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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최근연재일 :
2014.12.21 16:37
연재수 :
89 회
조회수 :
148,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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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8
글자수 :
539,631

작성
13.03.05 20:44
조회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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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글자
17쪽

붉은 못 59화 - 고목(枯木)의 숲

DUMMY

다다른 것은 성에서는 조금 떨어진, 성 안의 큰 마을에 비하기엔 초라할 정도로 낙후된 모습이었다. 낡은 농기구와 흠집이 가득한 거대한 솥들. 썩 잘 지었다 할만한 것은 아닌 작은 공간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키가 큰 청년이 다가와 레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잘한다. 잘해. 내가 저쪽 숲에는 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어머니 걱정하신다. 가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그는 자주 겪는 일이라는 듯이 묻지도 않고 작은 두 꼬마 악동들을 짐짓 엄한 척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로 흘겨 보였다. 하지만 그 눈빛에 자상함만이 가득했다.

"씨. 형은! 형도 자주 가면서! 왜! 좀 놀다 와도 됐잖아!"

"나랑 너랑 같으냐. 이 녀석이 큰소리치기는."

레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툴툴거렸다. 나무에 매달려있던 터라 껍질이 벗겨져 헤진 손을 보며 아렌은 한숨을 쉬었지만 달래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데려다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닐세. 애들을 발견한 건 이 소녀거든."

셰넌은 옆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숨은 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모습으로 서 있는 소녀였다.


"아렌."

셰넌이 점잖게 그를 부르자 그는 미세한 요동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아.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가 무색하도록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아렌의 표정은 비사에게 일상이었다.

"앙마야."

베리가 아렌의 다리를 부여잡고 뒤에 매달려서는 눈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베리. 그런 말 하지 마."

"부-."

비사는 어딜 가나 같은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웃으며 아이를 달래기는 하면서도 아렌 역시, 저런 눈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렸다.

"이름이 무엇이지?"

셰넌이 묻는 것을 잊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소녀가 셰넌을 향해 고개만 살짝 돌리고서는 '비사'라고 툭 하고 내뱉었다.


셰넌과 덴은 어디론가 향했고, 아렌은 베리를 어깨에 올리고는 비사에게 말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편하게 말해도 되겠지."

안에 입은 옷이야 고급스러웠으나 로브는 이전의 것이기에 그는 귀족이냐고는 물어오지 않았다.

"상관없다."

그녀의 투명하지만 저음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끊어져 나왔다. 셰넌을 대하는 것도 그러하고 아렌은 그런 비사가 참으로 건방진 말버릇이라 생각했으나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홀로 숲으로 들어가는 아이라는 말에 조금 안쓰러운 시선이 된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비사의 눈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신기한 모양이었다.


"형, 누나 나 때문에 다쳤어."

"뭐? 어디, 얼마나."

"여기."

레리가 비사의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렌은 동생 놈이 혹시나 사고를 쳤는가 당황하였으나 상처를 확인하고서 안심하는 듯했다.

"아이고, 너 뭘 하고 다니길래 남의 집 귀한 딸 손에 상처를 입히고 그래."

그래도 제법 어른스럽게 서로 무안하지 않도록 너스레를 떨었다. 듣고 있자니 비사는 괜히 긁힌 곳이 가려워졌다.

"형, 집에 들렀다 가라고 하면 안 돼?"

"응? 집? 뭐... 괜찮겠지. 비사, 들렀다 가지그래. 내줄 건 차 정도밖에 없지만 말이야."

"누나, 엄마한테 약도 발라 달라고 할게요. 우리 메리도 보여줄게요. 메리는요, 염소에요. 근데 우리 가족이에요."

레리는 조잘거리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비사의 손을 끌어당겼다. 약하게 잡힌 손일수록 뿌리칠 수가 없다. 그것을 거절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낯선 이들을 따라 그곳에 들어가는 이런 묘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제닐이 보았다면 비사는 날이 새도록 그녀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굳이 비사의 입장에서 변명을 늘어놓자 하면 이런 분위기에서 거절을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제닐과 세이였다.


