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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님의 서재입니다.

정령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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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작품등록일 :
2018.04.1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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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5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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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돌, 스트라 대 유키 (2)

DUMMY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스트라가 앞으로 넘어진다.


스트라는 무심코 발을 쳐다보았다.


‘얼었어?’


퍼렇게 질려있는 발이 보인다.


방금 자신이 넘어진 장소를 본다. 분명히 발을 보호하고 있어야 할 신발이 그곳에 있다. 산산조각이 난 채로.


스트라는 일어나며 다급하게 발에 화염을 집중했다. 유키의 냉기가 발가락부터 시작해, 스트라의 몸을 잠식하고 있다. 가만히 놔뒀다가는, 온몸이 얼어붙을 것이다.


스트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유키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어, 거리가 벌어진 상태다.


‘도망갈 수 있어.’


호흡도 가빠지고 있는 것이, 애초에 달리기와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트라는 다시 달렸다. 광장의 끝이 눈 앞에 보인다.


“헉, 헉··· 또 도망가는 건가요?”


스트라는 광장을 벗어나기 직전,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한다. 아까와 다르게 이성을 되찾은 목소리다.


“언제나 그렇게... 도망만 다녔나요?”


스트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유키는 더 이상 달리고 있지 않다. 아니, 걷지도 못하고 있다.


‘냉기가, 약해지고 있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힘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원망에 눈이 멀어 무리한 것일까?


‘그럴지도 몰라.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점점 약해지는 유키와 다르게, 유키의 영역에서 벗어난 스트라는 다시 돌아오는 자연력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유키의 눈에 있는 원망이, 자신을 못 박아 놓은 것 같다.


‘아니, 유키 씨 때문이 아니겠지···’


유키의 원망은 통로에 불과하다. 그의 과거, 그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기억으로 향하는 통로.


“왕에게 들었어요. 당신의 과거를.”


그리고 그 통로 끝의 문을, 유키가 열려고 한다.


“누구와도 싸우지 못했던 한심한 사람.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 굽히는 것밖에 못하는 심약한 사람. 그것이 당신이라고.”


유키가 무릎을 꿇는다. 스트라는 움찔했다. 단순히 달리기에 지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오지 마세요!”


유키는 그런 그를 저지한다.


“유키 씨···”


“오지, 마세요. 오히려 당신에게는 지금이 기회 아닌가요? 이 왕국에서, 왕에게서, 그리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키의 말에 스트라가 다시 움찔한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스트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만 벗어나면···’


광장의 끝. 이곳을 벗어나서 저 길을 따라 가면, 왕국을 벗어날 수 있다.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도 된다. 동료들과 침입했던 비밀 통로를 다시 거슬러가면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스트라의 반응을 본 유키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대로 가세요. 차라리 그렇게 하세요. 자신 없다면,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주지 마세요.”


‘거짓된 희망···’


자신을 보던 수많은 눈이 떠오른다. 그 안에 담겨있던 것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원망이었다.


“도망가세요.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나요? 당신은 어차피 도망자였잖아요?”


‘도망자···’


스트라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 단어만큼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도망쳤다.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누구와도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다.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두려웠다. 누군가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 자신을 욕하는 것이 두려웠다.


누구에게도 상처주기 싫었다.


그렇기에 싸움을 피했다. 그렇기에 싸움이 벌어져도 일부러 패배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사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언제나 시험받아야 했다. 언제나 시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예언의 아이. 그 무거운 이름 때문에, 누구나 우러러보는 예언의 아이,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싸우기 싫은데 전투술을 연마해야 했다. 상대방의 말을 따르고 싶었지만, 두둔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노력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모두의 기대가, 자신을 옭아맸다.


누구에게도 원망받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희망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도망쳤어야 하는, 가장 도망치고 싶었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스트라!


나이트가 왕에 즉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거짓된 희망을 부수는 거였다.


예언의 아이를 두둔했던 사람들을 모아 처형했다. 처형의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스트라를 불렀다.


