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애인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001 애인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녁 8시, 동료들과 식사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나는 이쪽으로 갈게."
"뭐, 또 걸어서 올라가는 거야?"
동료가 놀리듯 웃는다.
"어쩔 수 없잖아. 요즘 운동이 모자라. 위에서 보자구."
"그런다고 뱃살이 빠지냐."
동료 목소리를 들으며 비상구 문을 연다.
밖은 따뜻해졌지만 비상구 쪽으로는 햇빛이 닿지 않아 서늘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마시고 조금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 배가 나올 나이도 아닌데 은근히 아랫배가 둥글어졌다.
데이트할 때는 애인 취향에 맞추기 때문에 기름지고 달콤한 걸 먹는 경우가 많다.
배가 나온 건 아마 그 때문일 거다.
흐흐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그래, 애인이다, 애인.
나는 현재 절찬 연애 중이시다.
지금까지 살아온 30년은 저주가 붙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불행한 일의 연속이었다.
길을 걷다 맨홀에 발이 빠지는 건 일상다반사고, 새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맞는다.
언제부터인가는 그러려니 하고 항상 여벌 옷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머리 닦을 물티슈는 당연히 상비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그랬으니 정말 태어나면서부터 불운에서 불운으로 옮겨 다녔던 것 같다.
연애도 마찬가지.
여자와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닌데 될 듯 말 듯 하면서 언제나 연애까지 가는 데는 실패해 왔다.
덕분에 얼마전까지 동정이었다.
하지만 운이 풀리면 확 트이는 모양이다.
취직하자마자 처음으로 진짜 연애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것도 여자 쪽에서 고백해 온.
아직 몇 달 안 되었지만 몸의 궁합도 잘 맞는다.
이번이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 같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한동안 끊었던 헬스장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식스팩까지는 아니라도 두루뭉술 나온 뱃살을 보여줄 수는 없잖아.
하지만 야근이 이어져 헬스장에 못 가는 날이 많아지자 시작한 게 계단으로 다니기다.
출퇴근은 물론이고 점심, 저녁 식사 때에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물론 사내 연애 중인 연인에게는 비밀이다.
뱃살 나온 것도, 그걸 빼기 위해 계단으로 다니는 것도.
그녀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멋진 사람이고 싶으니까.
높은 건물이라 계단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며칠이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지금까지 누군가를 본 적은 없다.
지금은 대부분 퇴근한 뒤라서 건물은 더욱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귀신이 나올 것 같다.
"...."
기왕 귀신이라고 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나와주면 좋을 텐데.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신 부모님은 꿈에서조차 나온 적이 없다.
'뭐, 아버지 어머니가 귀신이 되면 그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지만.'
두 분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아마 지금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계시기 때문일 거다.
어머니, 아버지는 정말 다정하고 사이좋은 부부였으니까.
그러니 분명 저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계시겠지.
지금은 결혼해서 따로 사는 형의 꿈에도 부모님이 나온 적은 없다고 하니까 분명 잘 지내고 계신다.
[어머니가 여기 오겠다고 떼쓰는 걸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말리는 게 아닐까. 산 사람이 귀신과 만나서 좋을 일은 없잖아. 뭐,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우리 역시 그곳에 갈 테니까.]
언젠가 형이 그렇게 말하며 쓸쓸하게 웃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전에는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했었다.
왜 그날 나갔느냐고, 왜 그 시각 그곳에 있었느냐고, 왜 술 취해 돌진하는 차를 미리 보지 못 했느냐고,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늘어놓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비난이었는데.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두서너 계단을 한꺼번에 올라갔다.
지금 사귀는 여자는 어머니를 닮았다.
외모가 닮은 건 아니지만 웃는 모습이 조금 비슷했다.
그래서였을 거다.
어쩌다 영업부에 가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쫓곤 했었다.
그녀도 그걸 느꼈겠지.
그녀가 고백한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고백은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답답해서.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가 용기를 내준 덕분에 사귀게 되었다.
지금은 그녀와 결혼 얘기까지 오가고 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였다.
아직 빠르지만, 정말 좋아한다고,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역 프로포즈는 처음이었다.
물론 진지하게 사귄 것도 처음이기는 한데.
'행복해지자.'
