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58화 - 고목(枯木)의 숲
'역시, 기분 나쁜 숲이야.'
허름한 옷을 입고 꽃바구니를 가슴에 안은 여인 덴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솟구쳐 올랐다. 앞에서 가는 사내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그는 무심하게 걷고 있었다. 섬뜩하게 시리고 습한 안개가 바람을 따라 뺨을 스쳤다. 곳곳에 묻히지 않은 뼈들이 굴러다니는 꺼림칙한 숲이었다. 하지만 이끼 가득한 바닥을 내려다보며 아슬아슬 걷는 이 여인은 차마 불만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향하는 곳은 자신의 앞을 걷는 셰넌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무덤이었으니 말이다.
묵묵히 걷기만 하는 셰넌은 이 습한 숲길을 걸으며 코끝으로 나무 타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어느 날의 그는 숲을 달리고 있었다. 정작 예측했던 것처럼 성에 다다른 공격은 그리 대단찮은 것이었건만 왜 숲이 타는 것인가.
다 끝나버린 지금도 매캐한 연기와 함께 눈 시리게 타오르고 있었다.
성만 지켜내면 꼭 데리러 가겠다 약속했었다고, 달려가던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란성에까지 방어선이 밀릴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성에 남겠다던 이들이 늦게 출발한 탓에 적은 수의 사람만이 숲을 향했다. 그들은 결국 이곳에서 맞닥뜨린 국적이 어딘지도 모를 도적단에게 목숨을 잃었다.
셰넌이 발을 멈추었을 때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그것은 도적질을 위한 살육이 아닌 재미삼아 조각조각 잘라 놓은 칼장난이었다. 이 무리에 속하지 않았길. 그의 간절한 애원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속절없는 처절함으로 그에게 돌아왔다.
아내와 그 품의 아이까지 한 번에 찔러 베어 나간 칼의 흔적. 팔다리가 잘려나간 첫째, 그 어림에도 어머니와 동생을 보살피겠다던 듬직한 몸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엄히 키운다고 그리 잘 품지도 않았던 몸이 너무도 작았다. 끌어안으면 부서질 것처럼 작아져 있었다.
끝내 사라진 머리를 찾지 못했기에 그는 그곳에 이들을 묻었다. 식은 몸의 마중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기나긴 산적토벌도 일단락이 났다. 사람들은 이제 이 숲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쳇더미가 쌓여 있던 고통이 가득한 죽음의 숲이었고, 사내 자신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힘이 잔뜩 들어가 굽혀진 어깨를 한 채 뒤처질까 덴은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미끄러지지 않게 힘을 준 발가락이 저려 왔다. 하지만 이 숲에 홀로 남겨진다면 그녀는 저 늑대들보다도 시끄럽게 울어댈지 몰랐다.
평 귀족인 셰넌이지만 한 때는 이 그란성의 신뢰 높은 기사였으며, 지금은 성 기사단에서 물러났으나 일대의 자경단 간부로서 인맥을 가진 그였다. 갑옷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덴의 집이었기에 셰넌에게 조금 잘 보여 보려 한 것이 속내였다. 그런 중에 얼결에 동행하겠다고 말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깊은 곳일 줄 알았냐 말이지.'
같은 전쟁을 겪었으나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그란에 온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덴에게 있어서 이곳에 잠든 사람들은 예전에 여기서 누가 죽었다더라 정도의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숨진 이들은 안타깝기야 해도 그저 그녀를 무섭게 만드는 꺼림칙한 것들일 뿐이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셰넌은 곧 멈춰 섰다. 베어지고 꺾여 마침내는 불탄 나무들 대신에 자리를 차지한 어린나무들이었다. 셰넌은 품에서 병을 꺼내 하얀 돌을 둥글게 둘러 표식을 한 자리에 물을 뿌려댔다.
"성수... 인가요?"
얼핏 다시 보아도 신전의 병 모양이었다. 덴이 아는 한 무덤에 성수를 뿌리는 의식은 아는 것이 없었다. 비싼 물을 바닥에 저렇게 비우는 것은 덴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 같았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말이네."
죽은 이들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말을 하는 셰넌의 목소리가 계산적인 속내를 들고 여기까지 따라온 자신을 따끔따끔 찔러대었다.
'그들을 덮는 흙마저도 신성하기를.'
덴은 죄책감을 덜고 싶은지 우러나오는 것인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오는 내내 투덜거리던 속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얼른 품에 안고 있던 꽃바구니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거칠고 마디마디 두텁게 튀어나온 신앙 없는 손이 흙과 돌을 다듬는 것을 한 걸음 물러선 채로 바라보았다.