지끈.


머리에 두통이 밀려온다. 애써 덮어두고 있던 그날이 떠오른다.




“이들을 봐라!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고 있지 않은 이들을! 자신이 속았다는 것도 모르는 자들이다! 예언자의 거짓은 이토록 위험한 것이다!”


나이트는 단상 위에 올라, 묶여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이 거짓은 전염병이다! 이들을 놔두면 다시 우리를 현혹시키려 들 것이다! 난 그것을 두고 볼 수 없다! 비록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난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 이들을 정화할 것이다!”


“와아아아!”


단상 아래의 수많은 군중에게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함성 소리는 모인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작디작았다.


“그리고 난 정화를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손님을 초대했다!”


나이트의 손짓에 따라 누군가 단상 위로 끌려온다.


“익숙한 얼굴이겠지? 얼마 전만 해도 예언의 아이라고 모두가 떠받들었으니 말이야.”


그는 스트라였다.


“스트라?”


“정말 스트라야?”


군중에게서 동요가 퍼져나간다. 스트라가 감옥에 갇힌 후로, 어느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혹자는 그가 이미 탈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다.


“스트라! 스트라! 우리를 구해줘!”


그리고 형장에 있던 사람들은 스트라를 보고 희망을 품었다.


“예언의 아이다. 그라면 우리를 구해줄 수 있을 거야!”


“스트라! 나야! 네 옆집에 살았던!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고요하던 형장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진다. 모두가 자신들은 살았다고 말한다.


그 광경을 보고, 스트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 광경을 보고, 나이트는 짙은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다들 보고 있는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들을!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은 이놈이 아닌데도, 아직도 거짓된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을 봐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나이트의 외침에, 형장이 다시 조용해진다.


“이들이 꿈에서 깨어났다면, 난 기회를 주었을 거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끝까지 현실을 외면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다!”


나이트는 옆에서 전해주는 검을 직접 들고 형장으로 내려갔다.


“예언을 믿는 자들이여! 이것이 그대들의 최후다!”


촤악!


망설이지 않고 휘두른 그의 검에 하나의 목이 떨어진다. 방금까지 끊임없이 희망을 구가하던 입은, 혀를 밖으로 내동댕이친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아악!”


“지, 진짜 죽였어!”


모두가 생각했다. 설마 진짜 죽일까? 혹시 말만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도 같은 동족인데? 싸우다 죽이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 생각은 지금 산산이 부서졌다.


나이트는 피를 뿜고 있는 시체를 뒤로한 채 옆의 사람에게 이동한다.


이미 겁에 질린 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 눈은 스트라에게 향해 있었다.


스트라는 그 눈에 담긴 말을 읽었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다.


‘살려줘.’


하지만 스트라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을 꽉 쥐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검의 다음 대상이 된 그도, 스트라도, 아직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겁만 주는 걸 거야. 지금 죽은 저 사람도, 무슨 속임수가 있는 걸 거야.’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생각이었다.


촤악!


또 하나의 머리가 떨어진다. 떨어진 목에 남아있는 감정은 불신이었다. 정말 자신의 목이 베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자의 최후였다.


그 후로도 나이트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또 하나의 목이 떨어진다. 또 하나의 목이 떨어진다.


형장은 지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설마 했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스, 스트라! 살려줘!”


그 말이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었다.


모두가 믿었다. 스트라가 자신들을 구해주리라는 것을, 지금은 가만히 있지만, 자신이 죽기 전에 그가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고. 앞의 몇 사람은 죽었지만, 자신만은 분명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거짓된 희망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스트라를 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수록, 희망은 다른 것으로 바뀌어갔다.


“스트라! 왜 우리를 살려주지 않는 거야!? 우리는 너를 위해-”


하나의 목이 떨어진다.


“스트라··· 아니지? 구해줄 거지?”


하나의 목이 떨어진다.


