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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님의 서재입니다.

정령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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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작품등록일 :
2018.04.19 18:40
최근연재일 :
2019.09.30 23:58
연재수 :
2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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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20,287

작성
19.09.0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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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격돌, 스트라 대 유키 (4)

DUMMY

스트라는 어떻게든 지맥에 담긴 냉기의 자연력을 유키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제길···!”


그러나 힘들다. 주변에 있는 다른 자연력들이 그것을 방해한다. 냉기의 자연력을 다룰 줄 모르는 스트라는, 그것만 따로 추리기가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다른 속성이었으면.”


다른 속성은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능숙하지는 못해도 끌어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스트라는 포기하지 않고 냉기의 자연력을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포착한 냉기의 자연력은 다른 자연력에 밀려 금세 넓은 광장 너머로 사라졌다.


지맥에서 뿜어지는 힘이 너무 강해서, 자연력의 흐름이 너무나 빠르다. 포착한 순간, 냉기의 자연력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수많은 자연력들이 허무하게 흩어지고 있다.


“안돼···”


스트라는 절망했다. 방법을 찾았음에도, 그것을 이룰 능력이 없다.


유키를 쳐다보았다. 이대로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스트라의 머릿속에는 도망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겁이 났다. 누군가 죽는 것을 다시 보기 싫었다.


스트라는 유키를 바라보았다. 점점 가늘어지는 숨이, 그녀의 최후가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알린다.


도망쳐야 한다. 그녀가 죽는 모습을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이 그에게 파고들 것이다. 그것이 두렵다.


차라리 보지 않는다면, 혹시나 그녀가 자력으로 살아났을 수도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상처입지 않을 수 있다.


두려움과 죄책감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


“으아아악!!”


“밀어붙여! 살고 싶으면, 적을 죽여라!!”


지맥에서 뿜어져 나온 자연력이 스트라의 힘을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스트라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고 있는 것은 예언의 아이들이 만든 빛기둥만이 아니다.


“!! 모두들!”


성문 앞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의 함성과 비명. 적들을 향한 살기와 생존을 갈구하는 외침.


그것이 너무나 또렷하게 귓가에 맴돈다.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주변의 모든 대장간들이 작업을 멈췄기에 그 소리들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각자의 집에서 이 악몽이 끝나기를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스트라는 들었다. 익숙한 사람의 비명을. 그리고 듣지 못했다. 그 사람의 다음 외침을.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내질러야 할 고함이 들리지 않는다.


“하, 하하하하.”


스트라는 실성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곳은 막장이다. 길이 막혀있다. 어디로 도망가든, 다른 아이들과 보았던 성문에서의 수많은 죽음은 이미 그의 정신에 박혀있다.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다.


‘도망가고 싶어.’


가장 확실한 도망은.


‘죽고 싶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편해질 수 있을 텐데···


‘유키 씨···’


그러나 눈 앞에 있는 사람과 저 수많은 비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망가고 싶지만, 그것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무엇이 자신에게 더 편한 길이 될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눈 앞에 있는 것에 급급하여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금도 어쩔 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유키를 향해 필사적으로 술법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민하는 자신이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스트라.


그때, 문득 어제 하스트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하스트는 내 상태를 보고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 전쟁에서 넌 누구보다 힘들겠지. 여기는 너의 마을. 그리고 싸우는 사람들도,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죽는 사람들도. 모두 너와 관련이 되어있겠지.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몰릴 수도 있어.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넌 선택해야겠지.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후세에 받을 평가? 당장 네 눈앞에 있을 사람의 시선?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제안?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선조들의 지혜? 네가 받았던 교육? 예전에 들었던 누군가의 조언?


난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그 모든 말이 맞는 말 같았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하스트는 부정했다.


-믿지 마. 듣지 마. 보지 마. 너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둘러쌓던 모든 것들. 그것은 네 것이 아니야.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것, 들은 것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날 하스트의 눈에 담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은 그 사람만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 아무리 위대한 자의 지혜라고 해도,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네가 겪은 것이 아니야. 겪지 않은 모든 지식과 지혜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것에 자신을 맡기지 마. 그것을 믿지 마. 너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너의 것이라 착각하지 마.


마치 하스트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장난스럽던 그가 아니라, 긴 세월을 견딘 사람처럼 느껴졌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 네가 선택해야 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 그것을 잊지 마.


난 그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서도 남은 것.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남는 것.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혜가.


-그것이 있다면, 그것에 따라라. 아무리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라 해도.


그의 눈 속에 잠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만이 너의 진심이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그것만을 생각했다. 절대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하지만 결국 오고 말았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나는 예언의 아이.”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 예언의 아이를 포기하는 순간을.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깨달았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나를 예언의 아이라고 치켜세우지 않는다.


벗어던진다.


“거짓된 희망.”


누군가 나에게 희망을 품는 것에 두려워했다. 그 희망을 꺾어버릴까 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난 누구보다 나에게 희망을 품었다. 혹시라도 그 모든 희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까 봐.


버린다.


깨달았다. 지금만큼은 난 예언의 아이일 필요가 없다. 지금만큼은 희망과 기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예언의 아이에 걸맞은 힘을, 예언의 아이에 걸맞은 태도를, 예언의 아이에 걸맞은 인간성을. 그것들을 추구했고, 그것들에 기대했다.


그것들을 지금만큼은 내 안에서 없앤다.


“나의 진심.”


지금만큼은 그 무언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있어도 된다. 스트라로 있어도 된다.