바람 한 줄기가 숲을 흩었는지 큰 새의 푸드덕거림과 함께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꺅!"
덴의 짧은 비명이 적막한 숲을 울렸다.
"아니, 저기 새가 저, 깜짝 놀라서..."
셰넌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허둥지둥 붉어진 얼굴을 하고 어색한 말을 늘어놓았다. 셰넌이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도록 하지."
"괜찮은데... ...예."
정말로 괜히 따라온 것이었다. 온전히 쏟아내야 할 그의 시간을 방해해버린 것이 미안스러웠다.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셰넌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님, 도련님들 죄송해요.'
덴은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사죄를 건네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셰넌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눈이 마주친 덴만이 그저 열심히 자신의 뒤를 걷다 갑자기 멈춰선 이유를 묻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나?"
"네? 어떤 소리 말씀이신지..."
나무 사이를 통해 들린 소리는 어떤 방향도 주지 않았다. 기분 나쁜 심장 소리가 둔탁하게 머리를 울렸다. 셰넌은 다짜고짜 덴의 손을 잡고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점점 짙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덴은 당황했지만, 그의 긴장한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몇 차례의 토벌도 해 왔고 국경도 재정비되었지만, 여전히 숲은 위험했다. 짐승과 짐승 같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숲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를 긴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메아리 치듯 사라지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스쳤다.
'가까워졌다.'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더욱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덴을 숲 밖으로 뛰어나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 숨어 있으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이 비명의 근원을 무시한 채로 덴과 함께 숲을 빠져나가야 하는 것일까.
'함께 있어야 했다.'
줄곧 후회해 왔던 것이었다. 차라리 함께 있었다면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구하지 못했다면 함께 죽었을 것이었다.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내의 눈빛을 떠올리면 항상 선택을 후회했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무언가 달랐을까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언제나 답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
쉴 새 없이 달려나가던 두 사람이 멈춰 섰다. 확연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 같네요."
덴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거친 숲길을 전력으로 질질 끌려 달렸더니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고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셰넌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이쪽인 것 같아요!"
순간 굳은 듯 멈춰있던 셰넌이 몸을 움직였다. 근처의 큰 나무 옆에 덴을 앉혀두고 풀을 헤치고 파고들었다. 허리춤에 달린 칼을 고정하는 가죽 묶음 위로 손을 움직였다.
파사사삭
자세를 낮춘 채로 빠른 속도로 나뭇잎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눈이 묻은 마른 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앉아 울고 있는 어린아이와 그 울음을 달래는 소년이 보였다. 누군가 옆에 서 있었다.
시선을 올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이런 숲에서 갑자기 칼을 들고 튀어나온 자신을 보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천 그림자 사이로 희끄무레한 얼굴이 보였다. 마주친 눈은 마치 흑요석처럼 고요했다.
발아래로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울던 아이가 깜짝 놀라 잠시 훌쩍임이 멈췄다.
셰넌은 손의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상상하던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베리와 레리가 아니냐."
그는 낯이 익은듯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곁으로 다가갔다.
"셰넌님!"
"앙마 시러. 으앙."
짧은 머리를 양 갈래로 높이 묶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조막만 한 얼굴을 하고 소년의 다리를 부여잡고 빽빽 소리를 질러댔다. 소년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아이를 달랬다.
"베리. 울지마 뚝."
네 살배기 꼬마 베리와 아홉 살난 레리. 어린 오누이였다.
근처 성 밖에서 거주하는 촌락의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놀러 나온 모양이었다.
"제가 나무에서 떨어질 뻔한 바람에 동생이 놀랐나 봐요."
"이 높은 나무에서? 왜 이런 곳을 올라갔느냐. 다친 덴 없고."
위를 올려다보며 셰넌이 레리에게 말했다.
"아니, 이 누나가 잡아줘서 괜찮아요. 헤헤. 저기, 새 둥지가 보여서..."
레리는 멋쩍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위험한 숲에 들어가지 말라며, 어른들이 숲에 가면 못된 괴물이 나와 잡아먹는다는 둥 아이들에게 겁을 준 것이 더욱 베리를 울린 셈이었다.
부스럭
누군가 조심스럽게 나뭇잎을 손으로 휙휙 젖고 있었다. 궁금함을 못 이긴 덴이 눈을 빼꼼 내밀었다. 셰넌은 순간이나마 그녀를 잊어버린 것 같아 미안함을 느끼며 손을 잡아 주자 주섬주섬 밖으로 걸어 나왔다. 덴은 대충 설명을 듣고는 흙투성이의 작은 아이를 달래 안아 올렸다. 꺼림칙하게 생긴 저 소녀는 우는 아이를 보고만 있었던 것일까. 덴의 품에 들리자 베리는 앙증맞은 손으로 그녀의 양어깨 옷깃을 꼬옥 쥐었다. 셰넌은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위험하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다시는 너희끼리 이런 숲에 들어오지 말아라. 알았지."
