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46화 - 몽중몽(夢中夢)
"거절한다."
소음 속에 묻힐 듯이 낮은 목소리였으나 분명한 의사표현이었다. 청하면 될 것이라 당연히 생각하였던 자들은 순간 당혹감에 빠져들었다.
애당초 저택에 묵는 여성 손님을 대상으로 한 내용에다 정작 당사자는 거절의 답을 들려주었다. 이들은 아무도 진급시키지 않는다는 의향을 이런 식으로 내보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들을 시작하였다. 그렇다 해도 이 이야기를 쉬이 놓을 수도 없는 꾐이 분명했다. 눈앞의 기회가 아닌가.
비사를 놔두고서 자신들만의 소곤거림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사는 이 순간 이들이 말이 참으로 많은 족속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 자신은 어정쩡한 자리에 발을 붙이고 있음이니 점점 머리가 멍해져 이젠 시야가 좁아질 지경이었다.
그런 비사의 생각은 뒤로하고 이들은 순서를 정할 방법을 옥신대며 논하는 자들과 카일러스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자들로 나뉘고 있었다.
"집합해!"
수련장에서 커다란 장검을 어깨에 걸친 자가 이들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웅성거림이 물로 씻은 듯이 사라지며 순식간에 비사의 주변이 텅 비었다. 이들을 불러 모은 자는 멀리서 비사를 빤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야 매우 고까웠으나 어찌 되었건 상황을 정리해 준 셈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는 없고 비사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몰려간 곳을 바라보았다.
"비사."
누군가 자신을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덩그러니 뜬 검은 눈동자가 땅으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이 피곤함의 원흉인 카일러스였다. 자신을 향하여 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고 있었으나 그 웃는 낯짝을 보아하니 비사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시선만을 고정할 뿐이었으니 할 수 없다는 듯이 카일러스가 걸음을 떼야만 했다. 그런 비사가 역시 재미있다는 듯 그의 얼굴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리었다.
"곤란한가?"
카일러스가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을 안 들어도 귀찮은 표정이군."
그의 눈은 누가 보아도 이 상황을 즐기며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나 비사에게는 이 상황이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글쎄. 그대에게는 심심풀이. 기사단에는 작은 소란 정도일까."
무엇하러 소란을 원하는 것일까.
"저들을 모두 죽여주길 바라는 것인가."
마치 생사를 가르는 칼이 아니라면 칼이 아니라 말할법한 물음에 카일러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죽음 없는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면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살기 위해 싸우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군. 무거운 칼을 가벼이 휘두를 일이 되었군."
죽여야만 살 정도로 위험한 길을 걸어왔다는 뜻일까. 카일러스는 무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스터의 말대로라면 분명 비사는 경험이 적지 않은 '꾼'이었다. 허나 보통의 무가 인간이라면 쉬임없이 대련함이나 전쟁이 아니고서야 상대를 죽여가며 수련을 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리 넘겨 짚어 보아도 비사는 병사 출신이 아니었다. 홀로 움직이는 살상용 인간에게 제일 가까웠다.
"죽여달라 부탁하면 죽여줄 것인가."
"거절한다."
"다행이군. 저들을 죽이면 곤란해."
비사의 시선이 잠시 카일러스에게 머물다 수련장을 향하였다. 저마다의 허리춤에 칼을 차고서 무언가를 위해 그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검을 겨루나."
"누가 더 강한지를 알기 위해서."
비사는 분명 이들을 이길 것이다. 허나, 그것이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이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칼을 들고 이기고 지는 것은 이들에게 굉장히 중한 것이거든. 그게 곧 권력이자 명예이니까. 목숨도 걸고 인생도 거는 것이 검의 세계가 아닌가. 그래, 결국에는 누군가를 죽일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 놀기 위한 칼질을 배우는 것이 아니니까."
죽고 살기 위해서가 아닌 고작 강함을 상대에게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 그리 중한 것일까.
"비사, 그대는 검보다 철학이 필요한 것 같군."
"철학이 무엇인가."