집이 보이자 먼저 레리가 폴짝 뛰어들어갔다.

"엄마! 다녀왔어요! 손님도 왔어요!"

문을 벌컥 열고는 큰 소리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자 마르고 햇볕에 탔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옅은 주름이 있는 그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따라나왔다. 그 손에 매달려 레리가 웃으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사의 발이 멈추자 아렌이 고개를 돌리더니 물어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옛날 일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렌이 베리를 옆에 내려놓고 여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설명을 하는 눈치였다. 레리가 궁금한 듯이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웃으며 비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앙마! 들어 오지 마."

베리가 입을 부- 소리와 함께 내밀었다. 아렌이 미간을 좁히며 화가 난 척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손으로 자그마한 몸뚱이를 낚아채듯 안아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다르랑.

문 앞에 선 순간, 비사에게만 들리는 적인의 울림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으로 무언가 서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낯선 어둠이 단란한 집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귀를 다스리는 적인의 영향으로 어설프게나마 비사의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파편인가.'

사람의 골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바스락거리는 검은 살점이 떨어져 내릴 것 같이 그것은 계속 턱뼈를 삐걱거리고 있었지만,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비사는 문득 어둠 속에서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들을 수 없다."

비사는 알 수 없는 그것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동자도 없는 빈 눈 틈이 안으로 들어서는 비사의 발걸음을 쫓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두꺼운 천으로 문을 대신한 많은 집과는 달리 반듯한데다 무늬까지 새겨 넣은 나무문이 달려 있었다. 안에서 본 그들의 집은 돌 사이로 흙을 굳혀 생각보다 단단한 벽이었고 두꺼운 천과 나무로 방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제스미라고 해요. 실례지만 아가씨 나이가 몇 살이지요?"

제스미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는 비사를 둥근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열...일곱."

"한참 더 어릴 줄 알았더니."

아렌이 깜짝 놀랐다. 얼결에 '숙녀'를 집으로 데려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제스미는 것 보라는 듯이 아렌에게 눈짓을 했다.


"아가씨는 고운 손을 해야 하는데..."

더 거친 손으로 제스미가 비사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제스미가 짙은 갈색의 도약을 가져와 비사의 손에 발라주었다. 그리고는 노을빛의 부드러운 천을 꺼내 손등을 묶어주었다.

"엄마 건데."

베리가 그 손등을 보며 인상을 쓰며 말하자, 제스미가 베리를 향해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척 보기에도 그들의 살림에 비하면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부담이 목구멍을 조여대고 있었으나 이것을 거절한다면 가난이 이들의 자존심을 긁어 버릴지도 몰랐다. 비사는 이것을 받은 것이 아니라 빌린 것으로 치기로 하였다.


"누나 이쪽에 와 봐요. 우리 메리 보여 줄게요."

레리가 나무판자로 된 조악한 작은 문을 열었다. 비사가 다가서자 파삭파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숙여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푸라기 위로 염소 한 마리가 반대편 구석에 몸을 밀어대고 있었다. 겁먹은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니 누가 보면 남들 눈 피해 발길질이라도 했으려나 생각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왜 그래. 이리 와."

레리가 재차 불렀으나 올 리가 없었다. 아렌이 신경이 쓰였는지 다가와 레리의 옆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메리. 괜찮아. 이리 나와 봐."

메리가 아주 천천히 일어나더니 다가왔다. 비사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훈련받은 말도 아니었고 겁을 한 번 먹었는데도 다가오다니 어지간히도 제 주인을 믿는 모양이었다. 아렌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레리가 그 옆에서 등에 팔을 두르더니 머리와 턱 언저리를 마구 문대었다.

"누나도 만져 봐요. 우리 메리는 진짜 똑똑해요. 천재에요."

비사가 물러선 채로 가만히 있자 레리가 손을 잡아끌었다. 움찔거리는 흰색 털 위로 하얀 손을 갖다 대었다. 잘 빗겨진 털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살짝 손을 움직여 보았으나 메리는 더 피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비사를 향해 콧김을 풍하고 내뱉었다. 긴장하긴 매한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우리 메리는요, 도망 올 때 여기 오다가 한 번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형이 가니까 살던 집에 다시 가 있었어요. 몇 날 며칠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단하죠."

