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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quer_R

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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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81 회
조회수 :
9,421
추천수 :
82
글자수 :
474,693

작성
19.06.20 16:41
조회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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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경계#5

DUMMY

배 위의 시간은 한가하게 흘러갔다. 하늘 높이 올라온 햇살과 바다의 서늘한 짠내가 마치 여가를 온 게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와 다르게, 선원들은 다들 갑판 위를 돌아다녔다. 쇠로 된 테두리 위에 활을 장착하고 어딘가를 조준했다.


마침 갑판을 지나가던 시오르는 고개를 내밀어서 무슨 일인가 살펴봤다. 선원들은 다급하게 화살을 가져오고, 끓인 물을 양동이에 담아왔다. 레아는 시오르의 뒤로 다가와서는 어깨를 콕콕 찔렀다.


"갑자기 왜 멍 때리고 있어?"

"저기 뭐 하시는가 해서."

"거미들이 자라는 계절이라 그래. 저번에 말했던가?"

"붉은 점박이 거미인가?"

"응. 산란기라서 원체 민감해서 말이지."


말하기 무섭게, 건너편 언덕에서는 붉은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검은 등 위에 새겨진 붉은 점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배를 바라봤다. 언덕을 전부 오른 거미는 재빠르게 뒤돌더니 배 위의 선원들을 보며, 하얀 실을 흘려댔다.


"우선 내려가자. 바깥에 있으면 위험할지 몰라."

"그래."


거미들은 다닥다닥 소리를 내며 배 근방에 몰려들었다. 시끄럽게 울부짖는 것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온 이방인을 쫓아내기 위함임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나가야 했기에, 더욱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배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잠시 가만히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태세를 갖추라던가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소리는 들렸지만, 아직까진 큰일이 없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 위에 앉았다.


"아, 내일이면 도착인데."

"심심하네. 문도 조금만 더 하면 고칠 것 같은데."


시오르는 손 위에 못을 띄우고는 날을 가다듬었다. 원소 마법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자주 다루던 철은 간단하게 가공하기는 쉬웠다. 레아와 힘을 합한 덕에, 거대한 문을 고칠 방법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못을 넣을 부분을 메울만한 방법을 찾으면 된다. 퍼거스의 말로는, 비상용 아교와 남아도는 나무판을 준비해오겠다고 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라, 아직도 문은 고치지 못했다. 바깥에서 선원들의 함성이 들렸다. 거미를 겁주기 위한 행동이 계속되자, 시오르는 못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어두고 레아를 봤다.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눈이 특이하구나."

"그렇지? 마력이 모자라면 좀 짙어진다고 하더라고. 확인해보니 무슨 병은 아닌 것 같고, 유전된 것 같아."

"유전? 그런 사람들이 있나?"

"마력에 따라 머리색이 바뀌는 사람도 있다더라고. 아마 그런 부류인 것 같아."

"멋지네."

"뭘, 그렇게 따지면 네 눈동자도 제법 신기한데."

"내 눈동자?"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거울을 바라봤다. 특별할 것 없는 푸른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맑다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오른쪽 눈을 자세히 봐봐."

"오른쪽이라...."


세세히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오른쪽 눈에서 옅은 고리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봤다. 상당히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고 희미한 선이다. 이에 시오르는 놀란 듯이 레아를 바라봤다.


"뭐야, 이건."

"나도 모르겠어. 예전부터 신경 쓰였는데, 너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런가...."

"네 몸이 약한 거랑은 큰 관련 없을 거야. 그랬으면 나르시아 님이 말해줬겠지."

"역시 레아는 이런 것도 잘 보는구나."

"그냥 우연찮게 알게 됐어."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수줍은 듯이 다리를 끌어안고는 팔로 붙잡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시오르는 그녀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보아, 나중에 물어보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느꼈다.


게다가 마침, 그의 정신도 잠깐 다른 데로 갈 만큼 일이 생겼다.


"저거, 거미 아니야?"

"여긴 바다 쪽이니까 거미가 있을 리가.... 엄마야!"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작은 거미 하나가 레아의 침대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거미는 반갑다는 듯이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장면에 두 사람은 식겁하며 거미를 찾아야만 했다. 만약 바깥의 붉은 점박이 거미 새끼라면, 일생일대의 위험한 독에 쏘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


밤이 되자, 달빛은 게슴츠레 바다를 훑어봤다. 간혹 작은 배 몇 척이 지나가곤 했으나, 주로 바다의 고요함을 넘어서 이동하는 것은 퍼거스의 배였다. 한참을 밤을 새우며 주변을 경계하는 선원은, 우연히 뱃머리로 나온 나르시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바닷물을 얼음으로 바꾸어서 끄집어 올리더니, 여러 모양으로 바꾸기를 반복했다. 검이 되기도 했고, 꽃이 되기도 했으며, 마지막에는 사슬이 되어 늘어졌다. 마법을 마친 그녀는 사슬을 멀리 던지며 마력만 다시 끌고 왔다. 얼어붙은 사슬은, 다시 물이 되어서 풍덩 하고 빨려 들어갔다.


나르시아는 자신의 팔에 돌아온 마력을 애써 붙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마력이 다시 자신에게 회수되지 않았다. 손 틈으로 새어나가는 모래처럼 마력은 점차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마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더라도, 순수하게 몸에서 끌어낸 마력은 마법사에겐 최고의 힘이다. 조금이라도 마력이 짙으면 더 복잡하고 체계적인 마법을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만족하지 못했다.


