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GRS - 제 2장(1)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크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더 크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나는 발악을 하듯 소리치며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쥐가 날 정도로 말이다. 힘들고 아팠다.
"이 정도론 결코 용서 못하는 일이지만 네가 나를 위해 평생 케이크를 만들어다 바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봐주는 거야."
"………."
입은 움찔거리기만 했다. 옆에 서있던 미젠다가 툭 쳤다.
"어이, 제자. 이럴 땐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거야. 알겠어?"
"아, 예…."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아리야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비참하다. 울고 싶다.
"음, 좋아. 그래. 이만 가봐도 좋아."
아리야는 연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겁나게 좋아하는구만.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하겠다.
바로 몇 십분 전 일이었다. 아리야에게 주먹을 날리던 나의 불타는 투혼은 아리야의 사타구니 가격에 간단히 소멸하고 말았다. 어느새 빈틈을 보인 내 밑을 공략한 것이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풀썩 쓰러졌고 이때다 싶은지 아리야는 벌떡 일어나 발길질을 시작했다. 이 녀석 공격수법이 급소 공격 후 발길질인 모양이다. 고약하다.
어쨋든, 그렇게 얻어 터지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아리야에게 방 안으로 끌려들어가게 됐다. 그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 1번, 지금 당장 내게 사과하기 위해 자살한다. 2번,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
뭐, 뭐야? 이건.
당연히 바로 대답을 못했고 항변을 하려는데, 타이밍 좋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진래가 나선 것이다.
"어머나, 그 두 조건은 너무 심하네요. 이건 어때요? 아리야."
그러더니 속닥속닥 귓속말을 한다. 아리야는 처음엔 똥 씹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빙긋이 웃고는 호령하였다.
"좋아. 진래의 제안을 수락하지. 넌 평생 내 수발을 들어야해. 알겠어?"
그건 또 뭐냐? 강제 노동 착취다! 노동 센터에 신고할 테다!
"닥쳐. 이 정돈 기본에다가 하나 더 있어."
악마 같은 녀석.
"수발 외에도 케이크를 만들어와. 내가 요구할 때마다. 그것도 팬케이크로. 생크림이나 초코도 좋지만 난 그게 제일 좋아. 날 넘어트린 죄는 죽음으로 갚아도 부족하지만 진래가 이렇게 부탁하니 여기서 끝내는 거야."
잔뜩 잘난척하는 얼굴로 말하는 아리야. 난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해를 돕기 위해선지 미젠다가 옆에서 내게 귓속말을 해왔다.
"이보게, 제자. 저 아리야 아가씨께 대들어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차라리 이렇게라도 빌붙는 게 나아."
헛소리. 차라리 죽고 말지.
"아니야. 잘 생각해. 너, 저 아가씨가 누구 딸인지 알아?"
알게 뭐야.
"리치 그룹 회장의 딸이라고. 이해 되? 이 한국을 지배하는 기업 집단의 보스란 말이야. 너 하나 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건 코파는 것보다 쉬울걸."
협박인가? 이렇게 더러울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장난이지, 제자. 진짜로 죽일 리는 없잖아. 다만 고문 정돈 할 수 있지."
그 고문이란 녀석은 정체가 뭐냐고 물으려 했지만 아리야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려댔다.
"알아들었지? 일단 반성의 벌을 내려야겠어!"
뭐… 그 이후로 방금과 같이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막 끝났다만.
"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리치 그룹. 들어본 적은 있다. 그 거대한 기업 집단. 아버지도 거기에 속한 회사에 다니신다. 리치 그룹 메이커도 얼마 전에 탄생했다 들었다. 한국 경제 89%를 차지하고 있는 초거대 기업 집단. 그 부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고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학교 이름도 요상했는데 아무래도 그 리치 그룹이란 데서 이 리치 스쿨을 만든 모양이다. 빌어쳐먹을!
게다가 그 총수의 딸이 저 되바라진 꼬맹이 아리야라고? 미쳤구만. 아직 아리야와 함께 노는 저 나머지 여자들에 대해선 모르지만 그런 녀석이랑 어울리는 걸 보니 제딴에서도 대단한가 보다. 에드워드에게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인지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넓은 학교 정원과 거대한 학교 크기가 납득이 간다. 과자 값이 10만원 이상이었던게 납득이 간다. 정말로 사람 잘못 건드렸구나. 새삼스레 깨닫는 나였다.
이제 사타구니 두 번 차인 걸로 복수니 뭐니 할때가 아니다.. 정말로 묻혀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래. 그래서 학생들이 그렇게 아리야를 두려워한 거였어. 저 악마 꼬맹이.
그렇다고 굽실대거나 아부할 생각은 없다. 결코 없다. 그냥 내 마음에 드는 대로 대할 것이다. 기분 나쁘면 나쁘게. 좋으면 좋게. 날 조금이라도 신경질나게 하면 만들어오라고 시키는 그 팬케이크에 설탕 대신 소금을 가득 넣어줄 테다.
