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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강 님의 서재입니다.

나도 가면 하나를 주웠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이리강
작품등록일 :
2020.05.20 21:58
최근연재일 :
2020.06.15 23:08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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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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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
글자수 :
120,996

작성
20.05.2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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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시간·수명·젊음 소비자]

DUMMY

하루 전, 열상국(列桑國) 중해공국 루모이 남작령 빠가당 마을.

빠가당 마을은 50여 호쯤의 가구가 살았다.


신기(神紀) 2011년.

늦봄의 어느 날이었다.



풍강흰달의 가족은 가장 낮은 계층인 ‘소비자’ 집안이었다.

일체의 직업도 구할 수 없는 계층.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고, ‘수명’을 소비하고 ‘젊음’을 소비해서 살아야 하는 인생.

별다른 일이 없는 한-사고나 병도 없이 아주 무탈하게 살았을 때마저도 소비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45살 전후였다.

향사나 기사, 남작 등의 제후 눈에 들어 이들 ‘특별한 혈통’이나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자들의-이들은 모두 가면사였다-잡임(雜任)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나마 팔자 피는 거였다.

잡임이란 ‘가면이 없는 소비자’들이 그나마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 취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


하지만 남작이 잡임으로 고용할 수 있는 소비자의 수는 50명을 넘을 수 없고 상급기사는 25명, 기사는 15명을 넘을 수 없었다.


준기사 계층인 향사는 5명.



흰달과 그의 가족이 사는 ‘빠가당 마을’은 촌구석 동네였다.


열상국(列桑國)의 제후 중 중해대공 청휘상웅(淸彙尙雄)이 다스리는 중해공국 영지 중에서도 서쪽에 속한 ‘루모이 남작령’ 내에 있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딱 세 번 버스가 다녔다.


마을의 유지는 농사(農師) 박구태(朴邱兌)와 원예사인 영정인희(永井人熙)였다. 둘 다 향사 훈작이 있는 가면사였다.

박구태는 4,000평의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부가면 소유자였고 영정인희는 5,000평의 과수원과 채소밭을 경영할 수 있는 원예가면 소유자였다.

각각 잡임 5명을 고용하고 ‘소비자’에게 ‘돈’을 봉급으로 줄 수 있는 준 귀족계층 신분이었던 것.


그 외에 영주의 ‘산지기’인 곽서춘배 어른과 촌정 석보수철이 그나마 셌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오늘은 영정 씨 마님의 과수원과 채소밭이 잘되도록 해 주십사하고 정령들에게 ‘고수레’를 지내는 날.

흰달이 갔을 때는 이미 마을의 늙수그레한 아줌마와 아저씨들, 아직 젊은 처녀와 총각들 그리고 알쏭달쏭한 시기인-집안에서의 위치도 애매해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소년과 소녀들까지 잔뜩 와서 ‘고수레’ 준비를 돕거나 구경하고 있었다.

‘영정근식’이 삐딱한 눈으로 흰달을 봤으므로 흰달은 오른손으로 뒷덜미를 긁적이면서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어제는 한바탕 싸웠지만 그렇다고 원수지간이 된 것도 아니잖냐?’ 뭐 이런 정도의 의사 표시를 하고 싶었던 것.


이게 다 곽서리자(郭徐梨子) 때문이었다.


산지기 어른의 딸 ‘리자’를 두고 흰달은 근식과 알력이 있었는데 어제 결국 대판 주먹다짐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소비자 팔자일지언정 흰달의 가슴은 청춘의 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 리자는 빠가당 마을의 제일 예쁜 처녀였다.


흰달의 얼굴은 여기저기 부어있었고 눈퉁이도 퉁퉁 부어있었다. 코뼈도 부러진 걸 겨우 맞춰놓은 상태였다.

근식의 얼굴도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입술도 터져있었고 세 군데쯤은 멍이 들어있었으니까.


근식의 엄마인 영정인희는 사람들을 시켜 흰달을 적당히 치도곤을 놨다.

흰달이 생각해도 확실히 너무했다 싶었다. 준기사 계급인 향사의 아들을 팬 것은. 아무리 동갑이라고 해도.

‘가면사’인 영정인희의 위신을 생각하면 마을 사람 누가 봐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짓을 흰달은 했던 것.

이놈의 성질이 문제였다.

“감사합니다요.”

다 맞고 나서-멍석말이 당하듯 맞았지만-뼈들이 아주 결딴나서 죽을 만큼 맞지는 않았다 싶어서, 그럴 정도로 때리게는 시키지 않은 영정 씨 마님에게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올렸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

“그럼요. 네, 알겠습니다요.”



