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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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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8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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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4
추천수 :
82
글자수 :
474,693

작성
19.10.1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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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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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정말로 잃어버린 것#6

DUMMY

세라스는 붉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며 석재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 뒤편에 있는 동굴과 이어진 길은 마을에서 제일 우중충한 곳이다. 그런 곳을 지나면서 한층 더 기분 나빠진 그녀는 투덜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염색이 많이 빠진 탓에 아침부터 다시 머리를 붉게 물들이던 그녀는, 하필 염색약이 담긴 통을 바닥에 엎었다. 덕분에 불쾌한 기분인 채로 하루를 시작했고, 시종들은 종일 저택 바닥을 닦아야 했다. 다만, 그녀가 화난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충분히 추측했던 시오르에게, 알렌은 나르시아가 그를 싫어했다고 말했다. 그 말의 진위 여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드디어 모인 4남매의 첫 대면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이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녀도 영원히 비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고 나서 이야기해도 되는 일이다. 아니, 시오르가 마음을 추스를 때에 하나씩 풀어내는 것까지 고려했다. 간단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여태까지의 지론이다.


리버스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 누구보다 집안을 보듬었던 어머니의 사망은 많은 것을 바꿨다. 분명히 이 사실만으로도 시오르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드리워냈을 것이다. 그는 상처받아야 마땅할 일에도 웃고 있는, 이상한 가족이었다. 그가 미쳤거나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면, 분명 그도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계단에서 발을 완전히 떨어졌을 때, 동굴 앞에는 알렌이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따지러 찾아왔기에 세라스는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며 알렌에게 걸어갔다.


"알렌, 아직도 반성 안 했어?"

"반성?"


알렌은 세라스의 말에 어이가 없는 듯이 손가락 튕기듯이 팔을 내저었다.


"부모님 묘까지 데려다준 게 잘못이야?"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안 그래도 힘들 녀석한테...."

"그럼 언제까지 전부 비밀로 할 거야?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평생?"


그 말에 세라스는 씩씩거리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알렌 또한,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한 것을 후회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그땐 내 잘못이야. 그래도 다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래서 다 말한 거야?"

"응. 부모님 소식부터, 우리 집안의 이야기까지."


가계는 기울지 않았다. 단지 약혼자도 없이 이대로 가문을 이어간다면 그대로 핏줄이 메마를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은 성인도 아니고, 나르시아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가문을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은 그녀를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만든 원인이니까.


시오르는 결코 알렌이 그날 했던 발언의 진위를 묻지 않았다. 이런 점은 기억이 없어도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 알렌. 그는 멍하니 무덤 앞에 선 형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울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토록 그를 그리워했던 부모님은 이제 없다. 차가운 돌바닥 아래에 묻혀서, 영원히 침묵할 뿐이다. 만약 영혼이 남아있더라면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나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최선이다.


알렌은 형을 떠올렸다. 허약한 점만 제외하면 어디에 내어둬도 부끄럽지 않았고, 자신의 자부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형의 달라진 모습은 분명, 상상도 하기 싫었던 일이다. 그렇지만 내면에 깃든 것은 같았기에 그는 희망을 품었다. 설령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과거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역시 어쩔 수 없나."

"쟤는 왜 저기서 가만히 있어?"

"잠깐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기억이 돌아온 걸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봐도, 시오르는 울 기세가 없었다. 기억이 없는 척하고 있을 수 없는 곳에서 그는 조용히 부모가 묻힌 곳만 응시했다. 이 사실에 세라스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그녀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기분 좋지 않은 시원함에 세라스는 팔을 부르르 떨었다.


"뭐 해?"

"...이상해서."


시오르는 얼빠진 듯이 중얼거렸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모습은 달랐다. 굳게 다문 입술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 모든 게 그의 마음을 표현했다. 단지, 멀었기에 보지 못했을 뿐이다.


"가족이잖아. 날 18년이나 키워준.... 부모님이잖아."


