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종단胡宗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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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대나무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 고태건은 박영철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갔으면 합니다."
강우용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고태건이 평소에 즐겨 마시는 커피를 따라주었다.
고태건이 같이 마시기를 권유했으나, 박영철과 금지화는 완곡히 사양하고 고태건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리를 두고 기다렸다.
커피를 마신 뒤 고태건은 어느새 익숙하게 명상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백색 광휘에 둘러싸인 한 노인이 나타나 대나무 숲 입구에서 황금빛 주장자를 힘껏 들어올려 땅을 세 번 내리치고, 다시 허공을 향해 크게 세 번 원을 그린 다음 문을 두들기듯 정면을 향해 세 번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깊고 고요한 대나무 숲이 양 옆으로 갈라지면서 숲 안쪽으로 하늘로 오르는 통로 같은 신묘한 느낌의 비밀스런 공간이 열렸다.
주장자를 든 노인이 대나무 숲으로 먼저 성큼성큼 들어가 누군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노인의 부름을 따라 어떤 이가 숲으로 들어가는 뒷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숲 속으로 들어가자 대나무 숲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저절로 닫혔다. 바깥 세상으로 나 있던 통로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고태건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무엇을 본 거지?
꿈을 꾼 건가?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강우용과 박영철, 금지화를 돌아다보았다. 세 사람은 조용히 한담을 나누며 웃고 있었다.
분명 못 본 것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고태건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박영철을 향해 말했다.
"다시 출발합시다."
대나무 숲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언덕으로 오르는 좁은 샛길이 나왔다.
언덕은 높지 않았지만 샛길은 오를수록 경사가 급해 쉽사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마치 땅에서 끌어 잡아당기는 것처럼 한 걸음 한 발을 앞으로 내딛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좀 전까지 가벼웠던 몸이 쇳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천근 만근으로 느껴지다니...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이 길이 이렇게 오르기 어려운 건 또 무슨 일이지?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고태건은 땀을 흘리며 걷는 것이 어려워지자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 하는 고태건을 보고 뒤따라 가던 금지화가 말했다.
"아랫배에 힘을 주시고 두 손과 두 발로 기운을 받아 올라간다고 생각하시면 좀더 걷기가 쉬우실 것입니다. 두 손바닥은 장심掌心, 두 발바닥은 용천湧泉이라고 하는 외단전外丹田입니다.
이미 혈이 열려 있으시니, 네 개의 외단전에 의식을 두시면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몸을 믿고 느낌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지기를 타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고태건은 금지화가 한 말을 최대한 따르려고 애쓰며 걸었다.
아니, 어떻게 나보다 더 힘들어하시는 거야?
뒤에서 따라가는 강우용은 영문을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태건의 뒤를 쫓아 올랐다.
당도한 길 끝나는 곳에 작은 동굴이 나왔다.
강우용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마치 처음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이곳에 오른 시간이 달라서 그런 건가...?
강우용은 동굴 천장 틈으로 들어와 바닥에 어린 달빛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고태건은 동굴 안을 둘러보며 연신 땀을 닦았다.
한라산을 오른 것보다 더 힘든 등반이었군.
"이곳은 천화 동굴입니다. 서복이 불로초를 구한 곳이어서 불로초 동굴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에서 잠시 명상을 하시고 바로 토굴로 가시겠습니다."
박영철이 말했다.
고태건은 서복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별이 보이는 천장 아래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일심정기一心正氣 조화정造化定
광명천지光明天地 대인간大人間"
서복이 현묘진일이 내려준 활구를 봉송하며, 천화 동굴에서 백일 마지막 수련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동굴 안에 검은 그림자가 언뜻 스치고 지나가더니 소름이 돋는 살기가 느껴졌다.
아니, 이곳에서 피냄새가 나다니...
어쩐 일이지?
서복은 눈을 천천히 뜨고 주변을 살폈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지만, 동굴 안은 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새벽 별빛으로 사물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호 사형! 혹시 호 사형 아니십니까?"
서복은 동굴에 비추어진 형체만으로도 호종단胡宗旦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칼에서는 온갖 피냄새가 났다.
"서복, 그동안 잘 있었나?"
"언젠가 호 사형을 다시 한 번 뵐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용케도 세상에서 감추어진 이곳까지 저를 찾아오셨군요."
서복은 애써 반가운 목소리와 미소로 호종단을 만난 비운의 예감을 덮으려 했다.
호종단은 시황제 휘하의 방사들 중에서 풍수학으로 진나라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인재였다. 서복은 점사로 진시황 곁을 드나들면서 진시황이 가장 아끼는 방사 호종단을 알게 되었다.
호종단은 풍수학에도 실력이 출중했지만, 무공도 뛰어나 가끔 시황제가 황궁을 벗어나 국경 너머의 지리를 둘러보고자 할 때면 반드시 그와 동행을 했다. 서복이 풍수에 눈을 뜨게 된 것도 그런 호종단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낸 덕분이었다.
호 사형이 그린 지리서를 보고 진시황이 탐모라의 운세를 알게 된 것이 틀림이 없다.
서복은 호종단이 탐모라까지 오게 된 이유를 짐작했다.
"진시황이 내게 탐모라의 왕후지지를 없애라고 명했네. 중원 천하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도 늘 불안했던 황제가 아닌가.
서복 자네에게도 내가 말해주었었지? 삼신산이 있는 곳들 중 탐모라에 왕후지지가 있어 천하 제왕이 태어날 형세라고 말이야."
그래, 그랬겠지. 진시황이라면 그런 사실을 알고서 절대 그냥 두고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서복은 호종단이 임무를 맡고 왜 동굴까지 찾아왔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차마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고 싶지 않아 호종단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나는 먼저 종달로 가서 차근차근 남쪽까지 물혈을 뜨고 맥을 끊어 나갔지. 그리고는 왕후지지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을 했네. 산방산이라는 곳이었는데 도착해 보니 왕후의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바로 알겠더군.
바다로 향해 꿈틀대며 내달리는 용머리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데리고 온 장병들과 힘을 모아 용의 꼬리를 자르고, 잔등을 내리쳐 끊었지. 내가 마지막으로 용의 머리를 내리쳤어. 용은 검붉은 피를 토하며 천지를 울리는 신음을 토하고 죽었네."
서복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탐모라 남쪽 전역에 피 같은 붉은 비가 쏟아져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삼신산을 보호하고 있던 영적 결계結界가 약해진 것을 서복도 감지하고 있었다.
서복은 호종단이 가여웠다.
사형의 출중한 능력이 결국은 그렇게 쓰이는구나.
원치도 않는 권력이 좇는 피바람을 제아무리 뛰어난 방사도 결코 피해갈 수가 없는 운명...
내가 이곳에서 스승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그의 인생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신선이 사는 땅의 운명을 사형이 바꾸었군요."
서복은 빗대어 호종단의 능력을 찬탄하는 투로 말했다.
"그게 나의 운명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그리고 내 임무가 아직 하나 더 남았네."
서복은 호종단의 말을 듣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 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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