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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최근연재일 :
2014.12.21 16:37
연재수 :
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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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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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39,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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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1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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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붉은 못 85화 - 사람 꽃

DUMMY

란돌을 발견하기 전, 비사는 스어가의 저택을 돌아다녔다. 그가 말했던 대로 흰 꽃 더미를 홀로 마주한 에스윈, 자신의 방에서 하녀에게 손톱을 다듬게 하고 있던 에첼. 평범하게 자기 할 일들을 하는 하인들. 수상쩍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지붕 위에 올랐던 비사는 건물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줄곧 지붕을 점령하고 있던 헤이즈도 뒤를 쫓았다.

저택 안쪽에는 단정하게 다듬어진 정원수들과 그 앞으로 빈 뜰이 있었다. 그곳을 경계로 순찰하는 이들도 드나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인들의 공간이라 정해져 있는 자리일 것이었다. 해도 비사는 허락 없이 내려섰다.

비사는 멀뚱히 서서 땅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밑창으로 바닥을 쓸었다.

지익하고 바닥에 옅은 자국을 남기며 몇 걸음을 더 걸었다. 헤이즈는 뭐라 한마디 묻지도 않고서 시선만 움직였다.

비사의 발은 흙바닥에서 낮은 석판이 깔린 장식 길로 옮겨졌다.

밟아 다진 땅. 힘없이 끌려가던 그 지면은 흙이 팰 만큼 무르지 않았고 마치 손으로 골라 놓은 것처럼 박힌 돌들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한 번씩 어딘가에 걸려 튀어 오르던 발.

모양을 내며 이어진 석판의 틈.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날씨가 좋으면 꽃구경이라도 하며 다과를 할만한 탁자, 저택 측면의 작은 문과 그 옆으로 붙어 있는 온실. 정원수 너머로 거리를 둔 창고 같은 건물들이 보였었다.

곧이어 하인의 작은 목소리에 짜증을 내며 걷는 에첼이 나타날 때까지 비사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너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넘겨 짚는 거야."

아렌이 재차 물었다. 비슷하게 다져진 바닥이야 좀 산다 싶은 집구석엔 제법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케리가 분명 그날 그곳에 있었다는 말을 믿는다면 아마 제법 들어맞는 추측일 것이었다. 문제는 거기 시신이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뭐라 설명을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작지만 뇌구로 뭐라도 하나 터트리며 주술사 흉내라도 내야 할 것인지. 있는 진기 없는 진기 다 끌어모아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떠올라 볼까. 무엇으로 말을 믿으라 할 것인가.

사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이 필요하게 되었다.

해도 그런 거짓말을 제대로 할만한 능력도 없었으니 그냥 속없이 죽은 케리를 봤다라고 말해야 함일까. 그럼 또 증명해야 할 것이니 앞으로 돌아갈 이야기였다.


"왜 말을 안 해! 뭘 아느냐고 묻잖아!"

참을성 없는 란돌이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그냥 안다."

앞뒤 설명을 다 잘라 버렸다. 안 믿으면 자기들 손해 아니던가. 당연히 란돌의 격한 반발이 빗발쳤다.

"뭐? 이게 지금 네가 사람들을 갖고 놀려고...!"


다르릉.

비사의 귓가에 적인의 울림이 들리는 순간, 뜯어먹을 듯 좨치던 눈빛과 말들이 멈추었다.


비사가 고개를 돌리자 옆으로 나무 조각들이 떠올랐다.

적인의 또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봉인 일부를 가지고 노는 것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이 된 비사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뭇조각들은 어느새 그들이 아는, 가장 찾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비사는 보지 못한 얼굴을 적인은 보았던 모양이었다.


란돌도 아렌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리..."

입술도 붉지 않은 나무 조각이 뭉쳐 만든 얼굴은 란돌의 손이 닿기 전에 곧 나비가 되어 흩어지더니 비사의 등 뒤로 되돌아갔다.

란돌의 놀란 눈이 비사에게 고정되었다. 이런 상황은 쥐약이었다.

"케리, 케리지? 방금 케리였지? 대화할 수 있나? 다, 다시 불러올 수 있나?"

모양 정도야 몇 번이고 만들 수도 있을 것이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고개를 저었다.

