않는다.

판데모니엄의 심장을 찔러라.

자유를 얻어라."

대륙의 인간 그 누구라도 알고 있을 짧은 시구를 기도처럼 읊조린 마티아스는 마신교의 상징, 세 개의 뿔을 형상화한 목걸이에 입을 맞추며 말에서 내렸다.

"돌아가라."

마티아스가 말의 엉덩이를 때려 남쪽으로 쫓아 보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타락의 대지로 들어섰다. 그의 주인을 찾아.



---



리치가 사람의 몸을 얻게 된 지 3일이 지났다.

그동안 리치는 미리암의 도움을 받아 살아있는 사람의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처음에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마왕의 선물은 기막히게 쓸만했으니까.

애초에 은퇴를 결심했으니 썩지도 않고 의심을 받을 일도 없는 데다가 마나를 생성할 수 있는 몸을 얻게 된 건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마신교를 정리하고 라이프 포스 베슬만 찾으면 두 다리 쭉 펴고 쉴 수 있었다.

"허어···."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리치가 이제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였다.

리치는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 이걸 다 하면서 살지?'

3일간 리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하루의 삼분지 일을 자면서 보내고 나머지 삼분지 일은 살아있기 위한 부가적인 작업으로 보내며 고작 남은 삼분지 일의 시간마저도 생계를 위해 일한다.

아무런 여유도 없었다.

그것이 리치가 잊고 있었던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삶'이었다.

리치는 진이 다 빠졌다.

낮이면 마당 한 켠의 정자에 걸터앉아 보육원의 일상을 지켜보다가, 저녁이 되면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가 엎어져 자는 것이 리치의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내버려 두던 아이들은 리치가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고 정자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더니, 어느새 리치를 놀이기구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리치의 등에 매달려 숱 적은 이스마엘의 머리카락을 꼽고 있는 카인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허어···."

"원장님, 한숨 너무 많이 쉬어. 힘들어?"

"별로."

리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엠마 사제가 빙긋 웃었다.

"원장님이 보육원에 계시니 아이들도 즐거워하네요!"

리치는 새삼 앞에 한 명, 뒤에 한 명. 총 두 명의 갓난아기를 매달고 종횡무진 가사를 처리하는 엠마 사제가 존경스러웠다.

'숨만 쉬고 있어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저렇게 기운이 넘칠 수가 있는가?'

빛의 집에 갓난아기는 세 명.

나머지 한 명의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코리 사제는 아나이스와 함께 마당에 빨랫줄을 걸고 있었다.

열한 살짜리 아나이스와 비슷한 키의 코리 사제.

항상 시끄러운 엠마 사제와는 달리 과도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코리 사제도 업무량은 엠마 사제 못지않았다.

리치는 코리 사제에게도 조용히 경의를 표했다.

꾸벅.

평상에 앉아 고개만 까딱거리는 리치의 어깻죽지를 붙잡은 카인이 지루하다는 투로 말했다.

"원장님은 맨날 앉아만 있어."

카인이 옷깃을 지지대 삼아 암벽을 타듯 어깨를 타넘고 앞으로 이동했다.

"···."

킁킁.

그리고는 리치에게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또 뭘 하는 거냐?"

"죽었나 확인."

"안 죽었다."

"알아."

카인이 리치를 고목나무 둥치 삼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을 때, 미카는 리치의 앞에 서쪽 숲에서 채집한 벌레들을 늘어놓고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사슴벌레 암컷이에요. 뿔이 작아요."

"그렇느냐?"

"그리고 이건 제 보물인데, 말라키아 청동 풍뎅이에요. 진짜 금속 껍질을 갖고 있대요."

"호오."

"책에 보면 희귀한 곤충이라고 나와 있어요. 남부에는 잘 없다는데···. 제가 보여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리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안 와도 된다."

리치의 대답을 가볍게 무시한 미카가 책을 가지러 보육원으로 달려들어갔다. 카인도 폴짝 뛰어내려 뒤를 따라 달려갔다.

닭장에 모이를 주고 나왔는지 사제복에 붙은 깃털을 털던 엠마 사제가 리치에게 말했다.

"요즘은 아이들이 원장님을 졸졸 따라다니네요?"

"그래. 귀찮아 죽겠군."

카인이 올라가 있던 어깨가 저려왔다.

뒷목을 주무르는 리치의 심드렁한 표정에도 엠마 사제는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는 원장님을 피해 다녔었는데···. 미리암이 없어졌던 날 이후로 원장님이 좀 바뀌신 걸까요?"

"내가 바뀌었으면 저 꼬맹이들이 그걸 안다는 말인가? 나는 아이들과 대화도 해본 적이 없는데."