어머니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누렸을 행복까지 모두 내가 누리자.
부모님처럼, 아니, 부모님보다 더 다정한 부부가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도 분명 그걸 바라고 계실 거다.
형은 그렇게 생각해서 계속 행복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나는 깊이 숨 쉬며 다리를 멈췄다.
역시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라가는 건 무리였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그래도 거의 다 왔으니까.'
이제 두 층만 더 올라가면 사무실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힘을 내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위쪽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 응... 잠깐... 사람이 오면 어쩌려구 그래요...."
"괜찮아. 다 퇴근해서 아무도 없어."
"아이참, 그래도 그렇지...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한 게 이래서였어? 아... 앙... 뭐야, 너무 급하잖아... 계장님... 안 돼... 응... 앙...."
다리가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굳었다.
나에게 관음 취미는 없다.
평소라면 얼른 계단에서 나가 이 장소를 피할 거다.
하지만 남녀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남자는 아마 얼마 전에 계장이 된 나의 사수, 그리고 여자는 목소리 톤이나 분위기는 달라도 애인인 정소희 같았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벌써 퇴근했을 그녀가 아무도 오지 않는 계단에서 김 계장과 함께 있을 리 없다.
내가 아는 정소희는 유부남하고 이런 곳에서 난잡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목소리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분명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다른 사람일 거다.
'그래, 그렇지. 소희 씨일 리가 없어.'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를 갖고 싶어서 나는 단박에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사람은 급하면 없던 힘도 생기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힘들어 헉헉거린 건 뭘까 싶을 만큼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가 구석에 엉겨 붙은 두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눈알이 굴러떨어질 만큼 크게 눈을 부릅떴다.
반쯤 벌거벗고 엉겨 붙은 남녀는 틀림없는 김 계장과 정소희였다.
두 사람의 하의는 완전히 벗겨져 바닥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아니,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정소희도 정소희지만, 김 계장도 그렇다.
그는 내가 누구와 사귀는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 저런 짓을 하는 거야, 개X끼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이 개 같은 년놈아, 지금 신성한 회사에서 벌거벗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김 계장과 정소희가 깜짝 놀라 이쪽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동료들이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복도에 있을 거다.
여기에서 큰 소리가 나면 분명히 들린다.
'X발, 모두 나와서 보게 만들어 주마.'
창피해서 회사에 있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꼬박꼬박 이름도 말해주자.
나는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유부남이 다른 여자랑 붙어먹어도 되는 거야? 김 계장! 당신 마누라는 이 사실 알고 있어? 그리고 너, 정소희! 하, 진짜 못 해 먹겠네. 나한테는 그렇게 정숙한 척 내숭 떨더니 유부남하고 붙어먹어? 네가 말하는 진중한 교제가 이런 거야? 결혼할 남자 따로, 헐떡거릴 남자 따로? 정소희! 대답 좀 해보라고. 입 붙었냐? 김 계장님, 부하 직원이 누구랑 사귀는지 뻔히 알면서 이래도 됩니까? 제가 연애 상담할 때마다 속으로 웃었어요?"
돼지 멱따는 소리도 이렇게 크지는 않을 거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정소희였다.
그녀가 당황해서 목소리를 작게 해 외쳤다.
"아니, 아니에요, 진우 씨. 이건 그게 아니라, 목소리 좀 줄여요! 나는... 그러니까... 그, 억지로, 그래요, 약점을 잡혀서 정말 할 수 없이 그런 거야. 나, 나는 피해자예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내 목청에 가려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중에도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김 계장이 당황해서 정소희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이 미친X이. 니가 먼저 나한테 꼬리 쳤잖아."
나를 잡으려는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팔을 내민다.
"진우 씨, 조, 조용히 좀 해. 좀 진정하라구. 우리 진정하고 차분하게 앉아서 말로 합시다."
너나 앉아서 말로 해. 그리고 나한테 말하기보다는 먼저 그 남사스러운 물건이나 먼저 가려라. 눈이 썩겠다.
어쨌든 이제 늦었다.
나는 여전히 정소희, 김 계장, 불러가며 고래고래 외치는 중이고, 비상구 문으로 이미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 뭐야."
"계... 계장님... 하고 영업부 정소희 씨?"
