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원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린 한라산.
까깍깍깍
까깍깍깍
한라산 이른 새벽이 까마귀 울음과 그들의 날개짓 소리에 흔들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야.
공인이 되고 정치모임으로 산행을 한 적은 많았지만, 혼자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군. 정상에서 기도를 하려면 보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서둘러 도착해야 해.
고태건은 효소 물병과 깔개 방석을 넣은 작은 배낭을 메고 챙이 넓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채 서둘러 관음사 입구를 통과했다.
차가운 새벽 이슬이 내려앉은 넓은 조릿대 밭을 지나 인적이 없는 울창한 나무 숲에 들어서자 그는 무심한 걸음걸이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돌이켜볼수록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분통해서 견딜 수가 없군. 어처구니없게 청와대로 향하기도 전에 고향 제주도에서 발목이 묶일 줄이야.
더군다나 도와주겠다던 서울 인맥들은 또 어떻게 그렇게 돌변할 수가 있지?
단식으로도 비워지지 않은 생각들이 연이어져 고태건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앞에 보이는 경치들에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고 그대로 휙휙 지나쳐 한라산 정상으로 향했다.
백록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되지 않은 채 고인돌처럼 우뚝 솟은 거석에 백록담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이자, 고태건은 정상 가까이 온 것에 안심하며 발길을 멈추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혼자임이 분명했다.
마지막 정상에 오르기 위해 효소액을 꺼내 목을 축이고 배고픔도 달래며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세찬 바람이 불면서 구름이 빠르게 흐르더니 하늘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고태건은 땀을 식히려고 벗어 들었던 웃옷을 다시 걸쳐 입고 백록담 분화구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도제한으로 4층이 넘는 건물이 없었던 때의 제주도는 날이 좋으면 어느 마을, 어느 동네, 어느 대청마루에서도 바로 한라산이 보였었지.
어르신들은 어디서나 한라산을 바라보며 설문대 할망의 보살핌을 감사하고 당연하게 여겼었는데...
지금은 고도제한이 풀려 곳곳에 들어선 고층 건물들에 가로막혀 한라산을 도심에서 바로 보는 것이 쉽지가 않아.
고태건도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소박하면서 정겹고, 가공되지 않은 자연과 인심을 어디서나 느낄 수 있었던 예전의 제주도가 가끔은 그리웠다.
백록담에 다다르자 어느새 바람은 멎고 안개가 걷혀 화산 분화구가 훤히 드러났다. 분화구 바닥에 고인 작고 푸른 물웅덩이에는 흐르는 구름이 거울처럼 비쳤다.
안으로 깊이 꺼져 가파른 절벽에는 짙은 초록색 들풀과 가지 무성한 키 작은 잡목들, 눈향나무와 구상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바깥 능선은 병풍을 둘러친 듯 험준한 기암괴석들이 솟아 한라산의 위용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석이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색이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여 산맥우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 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가재도 귀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운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정지용, 1939
백록담 앞에 서니, 학창시절 흠모하던 시인 정지용의 ‘백록담’ 몇 귀절이 떠올랐다.
시간이...
그제야 고태건은 손목 시계를 보았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까지 아직 여유가 있군.
그는 제주도의 가장 높은 곳, 하늘과 맞닿은 백록담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배낭 앞 주머니에서 차곡차곡 접힌 종이쪽지를 꺼냈다. 단식을 하며 떠오르는 대로 적어 놓은 기도문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의 뜻을 받들고자 저 고태건이 이렇게 제주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환란 속에 있을 때마다 저를 지켜 주시고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의 시련도 당신의 깊으신 사랑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 그의 시선은 더이상 기도문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열망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당신의 사랑이 대한민국의 중심이 되게 하고자 부족한 저이지만 대통령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약속 드린 대로 제주도를 아버지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의 뜻으로 가는 저에게 지금의 작은 시련을 헤쳐 갈 수 있도록 당신의 지혜를 허락하소서. 간절히 애원합니다.
......
이 모든 것이 저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기도를 끝내자 고태건의 가슴은 간절함으로 벅차올랐다.
급히 오른 탓인지 높은 고도 때문인지 약간 어지러움은 있었지만 마음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해져 있었다.
하늘은 높고 세상은 고요하구나.
고태건은 마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시공간을 허락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내친 김에 두 번째 기도를 올리기 위해 백록담을 에둘러 세워놓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묵상기도를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느닷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요?"
예나가 고태건의 이야기가 신기해 되물었다.
"네, 눈은 감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그 목소리가 제게 물었죠.
'정말 제주도를 살리기를 원하느냐?'라고요.
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제주도의 참 역사를 알고 있느냐?'라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두려움이 앞섰지만 저는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다시 묻는 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제주도의 진정한 역사가 되겠느냐?'
저는 감히 눈을 뜨지 못하고 대답했습니다.
'주여, 당신이십니까? 당신께서 오실 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습니다.'
제 기도에 응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꿈을 꾸신 건가요 아니면 이렇게 말씀드리면 실례가 되겠습니다만 무리한 단식 때문에 환청 증세를 겪으신..."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나는 서복 신명이다.'라고요."
"네에? 서복? 서복이라면..."
예나는 강우용에게 서복 불로초를 알아 보라고 고태건이 지시를 했다던 말이 기억이 났다.
"그분이 스스로를 이렇게 밝혔죠.
'그렇다. 서불과차徐弗過此. 진시황의 명으로 불사의 약초를 구하러 제주도에 왔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지는 서복이다. 제주도에도 나를 기념하는 곳이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한다는 말씀이신데요. 어떻게 된 거죠?"
"서복 신명님이 그랬습니다. '너의 간절함이 통해서 내가 왔다.'고 말입니다."
예나는 강우용이 한 이야기에서 느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이상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태건을 쳐다보았다.
"제 이야기가 분명 황당하게 들리시겠지요. 기도를 올리고 응답을 받는 생활에 익숙한 저로서도 그런 일은 정말 처음이었으니까요. 저는 진짜 서복 신명님이 제 기도를 들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말했습니다.
'너는 제주도정을 안정시키고 그 여세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통령님께서 기도를 드린 대상은 다르지 않았습니까?"
예나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진위를 가려야겠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그렇습니다. 달리 누구에게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나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그 이전부터 제주도에 있어 왔다. 오랫동안 제주도에 서려 있는 섭리를 이룰 인물을 찾고 있었다. 오늘 너의 간절함에서 그 기운을 느껴 온 것이다.'라고요.
저는 그때 제가 듣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분이 말하는 섭리를 이룰 인물이 '저'라는 말은 정말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길이 있습니까? 제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되셨나요?"
"그리고 바로 답을 들었죠.
'길은 분명하다.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제주도에 숨겨진 역사와 미래를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그것을 원하느냐?'라고요.
저의 고민은 길지 않았습니다."
고태건은 당시 세운 의지를 예나에게 재현하려는 듯 예나의 얼굴을 보며 힘있게 말했다.
"바로 '네, 그것을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 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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