“고수레하는데 내가 지게 좀 져주려고 왔지.”

“흥. 뭘 얻어 처먹을 게 있나 와봤겠지.”


‘음.’

흰달은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싸웠건만 리자가 마을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농사’인 박구 씨 어른의 둘째 아들인 ‘박구성규’란다.

어제 그 싸움이 있고 나서 마을 소녀와 처녀들이 모여서 리자에게 마을 총각 중 누가 제일 좋냐고, 좋아하는 순서대로 말해보라는 윽박질과 꼬임에 빠져서 1번부터 5번가지 순위를 말했다는데······.

‘우리끼리 비밀이다.’

‘당연하지.’

분명히 이랬을 거다.

리자는 순진했던 것.


1위는 박구성규였고, 2위는 영정근식이었다.

소문이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야, 5위.”

‘윽.’

촌정의 아들 ‘석보상절’이 느닷없이 뒤에서 어깨동무하자 흰달은 찡그렸다.

금이 간 갈비뼈들이 결렸던 것.


흰달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 하얀 피부,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미남이냐, 미남 축에 드느냐는 소녀와 처녀들 사이에서 꽤 논쟁거리였다. 분명한 것은 평범한 축 이상이란 것.

마을의 소년, 청년 통틀어 누가 제일 잘 생겼냐 따지는 여자들만의 투표에서 5등 정도는-때때로 이 순위는 변했지만-되는 외모였다.


“이 녀석. 분명 갈비뼈 몇 개는 나갔을 게 분명해.” 석보상절은 말했다. “그래도 너희 집, 마님 고수레를 도와주겠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이렇게 온 거면 정성이다. 정성이 아니냐?”



‘그려.’ 근식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어차피 너희가 나하고 대거리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때뿐일 거다.’



꼬르륵.

흰달은 기름과 고기 냄새에 콧구멍을 벌름대며 ‘삼보 중 무엇을 팔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제 자신이 가장이다. 성년이 되었으니 가족을 위해서 젊음·수명·시간 중 하나를 팔아야 할 때였다.

소비자의 평균 수명은 짧다. 그래서 대부분 일찍 결혼해야 했다.

귀족이나 제후 가문의 아가씨에게 데릴사위나 남편 중 하나로 채택될 팔자가 아니라면 일찍 결혼해서 최대한 아들딸 많이 낳고 아내와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수명·시간·젊음’을 팔고 일찍 죽는 것도 멋진 남자의 인생인 거다.


흰달의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래. 지게를 지겠다고?” 영정인희는 말했다. “흰달이 그럼 과일 지게를 져라.”


영정 씨 마님은 흰달의 엄마보다 나이가 다섯 살은 많았지만[45세] 30년은 젊어 보였다.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젊음을 팔아먹은 적도 없고, 소문대로 ‘젊음의 포춘크리스털’을 복용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윽.

지게에는 저장고에서 꺼낸 온갖 과일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갈비뼈가 뜨끔뜨끔, 찌릿찌릿 아팠지만, 흰달은 과수원의 제단이 차려진 곳까지 지고 날랐다.

그 뒤로 고기를 담은 커다란 솥을 짊어진 삼포인호(三浦人戶)가 뒤따랐다. 몇 겹의 전 광주리를 진 제갈학강(諸葛學剛), 술 단지를 진 남구운냥(南區運兩) 등도 기우뚱기우뚱 따라왔다.



“···모든 산천과 땅의 숲과 시내와 강과 바위, 풀과 꽃과 나무와 식물과 과일을 지배하시는 정령왕과 정령들께서 은덕을 베푸사 훈작 향사, 종8품 산관, 원예가면사 영정인희가 5,000평의 과수원과 채소밭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뿌리와 해충과 조수의 침범을 막아주시며 늘 풍성한 수확을 얻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모두의 혈통에 아득한 태고시대의 인간들이 범한 원죄가 흐르니 가엾게 여기사···”



꿀꺽.

제단에 넘치도록 진열된 각종 고기와 과일, 전, 나물, 어물, 과자, 고깃국, 술, 떡 등을 보던 흰달은 고개를 돌렸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신작로에 황토 먼지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버스는 종점 공터에서 돌고 있었고, 정거장에서 내린 초등학생들은 자그마하게 보였다. 무리를 지은 채 그들이 외치거나 웃고 떠들며 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신들이 정한 율법, 인간들을 위한 자비. 오늘도 신들을 찬양하고 원죄를 회개하는 빛나는 아이들.


아이들이 부르는 낭랑한 노랫소리도 울려 퍼졌다.



***


흰달의 집은 산비탈에 면해있었다.



흰달의 가족도 한때는 도시에서 살았다.