"와... 이런 데서."
"미쳤나."
비상구로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나와 함께 밥 먹고 올라갔던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부장님이 서 있었다.
퇴근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장님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부장님, 저렇게 눈이 커질 수도 있구나.
항상 감고 다니는 것처럼 게슴츠레한 얼굴만 봤는데.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두 번 세 번은 봤을 거다.
"꺄아아아!"
한 박자 늦게 정소희가 비명을 지르며 쪼그려 앉았다.
김 계장과 정소희는 모두 바지라서 입으려면 몸을 펴야 하지만 그러면 알몸이 보인다.
쪼그려 앉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정소희가 얼굴을 가린 채 울기 시작했다.
울면서 죽고 싶다는 둥 협박당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아, 아니, 저 여자 말은 거짓말입니다, 부장님. 우리는 어디까지나 합의로... 이건 그러니까...."
김 계장은 아랫도리를 손으로 가리며 엉거주춤 서서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했지만, 글쎄, 변명할 말이 없었을 거다.
어쨌든 이쪽에서는 엉덩이에 난 털까지 보일 지경이다.
눈이 썩기 전에 손 하나는 이쪽으로 돌려주던가, 어떻게 좀 해줘.
내가 중얼중얼하자, 사람들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결국 김 계장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군가의 핸드폰에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사진을 찍은 모양이다.
나도 핸드폰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일단 찍어두자.
핸드폰 카메라를 김 계장 쪽으로 내밀다, 문득 내가 생각보다는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격은 당연히 받았고 분노도 했지만, 의외로 가슴 터질 것 같은 슬픔은 없다.
'그냥 화만 나네.'
어쩌면 정소희라는 여자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형도 어머니와 비슷한 분위기의 여자와 결혼했다.
그와 달리 형은 성격도 어머니를 많이 닮은 여자를 고른 것 같지만.
'하아, 인제 그만둘까.'
창피는 줄 만큼 줬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헤어지면 그만이지.
오히려 지금 이런 여자라는 걸 알게 되어 다행이다.
어쩌면 부모님이 저승에서 바보 같은 아들을 도우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핸드폰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핸드폰 카메라 화면이 김 계장으로 가득해졌다.
"이 개새X! 네놈 때문에 나는 망했어!"
김 계장이 분노해 외쳤다.
아니, 흥분해서 말해도 냉정하게 생각해도 어디까지나 개새X는 너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할 틈은 없었다.
김 계장이 나를 박은 것과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 건 아마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나는 강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밀렸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냅다 상대를 밀어낸다.
김 계장이 붕 날아 계단으로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 대신 자기가 떨어지는 걸 믿을 수 없었는지 김 계장의 눈이 접시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밀어낸 반동으로 나 역시 다리가 엇갈리며 뒤로 벌렁 넘어지고 있었다.
뒤에서 정소희의 비명이 울렸다.
"꺄앗!"
두 사람의 머리가 부딪쳤다.
아프다.
이 여자 돌머리인가.
엄청 아프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번쩍 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진짜로 하얀 빛이 시야를 덮었다.
"어...."
"뭐야, 이 빛은!"
"진우 씨! 이쪽으로 나와!"
"빨리!"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리고, 동료가 당황해서 손을 뻗었다.
나도 빛에서 도망치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막 동료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 그걸 막으려는 것처럼 빛이 밀도를 늘려 나를 감쌌다.
눈부신 하얀 빛 때문에 주변 모습이 희미해진다.
바로 뒤에서 정소희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 이거 뭐야! 몸이 사라지고 있어!"
그녀만이 아니다.
내 손 역시 입자가 풀리는 것처럼 빛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내밀었을 때였다.
쾅!
벼락이 꽂힌 듯 엄청난 충격이 머릿속을 덮쳤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사방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잡아당겨진 것 같다.
의식은 거기에서 툭 끊겼다.
"헉!"
깜짝 놀라 일어난다.
왜인지 나는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 어디야."
나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혼자 서 있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5일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월, 금 휴재).
(혹시 매일 연재하더라도 기본은 주5일이에요. 베르헤라, 이제 힘이 딸려서 주7일 연재를 못함.)
0513 주인공 시점을 1인칭으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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