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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살인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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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5.13 18:25
최근연재일 :
2021.01.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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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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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96.

DUMMY

조용한 골목의 끝에 누군가의 개인적인 취향이 잔뜩 묻어나는 가게가 있다. 그곳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가구점이자, 직접 세공한 악세사리를 파는 곳이기도 하다. 혹은 비밀스러운 손님들을 안내하는 은밀한 장소이기도 하며, 아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격식 있는 식사 자리이기도 했다.

호야의 가게는 그런 복잡한 목적은 둔 곳이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하나, 둘 놓인다.


“제법 신경 썼구나?”


이미 놓은 접시에 담긴 고사리 크기의 스테이크를 썰며 연우가 물었다.


“당연하죠. 사장님께서 오시는 건데요.”

“두 사람도 입맛에 맞아?”


그건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자윤과 희서에게 묻는 말이었다. 기다란 사각형의 테이블에 하필이면 연우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이 두 사람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럼요. 이런 걸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 다행이네.”


연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테이블 양쪽으로는 왕철과 덕순이 제아를 챙겨가며 음식을 먹고 있다. 제아는 철없는 아이의 얼굴로 썰지도 않은 고기를 입안에 그대로 밀어 넣었다.


“더 드릴까요?”

“좋아!”


호야는 사람 좋은 웃음을 남기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오늘 이렇게 모인 건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잠시 점검하려는 목적이야. 불만은 없겠지?”


그 물음은 철저히 자윤과 희서에게 초점을 맞춘 질문이었다.


“무, 물론이죠.”


자윤이 서둘러 그리 답했다.

연우는 만족한 얼굴로 옆에 앉아 있는 철가면에게 서류 하나를 받았다.


“편하게 먹으면서 들어. 애초에 우리가 계획했던 경찰을 이용해 핀치 히터를 몰아넣으려는 계획은 실패했어.”

“그렇게 도장 찍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


왕철이 물었다.


“경찰은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어. 그만큼이나 정보를 흘렸는데도. 도리어 우리 쪽의 인물만 잃었을 뿐이야.”

“연우님 말에 덧붙이자면, 재우가 실종됐다. 미향이 그의 행방을 쫓고 있지만 소득은 없다고 보고 있다.”

“철가면의 말대로. 난 언제나 우리 쪽 인원의 희생을 ‘0’으로 두고 있는데, 항상 이러네.”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갑작스러운 그 사과는 왕철과 덕순도 예상했던 것이 아닌지, 놀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괘, 괜찮습니다. 저희가 제대로 일을 못 해서········· 그래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자윤이 서둘러 그리 말했다. 연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연우의 표정 중에 가장 사람답다고, 자윤은 생각했다.


“이렇게 대하니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지는군.”

“하하········· 뭐, 원래 말투가 더러웠던 건 이쪽이니까요.”

“내가 뭘?”


희서가 자윤을 노려봤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하면 돼?”


희서가 시선을 연우에게로 옮겨 차갑게 물었다.

호야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쌓였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로 꾸며진 식탁은 호화롭기 그지없다. 연우는 그가 손을 닦으며 앉는 것까지 기다린 후에 입을 뗐다.


“핀치 히터에 쳐들어간다.”

“·········뭐?”


날카로웠던 희서의 눈이 완전히 풀려 흔들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면전을 하자고?”

“그들도 살인앱고가 깔렸다면, 더 지켜볼 필요도 없어. 전력이 늘어나기 전에 누른다. 그거면 돼. 기다리는 것도 지쳤고, 꼼지락대는 것도 이제 질렸어.”


연우답지 않은 판단임은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사뭇 어두웠다.


“알아. 그런 표정들 짓지 마.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연우는 콧대를 어루만지며 얘기했다.


“지긋지긋하잖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내는 거. 어르신과의 유착도 끊어냈다고 싶어도 입김은 닿고 있어. 우리가 어디를 가던, 어떻게 움직이든.”

“그거야 어쩔 수 없지. 고놈들이, 아니지. 이놈의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니까.”


덕순이 신경질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학연, 지연, 유착 뭐 등등. 이 세상은 원래 그렇게 굴러가는 거야. 의리라던가 우정이라던가, 형제애? 뭐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붙여서.”

“그러니 이제 끊어내야지. 어디든 연결돼 있으니까, 법이든 도덕이든 그런 거 상관없이. 이번야말로."