란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주저앉더니 비사의 다리를 부여잡고 엉엉 울어대었다.

어쩔 줄 모른 비사는 그리 서 있기만 하였다. 다리 한 짝 정도 잠시 빌려 준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비사가 이들을 뒤로하고 문밖으로 나서자 앞에 헤이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줄곧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왜."

"마지막까지 살피라 하셨습니다."

역시 한동안 지켜본 탓일까. 짧은 질문에도 그는 제법 알아서 답을 토해내었다.

"마지막."

이 일의 마지막이라는 게 대체 언제일까.

"비사님께서 발을 빼시는 순간까지입니다."

하는 짓이 얄미워도 자신에게가 아니라 방안의 저들에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내버려 두기로 한 비사였다. 어차피 꿍꿍이 놀이라면 카일러스가 한 수 위였다.




풍채가 좋은 스어 남작은 돌아와 성주 앞에 세워지게 된 순간에도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조밀한 세공이 빛나는 황금 단추와 광택이 도는 가죽 구두까지. 하지만 그는 지금 고개를 떨군 채로 그란성 성주의 접견실에 서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 사용인들이 그런 짓을..."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오. 남작."

란코르트는 전에 없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학식을 갖춘 얌전한 귀족이었으나 망나니라고 부를지언정 제 아들에게 향한 칼을 그대로 뽑아 넘길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란돌님이 우리 에스윈을 얼마나 홀대하셨으면 사용인들이 이런 일까지 벌이었겠습니까."

눈을 흘끔거리며 고개를 들락 말락 한 그런 모습이었지만 스어남작 역시 죄목을 전부 가져간 채로 문제가 커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거기다, 우리 두 가문은 이제 혼인을 약조한 사이 아닙니까. 저희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다 아랫것들이 저지른 일. 란돌님께서도 살아 돌아오셨는데 더 문제를 키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란코르트의 언성이 높아졌다.

"약혼은 파기하도록 하겠소.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떠하였건 둘의 문제요. 정말로 사용인들만이 이런 일을 벌이었겠소? 란돌은 자신이 갇혀 있던 지하에서 에첼을 보았으며 그녀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보았다고 하오. 잡혀가는 것을 에스윈이 보고 있었다고도 하였소. 사용인들의 일이라면 어찌하여 에첼은 란돌을 구하기는커녕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오!"

"에첼이 워낙 성질이 있기야 해도 무슨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 에스윈은 다들 아시다시피 꽃 한 송이 함부로 뽑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무언가 필시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에첼을 뒤로하고라도 에스윈의 성정이야 모르는 이가 없었기에 당장 따져 묻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다들 내심 란돌의 시야가 어찌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거기에 서 있던 것도 에첼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거기다 유령이니 뭐니 소란까지 피워 성주민에게 불안을 키워냈지요."

말을 이은 란코르트의 수하인이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사라진 케리 제더스가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지도 다시 여쭈어야겠습니다."

"케리 제더스? 그게 누굽니까."

"3년 전, 아니 이제 4년 전 스어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한 소녀가 실종된 사건입니다. 잊으셨습니까."

"하녀 계집들이야 좀도둑질을 하거나, 용병들과 눈이 맞아 도망가는 사태까지 빈번히 일어납니다. 선급금을 가지고 떠나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어찌 그런 미천한 것들의 일까지 제가 신경을 쓰겠습니까. 시종장에게 그런 일은 맡겨두고 있습니다."


수하인은 이전 꽤나 빈번히 스어가를 찾아간 제스미에 대해서도 재차 물었으나 스어 남작은 아는 것이 없는 눈치였다.

란코르트는 기가 찼다. 어찌 보면 이날 문제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었다. 정작 스어가의 주인은 케리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수하의 손에 들렸던 기록부를 들여다보았다.

'스어가에 단 한 번이지만 공식적으로 확인 요청서가 발부된 적이 있었건만 어째서 그 정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

스어남작의 돈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무관심을 생각하던 란코르트의 머릿속에 불현듯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대신 일을 처리한 사람이 있었다 하면, 그 두 자매겠군.'