비사는 이전 슬렌스의 피를 말릴 뻔하였던 것처럼 질문의 꼬리를 잇는 질문만 하고 있었다.
"내 사상을 묻는 것인가 아니면 철학의 철학성에 대해 묻는 것인가."
비사는 philosophy(철학/哲學)이라는 단어의 뜻을 묻고 있는 것이었으나 카일러스는 비사가 그런 것을 물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함부로 굴지 않길 잘한 것 같아."
열을 맞춰 서 있던 수련생들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기가 세건 신분이 높건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다. 이들 중 누가 감히 공작 저하가 부르시는데 대답도 아니 하고 빤히 쳐다만 볼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수련생 무리가 비사를 향해 걸어오자 한창 이어지던 대화도 어긋난 질문도 멈추었다. 비사는 몸을 돌려 휙 하니 저택의 안으로 향했다.
다가선 소년들은 카일러스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다가섰다.
"카일러스님. 진급에 관한 이..."
수련생의 들으나 마나 한 질문을 자르며 카일러스가 한마디를 뱉어냈다.
"열흘이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건 의문을 일축하며 기회를 노리는 자들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확인의 답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니 이스터가 어찌할 줄 모르는 불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비사는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 이스터가 사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멀뚱한 비사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옷더미를 향했다.
"의복이 불편하실까 봐 몇 벌 준비해 보았습니다."
아렌스에서 만든 옷들은 피가 묻고 여행길에 상한 탓에 비사는 로브 밑으로 이스터가 챙겨 놓는, 그나마 골라낸 밋밋한 장식의 의상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제닐의 헐렁한 셔츠가 생각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 아가씨 옷이라는 것은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여종 아이가 천 더미를 또 잔뜩 짊어지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스터가 옷가지들을 늘어놓았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여성의 부드러운 선의 옷과는 다른 빳빳한 선을 이룬 두꺼운 상의와 가죽 벨트, 발목 위까지 올라올 부츠를 탁자와 의자에 걸쳐놓고 올려놓았다.
"아..안녕하세요."
아이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비사에게 인사를 하자 비사 역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아주니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스터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사용인 중 한 명인 쥬나 양이에요."
짙은 갈색의 원피스와 하얀 앞치마, 그리고 팔에는 덧소매를 한 주근깨가 귀여운 소녀였다. 비사가 무서운 것인지 수줍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스터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채로 흘끔거리고 있었다.
"옷이 불편하신 것 같아서 뭐가 좋을까 하던 차에 쥬나 양이 이걸 추천해 주었거든요. 이거라면 맘에 드실 것 같아서요."
비사는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이색적이긴 하나 분명히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스터와 첫 만남이 아무래도 그리 고상한 자리는 아니었던지라 비사라는 인물을 이루는 형상 도에 레이스 두른 모자를 쓰고 다소곳하게 앉아 찻잔을 드는 모습은 없었다. 이스터 자신이 지나치게 단정한 면이 있었기에 사교계의 소녀들과는 다른 사상을 하고 있어, 그런 모습에는 더한 반동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수선도 쥬나양이 해주었어요."
아침에 소리를 질러대던 그 소녀도 이런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물론 이스터가 찾아온 것이니 훨씬 질이 좋고 단정한 옷이었다.
옷을 탁자에 올리는 쥬나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오래된 못이 박여 있었다. 일하는 자의 손이었다. 굳은살과 상관없는 손등의 상처들이 얼핏 보였으나 앳된 얼굴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아, 옷을 갈아입으시면서 등에 약과 붕대도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사님."
쥬나는 그저 높은 손님일 것으로 생각한 비사라는 소녀의 몸에 난 상처들을 보고 눈이 찡그려졌다. 이 앞에 앉아 상처에 약을 바르는 소녀는 분명 자신이 너무 높아 우러러도 못 볼 대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직접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할 정도의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걸까.