조급해 보이긴 했지만, 연우의 눈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의지와 열망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인 모습은 불안감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어릴 때 모습이 조금 보이는구나.”


왕철이 웃으며 말했다.


“이길 수는 있고?”

“제아를 쓸 거예요.”

“얘까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부수러 가는 거니까요.”

“핀치 히터가 마지막 산하 기업인 건 확실하고?”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거기에 이수가 있으니 충분한 가치는 있죠.”


자윤의 얼굴이 크게 동요한다.


“그, 그 사람은 죽었을 텐데요·········?”

“그렇지.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버젓이 살아있더라고. 뭔가 커다란 비밀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야.”


그 말에 자윤과 희서의 눈이 반짝였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어쩌면, 현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복수와도 연결될 거야. 그건 확실해.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두 사람도 움직이지 않을 이유는 없지?”

“그건 그렇죠······.”


자윤은 뒷말을 흐리며 답했다.

어차피 움직일 계획이긴 했으나, 이런 식의 노골적인 접근은 그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알았으면, 오늘은 즐기고 이틀 후에 출발하자고.”


“이틀 후면 꽤 서두르시네요.”


호야의 말에 연우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은 후, 말했다.


“저쪽도 우리 정보를 전부 알고 있을 거야. 미뤄봤자 득이 될 것도 없고, 더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야.”


모든 이들의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지속했다.



* * * *



약도가 그려진 종잇조각을 펼친다. 거기에는 흘린 글씨로 “Pinch hitter”라고 적혀 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일호와 이호가 각기 커다란 검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문을 열지 않으시는 거죠?”


그 말에 재우는 서둘러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쪽에 다소곳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진땀을 흘린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해야 하나·········.”


두 소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마치신 거로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럼 무엇이 문제이지요?”


일호가 한 걸음 재우에게 다가간다.


“혹여 이 문이 두려우시면, 제가 대신 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재우는 난감했다.

그녀들의 말대로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아무리 거절이란 선택지가 없는 부탁이었다 할지라도, 정말 막상 그때로 돌아가려고 하자니 손에 땀이 맺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박 현·········.”


재우가 그의 이름 나직이 입에 담아보았다.

자신의 삶에 살인을 앗아간 자. 그리고 살인이 아닌 방식으로 자신을 위로한 자.


그리고 다시 문을 바라본다.

그가 앗아가고, 가져가 준 무게를 다시 짊어질 수 있을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 되물었다.

재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김재우 님·········?”


두 소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저희가 서포트할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소녀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임무의 성공 여부일 뿐이다. 그가 움직이지 않고 포기한다면, 자연히 두 소녀의 임무도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일련의 모든 것들이, 그녀들이 말하는 ‘서포트’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재우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에 위로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문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저희는 반드시 임무를 성공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생각과 행동은 절대적이니까요.”


그 말에 재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임무라·········.”

“김재우 님?”


두 소녀는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꼈다. 그것에 관해 물어볼까 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재우는 망설이던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어르신들의 말은 그렇게 깊이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재우가 그 말을 어렴풋이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두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뒷모습을 쫓아 핀치 히터의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잿빛의 벽지.

적포도 색의 카펫.

봉황이 네 개의 다리에 정교하게 새겨진 탁자. 그 위에 조심스럽게 녹차가 놓였다. 시계는 심장 박동에 맞춘 것과 같이 침착하게 흘러간다.


“어르신들이 보내셨다고?”


녹차를 가볍게 마시며 묻는 건 이수였다. 백색의 양복에 붉은 넥타이가 그녀의 새하얀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무척이나 단호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습니다.”

“그때 마네킹으로 난리 쳤던 게 당신이지?”


재우는 그 말에 앞에 놓인 차를 들어 입을 적신다.


“그렇습니다.”

“꽤 훌륭한 솜씨였어. 우리 산하에 스파이로 들어와 있는 것도 신선했고.”

“·········그건······.”

“알아. 그건 돈 때문이었겠지. 자네 같은 기술자는 온전한 곳에서 받아줄 수 없을 테니까.”


재우의 손이 불안한 듯, 찻잔을 몇 번 쓰다듬고 내려놓았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이수는 눈동자를 굴려 일호와 이호의 모습을 살폈다.

두 사람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재우의 뒤에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이 둘은 어르신들이 보낸 기종이고. 흐음~ 대충 알겠어. 좋네. 좋은 전력이 되겠어.”