어딘지 아귀가 맞는 것 같았다. 에스윈을 집요하게 따라붙던 란돌, 지하실의 에첼.

란코르트는 이제서야 란돌의 두서없는 행동들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철없는 아들이라고만 여겼었으나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점은 그란가의 핏줄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다시 아침 해가 뜰 무렵 란돌은 스어가를 감시하는 첸트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해도 되겠습니까."

"파, 전부 다 파버려."

스어가를 모두 헤집어서라도 뭐가 됐든 좋으니 찾아내라는 란돌의 지시였다. 하지만 지휘관은 아무리 혐의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그란성의 상권을 대부분 쥐고 있는 스어남작을 함부로 건드려도 될 것인지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거기다 성주도 아닌 성주의 아들의 과격한 명을 따라야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섰다.

"거기 너! 누가 함부로 안을 들락거려도 된다 했나!"

그는 스어가 안으로 들어서는 검은 머리를 한 소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란돌이 버럭 화를 내었다.

"감히 어딜 함부로! 저분께 예를 갖추어라. 필요하다는 것이 있으시다면 다 갖다 드리도록 하고 알겠나."

란돌은 첸트를 나무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둘러보시지요. 천천히 마음껏 보셔도 됩니다. 다른 뭔가 알게 되시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첸트의 눈썹이 팔자가 되었다. 언제부터 망나니 도련님이 이렇게 남한테 존칭을 갖추는 인물이 되었던가. 뭐가 어찌 되었건 따질 수는 없었다.


란돌은 이곳에서 케리가 죽었을 것이라는, 그 후 어딘가 깊숙한 아래로 향했을 뿐 그 뒤는 모른다는 비사의 말에 또 대책 없이 크게도 일을 벌이고 있었다.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사이 란코르트를 태운 마차가 들어왔다.

"여기서 무엇하는 게야. 더 누워있어야 할 것 아니더냐."

"땅을 파려 합니다."

란코르트는 이쯤 되니 자기 아들이 망령에 쓰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번엔 대체 무슨 근거로,"

"성, 숲, 근방의 폐허가 된 마을부터 찾을 만한 곳은 다 뒤졌어요. 하지만 가장 의심 가는 곳인 이곳을 뒤질 기회는 없었습니다. 아니,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일을 당한 것으로 바로 그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 부탁드려요. 저를 위해 무리를 해주세요. 이런 억지 부탁을 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어쩔 테냐."

란코르트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잊겠습니다. 전부 다요. 케리도, 지난 4년간을 괴롭혀 오던 의문들까지 전부 잊겠습니다."

"그게 말처럼 되겠느냐."

"사실, 시도해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습니다."

란돌의 표정은 단호했다.


란코르트는 결국 지휘관에게 저택의 땅을, 실내 외 할 것 없이 작은 흔적만 있으면 발 디딜 틈도 없이 파 올리라 명령했다.


스어 남작은 황가에 이 억울한 일을 알리겠다 노발대발하였으나, 거부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땅을 파기도 전에 지하에서는 다른 성에서 도난당한 그림으로부터 시작하여 금지된 약물과 타국에서 들여온 밀매품까지 각종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남작의 죄목까지 추가되었다.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란코르트는 란돌에게 물었다. 란돌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와 같았다.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조차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나온다면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 것인가.

말라붙은 살가죽도 하나 없을 앙상한 뼈마디의 모습을 자신은 보고 싶었던가. 케리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죽음은 제대로 상상하지 않고 있었던 셈이었다.

'썩지도 않고서 아름답게 피 흘리며 죽은 모습이라도 상상했나.'

현실은 구더기가 괴고 썩은 물을 악취와 함께 흘러내리다 벌레에 내장을 파 먹히고 결국은 사라지는 모두와 같은 죽음이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죽음만큼은 평범하게 절차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 애타게 가슴을 태우더라도 말이다.

'찾고 싶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란돌은 갑자기 자신이 케리의 죽음을 현실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어가의 사병과 하인들까지 동원하여 곳곳의 땅을 파헤쳤다. 비싼 정원수를 뽑아 재끼고 화단도 흙을 토해냈다. 기사단의 수련생들까지 불려 나와 곡괭이와 삽을 들었다.