레리가 신이 나게 이야기를 해대었다. 순간이지만 집안의 분위기가 잠시 멈춘 듯했다.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원래는 작은 나무 세공 가게를 운영했었지만 살던 마을 자체가 없어졌다고 했다. 이들의 아버지는 장식품들의 중간 상인이 되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중이라 몇 달에나 한번 겨우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아렌은 자경단의 일원이며 제스미와 땅을 일구거나 하며 생활하는 모양이었다. 레리와 베리만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때때로 모험을 나선다고 했다. 모험이라는 대목에서 아렌이 한숨을 쉬었다.

차와 함께 식은 과자 두 토막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감사합니다."

기준을 모르겠는 비사의 정중한 인사가 아렌에게는 의외로이 다가왔다.

"차린 게 너무 없어서 미안하네. 우리 꼬맹이들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제스미가 눈가의 주름을 길게 늘이며 말했다. 차는 제스미와 아렌 앞에도 놓였지만, 과자 접시는 비사에게 뿐이었다. 베리가 인상을 쓰며 옹알거렸다.

"나두 과자..."

레리가 베리에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 엄마 창피해한단 말이야."

속삭이는 소리가 너무 컸기에 제스미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자신 앞으로 내어진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는 비사였으나 그것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로는 남기는 것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었다. 뜨거운 찻잔을 손에 들었다.



끼이익-

잠시 밖이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언질도 없이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반듯한 예복을 입은 하인이 연 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이 마을의 거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한 여인이었다. 제스미도 아렌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비사는 한 눈에도 방금 들어선 이가 분명 한 집안 하는 귀족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일 같이 누군가 손질해 주었을 법한 연분홍의 금발을 길게 늘어뜨렸고, 하얀 털이 안에 박혀 있는 외투 사이로 레이스가 달린 치마와 흙이 묻지 않은 꽃 수가 놓인 고급스러운 구두가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이들은 정중하고도 어색한 분위기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쪽에서 바라보던 비사와 눈이 마주친 아름다운 여인은 하던 말을 멈추고서 곱다란 그 눈을 떼지 못하였다. 어느샌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 입술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에스윈님?"

아렌이 에스윈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에스윈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비사를 가리켰다.


"앙마야."

베리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순간 에스윈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잠깐 들른 아이입니다."

아렌이 급히 설명을 이었다.

"손님께서 와 계셨던 거군요. 제가 실례를,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린듯한 에스윈이 웃어 보이려 애쓰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심장 소리가 비명처럼 비사에게 들려왔다. 그녀는 비사와 그 이상 눈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메리보다도 조그마한 심장을 갖고 있으려는지 겁이 많거나, 기가 약하거나 라고 비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낯선 이라 놀라셨나 보군요. 앉으세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제스미가 말을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사는 슬쩍 접시를 아이들 앞으로 밀었다. 제스미가 아직 식지 않은 물을 다시 대피는 사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와작와작.

이 긴장감을 무시라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스미는 무심결에 비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과자를 먹고 있지 않았다. 레리와 베리가 사이 좋게 비사의 의자 뒤에 쪼그려 앉아 신 나게 입안 가득 구겨 넣은 것을 씹어대고 있었다. 조금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그러들었다.


찻잔이 에스윈 앞으로 놓였다.

"번번이 이렇게 찾아와주시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희가 죄송스러워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에스윈의 고운 손이 주름지고 상처 많은 제스미의 손을 끌어다 살포시 양손으로 쥐었다.

"아니에요. 제가 무엇이라도 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그런 생각하지 마셔요."

분명 웃는 얼굴이지만 제스미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비사는 그런 제스미보다도 어느샌가 문 앞에 서 있는 저편의 존재를 지켜 보고 있었다.

"아가씨. 다 내려놓았습니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아주머니, 필요한 것이 있거든 꼭 어려워 마시고 절 찾아주세요. 아셨지요."