마력이 파란색을 못 벗어날 정도로 눈에 띄게 짙은 힘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소모하는 마력을 아끼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녀는 아직 자연마법을 익히지 못했다.


"제길."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상당히 빼곡히 적힌 자연마법에 대한 정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필기는 아니었으나, 무척이나 그녀의 글씨체와 비슷했기에 그녀는 수첩을 닫았다.


괜한 생각이 밀려올 무렵,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레아는 붉은 로브를 입고는 선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딱히 배 위에선 외출할 곳도 없기에, 그녀가 로브를 입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로 여긴 나르시아.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리자, 레아는 나르시아를 보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외출이라도 하는 거야?"

"아, 아뇨. 그냥 개인적인 미신이에요."

"미신?"

"밤 중에 돌아다닐 때는 자주 입거든요. 이걸 입고 있으면 어딘가 운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

"하긴. 세라스도 필기한 내용을 더 쉽게 외운답시고 종이를 삼키니 말이야."


나르시아는 피식 웃었다. 운이 없다고 칭얼거리는 그녀다운 행동이다.


"나르시아 님은 그런 거 없나요? 딱히 효과는 없지만, 왠지 하면 일이 더 잘 풀릴 것 같은 거요."

"있긴 하지. 의식하고 그러진 않고, 남들이 그렇다고 하더라."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보여주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은 대부분 물어뜯긴 흔적이 남아있었다.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더라고."

"그렇군요."

"보다, 오늘은 좀 소란스럽던데. 거미니 뭐니 해서."

"오늘은 선상으로 나오신 적이 없나요?"

"없었어. 선실에서 잠깐 책 좀 보느라."

"그럼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붉은 점박이 거미 서식지를 지나쳐왔거든요."

"아, 오늘이 두 번째 달하고 열아홉 번째 날인가? 봄철이니 어렴풋이 맞겠네."


말을 마친 그녀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혼자 식구를 부양해야 할 소녀라기엔, 너무 가녀린 모습이다. 새하얀 피부는 병자의 피부가 아닌,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을 줬다. 특히, 평소와 다르게 한갈래로 묶은 머리는 조금 더 어른스러웠다.


이질적인 모습에 나르시아는 이전부터 피어오르던, 꺼림직함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혹시 시오르와는 사이가 어떻니?"

"저는....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절 신뢰해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이전에는 어땠길래?"


그 말에 레아는 얼굴을 붉혔다. 의미를 알아들은 것인지, 질문에 당황한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르시아는 괜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게 눈을 돌리고 있었다. 이에 레아는, 조금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정말 좋은 친구였거든요. 전적으로 믿고 따라도 될 만큼."

"혹시, 네가 이전에 현장 실습 나섰을 때...."

"네. 혹시 시온이 말한 적 있었나요?"

"당연하지. 그때 이후로...."


잠시 말을 하려던 나르시아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말을 멈췄다. 그러한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레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이후로는요?"

"나름 뿌듯해했어. 당사자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처음엔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기분 좋아하나 꼴사나웠거든. ...미안."


어색하게 웃는 레아의 모습에, 나르시아는 마지막에 목소리를 낮췄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새나간 것 같아서 속이 불편했다.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잠시 환기한 나르시아.


"이럴 거면 당사자 앞이니까 말 안 하는 게 더 예의였나 싶네."

"아뇨, 그래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보단 다행이에요."


나르시아는 레아의 눈빛을 바라봤다. 차마 자신과 눈동자를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을 이리저리 훑고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있던 손도 손톱을 매만지듯이 더듬거렸다.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차분함과 상냥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상한 곳에서 어긋나는 모습에, 나르시아는 레아가 평범함과 거리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것이 어쩌면 조나단이 저번에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나르시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이상했던 부분을 찾아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오르의 친구 일은, 그녀의 일이 아니니까.


"다시 한번 사과할게."

"괜찮아요...."


힘이 없는 듯한 레아는 천천히 배를 맴돌았다. 도망가듯 움직일 뻔했던 나르시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 붙잡고 사과하거나 다른 말을 한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등 뒤로 비춰지는 그림자는 어째서인가 그녀를 향해 늘어지는 것 같았다.


레아는 멍하니 바닷가를 바라봤다. 한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과거를 되뇌었다. 나르시아와의 대화 덕에 다시 그날이 떠올랐다. 어느 때보다 외롭고 갈팡질팡하던 시절, 드디어 의지할 누군가를 얻은 날. 그 얼어붙은 산기슭에서의 시오르는 그녀에게 그 누구보다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시오르의 푸른 눈빛. 그 안에 담긴 옅은 고리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나 가까이에서 바라봤던 눈동자를, 그녀의 삶을 바꾼 그날의 기억을 어찌 잊겠는가. 로브를 매만지며 레아는 회상에 잠겼다. 혹시, 그가 그날의 자신을 기억하고 다시 손을 내밀어줄지도 몰랐으니까.


작가의말

종강과 무더위가 슬슬 다가오고 있군요

지금은 휴학생이니 괜찮다지만, 무더위는 초금...ㅎ

여튼 여러분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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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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