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루파루파 님의 서재입니다.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루파루파
작품등록일 :
2020.03.28 18:38
최근연재일 :
2020.04.25 18:20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8,613
추천수 :
198
글자수 :
139,600

작성
20.04.09 18:20
조회
231
추천
5
글자
12쪽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DUMMY

레온 영지에는 두 개의 신전이 있다.

하나는 요새처럼 거대한 백사자성 내부에 있는 성내신전, 나머지 하나는 성 아랫마을에 있는 성외신전이다.

성내신전에 기거하는 사제들은 중앙청에서 파견한 정예들이다.

고위의 사제들은 마기의 변화를 읽어 웨이브가 시작될 시기를 예측하고 웨이브에서 백사자성의 군대와 함께 싸운다.

반대로 성외신전에는 항상 많은 숫자의 하급 사제들이 거주한다. 결원율이 매우 높으며, 주기적으로 인원이 보충된다.

신성 교단과 길드 연맹, 그리고 제국평의회. 3자의 계약관계에 의해 모험가 파티에 일정 숫자의 사제를 제공하는 역할이다.

"실제로는 성내신전도 성외신전 소속의 분소 같은 거지만 교류는 별로 없어요. 기껏해야 모험에서 가져온 유물을 인계하는 것 정도죠."

미리암의 열띤 설명을 다 들은 리치의 평가는 간단했다.

"한 마디로 교단에 연줄도 없고 신성력도 일천한 하급 사제들이 버려지는 쓰레기장이군."

"그건 조금 심한 말이 아닐까요?"

미리암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아무리 미운털이 박혔어도 사제는 사제였다. 신을 믿는다면 대놓고 깎아내리기 껄끄러운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리치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런 데 오고 싶어서 왔을 리는 없지."

"저는 그런 것까지는 잘 몰라요.

그보다 원장님. 신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계시면 안 돼요."

리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 맘이지."

리치는 자신보다 어린 종교의 신전 따위에 위축되지 않았다.

"참··· 그러면 의심받을지도 몰라요."

"겨우 이 정도로? 그럴 일 없다."

아나이스는 카인을 데리고 낡은 옷이 잔뜩 담긴 수레를 정신없이 뒤지고 있었다. 아나이스는 깊은 수레에 거꾸로 파묻혀 다리를 휘젓고 있었다. 카인은 재미있어 보인다며 수레로 뛰어들었다.

"한참 걸리겠군."

리치가 신전의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얼굴을 덮는 그림자에 고개를 살짝 드니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얼굴이 리치에게 물었다.

"누구시오?"

다 풀어헤쳐진 사제복을 입은 남자였다. 술 냄새에 찌든 남자의 씻지 않은 얼굴엔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사제가 맞긴 한가?"

"신경 끄시오."

미리암이 말했다.

"이분은 보육원장님이세요. 사제님. 어린아이 옷을 한 벌 사러 왔어요."

사제는 깎지 않은 수염을 매만지더니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50코퍼. 지금 내라."

미리암은 기가 막혔다.

"50코퍼라니, 다 해진 옷 한 벌에요? 지난번에는 10코퍼였잖아요? 천을 사다가 만드는 게 더 싸겠어요."

사제는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가격은 그때그때 다르다."

미리암도 질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특유의 어린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원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줘야 하는 옷가지가 아닌가요?

게다가 보육원도 성외신전처럼 성내신전 소속이에요. 저희에게도 권리가 있단 말이에요."

"싫으면 돌아가라. 직접 만들어서 입던가 발가벗고 다니던가"

하지만 당연한 논리는 배를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강짜에 막혔다.

"잠깐만요."

사제가 고개만 살짝 돌려 미리암을 쳐다보았다. 미리암은 사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냐?"

미리암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살게요."

사제가 피식 웃었다.

"진작 그랬어야지.

하여간, 보육원의 반쪽짜리 사제 년들이나 그 애새끼들이나···. 부원장 하나만 믿고 콧대가 높아져서는 말이야."

미리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제는 아직 쌓인 게 남은 듯 계속 중얼거렸다.

"성 안의 개새끼들··· 멍청한 보모 년들··· 진짜 지옥은 알지도 못하는 병신들끼리 고고한 척하기는···."

"자네."

잠자코 앉아있던 리치가 미리암의 어깨를 토닥여준 후 사제를 불렀다.

"뭡니까? 원장님?"

사제는 '꼴에···.' 하고 중얼거렸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말이 너무 심하군. 사제로서 부족한 행동 아닌가?"