"가져다주시는 것만도 과분할 정도인데요. 감사합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던 에스윈은 아이들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자신을 기다리는 마차에 올랐다. 손도 대지 않은 소박한 찻잔만이 향기 품은 빈자리에 남아 있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손님이 오는 바람에, 비사양도 돌아가야지요?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비사, 데려다 줄게. 묵는 곳이 어디야?"

제스미의 말에 비사가 일어서자, 아렌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가겠다."

"안돼. 여기서 성까지 거리도 있고 성 안이라도 해가 지면 위험하니까. 그리고 해가 떴을 때도 혼자 숲에 가선 안 돼. 너희도 마찬가지야."

표정이 다양한 듯한 아렌이었지만, 이 데려다 주겠다는 부분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인지 진지한 눈빛이었다.

"데려다 주거라. 들어가는 것까지 기다려서 보는 것 잊지 말고. 아가씨 절대로, 절대로 어두울 때 혼자 나다니지 말고. 여자아이니까요. 알았지요?"

제스미의 눈빛에서는 어딘가 간곡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색은 뒤로하고, 오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약하디약한 존재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문밖의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드는 제스미에게 비사는 고개를 숙여보았다. 문 옆으로 큼지막한 나무 상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누나 또 놀러 와."

"베!"

베리는 제스미의 치마 뒤에 숨어 인상을 쓰며 혀를 내밀었다.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았을 때에 근처의 여인들이 제스미를 향해 다가가 말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스미, 에스윈 아가씨께서 다녀가셨어?"

"매번, 우리만 고마워서 어째. 아이들 것이라도 좀 남겨 둘까."

"아니야. 전부 가져가."

비사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제스미가 홀로 남아 상자가 놓여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정이 없는 이는 없다 하지 않던가. 이들도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였다. 깨끗이 닦아 둔 선반 위에는 어설픈 글씨로 메리라고 적힌 나무 인형 옆으로 손 떼 묻은 인형이 네 개가 있었으나 이들은 한 사람분의 이야기는 아무도 꺼내지 아니하였다.


어둑했지만 귀가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 사람은 아니지? 무덤숲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외지인 정도니까. 정말로 거긴 안 가는 게 좋아. 위험한 곳이거든."

"그것이 이름인가."

"뭐. 아 무덤숲? 전쟁 때 워낙 많은 사람을 묻었으니까. 묘비도 없는 게 많고, 많이 불타 죽기도 했지. 셰넌님의 가족도 그곳에서 돌아가셨으니까. 워낙 사람이 안 가다 보니 짐승들도 늘고, 토벌해도 결국 또 사람들도 숨어들지. ...하여튼 정말 흉흉하니까."

설명을 늘어놓던 아렌의 목소리가 순간 굳는 듯했지만, 아무런 내색 없이 다시 웃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묵는 곳이 어디라고?"

"케인레스가."

"거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구나. 나도 거기엔 아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말이야."

그란성의 성문까지 한참을 걷고, 다시 케인레스가까지는 역시 거리가 있었다. 아렌은 여자인 비사의 걸음 속도를 생각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고, 비사 역시 아렌의 걸음을 생각하며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결국, 느려진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서야 그들은 기사단의 입구에 다다랐다.

"들어가.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비사는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아렌을 올려다보았다.

"잘 가라던가. 데려다 줘서 고맙다던가. 안녕이라던가. 인사라도 해주는 게 어때. 자고로 인간관계는 이 인사에서 정해지는 거야."

비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말을 동강동강 다 잘라먹는가 싶으면 그러다가도 뜬금없이 이런 행동을 하니 아렌은 영 이상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제법 익숙하게 이곳의 말을 하게 되었음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선택지는 결국 말주변머리에 달린 것이라 비사는 아무래도 평생 쉬워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렵다.'


