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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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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5.13 18:25
최근연재일 :
2021.01.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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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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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78.

DUMMY

나른한 기분이 잔뜩 눌러앉은 사무실 안에 5명의 사람이 오로지 택진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이러고 있는 게 자연스러운 수혁과 인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아니지, 컴퓨터만 있으면 만사형통인 수아까지를 제외한 나머지 둘도 각자 나름의 시간 때우기 방법을 터득했는데, 먼저 배득은 노트북을 가져왔다. 지금껏 밀렸던 영화들을 한창 시청할 작정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가져온 영화에 관심을 보이던 유영은 몇 시간 지나자 좀이 쑤시는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더니, 오후 1시가 넘어가서 도착한 ‘증거품, 마네킹’ 쪽에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왜 속을 이렇게 텅텅 비워놨을까?”


유영이 볼펜으로 마네킹의 어깨를 툭, 툭, 내려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뭘 넣어놨었나?”

“폭탄 같은 거라도 넣었나 보죠.”


배득이 답했다. 하지만 애초에 유영은 대답을 의도한 게 아니었으므로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왜 답했어?”

“물어봤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녀가 놀란 부분은 거기가 아니다.


“아아, 아니. 왜 그런 한심한 답을 했느냐고.”

“네?”


배득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이 됐다. 다른 이들이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는 키득거렸다.


“아니 왜요? 저만 몰라요?”

“폭탄이었을 리가 없잖아. 왜냐면 자료에 보면 폭발한 흔적은 단 한 곳도 없었거든.”


배득의 앞으로 유영이 부서진 마네킹의 파편을 보여줬다.


“잘 보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부서트린 흔적들이야. 그 안에서 수면 가스가 새어 나왔다고 자료에도 쓰여 있고.”

“꽤 꼼꼼하게 보셨네요?”


인표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외울 정도로 봤지. 그것보다. 다른 곳에서는 수면 가스가 발견되지 않은 거지?”

“멀쩡한 하나는 사망자 박 현군의 지문만 나왔고, 팔 쪽을 인위적으로 부서트린 흔적이 있는 마네킹은 깨끗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수면 가스 흔적이 있는 쪽은 손상이 워낙 심해서 알아볼 수 없고요.”

“마네킹 제작자도 만나봤지만, 의뢰만 받고 만들어만 줬을 뿐이다?”

“의뢰인은 박 현군이었고요.”


유영은 잠시 서류에 보이는 김재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좀체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지 들고 있는 볼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지. 좀 정리가 안 되거든?”

“·········그건···.”

“그도 그럴게, 네 자료를 외울 정도로 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네가 8년 동안 모았다는 사건. 단순히 사망자 박 현이 사람 죽이고 목적을 완수한 다음, 붙잡히는 게 두려워서 자살한 것으로밖에 안 보이거든. 물론 그 배후에 ‘어플’이라는 게 있다는 건 오케이. 근데 어떻게 잡을 건데? 그거 실제로 있긴 한 거야?”


인표는 그녀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유영은 그런 그의 어두운 표정 아래에 꽉 쥔 두 주먹을 보았다.


“저는 사망자 박 현. 그러니까 그 아이가 절대 혼자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부축인 사람들이 있거나, 또는 무엇인가 그를 그렇게 몰고 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유일한 생존자가 말한 ‘어플’이다? 그걸 너무 순진하게 믿는 거 아냐?”


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몰라요. 제가 너무 순진하게 맹신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아니, 있어야 한다고.”


그가 맹신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하나의 강조였다. ‘어플’의 존재를 자신만은 절대 부정하지 않겠다는 그런 강조 말이다.


“그리고 그 어플은 분명 그 아이에게만 깔려 있던 게 아니었을 거예요. 제가 첫날 설명해 드린 것 처럼요. 박 현군이 관련된 사건들 대부분에 그 ‘어플’이 작용하고 있다고도 전 생각해요. 지인, 주변, 어쩌면 전부 그 어플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근데 이제까지 조사해서 나온 건 없었지? 박 현이라는 걔 휴대폰에도.”