"제국에서 귀족으로 인정받으려고 보육원을 떠맡은 외국의 잔챙이 소귀족에게 들을 말은 아닙니다.

게다가 본인 옷은 맞춤옷이군요. 그런데 아이에게는 남들이 입다 버린 리넨 옷을 사주러 왔습니까?"

리치는 사제를 발가벗겨 높은 신전 천장에 3일 밤낮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리치의 시선이 신전의 창밖, 아무것도 없는 풀숲에 닿았다.

"이 장면을 엿보고 있는 쥐새끼 한 마리에게 감사해라."

"예?"

"못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리치가 다시 시선을 사제에게로 옮겼다.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면 된다.

리치가 사제를 위아래로 훑고는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술 냄새가 나는군."

사제가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예, 좀 마셨습니다. 어쩌라는 말입니까?"

"밤새 마셨나?"

"예."

"손을 떨고 있는데. 술 때문인가?"

사제가 시선을 피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리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걷는 데는 이상이 없어. 숙취는 심하지만, 몸은 건강해."

사제는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다면··· 무서워서 떨고 있는 거겠군? 도축을 기다리고 있는 짐승마냥."

사제의 풀린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리치는 사제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리치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도발하듯 말했다.

"타락의 대지, 모험가 파티에는 사제가 필요하지. 맞춰볼까? 자네가 다음 순번이겠지."

사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걸 어떻게?"

리치는 다리를 꼰 채 사제에게 말했다.

"밤새 술을 마셔도 아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지. 거기에 성내신전과 보육원의 사제들에 대한 적의를 너무 대놓고 드러냈네. 뻔하지 않은가?"

정곡을 찔린 사제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탓할 사람을 잘못 짚었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어쩌라는 말이오? 내 신성력은 이미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인데. 이번에 살아남더라도 다음은 없소."

타락의 대지의 마기는 신성력의 근간인 믿음을 뒤흔들어놓는다. 마음의 병을 얻게 된 사제는 1, 2년의 요양으로는 회복할 수도 없다.

수백, 수천 명의 하급 사제들을 일일이 돌봐줄 수도 없다.

그러니 그냥 희생시키는 것이다.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리치의 눈빛은 싸늘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푸념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뭔가 잘못됐소?"

리치의 비릿한 웃음이 진해졌다.

"잘못됐지. 자네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앞에서 강짜를 놓고 있잖아. 정확히는 자네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의 상관 앞에서."

사제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제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원장···."

아그네스는 강력한 사제다.

라-바르카의 중앙청을 떠나 보육원을 맡긴 했으나 그 발언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스마엘은 '귀족이 운영하는 시설'이라는 명분만을 위한 간판 원장.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아그네스의 상관이기도 하다.

"당신은 원장이니··· 그렇군. 당신이 부탁만 해 준다면···."

눈앞의 인물은 사제의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과연 사제는 황급히 표정을 바꾸더니 리치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부탁드립니다. 제 신성력은 이미 바닥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걸 알게 되면 화난 모험가들이 나서서 절 죽일 겁니다. 먹을 입을 줄이려고 할 겁니다."

리치는 횡설수설하는 사제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쎄··· 그럼 자네는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옷을 구하러 오신 게 아닙니까?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자네 목숨을 살려주게 될지도 모르는데? 자네에겐 목숨이 낡은 옷 한 벌 값인가?"

사제가 비굴하게 말했다.

"뭐라도 말씀하십시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하겠습니다."

리치가 기부된 사과 상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맛있어 보였다.

"저것도 내놔."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이번에는 리치의 손가락이 신전 한켠에 놓인 널빤지들을 가리켰다.

"저것도."

"저 판자들은 왜···."

"같은 소속이면 관심을 좀 가지게. 보육원 천장에 구멍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리치가 짐짓 화난 척을 하자 사제는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져가십시오. 얼마든지요. 더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이쯤 말했으면 연막은 충분했다. 리치는 눈을 빛내며 본론을 꺼냈다.

"하나 더 있긴 하네만."

"말씀만 하십시오."

"타락의 대지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들. 어디에 보관하지?"

성내신전에서 유물을 감별한다면 쓸 만한 물건을 추려내고 남은 물건들은 성외신전으로 다시 보냈을 확률이 컸다.

다시 말해 확률은 낮았지만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도 신전 어딘가에 있을 수 있었다.

"그··· 그건 비밀입니다. 외부인에게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성내신전 소속이 아닌가? 외부인이라니 섭섭하군. 구경만 하겠네. 자네와 나만 입을 닫으면 되잖나."