물결치는 목소리에 세라스는 고개를 돌렸다. 시오르는 살짝 새어 나온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나. 슬퍼야 하는데.... 떠올려야 하는데...."


세라덴 데피드 리버스, 그의 아버지는 레쉬리안 혁명 때 세상을 떠났다. 옳지 못함에 저항하고자 자신의 영지를 열어줘서, 이브리스 가문에게 치명타를 꽂았다. 하지만, 네메시스티아에서의 전투에서 날아든 마력에 몸을 관통당해 사망했다. 그 사실을 듣고 집안은 슬픔에 잠겼다.


어머니, 아리안 기니쉬가 그 뒤를 이은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천성적인 지병으로 고통받던 그녀는,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서서히 시들어버렸다. 그런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시오르를 기다렸다. 분명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일 것이라며, 내밀었던 손을 그대로 떨궈버렸다.


천성적인 나약함을 물려준 어머니도, 가문을 부흥시킬 거란 기대감을 물려준 아버지도 시오르에게 할 말이 많았다. 축복받은 세대의 정점에 설, 모든 조건을 갖춘 아들이다. 하지만 시대가, 집안이, 핏줄이 모든 것을 붙잡았다. 그가 차라리 평민이라면 명망 높은 귀족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시오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들 덕분이라며, 그것들이 자신을 붙잡은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붙잡고 있다며. 그렇기에 그의 부모는 눈 감는 순간까지 비탄하고 애원했다. 악마에게 빼앗긴 자식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시오르...."


그는 부모의 죽음에 슬퍼하지 못했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서러워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세라스는 그렇게 생각해봐도 그의 흐느낌이 자신을 울릴 것 같았다. 그의 슬픔이 떠나간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슬픔인 것만 같았다.


알렌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계단 위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형을 빼앗은 악마인가 싶어 기분이 나빴지만, 그 시선이 사라질 때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걸어오는 시오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제는 완벽히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올 뿐인 알렌. 이제는 정말 자신보다 왜소해진 형을 보며,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을 걸었다.


"이젠 괜찮아?"

"응."


언제나 참아왔던 것이라고 생각이 든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으로 가는 길을 앞장섰다. 그간 자신이 알던 형의 모습 뒤에 감춰졌던, 진짜 시오르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왼쪽 눈이 지끈거렸다. 그때, 시오르가 처음 자신 앞에서 울었던 기억이 다시 마력을 타고 기어들어 왔다. 그도 평범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야만 했기에.


세라스는 겨우 눈가에 아무것도 맺히지 않게 참아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그녀는 시오르는 눈치를 살폈다. 상당히 진정된 것인지 눈가가 심각하게 축축하지 않았다. 그제야 조심스레 시오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지금 언니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응. 나갈 일이 없다고 하는데도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아서."

"분명 마법에 관한 연구 때문일 거야."


세라스는 그렇게 답하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뒤따라오는 시오르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나랑 언니가 가진 힘은 말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오는 거거든. 원소 마법 중에서 화염을 잘 다르고 싶었을 뿐이지, 내 온몸이 더위에 찌들어 살고 싶다는 건 아니라고."

"그래서 그걸 풀어낼 방법을 찾는 거지?"

"그래도 강한 마법을 쓸 때마다 뿌듯한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마법을 잘못 활용한 것이라 추측하는 시오르의 말을, 짐작하지 못한 세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이기에, 그리고 귀족이기에 차라리 힘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을 덧붙힌 그녀. 알렌은 그들의 말에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마법을 이어나가는 가문에서 무술을 익힌 건 묘한 일이다. 그래도 원했기에 선택했고, 인정받았기에 나아간 것이지만.


"한동안은 언니도 왕궁으로 불려갈 일도 없고, 테사르노에서 나오면 알아서 찾아오니 걱정할 건 없지. 한동안은 편히 있는 게 전부야."

"영지 관리도 하면서 그럴 수 있어?"

"사실 좀 대놓고 맡겨두고 대충 넘어가는 식이긴 하지만.... 문제 생길 일이면 아예 직접 나서고, 대부분 평민들의 요구 사항을 반영해서, 일 처리가 어지간히 늦는 게 아니면 다들 좋아해."