삽질하는 이들의 끼니를 때울 대량의 음식도 조달되었다. 그리 종일 땅을 헤집었다. 하인들이 몰래 잡아먹고 파묻은 닭과 돼지의 뼈까지 나왔으나 사람 뼈는 해가 저물도록 나오지 않았다. 다들 군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실패도 예상했던 것이었다.

비사는 땅이 헤집어진 안뜰에 다시 섰다. 근처 창고의 문을 열어보고 저택의 입구로 걸어갔다가 온실의 앞에 섰다.


"거긴... 아니 가시는 게 좋아요."

비사는 에첼의 하녀를 알아보았다. 애처롭게 마차를 쫓아 달리던 페르였다. 그날의 기억 탓인지 얼굴보다 손에 시선이 돌았다.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번져 있었다.

"아. 저기 멋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음식을 나르는 걸 나와 도우라고 저분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먹은 변명이 읊어졌다. 그런 것은 어찌 되던 알 바 아니었다.

"왜."

"네?"

페르는 무얼 묻는지 몰라 뜸을 들였다.

"왜 안 되나."

"아, 아가씨들께서 엄청 아끼세요. 매일 같이 여기서 차를 마시는 걸요. 비싼 것들이 많아서 허락받지 않으면 하인들도 함부로 못 들어가게 해요. 화... 내실 거에요."

이 판국에 윗전 어른 심기 걱정이라니 매 맞는 어린 하녀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비사는 별 상관없다는 듯 온실 문을 열자 페르는 몸을 움츠리며 다시 저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누구는 제 몸 녹일 장작 캐기도 어려운데 추운 날 매일 같이 이 온실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을 때웠을 것이었다. 금일은 아니었어도 말이다. 하루 내 사이 추위에 시들어가기 시작한 나약한 꽃들이었다. 해도 향긋한 냄새가 머리 아플 정도로 가득했다.

등잔도 하나 없었지만,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유리 천장을 통해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깨끗이 닦은 유리 벽과 달리 뿌옇게 잔 먼지가 쌓인 천장이었다. 얼마 전의 비로 물이 흐른 모양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독종 에첼이라 하여도 그 위에 올라서서 걸레질하라곤 못 한 모양이었다.


한동안 그리도 한참을 서 있었다. 분명 어제처럼 오늘도 안개가 없어 맑은 하늘이었다.

'이 안은 언제나 천음(天陰)이런가.'

케리의 눈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을 탁한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멍청한 것들. 그렇게 파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니까. 도망간 계집을 여기서 왜 자꾸 찾는 것인지 원."

에첼은 이미 짜증이 한계에 다다랐다. 갇혀 있는데다, 시끄럽기까지 했기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였다. 독한 술을 한 잔 손에 들고 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는 여기저기 불을 걸어놓아 대낮처럼 환한 빛 속이었다.

끼익.

손끝으로 창문을 열고는 술을 또르르 흘려보냈다. 괜한 심술이었다.


"에스윈. 에스윈!"

멍하니 손톱을 세워 손가락을 꾹꾹 눌러대던 에스윈이 에첼의 짜증 난 부름이 몇 번이나 이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망나니 란돌과 약혼 따위를 벌렸기에 이 사태잖아."

이제 와 무엇을 말하겠는가.

에스윈은 약혼식 날 밤을 떠올렸다. 한껏 자신에게 행패를 부리고서는 방문을 나선 란돌이 큰 소리로 외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거기 누가 없는가? 저 여자와 나 대신 자 줄 남자는 없나? 선착순으로 받아 주겠네. 아무나 신청하라고! 하하하!"

누군가 열린 방문을 조심히 두드렸다.

스어가의 하인 사내였다. 에스윈의 방 앞의 커다란 항아리에 늘 들꽃을 꺾어와 채우던 자였다.

그는 어두운 방안에서 울고 있던 에스윈에게 선뜻 다가가지도 못한 채로 말했다.

"아가씨, 저런 자는 아니 됩니다."

에스윈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내는 덩달아 안타까운 얼굴로 무릎을 꿇고서는 말했다.