상처는 꽤나 순조롭게 낫는 것으로 보였기에 이스터는 한숨을 돌렸다. 화살을 빼내기 위해 짼 상처는 갈라진 틈 위로 굳은 피가 채워졌고 여기저기 보이는 얕지만 붉은 상흔이 괜히 보는 이의 미안함을 늘려 놓아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붕대를 감고 몸에 붙는 얇은 옷 위로 조금 헐렁한 셔츠와 바지, 부츠, 허리를 두 번 돌려 벨트를 매자 꽤나 깔끔한 모습이었다. 조금 긴 듯한 앞머리가 있기야 했지마는 반듯하게 뒤로 묶은 머리는 깔끔한 인상을 더해 주고 있었다.
"어울리세요."
"그렇구나."
쥬나가 무심결에 한 혼잣말에 이스터가 반응하자, 급히 입을 막고 몸을 숙였다.
"괜찮으신가요. 비사님?"
비사는 확실히 활동성을 가진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렁치렁하지도 않고, 치맛자락을 끌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옷이었다. 손목의 보호대와 겉옷까지 마저 입자 쥬나와 이스터 모두 흡족한 표정이었다.
서랍장에 다른 옷들을 개어 넣고 쥬나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새카만 머리의 사람을 만났다고 가족들에게 늘어놓을 수다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쥬나가 나가며 닫아 놓은 문이 금세 다시 휙 하고 열렸다.
"에. 남자 옷?"
한발 성큼 밀어 넣으며 다짜고짜 말부터 뱉어내는 이시스였다. 역시 그다지 할 일이 없어 이스터를 찾아 헤맨 듯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비사를 훑어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뭐, 그게 평상복이 된다면 품위는 좀 떨어지지만, 비사가 귀족도 아닌 거 같구, 기사는 아니지만 칼쟁이는 맞으니까. 나쁘진 않네. 언니도 참 지극정성이야."
이시스의 툴툴거리는 말에 이스터가 가만히 웃었다. 뭐랄까. 자신 역시 무언가 의무감 같은 것을 갖는 그런 기분이었다.
'묘하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분이야.'
달리 위험할 때 빼고는 무언가 요구하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한 탓일까. 그저 귀찮을 것 같으면 조용히 사라질 뿐이었다.
'단절된 듯한, 단절시키는 듯한. 마치...'
생각나는 것이 있었지만,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한 이스터였다.
"비사."
잘 개어놓은 옷을 뒤척거리며 구경을 하던 이시스가 비사를 부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비사는 남매가 쌍으로 꿍꿍이 많은 웃음을 지어대는 것이 꼭 왼쪽 오른쪽 번갈아 찍어대는 소 발자국 마냥 닮아 보였다. 이러니 물보다 피가 짙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후훗."
사람을 불러놓고서 말은 안 하고 기분 나쁘게 웃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비사의 어깨를 툭툭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이시스는 비사를 딱히 응원할 필요도 없다 여겼다.
'승리는 보나 마나 이 나의 것. 두고 보자 이 주근깨 꾸불이 여자. 비사의 괴물 같은 무서움을 맛보라구.'
이미 손에 거머쥔 것 같은 승리의 순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이어진 비사의 대답에 그 순간이 까마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지 못한 난관이 이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싫다."
"아 왜 싫어? 싸워 줘. 비사. 응? 그 꾸불이 여자랑 싸워 줘! 응? 응?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냥 가서 휙휙 몇 번 해주기만 하면 되잖아아아."
이시스는 계속해서 비사를 좨쳤으나 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돼. 이러면 안 되는데. 비사가 안 싸워주면 이기고 지고도 없잖아!"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알고 싶지도 않은 비사의 시큰둥한 얼굴에 이스터에게 혼이 나며 이끌려 방을 나갈 때까지 애원 아닌 애원을 하던 이시스였다.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공지를 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약간의 사고와 노트북 파손, 조금 힘들어진 집안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며칠 뒤에 또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시간 있을 시에는 일단 진행을 해보자하여 글을 올립니다. 당분간은 성실한 연재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연중이 아닙니다. ㅎㅎ
처음도 어려웠지만 역시 글을 올리기란 참 어렵군요. 자신감도 줄어들기도 하고 겁도 납니다만, 질러야 인생이겠지요. <--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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