“계획은 있으십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쪽 전력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 호되게 두들겨 맞았으니까. 남은 거야 당신, 나. 그리고 저 두 기종뿐이지.”

“어르신들께서 전부 지원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이수는 낮게 웃었다.


“그걸 믿는 건 아니지?”

“······예?”

“어르신들의 말씀 대부분. 그래, 정확히 98% 정도는 헛소리야. 당신도 잘 알잖아. 어르신들이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살인앱고 자체도 오로지 그들의 유희일 뿐이고.”


그 말에 일호와 이호가 허리를 더욱 바짝 당기며 외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과 목적은 언제나 명확하고 정교합니다.”

“명확? 정교? 재미있구나. 교육이란 정말 무서워. 명확하고 정교하게 가르침을 받으니 저런 답이 나오는구나.”


두 소녀가 얼굴을 구겼으나, 이수는 그런 두 사람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다시 차를 입에 댔다.


“우리는 질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일호와 이호가 동시에 외쳤다.


“아니, 질 거야.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두 소녀가 무엇인가 대꾸하려던 입을 그만 다물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우 또한 놀란 얼굴로 이수를 쳐다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시계 소리가 침착하게 흘러간다.

재우가 긴장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입을 뗀 것은 한참 후였다.


“·········왜죠······?”

“누군가를 만났으니까. 내 죽음도, 살인도, 악의도, 그자가 모두 가져가 버렸거든.”


재우는 두 손을 꽉 쥐었다.


“그게 무슨!”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호와 이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다시 달려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 그래. 두 사람은 그러니까 빠져도 좋아.”

“어르신께 보고하겠습니다.”

“마음대로.”

“박사님!”


일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저희는 지기 위해서············. 임무에 실패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게 아닙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움켜쥔다. 그녀의 눈이 심하게 떨린다.


“············저희는······.”


이호가 일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그녀가 앞으로 내밀었던 발을 거둬들이고 표정을 고친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이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한 행동을 한 점, 사죄합니다. 저희 둘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서포트. 모든 행동과 사고는 김재우 님에게 배속된 바입니다. 그의 생각과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무례한 행동을 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 모습에 재우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호와 이호는 고개를 천천히 들며, 말을 덧붙인다.


“허나, 부디 그 명령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설득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 부탁에 이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일방적인 방향이었다.


“좋아. 대신 두 사람은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는 게 어때?”


일호와 이호는 재우를 내려다보았다. 재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 말았다.


“······그럼.”


두 사람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시계 소리를 닮았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을 때서야, 재우는 고개를 문에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계획을 꾸미고 계신 거죠?”

“일단 그건 나중에 저 둘이 돌아오면 얘기하는 것으로 하고. 지금은 저 둘에 대한 당신의 이해가 필요할 것 같아. 안 그래?”


재우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저 둘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들은 게 없지?”

“정보라면.”

“아니. 자신에 대한 정보 말이야.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재우는 침묵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지에 쓱, 쓱 닦아내고 물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저 두 사람에 대해.”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차를 하나 타왔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냄새부터 음미해 마신 후, 설명을 시작했다.


“핀치히터는 원래 대타 소속의 거대한 산하 연구 시설이야.”


그 시설에서 진행돼온 프로젝트 하나.

살인앱고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프로젝트인, 인간 개조.


“원리는 간단해.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정신적인 개조를 하는 거지. 인간의 뇌는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거든. 파도, 파도, 파도 끝도 없이 새로운 것이 나오는 미지의 영역. 어쩌면 인간의 뇌는 우주를 닮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야.”


그녀가 두 손으로 뇌 정도 크기의 공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본능에 지배당하는 동물. 자신은 스스로 움직이고, 진취적이라 얘기해도 결국에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거든.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정확히 생존 본능이라 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재우는 눈앞에 있는 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묘한 분위기에 의해 그러지 못했다. 목이 바싹 말라가고 있음에도 그는 침을 삼켜가며 참아야 했다.


“그렇다면 그 본능 자체를 지배하에 두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본능 자체를 통제할 수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녀가 재우를 노려보며 물었지만,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간단해. 터무니없는 존재가 되는 거지. 1% 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네가 이름 붙인 일호와 이호라는 녀석들이 바로 그런 애들이야. 흔히 말하는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아이들.”

“인간성·········.”