"그···러하시다면야···."

결국 사제는 리치에게 지하실을 개방했다.



---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아나이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아나이스의 등에는 방물장수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짐이 들려 있었다. 공짜로 가져가도 된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것저것 멀쩡한 옷을 다 챙겨서 구겨 넣은 배낭이었다.

물론 배낭도 신전에서 제공해준 것이다.

준다니까 가져오긴 했지만, 수전노처럼 굴던 성외신전의 사제가 굽신거리는 모습은 아나이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직자로서의 초심을 좀 되찾아주었다."

리치는 사과가 잔뜩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있었다.

"사과는 뭐에요?"

"맛있어 보여서."

"달라니까 그냥 줬다구요?"

"같은 소속끼리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냐?"

아나이스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나이스가 '인간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을 때 미리암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지하실에선 뭘 하셨어요?"

"좀 찾아볼 게 있어서."

"찾으셨어요?"

"없더구나."

"유감이네요."

"사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고작 목걸이를 18년이나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무슨 목걸인데요?"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딱히 중요하지 않은 물건."

"···?"

리치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리암은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정말로 부원장님께 그 사제님에 대해 말씀드릴 건가요?"

"아니."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 건가요?"

"벌써 지켰다."

리치는 약속을 지킨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벌써 지켰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미리암의 순수한 궁금증에 리치는 은근하게 웃었다.

"지하실에서 나 혼자 올라온 걸 보고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느냐?"

"···?"

"그 사제는 반쯤 떡이 되어서 지하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예?"

"걷지도 못하니 원정은 꿈도 못 꾸겠지. 이 정도면 약속은 지킨 거나 다름없어."

미리암이 입을 쩍 벌렸다. 리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떤 변명을 할지는 모르지만, 외부인을 창고에 들였다고는 못 할 테니 내 이름이 나오진 않을 거다. 크하하하하!"

일의 전말을 대충 파악한 미리암이 고개를 푹 숙였다.

"뭐냐?"

"이해는 하지만···. 저는 리치 님이 친절하다고 생각했어요."

"···."

리치가 잔뜩 내민 미리암의 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걸음을 멈춘 리치는 사과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손날을 세워 미리암의 정수리를 탁 하고 때렸다.

"아얏!"

"친절은 오고 가는 거다. 기억해두도록."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은퇴한 리치는 보육원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외전. 이고르 +4 20.04.25 157 6 7쪽
25 9. 승화 (2) + 에필로그 +2 20.04.25 181 4 18쪽
24 9. 승화 (1) +2 20.04.24 137 5 12쪽
23 8. 습격 (2) +2 20.04.23 130 5 13쪽
22 8. 습격 (1) +2 20.04.22 149 5 14쪽
21 7. 때 아닌 던전탐험 (3) +4 20.04.19 172 7 12쪽
20 7. 때 아닌 던전탐험 (2) +2 20.04.18 169 5 12쪽
19 7. 때 아닌 던전탐험 (1) +2 20.04.17 194 6 12쪽
18 6. 수도사 아리타. (4) +2 20.04.16 210 3 13쪽
17 6. 수도사 아리타. (3) +2 20.04.15 204 5 12쪽
16 6. 수도사 아리타. (2) +2 20.04.12 224 4 12쪽
15 6. 수도사 아리타. (1) +1 20.04.11 227 7 13쪽
14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3) +2 20.04.10 254 5 12쪽
»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2) +2 20.04.09 232 5 12쪽
12 5. 사람처럼 사는게 너무 힘들다. (1) +2 20.04.08 284 5 12쪽
11 4. 미리암은 결심했다. (2) +2 20.04.05 301 9 12쪽
10 4. 미리암은 결심했다. (1) +2 20.04.04 314 6 12쪽
9 3. 마신교도 피니언 (2) +5 20.04.03 316 11 12쪽
8 3. 마신교도 피니언 (1) +2 20.04.02 362 7 12쪽
7 2. 리치는 이스마엘 (3) +1 20.04.01 386 8 12쪽
6 2. 리치는 이스마엘 (2) +1 20.03.31 419 11 12쪽
5 2. 리치는 이스마엘 (1) +1 20.03.30 494 12 12쪽
4 1. 보육원장 이스마엘 (3) +1 20.03.29 602 11 13쪽
3 1. 보육원장 이스마엘 (2) +1 20.03.28 664 13 12쪽
2 1. 보육원장 이스마엘 (1) +1 20.03.28 869 15 12쪽
1 프롤로그 +1 20.03.28 963 18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