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터, 왕후지지王侯之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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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용과 박영철은 천화동굴을 뒤로 하며 인적이 없는 내리막진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청량한 공기와 고요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와 곁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뿐이었다.
선인골 입구에 다다르자 반나절 동안 돌아보았던 세계는 잔잔하게 내려앉은 안개에 싸여 거짓말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강우용은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천화동굴 맞은 편 저 너머로 선명하게 보였던 산기슭의 토굴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잠시 열렸던 세계가 다시 닫히고 더 이상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그는 왠지 모르게 선인골을 벗어나고 있는 발걸음이 아쉬웠다. 입구에 도착하자 박영철이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선배, 차 한 잔 하고 가시죠?"
"그러지."
선인골을 벗어나자 강우용은 잠시 잊었던 세상으로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너무도 익숙한 세계가 순간 이상하리 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자신도 역시 낯설었다.
두 사람은 오른쪽으로 멀리 박수기정이 보이는 조용한 찻집으로 들어가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선배, 이제 아까 선배여서 선인골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박영철은 주문한 레드향 꿀생강차를 가지고 와 앉으며 말했다.
강우용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박수기정 옆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박영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맞네. 잊고 있었군. 그래, 내가 간택된 이유가 뭔가?"
"선배, 저기 박수기정에서 왼쪽으로 낮게 연결되는 해안선 보이시죠?"
박영철은 카페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잘 알지. 용머리 해안 같은데 맞나?"
"맞습니다. 제주도에는 유난히도 용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도 특히 용머리 해안이 대표적이죠."
"그렇지, 돈은 많이 들었지만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인증을 받았고,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도 지정이 되었으니 두 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나."
"예, 그래서인지 용머리 해안에 얽힌 전설은 좀 남다르죠."
"응, 나도 대충은 알고 있네. 진시황이 왕이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종단을 보내 혈맥을 끊었다고 전해지지."
"예, 방사 호종단이 탐모라에 왕후지지王侯之地가 있어 제왕이 태어날 형세라고 했죠. 그래서 진시황이 그를 보내 지맥을 끊고 지혈을 파서 탐모라의 기운을 끊으려고 한 거구요.
호종단이 제주도 곳곳에 물혈을 뜨며 결국 강력한 기운을 따라온 곳이 산방산 근처였고, 그곳에서 용머리 해안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지금도 산방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바위가 영락없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잖아요. 머리와 등 부분 곳곳이 잘려나간 듯이 보이구요. 만약 그 맥이 다시 이어질 수 있다면 제주도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전설만 믿고 생각해 본다면야 왕의 혈맥이 이어지니 진시황이 경계했던 일이 일어난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죠. 그래서 선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박 실장, 이제 더 이상 말 돌리지 말고! 아까부터 말하는 그 역할이 도대체 뭐냐니까?"
강우용은 인내심을 잃고 마시던 차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신경이 약간 곤두선 어조로 말했다.
해는 완전히 바닷속으로 잠겨 사라지고 주변에는 어둠이 깔렸다. 카페 주인은 잔디밭으로 나가 가로등에 불을 켰다.
바로 앞 해안가에 고고하게 서 있던 소나무 세 그루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페 한 곁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 밭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희고 투명하게 빛났다.
"끊어진 제주도의 혈맥을 잇고,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기운을 되찾는 것이죠."
강우용은 몹시 놀라며 황당하다는 듯이 박영철을 쳐다보았다.
"아까 그 선인골과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구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예, 선인골에 아직 선배가 보지 못한 곳이 남아 있습니다. 맥脈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용머리 해안의 기운이 바로 선인골의 그곳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하죠."
"내 참 솔직히 뭐가 뭔지 진짜 모르겠네. 마치 내가 어딘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야. 아까도 내려오면서 자네와 함께 간 곳들을 뒤돌아 보았는데 다시는 볼 수가 없더군. 그리고 이곳에 내려온 그 느낌이라니..."
박영철이 말했다.
"낯설고 새롭게 보이지 않던가요?"
"그래, 맞아. 바로 그거네. 그런 느낌은 정말이지 처음이야. 그리고 지금 자네가 내 앞에서 하는 이야기말이네. 말하는 자네는 실제이지만 자네가 하는 말은 이미 2천 년도 더 된 전설이야.
전설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인지 납득이 안 되네. 더욱이 그 오랫동안 끊어진 혈맥은 대체 어떻게 이을 수 있다는 건가?"
"그것이 가장 핵심이죠. 2천 년이 지나도록 제주도의 정기를 살리는 방법을 아는 이가 없었으니까요. 제주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 외에 '임금 제帝'를 사용한 지명들이 많죠. 천제연天帝淵 폭포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용머리 해안의 전설과 연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제주도의 '제濟'는 제주도의 황후지지의 미래를 의도적으로 숨겨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선배..."
강우용은 박영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그가 하는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우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박영철도 강우용이 갈등하는 것을 보고 깜깜해진 창 밖을 내다보며 잠잠히 기다렸다.
내가 먼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었군.
내가 도지사님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야.
"결국 내 목을 걸라는 말 아닌가... 그래, 알겠네. 한 번 해 보지. 만약 이야기가 잘 된다면, 고 지사님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네 말처럼 2천 년 동안 끊어진 제주도의 맥을 이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군가는 용기를 내야 하지 않겠나. 비록 도지사님이 바라는 대로 일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야.
강우용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강우용과 예나가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아니, 정말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꺼내는 이야기라서 제가 시간 가늠을 잘 못했네요. 그럼 너무 늦었으니 제가 드리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하시지요. 나머지 이야기는 모레 고 대통령님 만나서 들으시구요."
"저도 강 실장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듣는 것으로 하고, 강 실장님을 믿고 이후 뒷이야기는 대통령께 듣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오늘 장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모레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예나는 강우용과 헤어져 사무실을 나오자 한정을 생각하며 서둘러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동안 네 개의 문자가 와 있었다.
하나는 김의성 국장에게서 온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한정의 것이었다.
- 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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