문뜩, 재우는 그러한 만화나 영화들을 떠올렸다.


“보통은 현실이 더 잔인하다고 하잖아? 책이나 만화. 영화에서 나오는 것들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지. 인간성을 없애고, 본능을 지배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적이거든.”


그녀는 여러 가지 실험 모형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거를 위해 100명의 아이를 선발했고, 살아남고 완성된 실험집단이 바로 일호와 이호가 속했던 집단이었다.


“그 성공 모형을 바탕으로 진행된 게, 살인앱고야. 모든 본능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특정 본능만으로 이용해 인간을 조종할 수 있다고 본 거지.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으로 인간을 움직여 제거하려는 수법.”


그게 살인앱고였다.


“원래라면 일호와 이호 같은 아이들이 적절하게 뒤섞여 불필요한 인간들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제거하려는 게, 살인앱고의 올바른 방향이야.”

“옳······바르다고요?”

“실험으로는 말이야.”

“당신은 감정도 없는 사람입니까? 당신의 그 올바르다는 생각 때문에 죽은 이들이 있습니다. 고통받은 이들도 있었어요.”


재우가 자신의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실험도, 과정도 무시되고 된다는 겁니까?”

“물론이야. 연구와 실험은 결과야. 결과가 모든 것을 보여주지. 여태까지 네가 아파서 먹었던 약들. 당신이 불편해서 이용했던 것들이 어떤 실험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재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결과가 좋다면 과정은 잊혀. 아니, 잊으려 하지. 인간은 편안하다는, 생존 본능을 이기지 못하니까. 살인앱고도 똑같아. 인간의 광기와 치솟은 폭력성을 잠재우고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법? 도덕? 그런 건 이미 구시대적 망상에 불과해.”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건 잘못됐어요. 아무리 편해도, 아무리 약의 효율이 좋아도 그 과정을 문제 삼아 거부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요.”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당신은 무척이나 그 남자를 닮았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우는 살짝 경계의 빛을 띠며 물었다.


“박 현. 말투나 태도. 그 외의 것들도. 그 남자의 영향이라도 받은 건가?”


재우는 고개를 떨궜다. 아까 보였던 경계의 눈빛이 누그러진 채였다.


“안 받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의 머릿속에 마네킹 공장에서 있었던 일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이수는 두 손을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당신을 내 일에 끌어들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역시나.”

“무슨 말씀이죠?”

“내가 말했듯,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해. 살인앱고는 그 결과를 가장 명확하고 간단한 답으로 정의 내리지. 살인앱고가 내린 답은 맨 처음 실험부터, 실패였어.”


·········실패.

과정은 필요 없다. 이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하고, 모든 결과로 실험이 평가된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재우는 잔뜩 미간을 찡그려보지만, 머리가 도저히 이 대화와 그녀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없었다.


“맨 처음의 실험, 연구소 내부에서 일어난 실험은 실패했어. 게임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가장 이상적이고 옳은 모습을 보였으나, 그 결과는 가장 끔찍하고 두려워지는 생존자가 남는다는 결과를 내놓았지.”


녀석은 통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괴물이었다. 살인앱고의 기반이 됐던 실험집단조차 뛰어넘은 생존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즉각 실험은 중지···············돼야 했어. 하지만 대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어. 그런 공포의 대상이 사회에 몰고 오는 효과를 기대했지. 공통된 비난의 대상이 있을 때, 인간은 단결한다. 그게 틀렸다는 걸 알아도, 인간은 60% 이상 다수의 생각에 동조한다.”


그렇게 다음 살인앱고에서 탄생한 것이 박 현태였다.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어. 박현태는 대타가 다룰 수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래서 박 현을 이용하려 했던 겁니까?”


어느 정도 이제 맥락이 잡혀갔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재우는 좁혀진 미간을 펴고, 조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일호와 이호 같은 애들을 유독 많이 투입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던 거죠?”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현을 이용해서 박 현태를 죽이고, 그를 우승시켜 대타까지 무너트리려 했지. 그가 보여준 모습. 정의를 향해 집착. 살인하는 데 있어서 완벽한 자기 통제. 그 모든 게 적합한 남자였어. 날 죽이려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실패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수는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문밖을 향해 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돼. 사적인 이야기는 끝났으니까.”


그러자 일호와 이호가 담담한 표정을 한 채로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던 거야?”

“약 30분 전부터입니다.”