작가의말

역시, 걱정이 늘어도 질러야 인생. 이라는 생각으로 지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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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0

  • 작성자
    Lv.48 sublimat..
    작성일
    13.03.05 21:26
    No. 1

    처음부터 정독만 네번째... 분량이 많은데!!! 왜 다 읽을 때 마다 아쉬운건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5 21:47
    No. 2

    헙!!! 감사합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ㅎㅎ 매번 감사드립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암살의천사
    작성일
    13.03.05 21:41
    No. 3

    양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에서 오타가 있네요 `읽` 힘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6 20:52
    No. 4

    읽어버렸... 최근 오타가 별로 없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ㅎㅎ 양이라고 적은 것도 오타였습니다. 메리는 염소입니다. ㅠㅠ 죄송합니다.
    몇 번을 읽으면서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으하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긴급 수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ㅎㅎ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모노모노
    작성일
    13.03.05 22:40
    No. 5

    최근 연재속도가 빨라져서 기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5 23:50
    No. 6

    연재주기가 좋아야 할텐데 ㅠㅠ 이게 참 쉽지가 않아 죄송스럽습니다.
    주기가 오락가락하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지옥
    작성일
    13.03.05 23:49
    No. 7

    재밌게 잘 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5 23:50
    No. 8

    매번 감사드립니다!! 파이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8 판돌이02
    작성일
    13.03.06 02:36
    No. 9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6 20:29
    No. 10

    ^^ 저도 댓글 감사드립니다. 파이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DragonLo..
    작성일
    13.03.06 20:41
    No. 11

    메리는 양인건가요 염소인건가요?! 메리 처음 소개할때는 양이랬는데 메리보러갔을때는 염소라고..애들이 잘못알고있는건가..ㅎ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6 20:53
    No. 12

    안녕하세요! 으아, 제가 미쳤나 봅니다. 염소입니다! 애들이 몰라서 그랬어요라고.. 뻥을 치고 싶은 이 감정이란!! ㅠㅠ 정말로 정신이 없나 봅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ㅠㅠ 파...이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sfartar
    작성일
    13.03.06 21:27
    No. 13

    호오 건필하세요
    어찌보면 이제야 제대로 인간관계를 배우려나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7 00:21
    No. 14

    ^^ 안녕하세요! 딱 어느 한 시점이라기 보다, 매 순간 배워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3 달여우
    작성일
    13.03.07 10:52
    No. 15

    느긋한 장면인데 이상하게 긴장감이 도네요.
    비사 말투 때문인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07 18:53
    No. 16

    움, 긴장감을 갖게 될 순간을 위한 긴장감일까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DragonLo..
    작성일
    13.03.11 16:17
    No. 17

    저는 이제 내일 군대가야해서 앞으로 2년간 댓글을 못달아드려요 이제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11 17:04
    No. 18

    ㅠㅜ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선임 후임 모두좋은 사람만 만나시길 기원 합니다 나중에라도 찾아주실지는 모르지만 저도 열심히 쓰고 있을게요 파이팅 입니다
    슬프지만 다음으로기약하며 몸 건강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신수겸
    작성일
    13.03.13 14:40
    No. 19

    아... 케릭터도 좋고.. 문체도 좋고.. 스토리도 좋고.. 다 좋은데 뒤로 올 수록 늘어지는감이 있네요 ㅠㅠ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3.13 16:54
    No. 20

