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56화 - 불신(不信)의 길
"시험이라 하니 말이 너무 거창하구나. 어떻게 나올지 상황을 던져 주었을 뿐이지."
카일러스의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했다.
"궁금하셨던 것이 있으셨나 보군요."
그리고 이스터 역시 낮은 언성으로 침착히 말을 이었다.
탁. 탁. 종이뭉치로 탁자를 치고 나서 옆으로 물건을 밀어냈다. 의자를 빼내는 것인지 나무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뒤이어졌다. 비사는 어둠 속 한점의 허공을 응시하며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카일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바쁘다 하여도 물러서지 않을 셈이로군."
"네. 그럴 생각입니다. 용인하여 주실 것이지요. 오라버니."
어느 정도 짐작한 바가 있었는지 카일러스가 대화를 받을 모양이었다.
"문제 삼을 생각은 없으나 개인적으로 거슬린 것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야. 왜 너희가 쫓기었는지에 얼버무린 네 대답을 끝으로 더는 물어오지 않았다는 점이 말이지."
"일전 사람을 심기 위하여 도움을 준 것을 빌미로 안으로 파고들자 했던 자의 일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사님께서 연기를 하고 계시다 생각지 않습니다."
"내 추측도 정리된 참이다. 나도 그 부분은 고려치 않았다. 저리 수상하게 굴어서야 없던 의심도 생길 판이니까. 이스터. 너는 비사가 왜 여기까지 동행을 하였다 생각하느냐."
"위험스런 상황을 짐작하니 별다른 대책이 없던 저희를 중도에 내버릴 수 없으셨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단순히 말하자면 너희가 약자 이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말이야. 이 사건이 벌어진 경위나 뒷이야기에는 관심조차 없어. 위험에 처한 어린 소녀를 구했다. 말만 보자면 참으로 정의로운 이야기야. 헌데 그 이후로 아무런 정황도 파악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쫓아오는 누군가를 죽여가며 동행한다는 것이 쉬운 이야기일까. 나는 그래서 어쩌면 비사가 위험한 인물이 아닐까 고려했었다."
"확실히 저희 입장만을 보신 것은 사실이지만 무언가 느끼신 것이 있어 그리하신 것이 아닐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너희를 모른척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이것으로 추측하자면 사람 몇 목숨이 날라나는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서 빈번히 사람이 죽어나갔다. 혹은 죽여왔다. 그리고 너희를 외면하지 못할 만큼 비슷한 상황을 겪었으리라 본다. 상황을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시스 즈음의 어린 나이었겠지."
"저희의 상황에... 동화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스터의 목소리에 조금 흔들림이 있었다.
"쫓기는 것이 너희가 아닌 자신이 되어버린 셈이지. 그러니 앞뒤 다 잘라내고서 쫓기는 아이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죄책감을 포함하여 양측의 사정까지 그리 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말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만일 비사가 그저 나서는 성격이었다면, 수련생들이 대련 요청에 즉각 응했을 것이다. 거절한 것은 그들이 판단하기에 자신이 죽일 수도 있는 약자이기 때문이었을 거야. 굳이 싸울 필요가 없던 것도 사실이고 말이지. 하지만 장난스레 건네진 위협의 몇 마디에 그 모든 생각을 뒤로하고서 먼저 치고 들어왔다. 약자였던 기억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작 말 몇 마디로 순식간에 돌아가 버리는 것이지. 경계선이 확실치가 않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사는 겁쟁이야.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 거지. 상대도, 그리고 자신도."
"그렇다면 역시 비사님은 대단한 분이세요. 두려웠던 기억이 있음에도 다시 그 상황으로 자신을 내몬 것이지 않습니까. 오라버니 말씀처럼 과거가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경험하지 않으면 남의 고생을 모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이전의 가문에서 의붓형제들에게 내몰려 쫓겨나는 상황을 겪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귀족의 권위만을 품고 자라왔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라버니가 저를 인정해주시지도 않았겠지요."
"내가 너를 눈여겨본 것은 네가 고생을 해서가 아니야. 고통으로 주변을 받아들이는 자와 경험으로 삼는 자는 분명히 그릇이 달라."
"비사님은 결국 저희를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지요."
"비사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너희를 내게 되돌려 준 것은 사실이다. 잊지 않았으니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집 안에 들인 이가 피 냄새 즐기는 이가 아닐까 파악하려 한 것뿐이니까."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두터운 소리인 것을 보니 카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선 모양이었다. 덜컹거리며 창이 열리었는지 바깥 소음이 흘러들어왔다.
"결국, 제대로 된 실력 구경은 못하였지만 말이다."
"적당히 봐주라 덧붙이신 것은 오라버니시잖아요."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강함을 주어야 더 분발할 거라고 생각이 바뀌었거든. 나의 흥밋거리보다 중한 것은 그쪽이니까."