재우는 생각보다 이수와 오래 대화한 것에 먼저 놀랐다. 그리고 이어서 둘을 걱정하며 소파로 안내했다.


“일단 좀 앉아.”


이수는 두 사람이 앉는 것을 보고 나서 입을 뗐다.


“사전 지식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계획에 대해 얘기해 볼까? 두 사람은 어떻게 할지 생각은 정했지?”

“물론입니다.”


일호와 이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리고 일호와 이호가 번갈아가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저희는 이미 김재우님에게 배치된 상황에서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희가 받은 임무는 살인앱고가 진행되는 중에 그를 최대한 돕는 것. 그 이외의 임무는 일체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계획이 살인앱고 안에서.”

“김재우님을 돕는 행위라면.”


끝으로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좋네. 좋아. 역시 실험집단 중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네.”


이수가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수고스럽게 일어나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호와 이호는 묘한 감정에 고개를 숙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지. 이쪽 전력은 형편없으니까 말이야. 내 계획은 일단이래.”


그녀가 고개를 숙여 책상 아래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구월동을 위에서 내려다본 상당히 정교한 지도였다. 그녀는 그중에서 오른쪽 끝에 있는 변두리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대해 알아?”

“가보지 않아서 자세히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는 관광지죠·········? 강을 끼고 있어서 여름 레저가 활발한.”

“맞아. 실질적으로는 대타의 본거지지만.”

“그 말은 제가 잡혀 있던 곳이 여기라는 말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이끄는 대타. 헷갈리니까 이쪽은 그냥 ‘임시대타’라고 부를게.” “알겠습니다.”

“임시대타가 노리는 곳이 바로 여기야. 대타의 본거지. 일주일 후에 대타 본거지에서 매년 하는 큰 회의가 있거든. 임시대타 쪽은 언제나 대타 쪽의 정보를 수집하니까 분명 알고 있을 거야.”


이수가 눈을 위로 치켜뜨며 재우의 표정을 살폈다.


“임시대타의 목적은 어르신들을 제거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조금 결이 달라.”

“결이 다르다고요······?”


재우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의미를 곱씹기 위해서였다.


“나는 솔직히 어르신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낸 ‘실패’라는 결과를 바로잡으려는 것일 뿐. 그리고 그 열쇠가 바로 어르신들 주머니 속에 있을 뿐이야.”

“데이터······ 같은 걸 가져올 셈입니까?”


그 말에 이수는 방긋 웃으며 허리를 폈다.


“정확히는 말소지. 완전히 지울 거야. 기억은 남아도 데이터는 소멸이 가능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 실험 내용과 이제까지 자행한 모든 프로젝트를 삭제할 거야.”


그 말에 옆에 듣고 있던 일호가 입을 뗐다.


“그렇다면, 어르신들이 계신 곳에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사무실 말하는 거지?”


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받듯, 이호가 이어서 말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르신들의 지문과 안구가 필요합니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은 없고?”


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정보를 막 알려줘도 되는 거야?”


재우가 당황한 나머지 두 사람에 물었다. 일호와 이호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눈으로 재우를 바라봤다.


“저희는 이미 재우님을 돕는다고 말했습니다.”

“숨길 정보 따위는 없습니다.”


이수가 그 말에 크게 웃었다.


“그런 거야, 그런 거. 재우. 두 사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좋잖아?”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합니다. 이 두 사람. 어르신들은 왜 저한테 이 두 사람을 맡긴 거죠? 함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재우의 말에 이수는 미소를 지었다.


“함정일 수가 없지. 이번 계획을 위해서 내가 부탁한 거니까. 사실은 모두 박 현이라는 인물을 위해서 해놓은 계획이었지만 말이야.”

“무슨 말입니까?”

“저희는 박사님의 사망과 함께 박 현을 서포트할 것을 ‘명령’ 받았습니다.”


일호가 말했다. 재우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사님의 사망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고, 뒤이어 ‘명령’ 취소 및 대기 명령을 하달받았습니다.”

“당신은 애초에 스파이였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자, 그럼. 우리 계획은 간단해지지? 연우의 임시 대타가 길을 뚫어놓으면, 우리는 재빨리 뛰어가서 어르신들의 안구와 손가락을 쓱, 싹. 데이터를 지운다.”


일호와 이호가 차렷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이해했습니다.”


재우는 그런 분위기에 맞추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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