“네.”

“그럼. 내가 전적으로 네 말을 함께 맹신한다고 치면, 어플이라는 건 소유자가 죽으면 그대로 소멸하는 게 아닐까? 자동 삭제, 이런 느낌으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그게 가능하긴 할까?”


유영의 물음이 수아에게 던져졌다. 수아는 키보드 소리를 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가능해요. 간단하게 해킹을 해 휴대폰 제어권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제어권을 공유한 채 무엇인가를 깔아버릴 수 있죠. 링크를 통해서 지우게 할 수도 있고요. 어차피 데이터 더미니까요. 간단하게 설치되는 것만큼 간단하게 삭제할 수 있어요.”


그리고는 그녀가 고개를 바짝 들고 똥그랗게 뜬 눈으로 말했다.


“대신 그건 어려워요. 더미를 지우는 거.”

“더미?”

“네. 만약 어플을 사용했다거나, 깔았다거나 하면 반드시 흔적이 남거든요. 일종의 지문 같은 거죠. 해킹했다면 해킹의 흔적이, 어플을 깔았다면 어플이 깔린 흔적이, 지웠다면 지운 흔적이, 그리고 사용했다면 사용한 흔적이요. 아무리 철저하게 제거했다고 해도, 뭐 하나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에요.”

“발견할 수 있는 거야?”


희망이 깜빡인다.


“근데 쉽게 발견할 수는 없죠. 바보가 아닌 이상 보통은 흔적까지 같이 삭제할 테니까요. 하지만 완전한 삭제는 아마 불가능 할 거예요. 반드시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흔적이 사라졌다고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럼 다음에 의심 가는 사람을 잡는다면 휴대폰을 넘겨줘야겠네.”

“이전 휴대폰들은········· 다 없겠구나.”


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영이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그를 면밀히 바라봤다. 마치 다 지어진 건물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확인하는 건축가처럼 말이다.


“오케이, 일단 알았어.”


얼굴 가득 흡족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진짜 자료를 볼수록 허무맹랑한 이야기여서 말이야. 사람을 부추기는 어플이라니, 도저히 보고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럴걸?”


유영의 말에 배득과 수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이 사건보다 당신을 좀 더 믿어보려고. 전에 말한 것처럼.”

“······저요?”

“응.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니까,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라도 너처럼 맹신해 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 앞에 떡하니 나타나겠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맑게 빛났다. 그 반짝임은 무수히 믿음을 담아 인표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유영 씨.”


그날과 전혀 다르게 비는 오지 않는다. 하늘은 뜨거워 보이는 태양이 잔뜩 열을 내고 있지만, 그걸 간단히 식히는 바람이 곧장 이리저리 불어온다. 바닥에는 바싹 마른 잎사귀들이 뒹굴었다.


“왜 밖에 혼자 나와 있냐?”


수혁이 밖에서 홀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인표에게 말했다.


“그냥이요.”


인표는 저 멀리 사람들이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 안에도 분명 누군가는 살인범일 테고, 또 누군가는 피해자겠지.’


그런 소름 끼치는 생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면서 말이다.


“놀랄 일이야. 사건 외에는 저렇게 눈을 반짝이지 않는 녀석인데 말이지.”

“감사할 뿐이죠.”

“이번엔 뭔가 느낌이 좋아. 그때와 같이 그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끝나고 있는 기분은 아니야.”

“그럴까요?”

“적어도 난.”


수혁이 인표의 손에서 커피를 빼앗아 마셨다.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우리가 이미 그들보다 앞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표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배도 늙으셨나 봐요. 그런 말씀이 나오는 걸 보니.”

“뭐야?”


두 사람이 악의 없는 몸싸움을 한창 벌이려 할 때, 마침 택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인표는 성을 내는 수혁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를 던졌다.


“이놈이 건방지게!”

“어, 결과 나왔어?”