소심한 사람. 못난 사람. 나약한 사람. 한심한 사람. 심약한 사람. 그 모든 부정적인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 그런 나를 부정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인지를. 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고, 수없이 들었고, 수없이 내뱉었으니까.


“도망···”


그것만큼 익숙한 것이 있을 리 없다.


“도망자.”


그것만큼 자신에게 어울리는 말이 있을 리 없다.


무언가에게서 피한다. 무언가에게서 달아난다.


그것은 나의 삶이었다.


부정하고 싶었던 나의 한심함이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 그것만이 나의 진실이었고.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도망을.”


그 어떠한 순간에도 떨칠 수 없었던, 유일한 나의 진심이었으니까.


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선택했다.


“도망가자.”


무엇을 해도 괴롭다. 무엇을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다.


이곳을 벗어나도, 나이트와 맞서다가 모두의 죽음을 보더라도 괴로운 것은 똑같았다.


“더.”


그렇다면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 내 앞의 누군가를 구하는 길을 택하겠다. 아니, 구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택하겠다. 그렇다면 아주 조금은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노력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괴로운 것으로부터 도망가자.”


정말 우습고, 이기적인 생각이다. 용기 따위는 하나도 없는 겁쟁이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진심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니,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지금처럼 섬세하고, 확실하게 주위의 자연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마치 시야를 방해하고 있던 방해물을 치운 것처럼 상쾌함이 느껴진다.


주변으로 느껴지던 다른 속성의 자연력들이 느껴진다. 불의 자연력 말고 다른 속성이 이렇게 뚜렷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하지만 그것을 세밀하게 다루지는 못한다. 이 상태에서 냉기의 자연력을 하나하나 일일이 끌어오는 것은 아직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난 다른 길을 택했다.


유키를 감싸고 있던 술법이 확장한다. 막 밖에 있던 지맥의 분출구가 안으로 들어온다.


순식간에 막 안에는 어마어마한 자연력의 포화가 이루어졌다. 지금이라도 넘치는 불의 자연력 때문에 유키의 정수가 깨어질 지경이다.


“도망친다.”


그리고 스트라가 불의 자연력들로 정신을 집중한다.


“도망치자.”


주변에 있는 불의 자연력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불의 자연력으로는 유키를 치유할 수 없다. 그녀의 정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냉기의 자연력.


“모두 나와 함께 도망치자.”


불의 자연력이 탈출한다. 막 밖으로 도망친다. 여기에 있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콰우우우우!


유키를 기준으로 주위의 자연력들이 불의 도망에 휩쓸린다. 막 안으로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자연력은, 그 속도 그대로 밖으로 도망쳤다.


그 결과 유키 주변의 자연력들이 굉장히 적어졌다. 어느 것에도 침입을 받지 않은 유키의 정수가 잠시 현상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미 힘을 잃고 있는 유키의 정수는 그 어떤 외부의 자극이 없더라도, 긴 시간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가능한 남겼다. 불의 자연력이 냉기의 자연력만은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분출구에서 쏟아지는 자연력의 속도가 속도인만큼, 냉기의 자연력만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조정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주변에는 다른 자연력도 산재해있다. 단, 냉기의 자연력과 상극인 불의 자연력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변에 가득한 냉기의 자연력이 느껴진다. 지맥에 냉기의 자연력은 전체에 비해 극히 소량이었지만, 워낙 전체의 양이 거대했기에 그 소량조차 막 안에 요동칠 정도가 되었다.


스트라는 막의 크기를 줄였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제 스트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스트라는 냉기의 자연력을 다룰 줄 모를뿐더러, 주변 냉기의 자연력과 유키의 자연력 사이에 있는 미묘한 차이를 수정할 수조차 없다.


유키의 육체가 삶의 본능이 남아있기를, 정수가 냉기의 자연력을 무사히 흡수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됐어!”


자연력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정수가, 맹렬하게 냉기의 자연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스트라는 끝까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지맥의 자연력과 정수의 자연력은 다르다. 같은 냉기라고 해도,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스트라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대했던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다.


“정수가 안정되지 않아.”


역시 다른 자연력이라서 그랬을까, 정수가 격렬하게 요동친다. 하지만 스트라는 실망하지 않았다. 충돌하자마자 정수가 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격렬함은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정수가 자신의 안에 자연력을 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기나긴 인내의 시간 후,


“으··· 음···”


“유키 씨···”


드디어 정수가 안정화되며, 유키가 깨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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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드워프 왕 (1) 19.09.10 19 0 13쪽
174 공성전 (5) 19.09.09 18 0 13쪽
173 공성전 (4) 19.09.09 19 0 16쪽
172 공성전 (3) 19.09.07 15 0 14쪽
171 공성전 (2) 19.09.07 15 0 14쪽
170 공성전 (1) 19.09.06 21 0 13쪽
» 격돌, 스트라 대 유키 (4) 19.09.06 20 0 12쪽
168 격돌, 스트라 대 유키 (3) 19.09.05 17 0 12쪽
167 격돌, 스트라 대 유키 (2) 19.09.05 14 0 14쪽
166 격돌, 스트라 대 유키 (1) 19.09.04 20 0 11쪽
165 격돌, 소토 대 묘원 (5) 19.09.04 18 1 14쪽
164 격돌, 소토 대 묘원 (4) 19.09.03 19 1 12쪽
163 격돌, 소토 대 묘원 (3) 19.09.03 2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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