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복이 되기 전 화는 그저 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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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복이 되기 전 화는 그저 화다
“굴마훈 녀석을 불러와.”
도승지 이경증이 가져온 말을 적당히 듣고 거절의 말을 돌려준 요토는 그가 돌아가자 바로 사람을 시켜서 정명수를 불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정명수가 그 낯짝을 살갑게 하며 보이니 요토는 주는 것이 없이 별거 없고 못마땅함을 느끼며 입술을 비틀었다.
“흥.”
“전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명수는 이러한 요토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물끄러미 정명수를 보던 요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알고 있겠지만, 조선왕이 사람을 보냈다. 저들이 말하길, 잘못이 있다면 함께 심문하고 판결하자고 하더군. 네가 말한 것과 달리 말이야.”
“그렇습니까? 제 생각에는 비슷하게 되고 있는 듯합니다만.”
기죽지 않고 말한 정명수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 정도 마찰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흥.”
정명수가 묻는 말에 요토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한 것이 필요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 저들과 불화가 있다는 빌미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요토는 자신에게 돌아온 친왕 작위가 다시 떠나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울뿐인 작위와 함께 이곳 조선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느니 차라리 버일러가, 그도 아니면 일개 팔기가 되어 전장을 달림이 요토에게 더 맞았고 바라는 일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이 그저 작다고 여겨 벌인 일이 아님을 알듯 요토는 제법 정치적인 계산에 밝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전에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연락도 변변히 하지 않는 아버지를 뭐 예쁘다고 설득하여 홍타이지를 지지하게 하였겠는가.
적어도 그는 상황을 보고 판단하여 득이 되고 실이 되는 것을 분간할 식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이번 일은 이미 반쯤 틀어진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모든 게 네놈이 말한 대로 돌아가고 있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네놈이 말한 것과 달리 돌아가고 있음은 어찌 된 일이냐?”
“.....”
요토의 매서운 추궁에 정명수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웃고 있기는 하나 닫힌 입과 미세하게 금이 간 그 얼굴은 이미 상황이 예측에서 벗어나 마구 달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이 말 도둑이라고 시인할 조선 사람이 아직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이대로 죽이자고 주장할 거라면 관둬라.”
요토는 무미건조하게 그리 말하고는 말을 툭 하니 덧붙였다.
“조선왕은 그런 걸 놓칠 멍청이가 아니니.”
“이미 다른 수를 써두었습니다. 3일, 길어야 일주일로 시인하는 것과 비슷한 걸 준비하겠나이다.”
정명수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하니 요토는 시선을 어딘가 먼 곳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야 할 거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네놈을 내밀고 끝낼 것이니까.
내뱉지 않은 말이나 요토도 정명수도 지금 말에 그러한 뒷말이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요토는 알고 정명수는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요토가 내지 않은 말이 정명수에게 허물을 돌리고자 하는 걸로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냄새가 난다. 전장의 냄새가.’
철들 무렵부터 살기 위해, 대청의 영광을 위해 싸웠던 요토의 코가 그리운 향을 맡고 있었다.
***
“전라 병사 김준룡은 어명을 받으시오!”
“어, 어명이라고!?”
전라도 병영에서 뒤숭숭한 마음에 일찍 깨었다가 새벽에 갑자기 부름을 듣게 된 김준룡은 화급히 옷을 챙기고 나왔다.
“전라 병사 김준룡, 대령하였습니다!”
급한 대로 의관을 정제하고 화급히 최소 인원만 대동하고 나가니 그곳에는 성상이 보낸 사람이 조서를 읽었다.
“전라 병사 김준룡을 어영대장으로 봉한다! 그대는 나라에 위험함이 있으니 이 말을 들으면 즉시 서둘러 한양으로 오라!”
어영대장이라는 말에 놀라기도 잠시, 나라에 위험함이 있다는 말과 즉시 한양으로 오라는 말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서 내용이 간결함이야 급하면 그럴 수 있다고 치나 이 내용들은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명을 받고도 망설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김준룡은 곧장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의 은혜가 참으로 망극합니다! 소신 김준룡, 속히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답하고 난 김준룡은 곁에 있는 사람을 귀엣말로 대신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라 명하고 사신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사람을 이리 급히 부르는 건가? 설마 다시 청나라 놈들이 국경을 넘기라도 하였나?”
혹여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면 한양에서 그를 급히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겸양이 사대부의 미덕이라고 하나 그도 과하면 부덕이 되는 법.
김준룡은 전쟁이 벌어지면 한양에서 가장 먼저 찾을 사람들 목록에 자신이 반드시 있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전쟁이 나진 않았으나 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자세히 좀 말해주게.”
자세히 캐어물으니 명을 전하러 왔던 이는 한양에서 있었던 일, 철원에서 벌어진 일들을 늘어놓았다.
이에 김준룡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짐과 말을 준비하여 오는 이들을 보며 탄식했다.
“나는 내심 전날 전공을 세우고도 시기를 당하여 평가받지 못하였다고 여겼다. 헌데 정작 알아봐 주니 차라리 이 나라 조선을 위해서는 몰라줌이 나았구나. 이 부족한 자가 필요하다 함은 나라가 위급하다 하는 것을. ”
***
“나랏일이 단번에 뒤숭숭해졌구나.”