수혁이 건방진 이 후배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까 생각했으나, 휴대폰 속에서 들려오는 택진의 말을 듣고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니요. 그것보다. 또 나왔어요.”

“뭐가?”

“증거 없는 시체요!”


수혁과 인표는 그 외침에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

여기저기 시체를 향해 카메라 빛이 번쩍였다. 웅성대는 관중들을 제재하기 위해 몇 명의 경찰관이 붉은 안내 봉을 들고 그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둘러싸고 있는 곳은 골목 한복판. 으슥하고 좁은 곳도 아니었고, 가로등도 버젓이 시체의 위를 비추고 있는 곳이었다. 흔히 위험하다고는 볼 수 없는 공간인 셈이다.

그 안으로 자연스럽게 폴리스 라인을 들춰 인표의 무리가 현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택진이 활짝 핀 얼굴로 인사했다.


“뭐야, 최 인표!”


날카로운 인상에 며칠은 관리하지 않은 것 같은 거친 수염. 반지하처럼 내려온 다크서클에 푸석한 입술. 카키색 야상 점퍼에 이리저리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박 순경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택진이가 불러서 왔다.”

“짜식이, 형사 관둔 거 아니었냐?”


인표의 어깨에 대뜸 팔을 거는 박 순경의 어깨를 부여잡은 수혁이 목에 조금 힘을 주고 말했다.


“특별 수사다, 임마!”

“어이쿠! 오셨습니까, 선배님.”

“그래. 무슨 상황이냐?”

“뭐, 보시다시피. 살인사건입니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포메이션을 잡고 걸어갔다. 수혁이 가장 앞, 그 뒤로 인표와 박 순경, 이렇게 말이다.


“다만 어떤 멍청이가 8년째,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눈물 콧물 다 흘리는 사건처럼 증거가 없습니다. 주변 주민 신고였고, 현장에 도착한 지는 30분가량 지났습니다.”

“증거가 없다면서 무슨 살인사건이야? 내가 결과 나오기 전까지 확신하지 말라 했지?”

“정황상으로는 확신해도 된다고도 하셨죠.”

“30분밖에 안 봤는데 정황 파악이 돼? 우리가 무슨 명탐정도 아니고. 그리고 선배 그 말 취소하신 지 백 년도 넘었어.”

“뭐?!”


그러다 박 순경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빠르게 배득과 수아, 유영을 훑었다.


“그것보다 들개들을 끌고 다니십니까?”

“들개?”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런 돌아이들 어디에도 안 받아주는 놈들 아닙니까.”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도 다 들리는 그 말에 뒤에 따라가던 유영과 배득, 수아는 정말 들개처럼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걸로 부족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랄.”


그리고 그 말은 복사한 것처럼 똑같이 인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지랄.”

“뭐?”

“너보다는 훨씬 나아.”

“동감이다. 인표 말대로 너보다는 저 세 사람이 30배는 더 나아. 각각 10배씩.”


수혁이 동의하자 할 말이 없어진 박 순경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기 위해 주먹을 꽉 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저 날카롭게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린 애처럼 삐지기는.”

“안 삐졌어요.”

“됐고, 빨리 시체나 보여줘.”


박 순경은 앞에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감식반에게 비키라고 소리쳤다. 감식반들이 그를 흘겨보며 슬슬 자리를 피하자 바닥에 비상계단 안내 표지와 같은 자세로 한 남성이 쓰러져 있었다.

고통스러운 얼굴, 완전히 뭉개진 손가락과 두개골. 보기만 해도 인상이 절로 구겨지는 치명적인 타박상들. 누가 보아도 타살이었지만, 역시나 이 시체 또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보시다시피. 그리고 두 분이 원하셨다시피.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그건 바로 현장 어디에도 몸싸움의 흔적도, 흐른 피도, 심지어 부서지면서 흩어졌어야 할 뼛조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고동색의 번듯한 양복마저 마치 새로 입은 듯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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