    ㅠㅠ 어흑. 그리 느끼셨군요. 뭔가 길게 댓글을 달까 하다가 다음회 후기쪽에 정리를 해서 적어볼가 하는 마음에 짧게 ㅎㅎ
    지금은 그저 너그럽게 보아주십사 ㅠㅠ 하고 말씀을 드려 봅니다.
    읽어주시고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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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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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붉은 못 89화 - 사람 꽃 +8 14.12.21 444 33 12쪽
88 붉은 못 88화 - 사람 꽃 +6 14.12.19 439 37 20쪽
87 붉은 못 87화 - 사람 꽃 +12 14.12.18 569 37 14쪽
86 붉은 못 86화 - 사람 꽃 +14 14.12.17 478 35 15쪽
85 붉은 못 85화 - 사람 꽃 +20 14.12.16 330 31 19쪽
84 붉은 못 84화 - 사람 꽃 +8 14.12.14 593 37 17쪽
83 붉은 못 83화 - 사람 꽃 +8 14.12.12 489 38 13쪽
82 붉은 못 82화 - 장례 연회 +8 14.12.10 600 36 13쪽
81 붉은 못 81화 - 장례 연회 +6 14.12.08 345 30 11쪽
80 붉은 못 80화 - 장례 연회 +6 14.12.07 394 26 14쪽
79 붉은 못 79화 - 장례 연회 +6 14.12.05 520 35 16쪽
78 붉은 못 78화 - 장례 연회, 외전 그들의 연담(緣談) +4 14.12.03 440 28 25쪽
77 붉은 못 77화 - 이륜(二輪) +6 14.12.01 626 36 16쪽
76 붉은 못 76화 - 이륜(二輪) +8 14.11.28 669 37 17쪽
75 붉은 못 75화 - 이륜(二輪) +4 14.11.25 531 27 15쪽
74 붉은 못 74화 - 이륜(二輪) +10 14.11.22 618 34 21쪽
73 붉은 못 73화 - 이륜(二輪) +8 14.11.19 515 38 12쪽
72 붉은 못 72화 - 물음 +8 14.11.16 599 42 15쪽
71 붉은 못 71화 - 물음 +10 14.11.13 559 38 14쪽
70 붉은 못 70화 - 물음 +12 14.11.10 578 45 13쪽
69 붉은 못 69화 - 물음 +8 14.11.07 681 38 14쪽
68 붉은 못 68화 - 물음 +8 14.11.02 672 43 19쪽
67 붉은 못 67화 - 물음 +4 14.10.31 669 28 11쪽
66 붉은 못 66화 - 수라장 +2 14.10.29 722 36 17쪽
65 붉은 못 65화 - 수라장 +8 14.10.25 495 34 16쪽
64 붉은 못 64화 - 수라장 +6 14.10.21 719 38 12쪽
63 붉은 못 63화 - 수라장 +6 14.10.18 675 32 18쪽
62 붉은 못 62화 - 수라장 +20 14.10.15 899 37 13쪽
61 붉은 못 61화 - 수라장 +24 13.03.15 1,534 48 17쪽
60 붉은 못 60화 - 고목(枯木)의 숲 +10 13.03.13 1,104 33 16쪽
» 붉은 못 59화 - 고목(枯木)의 숲 +20 13.03.05 1,540 34 17쪽
58 붉은 못 58화 - 고목(枯木)의 숲 +28 13.02.28 1,508 78 14쪽
57 붉은 못 57화 - 고목(枯木)의 숲 +22 13.02.27 1,269 37 11쪽
56 붉은 못 56화 - 불신(不信)의 길 +26 13.02.01 1,545 41 10쪽
55 붉은 못 55화 - 불신(不信)의 길 +14 13.01.28 1,266 31 12쪽
54 붉은 못 54화 - 불신(不信)의 길 +30 13.01.22 1,487 44 16쪽
53 붉은 못 53화 - 불신(不信)의 길 +24 13.01.18 1,237 32 15쪽
52 붉은 못 52화 - 감시 +18 13.01.12 1,390 28 17쪽
51 붉은 못 51화 - 감시 +8 13.01.12 1,398 37 12쪽
50 붉은 못 50화 - 감시 +30 13.01.09 1,432 34 14쪽
49 붉은 못 49화 - 감시 +18 12.12.27 1,537 37 11쪽
48 붉은 못 48화 - 몽중몽(夢中夢) +22 12.12.21 1,606 44 22쪽
47 붉은 못 47화 - 몽중몽(夢中夢) +20 12.12.17 1,654 75 15쪽
46 붉은 못 46화 - 몽중몽(夢中夢) +20 12.12.15 1,636 41 12쪽
45 붉은 못 45화 - 몽중몽(夢中夢) +19 12.09.25 1,635 49 15쪽
44 붉은 못 44화 - 도과(倒戈), 들리지 않을 이야기. +11 12.09.22 1,657 40 25쪽
43 붉은 못 43화 - 도과(倒戈) +11 12.09.09 1,788 46 11쪽
42 붉은 못 42화 - 도과(倒戈) +9 12.09.07 1,519 34 9쪽
41 붉은 못 41화 - 도과(倒戈) +12 12.09.05 1,691 5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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