“길보 형, 몸조심하고 살펴서 가십쇼.”
도성 바깥까지 마중을 나온 윤휴의 말에 윤선거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짐은 적어 가벼우나 마음에 느껴지는 무게는 가득 청나라산 물품들을 가지고 내려올 때보다 더했다.
고작 서신 하나, 말 조금이 이리도 무겁다니 윤선거는 그 중압감에 처연하게 웃었다.
“무거운 짐을 지신 와중에 송구하나 이것도 함께 전해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이냐?”
“영보 형님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전에 논한 것을 적어 두었습니다.”
전에 논한 것이라는 말에 이보다 더 그늘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둡던 윤선거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둡게 변했다.
“정녕 그런 일이 있을까?”
“단편은 이미 보였습니다. 설령.....”
윤휴는 단호하게 대답하려다가 때는 백주대낮이오, 장소도 당장은 많이 보이지 않으나 얼마든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임을 생각하여 말을 조심하였다.
“......아무리 아비가 믿어주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이 가장 의심스럽다. 조선에서 가장 의기가 높고 유학의 도리를 따르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냐.”
“그것은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우리를 위협합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던 윤휴는 조금씩 말을 고르더니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인식은 생각보다 쉬이 유도됩니다. 길보 형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보았고 들었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기억에 윤선거는 입가에 느껴지는 씁쓸함을 좀처럼 떼어내지 못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못났다고 하겠지만 저는 솔직히 이런 일이 터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 철원의 일 말이냐?”
“예.”
언행에 거침이 없고 파격이 넘치는 윤휴라고 하나 지금은 들은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쉬이 넘길 수 없었기에 윤선거의 눈살은 그의 감정을 대변하며 와락 일그러졌다.
그에 윤휴는 그 기분을 충분히 안다고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길보 형께 감춤이 없이 말하자면, 정녕 제가 제물포로 가기 전에 이런 일이 터져서 다행이라 여깁니다.”
“희중.”
“의심을 더 하지 않고 온당하게 일을 전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만류하는 부름에도 윤휴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내니 윤선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네가 바라면 이런 일이 있지 않다고 해도 나는 네 말과 글을 사형께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 외로 한양에 더 머무르셔야 했을 겁니다. 저는 지금 작은 것 하나 용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로 길보 형의 걸음이 지체된 것을 실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똑부러지게 말한 윤휴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쓸 말과 아니 쓸 말을 가려 오해를 사지 않고 영보 형께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걸 걱정하면 내게 당부하여 말하거나 너도 함께.......무리구나.”
“예, 무리입니다.”
웃으며 끄덕인 윤휴를 보며 윤선거는 제가 생각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말로 전하고자 하면 나는 이 말을 과하다, 저 말은 온당치 않다 여기며 가감했겠지.”
“그리고 시간이 적으면 저는 그 서신에 쓸 말 쓰지 못할 말을 여럿 적었을 것입니다. 다급한 심정에 말입니다.”
“하하,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라?”
고사를 읊은 윤선거는 곧 진지하게 윤휴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알고 있느냐? 말은 돌아올 수 있고 마구간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이 다친 것은 낫기까지 그저 화며, 낫지 않는다면 화가 남아 복으로 덮는 꼴이 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외조 좌랑으로서 저는 이번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윤휴는 제가 입에 담은 안타까움이 진심이라는 듯 감정을 담아서 철원 방향을 보았다.
“교역에서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조총을 더 가져오라 하여 나라가 불안함을 저들에게 알리겠습니까? 아니면 명나라에서 보낸 것이나 청나라에서 보낸 것을 철원에 가져다가 화를 풀라고 베풀겠습니까?”
고개를 가로저은 윤휴는 부족함을 통감했다.
“궤도에 올라 교역하는 양이 늘었다면 충분히 감당할 일이되, 당장은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으며 후자는 사대부가 할 일도 아닙니다.”
“정녕 그렇구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궁리함을 멈추지는 말거라.”
궁리함을 멈추지 말라고 한 윤선거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처음부터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더냐.”
윤선거는 그 말을 남기고 영변부를, 심양을 향해서 떠났다.
홀로 남아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윤휴는 그가 남긴 말을 중얼거렸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시작하였다.......하하, 그렇습니다. 길보 형, 말씀대로 할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필요한 도움이기는 한 건지도 윤휴는 알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해 일이 뜻대로 풀린다는 보장도 그에게는 하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손을 놓고 할 수 없다고 칭얼대는 것보다는 낫다 여긴 윤휴는 밝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윤휴야, 윤휴야. 어리석게 하지 말거라. 먼저 고하고 허락하시면 알아볼 일이다.”
혹여 마음이 급하여 앞서 나갈까 걱정이 든 윤휴는 자신을 다독이며 걸음을 옮겼다.
슬슬 제물포로 돌아가야 하나 그 전에 들릴 곳이 있으니, 조선에서 가장 귀한 분이 계신 곳이었다.
- 작가의말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후원하신 기대에 응해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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