“네가 진정한 예언의 아이라면 지금 그 힘을 보여달란 말이야!”


하나의 목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어를 내뱉을 수 있는 목은 없었다.


스트라는 자신의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은 핏물을 방울의 형태로 떠나보내고 있다. 마치 눈물처럼.


떨어진 모든 목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희망에 넘치던 눈들은, 공허함과 원망의 잔해만을 남겼다.


“보았나! 저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니,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 예언의 아이는 거짓이다! 예언은 거짓이다! 예언자는 사기꾼이다!”


그 말은 가만히 서 있는 스트라와 대비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들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스트라의 손에는 처음 보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나이트의 강함에, 예언의 아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누구와도 싸우기 싫다는 생각에, 나이트의 추종자들이 감옥으로 끌고 갔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순간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도망갔어야 했어.’


만약 진작에 예언의 아이를 그만두었더라면, 그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을까?


‘이도 저도 아니었어.’


다른 모든 것들에게서 도망쳐놓고, 정작 예언의 아이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보지 않아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겠죠··· 당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패배하고 죽었다고 생각하겠죠. 그렇게 잊혀지겠죠.”


“누구에게도···”


스트라는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래요··· 가세요···”


스트라가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광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스트라는 눈 앞에 보이는 빛기둥들을 애써 외면했다. 여기서 뒤로 돈다면, 빛기둥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두 끝낼 수 있다.


“왕의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으로···”


하지만 그 말에 멈칫한다.


‘어디로 가야 하지?’


드워프 왕국은 더 커질 것이다. 끝없이 더 커질 것이다. 스트라는 알고 있다. 영물을 죽였다는 나이트의 힘은 비정상적이다.


하스트는 드워프 왕국이 도깨비 마을과 엘프 마을을 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스트라의 생각은 달랐다.


나이트는 모든 것을 복속시킬 것이다. 세상 그 어디도 안전할 수 없다.


‘어디로 도망가도 안 돼···’


스트라는 다시 발견될 것이고, 그렇다면 다시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다시 예언의 아이라는 무게에 짓눌릴 것이다.


비록 그때가 되면 과거의 유물 같은 존재가 될 테지만, 평생을 예언과 함께한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죽는 순간까지 그를 옥죄게 만드는 수단이 될 것이다.


“예언의 아이를 포기하고···”


점점 가늘어지는 유키의 말은 결국 스트라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예언의 아이를 포기···”


언제나 꿈꿔왔던 이야기다.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내주겠다고, 수많은 밤 속에서 바라왔던 이야기다.


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이 정하는 게 아니었다. 예언자라는 절대자에 의해 생긴 법칙이다. 절대 누군가에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러나 예언은 빗나가고 있다. 재앙은 처리되고 있다. 예언의 아이는 불확실한 거였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면···


털썩.


“유키 씨?”


고민하고 있는 스트라의 앞에서 유키가 쓰러진다.


스트라는 한달음에 유키에게 달려갔다. 유키는 이번에는 스트라를 막지 않았다.


“유키 씨!”


유키는 스트라를 막지 못했다.


“헉··· 헉···”


그저 가쁜 숨만 내쉴 뿐이었다.


스트라는 다급하게 유키의 몸을 살펴봤다.


“자연력이 사라지고 있어?”


유키의 몸에서 느껴지는 자연력은 극히 미약하다. 마치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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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공성전 (2) 19.09.07 15 0 14쪽
170 공성전 (1) 19.09.06 21 0 13쪽
169 격돌, 스트라 대 유키 (4) 19.09.06 19 0 12쪽
168 격돌, 스트라 대 유키 (3) 19.09.05 17 0 12쪽
» 격돌, 스트라 대 유키 (2) 19.09.05 14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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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격돌, 소토 대 묘원 (5) 19.09.04 18 1 14쪽
164 격돌, 소토 대 묘원 (4) 19.09.03 19 1 12쪽
163 격돌, 소토 대 묘원 (3) 19.09.03 2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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