아, 그나저나 팬케이크를 만들어오라니? 만들 줄 모른단 말이야.
"이봐, 제자."
한숨만 푹푹 내쉬며 방 구석에서 벽만 바라보는데 미젠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 스포츠 소녀는 겉 생김새에 맞게 워낙 털털해서 문제다.
"뭔 볼일 있나요? 미젠다."
괜히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젠다는 피식 웃더니,
"사부라고 불러, 제자. 아까는 미안했어. 내 인사이드 킥 많이 아팠지?"
다, 다른 명칭은 없는 겁니까.
"없어. 아무튼 미안했어. 그 답례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줄게."
"뭔데요?"
"팬케이크 만드는 것이 까다롭다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해."
도움이요?
"그래. 제자라면 충분히 요리사 분위기를 내뿜는 녀석을 찾아낼 수 있을거야. 그런 녀석을 하나 잡아다가 팬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워. 알겠지?"
그냥 가게에서 사면 안 되나요?
"안 돼. 그건 내가 직접 검사할 거야. 만약 가게에서 산 거라면 내가 용서 못해. 아리야에 대한 모독이라고.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돈은 있냐? 참고로 팬케이크 하나에 25만원이다."
아예 날 다 벗겨 먹어라. 나는 한숨 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 제자. 얼른 갔다와!"
예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대충 찾는 시늉이라도 내자. 오히려 여길 빠져나갈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군.
다시 기분이 상승하는 것을 느끼며 문을 나서는데 나라가 다가왔다.
"우리 진호.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뭘 모르는데?"
'우리 진호'가 무척 거슬려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리야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쌍한 아이야. 그런 아일 위해 팬케이크 만드는 건 얼마든지 해주고 싶어. 너도 그렇지?"
………….
"그런고로, 그 아이는 무척이나 팬케이크를 좋아한단다. 아까 그것도 진래와 사러 나갔다가 못 사서 다시 나가서 사 온건데 네가 뭉개버렸잖니? 미안하지도 않아?"
나는 처음 그 아리야와 만났을 때와 문 앞에서 부딪친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미안하다 할 수 있겠군.
"팬케이크를 잘 만들어 오면 이 누나가 상을 줄게. 알았지?"
입술에 손을 붙였다 내밀며 윙크한다. 나는 여자를 그리 밝히는 타입이 아니라 그 말에 별다른 기쁨을 느끼진 못했지만 아리야는 정말 사랑 받는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불쌍해? 돈 많지, 친구 많지.
툴툴대며 밖으로 나왔다. 좋았어. 이대로 돌아가야지.
"어머? 그러시면 안 되요."
엉?
난데없이 바람 처럼 등장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내 발을 묶어버렸다.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하여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
"안 된다구요."
으왓?!
바로 앞에 방긋 햇빛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나타나자 놀라고 말았다. 으, 내 심장이!
"지, 진래 씨인가요?"
왠지 모르겠지만 존칭이 붙여지는 그녀였다. 겉 생김새도 그렇고 행동도 자애롭기 그지 없어 그런 지도 모르겠다.
"맞아요. 기억해주시네요. 아깐 실례 많았어요."
"아, 네…."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신지?
진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진호 군을 도와주려구요."
'군'이라는 칭호 역시 '우리 진호'처럼 거슬렸지만 그냥 한숨 쉬는 걸로 마무리했다.
"왜요? 역시 힘드신가요?"
"힘들죠. 당연히."
"어머나, 그 정도로 힘드시면 안 돼죠."
어라? 뭔가 불안한데. 진래의 얼굴이 갑자기 무섭게 변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따뜻해 보이는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안색이 새파래졌다고 해야 하나, 흔히 말하는 핏줄 마크? 그런 게 느껴졌다. 왜, 웃으면서 화내는 인간들이 가끔 있잖아? 프로이드 박사가 좋아할만한 타입이다.
"잘 들으세요. 뭔가 허튼 생각이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다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내 어깨를 콱 움켜쥐고 세게 눌러 내렸다. 누가 보면 안마 해주는 걸로 보이겠지만 무지 아팠다.
"잘만 하시면… 무엇이든 잘 될 거에요."
진래는 살며시 손을 풀며 말했다. 목소리의 톤과 미소는 평소로 돌아와 난 겨우 안도의 숨을 돌렸다.
"화나시면 무척 무서울 것 같네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래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아니에요. 전 화나도 별로 안 무섭답니다."
거짓말. 난 이 여자도 상당히 무섭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여자들이 이렇게 무서운 생물인줄 진짜 몰랐다.
"기운내세요. 뭔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 제게 물어보세요. 아참, 어차피 매일 여기로 오셔야 될 텐데♡"
"분명 아리야에게 약속한거라면 그, 그렇죠."
나는 강렬한 공포감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잘 다녀오세요란 인삿말을 덧붙이며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철컹, 문 닫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하게 들렸다. 쳇, 도망치는 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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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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