고개를 끄덕인 시오르는 계단 끝에서 멈춰 섰다. 남매는 발소리가 멈추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아, 잠깐 지금이 몇 시인가 생각해보느라."

"딱히 우리 둘은 시계 안 들고 다니는데...."


시간은 대도시 광장이 아니면, 비싼 마공학 시계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다. 아니면 해의 위치를 보고 판단하는 게 전부다. 고개를 들어 올린 시오르는 눈대중으로 시간을 파악했다. 생각보다 오래 있었는지, 해는 슬슬 정상에서 서서히 기울어졌다.


"레아가 기다리겠네. 먼저 가볼게."

"알겠어. 혹시 저녁에 시간 되면 내 방으로 와줘."


알렌의 인사를 받은 그는 저택으로 달려갔다.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거친 숨을 쉬는 모습에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아까보단 진심으로 밝은 표정이라 생각됐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던 세라스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살짝 닦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쟤 부르는 거야? 또 이상한 소리 하는 건 아니겠지?"

"이야기할 건 다 했어. 부탁받은 게 있어서 그래."

"부탁?"


처음 듣는다는 세라스의 표정에, 알렌은 듬직한 어깨를 으쓱였다.


"형이 지금 마법에 대해서 여럿 찾아보는 중인 건 알지?"

"당연하지. 어제 그렇게 불러도 안 나왔잖아."

"혹시 자기 방에 있는 책과 관련 있는 게 있나 물어보길래, 일전에 나한테 빌려줬었던 책이 있거든. 찾아보고 준다고 했어."

"찾긴 찾았고? 짐승 우리가 따로 없던데."

"말을 해도 꼭.... 잘 보관해뒀으니 진작 찾았지."


얼굴을 찌푸린 알렌은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만, 어딘가 고민이 깊은 표정에 세라스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그래서, 무슨 내용인데?"

"체내 마력에 관한 내용."

"음.... 치료마법이라도 배우는 건가? 레아 언니도 같이 다니던데."


알렌은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으나, 어딘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여겼다. 그가 가진 책은 체내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게 아니다. 질병보단 명백히 공격성을 띄는 마법을 위한 기록이다. 그렇기에, 알렌은 그 부분을 딱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레아.... 누나던가."

"왜?"

"조금 꺼림칙해서 말이야."

"그 녀석한테 과하게 잘해주는 거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레니브에서 걔한테 진 빚이 많았다고 말했잖아. 같은 또래도 없어서 시오르가 거의 유일한 친구였고."

"그렇긴 한데.... 형 자는 중인데 방 근처를 서성이거나, 조용히 따라다니거나. 어딘가 소름 끼쳐서."

"그게 그 언니였어?"


세라스는 놀라서 입을 가렸다. 가끔 시종들이 이야기하는 시오르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가, 라흐벨인 줄 알고 있었다.


"뭐, 형이 말해왔던 걸 생각하면 좋은 사람이겠지만.... 밤 중에 잠깐 화장실 좀 가려고 하면, 자꾸 마주쳐서 놀란단 말이지. 매번 마주하니, 매일 밤, 형이 있는 방 앞을 서성이는 건가 싶고."

"하긴, 넌 걔 방 바로 앞이고 언니는 정 반대편이니까."


두 사람은 그 뒤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얼음 조각은 조금씩 녹아내리며 모습을 감췄다.


작가의말

갑작스레 겨울이 온다고 하니, 별로 안 믿겨지네요.....

오늘도 보러 와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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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69 잘못된 시작들#2 20.01.16 42 0 15쪽
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65 갈라지는 비극#1 19.11.21 31 0 13쪽
64 정말로 잃어버린 것#9 19.11.14 43 0 19쪽
63 정말로 잃어버린 것#8 19.11.07 55 0 14쪽
62 정말로 잃어버린 것#7 19.10.24 38 0 14쪽
» 정말로 잃어버린 것#6 19.10.17 3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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