'끙차!' 하는 신음을 내며 산적 두목처럼 걸터앉은 엠마 사제가 손가락을 좌우로 퉁겼다.

"모르시는 말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도 훨씬 눈치가 빨라요. 의지해도 되는 사람과 위험한 사람을 본능적으로 구분해요."

"그런가?"

"그럼요. 원장님은 아이들이 믿는 사람, 다시 말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죠."

엠마 사제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잔뜩 강조했다.

리치는 코웃음을 쳤다.

"날 좋은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벌써 싹수가 노란 걸세."

엠마 사제가 뭐 어떠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으악!"

리치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글쎄요' 라는 말이 엠마 사제가 아닌 반대쪽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빨래를 널고 다가온 코리 사제가 손을 닦으며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대부분 사기꾼이죠."

"커어, 명언이야 명언."

엠마 사제가 엄지를 치켜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코리 사제는 엠마 사제를 무시하고 리치에게 말했다.

"착하신 원장님. 오늘 특별히 하실 일 없으시죠?"

리치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의심이 싹텄다.

"···그렇네만."

무뚝뚝한 코리 사제가 드물게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원래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 좀 바빠서···."

코리 사제의 표정은 어색하게도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엠마 사제가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리치가 눈매를 좁혔다.

"부탁할 게 있어서 추켜세운 거였군?"

"헤헤."

그렇다고는 해도 밥값은 해야 한다.

'기준은 마음대로지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리치로서의 규칙이었다.

게다가 하루 웬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는 사제들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치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뭔가?"



---


목마를 탄 카인은 다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리치는 양손에 미리암과 아나이스의 손을 잡은 채 길드 구역을 지나 귀족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그래서, 노느라 옷을 찢어먹었다고?"

"응."

"뭘 하고 노는 게냐?"

"나무타기."

카인은 리치를 졸라서 산 막대사탕을 쭙쭙 빨고 있었다.

"내 머리에 흘리지는 말아라."

"흘리면 핥아먹을게."

"부탁이니 자제해 주겠느냐?"

리치가 질겁을 하며 카인을 땅에 내려놓았다.

아나이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너는 왜 따라왔느냐?"

미리암이야 리치가 실수할까 봐 따라왔다지만 자연스럽게 함께 온 아나이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이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아세요?"

"아니."

한 점 주저도 없는 당당한 대답에 아나이스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저희가 입는 옷은 보통 아그네스 부원장님이 만드시는데 부원장님은 성에 계시느라 바쁘세요."

보육원에서 보낸 5일 동안 리치는 아그네스를 본 적이 없었다. 교단 중앙청 출신이며 중앙청에서도 순위를 다투는 강한 신성력의 소유자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사제들은 부원장이 기부금을 얻어내기 위해 백사자성에서 귀족들의 병을 봐주고 웨이브에도 참가한다고 했다.

보육원은 기부금으로 먹고산다. 실상 혼자서 마흔에 가까운 입을 책임지는 셈이었다.

"흠."

미리암이나 아나이스가 입은 옷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정갈했고 정성스럽게 재봉 되어있었다.

리치의 눈에는 이스마엘의 비싸고 겉멋만 들어 거추장스러운 옷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실력이 좋군."

아나이스가 씨익 웃었다.

"그래서 카인 같은 말썽쟁이가 입을 옷은 귀족들이나 모험가 길드가 성외신전에 기부한 걸 헐값에 사서 입혀요.

성 아랫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지 않으니 대충 맞는 옷을 골라서 수선해야 하는데 부원장님한테 재봉을 배운 제가 고르는 게 제일 편하구요."

"오늘이 편한 이유라도 있느냐?"

"내일이면 캐러밴이 와서 시장이 열려요. 성외신전의 바보들은 헐값에 다 팔아치울 테니 오늘 물건이 제일 많죠."

"바보들?"

이상하게 적의가 담긴 아나이스의 한마디에 리치가 의문을 표했다. 아나이스는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리치에게 말했다.

"네. 성외신전의 사제들은 믿지 마세요. 그 옷들, 원래는 빈민가 사람들한테 무료로 나눠줘야 하는 거에요."

"그렇느냐?"

카인의 옷을 구하러 다녀와 달라 부탁하던 코리 사제가 어울리지 않게 미안해하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성외신전과 보육원 사이에는 리치가 모르는 어떤 알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귀찮은 일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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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65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86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9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35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51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7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73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200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17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7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9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31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9 5 12쪽
13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6 5 12쪽
»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9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4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9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21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3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90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26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8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8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72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76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73 1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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