잠시 말소리가 다시 끊어졌다.
몇 걸음 나아가는 작은 굽 소리의 다각거림이 멈추었다. 구령에 맞춘 함성만이 멀찍이서 울려왔다. 아마도 잠시 입을 닫고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예전, 정말로 머리와 눈의 색만으로 주변 모두가 태어난 아이를 철저히 고립시킬 수 있느냐고 오라버니께 여쭈었지요. 기억하시는가요."
"제법 오래전 이야기구나."
카일러스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답을 주시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라버니. 레이보다도 짙은 이색을 가진 비사님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도 궁금하셨던 거지요?"
"예나 지금이나 짚는 것이 많구나. 이스터."
"제게 꽃으로 끝나는 여자는 되지 말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불길함을 맹신하는 자들이야 별수 없지만, 색의 의미만을 입에 올리던 자들이 그 주인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궁금해하니 조금은 평범한 타인으로 섞여든 셈이지. 힘 있는 자가 나서서 검은 태양도 귀하고 아름답다 말하면 그리 믿는 자들도 느는 법이다. 반대로 저주받았다 말하면 붉은 태양조차 불길하게 보이고 말겠지."
"비사님은 좋은 분이시니 누군가는 결국 알아주었을 것이에요. 시간이야 걸릴 것이나 레이를 알아주는 이도 생겨나겠지요. 이시스도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요."
"나 역시 비사가 제법 마음에 들어. 검을 그만큼 쓴다는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지. 거기다 신분, 돈, 주변의 소문. 뭐든 상관 않으니 사심없는 본론을 바로 물어 오거든. 몇 가지 문제만 제한다면 나름 사고방식이 확고한 편이야. 레이너스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고 말이야."
"비사님의 예법에 어긋난 언동을 그냥 받아주셨을 때부터 좋게 봐주시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왠지, 어딘가 레이와 닮았지요. 그러니 더 떠보시는 게 아닐까 하고요."
"뒤늦었다 해도 돌려놓고 싶다. 그 일들이 자리 잡기 전에 대처했어야 했던 것들을 말이다."
자신들의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이야기를 생략하니 대화를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길지 않은 침묵 후에 이스터는 방을 나섰고 창이 닫히었다. 다시 종잇장을 넘기고 펜 끝이 긁어나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막상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생각이 붕 떠버린 비사였다. 상황까지 던져주며 행동을 수집한 데다 봐온 것에 접점이 있으니 카일러스는 꽤나 근접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왠지 아귀가 들어맞는 것에 수긍하고 말았다.
카일러스의 생각처럼 자신은 구해지고 싶은 자의 열망으로 손을 뻗은 셈이었다. 선의도, 정의도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듯도 섭한 듯도 하였다.
겁쟁이. 과연 그러했다. 달리 더 설명할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 번에 뇌 속을 쓸어나갔는지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졌다.
카일러스는 분명 얄궂은 구석이 있었다. 허나 저 정도의 이기심 정도야 귀찮은 것이 문제이긴 해도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럼 애당초 자신이 느꼈던 거부감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계산적인, 그리고 냉담한 구석이 있으며 남 위에 서는 자. 목적을 위해서라면 뻔뻔한 면모를 스스로 용납하는 자. 아민과 카일러스. 두 사람 다 첫인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 아랫것들에게는 제법 상냥한 구석마저 닮아 있었다. 하여도 같은 배에서 난다 해도 다른 것이 사람이지 않은가.
이들 사이에서도 좁혀지지 않을 가장 큰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가지려고 분투(奮鬪)하였고, 하나는 지키기 위해 싸우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 그리 생각하니 차이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민 쪽이 훨씬 직감적으로 움직였고, 카일러스는 그에 비하면 치밀한 편이었다.
자신이 파고든 이 틈새의 길은 어쩌면 적명가의 가장 깊은 곳의 사당으로 향하는 자를 막고자 하였던 방향진의 뜻과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미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였다. 아름답다 여기면 그리 보이고, 추하다 여기면 또 그리도 보이는 것이었다. 딱히 대놓고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콩가루 바닥바닥 떨어져 보였던 케인레스가가 청황의 황가에 비하면 그나마 덜 갈린 콩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룩주룩 이어지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아민이 아진의 자리에서 태어났더라면 카일러스와 더 닮았을지도 모른다. 인의(人意)로 뒤엎을 수도 없는 일을 괜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인제와 말하기도 뭣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사람이 전과는 다름을 새삼 깨닫고만 비사였다. 세상을 구성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이 사람이니,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 것이겠지.
아, 분명 다른 세상에 와 있음이로다. 비로소 그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 작가의말
사람 관계는 돌고 돌고. 상황도 돌고 돌고. 이겠지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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