소년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토닥이자 앳된 얼굴이 싱긋 웃었다. 셰넌은 죽은 아이를 떠올렸다. 살아 있었더라면 키가 어디쯤 자라 있으려는가. 이런 장난 많은 아이도 언젠가는 커서 늠름한 청년이 될 것인데 자신의 아이들은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이었다. 레리의 등을 말없이 손으로 한 번 더 쓸었다. 그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옆에 선 소녀가 말 한마디를 하지 않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이 어린 꼬마의 말대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 무서울 만큼 커다란 눈동자가 어딘가 섬뜩하기도 했다. 셰넌은 그저 기분 탓일 뿐일 것이라 여겼지만, 뒤에 선 덴은 벌써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엇 누나 다쳤어? 나 때문이야? 어떡해."
레리가 하얀 손등 위에 난 붉게 스친 상처를 보며 말했다. 꺾인 나뭇가지가 긁힌 얕은 상처였다.
"괜찮다."
낮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툭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소년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숲을 나가기 위해 네 사람이 한 방향을 향했지만, 소녀는 따라나서기는커녕 뒤돌아섰다.
"누나. 이쪽 이쪽."
레리가 뒤돌아서는 소녀를 불러 세웠다. 슬쩍 뒤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볼일이 있나. 그렇다 해도, 함께 나가는 게 낫지 않겠나. 이제 곧 해가 질 것인데."
어쩌면 자신처럼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긴 셰넌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덴이 그냥 가자는 듯이 속삭였지만 셰넌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땅히 새벽이슬을 피할 곳도 없다. 횃불 하나 없어 보이는 소녀가 해가 진다는데도 숲을 향해 들어간다는 것이 어딘가 이상했다. 명색의 자경단으로 이 근방을 순찰하는 자가 여자애 혼자 숲에 두고 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셰넌은 잡고 있던 레리의 손을 덴에게 넘겨 쥐여주고 저벅저벅 걸어 소녀에게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스듬히 서 있던 소녀의 손목을 잡고는 밖의 길을 향해 이끌었다. 딱히 별반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는 모습에서 셰넌은 무언가를 느꼈다.
"고독한 숲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밖에서 두려운 것이 많거나 없는 것을 쫓는 사람인 경우가 많거든."
"고독하지 않다."
"그렇다 해도, 사람보다는 짐승에게 어울리는 곳이지. 어차피 이곳에 있으나 다른 곳에 가나 별반 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같이 가지."
긍정도 부정도 돌아오지 않았다. 셰넌은 그저 밖을 향해 손을 살며시 당겼다. 레리가 어서 가자고 뒤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앞선 덴의 뒤를 셰넌과 소녀가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구나.'
셰넌은 소녀에게서 무의식중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자신의 인생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이 행복해 지기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와 비슷한 이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넘쳐났을 것이다. 이 숲에서 가족을 잃은 자도 그 혼자는 아니었다. 목숨을 끊은 이도 있었고, 술에 빠진 자도 있었다. 아예 이 근방을 떠나 버린 자들도, 싸우다 죽은 자들도 있었다.
셰넌은 다시 일하고 움직이며 도태되지 않는 자였기에 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찬양했다. 하지만 망가지는 방법이 조금 달랐을 뿐, 그는 그저 자신을 포기한 것일 뿐이었다. 그 역시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따라 걷자니 사내의 희끗희끗한 흰머리에 비사의 눈길이 가닿았다. 주름진 얼굴. 나이가 들어 있었다. 자신은 아비의 늙어가는 등도 어미의 말라 주름지는 살가죽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곁에 없다. 그러니 상상할 미래도 없다.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산 사람인 비사는 여전히 이래저래 떠다니고 있었으니 제 버릇 개 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작가의말
카테고리가 없어서 챕터 표기는 하고 있지 않지만, 챕터 상으로는 조금 긴 챕터입니다 신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사건이 한 번에 진행이 될 것 같기에 개개인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드러내면서 가고 싶습니다.
여러가지 상반된 의견이 들려오기 때문에 조율은 제 몫이겠지요.
이 부분은 좋다, 이 부분은 과하다 가끔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귀 얇게 하는 말 전부 들으려고 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쓰는 놈이 어느정도 고집도 필요한 것이겠지요. ㅎㅎ
Comment '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