"아가씨께서 아무리 괜찮다고 하셔도 저런 놈은 살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미천한 저 같은 하인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인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삶의 낙을 얻었습니다. 절대로 불행한 생을 사시도록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두 주먹을 세게 쥐고서는 일어섰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제없을 것입니다. 아가씨는 그저 맘 편히 모든 것이 지나가길 기다리시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에스윈은 그 하인이 란돌에게 강한 살의를 내비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죽여달라 부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지 말라 달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몽둥이 하나를 손에 들고 의연한 얼굴로 란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란돌이 인기척에 뒤를 도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을 보았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눈엣가시여서 그랬다며 입을 다물라 에스윈을 겁박하였고 자신과 다른 하인이 함께 자발적으로 나서서 벌린 것일 뿐이라며 사내는 모든 죄를 시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란성의 감옥 안에서 그저 목이 잘리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첼에게 말을 전하지만 않았다면 스어 가문의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일로 판결이 나기도 쉬웠을지 모를 일이었다.


쨍그랑. 챙강.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조용한 밤하늘을 울리며 저택 전체를 울려댔다. 에스윈은 무언가 하나 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고 있었고, 에첼은 그런 그녀가 짜증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온실을 전부 망쳐 놓고 있군. 저게 얼마나 돈을 들인 것인 줄 저 무지한 병사 놈들이 알기나 할까."

창가를 벗어나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말해 봐. 에스윈."

취기가 도는지 불그스름한 얼굴에 이죽거리는 표정의 에첼이었다.

"란돌이 잡혀 온 것을 너도 알고 있었잖아."

에스윈은 아래를 향한 눈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 놈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군. 네가 꼭, 5일째가 되는 날 죽여달라 했다고 말이지."

하인은 에스윈이 모르게 일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충성과 연정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사내가 공을 빼앗기기 싫다는 듯이 에첼에게 말을 전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네가, 맘이 약해져서 란돌을 살려서 돌려보낼 것을 고민하느라 그런지 알고 내려다본 게 화근이었어."

한참 손가락을 지근거리던 에스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밖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깥에서 들린 소리에 에첼은 벌떡 일어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에 자꾸 변명을 쓰고 싶네요.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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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붉은 못 60화 - 고목(枯木)의 숲 +10 13.03.13 1,104 33 16쪽
59 붉은 못 59화 - 고목(枯木)의 숲 +20 13.03.05 1,539 34 17쪽
58 붉은 못 58화 - 고목(枯木)의 숲 +28 13.02.28 1,508 78 14쪽
57 붉은 못 57화 - 고목(枯木)의 숲 +22 13.02.27 1,269 37 11쪽
56 붉은 못 56화 - 불신(不信)의 길 +26 13.02.01 1,544 41 10쪽
55 붉은 못 55화 - 불신(不信)의 길 +14 13.01.28 1,266 31 12쪽
54 붉은 못 54화 - 불신(不信)의 길 +30 13.01.22 1,487 44 16쪽
53 붉은 못 53화 - 불신(不信)의 길 +24 13.01.18 1,237 32 15쪽
52 붉은 못 52화 - 감시 +18 13.01.12 1,390 28 17쪽
51 붉은 못 51화 - 감시 +8 13.01.12 1,398 37 12쪽
50 붉은 못 50화 - 감시 +30 13.01.09 1,432 34 14쪽
49 붉은 못 49화 - 감시 +18 12.12.27 1,537 37 11쪽
48 붉은 못 48화 - 몽중몽(夢中夢) +22 12.12.21 1,605 44 22쪽
47 붉은 못 47화 - 몽중몽(夢中夢) +20 12.12.17 1,654 75 15쪽
46 붉은 못 46화 - 몽중몽(夢中夢) +20 12.12.15 1,636 41 12쪽
45 붉은 못 45화 - 몽중몽(夢中夢) +19 12.09.25 1,635 49 15쪽
44 붉은 못 44화 - 도과(倒戈), 들리지 않을 이야기. +11 12.09.22 1,657 40 25쪽
43 붉은 못 43화 - 도과(倒戈) +11 12.09.09 1,788 46 11쪽
42 붉은 못 42화 - 도과(倒戈) +9 12.09.07 1,519 34 9쪽
41 붉은 못 41화 - 도과(倒戈) +12 12.09.05 1,691 5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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