가면이 대량으로 떨어지는 신의 유희는 도시 중심이었다. 도시에서 버텨야 그나마 소비자들도 가면을 주울 기회라도 맛볼 수 있었다. 향사나 기사들도 도시에 몰려있으므로 그들의 잡임으로 들어갈 기회도 더 많았다.

촌구석 삶-소비자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흰달의 아버지 누리영섭도 성년이 되자마자 남작령 도시로 나갔었다.

드디어 ‘젊음·시간·수명’을 팔 수 있는 나이가 된 수많은 청년과 처녀들이 그렇듯이, 도시로 가서 돈을 펑펑 쓰며 기회를 노리듯이.

“‘나도 가면 하나를 주울 겁니다.’ 너희 아빠는 이렇게 큰소리치고 고향을 떠났단다. 그렇게 도시에서 나를 만나게 된 거야.”


하지만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제후가 도시를 건설하는데 들어간 돈만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흰달의 아버지 누리영섭과 엄마인 풍강혜몸도 ‘젊음·시간·수명’을 소비하면서 도시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한계에 도달했다.

영섭은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은화, 흰달, 새봄 그리고 삼남매의 엄마인 풍강혜몸은 임대주택에서 나와 아빠의 고향인 ‘빠가당 마을’로의 낙향을 결심했다.

“엄마, 엄마는 연로하시고 가족을 위해 충분히 하셨으니 이제 남은 건 내 몫이에요.”

그때 흰달의 누나인 은화의 나이는 18세였다. 흰달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새봄은 한 살이었다.

은화와 흰달 사이에 있었던 그 당시 열세 살짜리 형은 유괴된 건지, 어디서 죽은 건지 행방불명됐다.

“혹시 모르죠. 10년 후쯤 깨어나 보면 우리 흰달이 늠름한 가면사가 되어있을지도. 쥐구멍에 볕 드는 것처럼 우리 집 팔자가 펴있을지도 모르죠. 흰달아, 세상에 믿을 건 가족밖에 없었다. 가족이란 서로를 희생해서 서로를 보살피고 도와줘야 한다.”

누나의 말에 아홉 살 흰달은 끄덕였었다.


그때 누나에겐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었다. 그 대신에 가족을 위해서 10년의 ‘시간’을 소비하기로 했다. 팔아먹기로 했다. 소비자의 팔자와 삶이란 그런 것.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모두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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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64 단홍시
    작성일
    20.05.21 02:33
    No. 1

    이번에도 독특하고 참신한 설정이네요! 기대하겠습니다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추운겨울날
    작성일
    20.05.21 10:07
    No. 2

    재미있네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테사다
    작성일
    20.05.21 10:20
    No. 3

    영화 인타임처럼 시간을 사고 팔수는 있는데, 젊음이 영원하지는 않네요. ^^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잘 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오얏꼬
    작성일
    20.05.21 15:30
    No. 4

    프롤로그에서 마스크가 나오길래 짐캐리의 마스크가 생각났는데 지금 2회차에서 시간으로 소비한다는것을 보고 인타임이란 영화가 생각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오얏꼬
    작성일
    20.05.21 15:50
    No. 5

    근데 수명,하고 시간은 동의음이 아닌가요. 시간이 줄면 당근 수명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0 이리강
    작성일
    20.05.21 22:25
    No. 6

    ~~
    오얏꼬님^
    수명과 시간은 설정을 좀 달리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단이천
    작성일
    20.05.22 01:40
    No. 7

    모계 성씨를 따르나봄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30 이리강
    작성일
    20.05.22 22:19
    No. 8

    ~~성씨의 문제는 부모 중 강력한 혈통 쪽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자식이 태어났을 때 가문이, 부모가 의논하고 합의해서 자식들의 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땐 신탁으로 결정하고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0 노르에피
    작성일
    20.06.28 09:02
    No. 9

    이름 작명이 4글자인건 일본식 작명 같은 느낌이....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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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작님의 품에 안겨] +4 20.05.27 298 41 12쪽
7 [나도 가면 하나를 주웠다 5] +6 20.05.26 350 38 11쪽
6 [나도 가면 하나를 주웠다 4] +10 20.05.25 368 46 11쪽
5 [나도 가면 하나를 주웠다 3] +4 20.05.23 383 36 10쪽
4 [나도 가면 하나를 주웠다 2] +2 20.05.22 353 36 13쪽
3 [나도 가면 하나를 주웠다 1] +3 20.05.21 419 38 12쪽
» [시간·수명·젊음 소비자] +9 20.05.20 494 35 10쪽
1 [열신의 유희] +10 20.05.20 1,213 7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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