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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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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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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7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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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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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마지막 여명#2

DUMMY

"난 판을 짜는 일은 좋아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완벽한 판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딘은 킬킬대며 허공에 뜬 나르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마법진 수십 개가 밧줄처럼 모습을 바꾼 채, 나르시아를 딘의 오른손에 맞춰서 멋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야 더 재미있는 거 아닐까?"

"시끄러."

"1할의 가능성, 아니, 그보다 더 작은 가능성이라도 그게 날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짜릿하단 말이야. 그래서 이브리스 가문의 책사로 있을 때도 제법 즐거웠단 말이지. 어차피 무너질 게 뻔히 보이는데,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 여기까지 왔다네."


차갑고 매정한 모습의 남자가, 비웃듯이 잡담을 늘어놓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나르시아의 우려가 점차 커지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딘은 지금껏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어디서 꺼낼만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조종받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모습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난 너희가 마음에 들었다. 그게 너희에게 일어난 불행이지."

"언제부터 이런 거지?"

"루니르노가 적극적으로 시오르, 정확히는 라흐벨을 배제하고자 얼마나 많은 수를 들였나부터 생각해본다면...."


지팡이로 무너진 잔해를 두드리자, 또렷하던 성벽은 갑작스레 모습을 감췄다. 불 꺼진 통로는 완전히 왕성과 똑같았다. 차이라면 누군가 마법으로 이곳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도록 막아뒀었다는 부분이다.


"처음부터겠지."

"마치 태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다니. 허세가 심한 거 아니야?"

"그럼. 기만은 일종의 전술이지. 하지만 우리 형, 아니, 시나한이 짚은 인재는 분명 우리를 가로막으리라 생각했네. 문제라면 녀석과 라흐벨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 그걸 위해서 녀석이 첫 계약을 맺고자 도움을 구할 때, 루니르노 신도를 좀 섞어 보냈네."

"하지만 그날 술식이 엉망이 된 건...."

"우연이지. 단지 한 남자의 지병이 일으킨 우연."


나르시아는 필사적으로 마력을 흘려보냈지만, 오히려 그녀를 묶은 마법이 강해졌다. 마법의 구조를 눈치챈 그녀는 결국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 칠수록 죽음을 앞당기는 거미줄과 같았다.


"하지만 기회야 주어졌으니, 우린 자연스럽게 리아 님을 계약에 끌어들일 수 있었네. 그 틈을 붙잡고 나온 게 정확히 우리가 원했던 라흐벨이었으니, 더욱 성공을 확신했지만."

"거기부터 시작이라니...."

"설마 라흐벨이 자기 평판을 더 희생할 거라곤 생각을 못 한 게 흠이지만. 솔직히 너도 못 믿잖아?"

"...그래서 왜 이런 걸 나한테 자랑하는 거지?"

"이유야 많지만 역시 나이를 먹고 보니 누군가 내 활약을 알아주면 좋겠더군. 그래야 내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질 테니 말이야."

"왕국을 여러 번 배반한 역대 최악의 마법사로 말이지."

"걱정도 마. 그런 자잘한 이명을 얻을 생각 없네. 얼음 여제."


어두운 복도는 웅얼거리며 두 사람을 삼켰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딘은 평소의 냉철한 느낌을 살려줬다. 그제야 나르시아는 딘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알아챘다.


그는 몹시 흥분하고 있다. 자신이 세워놓은 업적에 만족하며, 이후에 있을 일을 기대한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무고한 목숨을 죽이는 일에 보람찬 듯이 활개 치는 모습은, 역겨워서 도무지 바라보기 힘들었던 나르시아.


하지만 시선을 돌려도 바라볼 수 있는 건 딘의 옆모습과 칠흑과 같은 어둠이다. 석재가 자아내는 울림은 으르렁거림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아무도 라흐베르를 불경하게 부르지 않는 것처럼, 나도 도무지 입에 담을 수 없는 경지로 가면 되니까."

"...미쳤어."

"아무튼 이르미온을 마주했다니 내가 다 긴장했네. 아직 꺼내 들 패가 아닌데, 벌써 발각당하면 나로서도 곤란하고 말이지."


나르시아는 이르미온이란 명칭에 딘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장난치는 것 같지 않게, 강철같이 단단하고 선명했다.


"왜 그러나? 설마 전설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적어도 몇 년 전부턴 실존했다고 생각하게. 하, 이르미온이라는 이름 하나만 남은 채로 모든 걸 움직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럼 우릴 죽이려고 했던 것도...."

"시오르가 그 멍청한 녀석들에게 잡혀서, 증거 인멸을 위한 의뢰가 왔다.... 악연이 참 질기지 않나?"


딘의 말에 나르시아는 서서히 불안감을 느꼈다. 정말 모든 게 우연이었던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선택을 되돌아봐야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명언이 있지. '무수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건, 우연을 붙잡을 수 있는 노력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지금껏 네 표정이 한순간이라도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야."

"진짜 재미있으면 그게 미친 사람이랑 뭐가 다르지?"

"하하하! 미쳤다라. 틀린 건 아니겠지."


무대에 서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린 딘에게서 검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살점에서 피어난 검은 마법진은 그의 몸을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했다. 나르시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진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을 놓쳐선 안 됐다.


딘이 자신에게 걸어둔 마법을 파악해내는 데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무리 보더라도 그가 자신을 곱게 놔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놔준다는 것도 이상했다. 마치 장례식 때에 흘러나오는 진혼곡처럼, 곧 죽을 사람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걸 어쩌겠나. 처량한 병사들이 마력과 강철 사이에 뒤엉켜서 만들어내는 전선, 전율이 일어나는 그 현장을 너는 알 수 없을 거야."

"알고 싶지 않아."

"다들 그러겠지. 시나한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팔을 뻗어서 케룸 가문의 마법진을 보여줬다. 그들의 마법진은 정교하면서도 여러 차례 모습을 바꿔서 보안을 유지했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 속에 감춰진 마법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리란 사실은 나르시아는 쉽사라 알 수 있었다.


"케룸 가문의 마법은 오랫동안, 마력을 쓰지 않는 마법을 위해 오랜 세월을 살아나갔다. 지금도 회백색과 잿빛으로 물든 마법 정도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


말하는 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마법진이 유리처럼 깨져서 바닥에 우르르 쏟아졌다.


"그런데 이런 마법을 돌연 취소하고는 우민들에게 나눠줘?"

"하, 자기 성과를 도둑맞았다는 것처럼 말하네."

"그런 놈을 현자니, 뭐니 하도 떠받드는 것도 웃긴 일이야. 우리는 얼마든지 정점에 설 수 있는데...."


혼란스러운 인간상에 나르시아는 눈을 감았다. 대체 뭘 위해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노인의 말에 집중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한 건 전쟁을 즐거이 여기고, 자신의 형인 시나한을 시샘하는 악인이라는 사실이다. 왕국을 종복들의 손에 넘긴 장본인인 것도 틀림없었다.


"그래서 철저히 그놈만은 여기 오지 못하도록 배제했네. 게다가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가 시오르라는 사실도 귀신같이 알아차려서 화가 나는군."


갑작스레 팔을 뻗은 딘은 그림자를 무너트렸다. 건물 외벽인 척하는 마법을 걷어내는 것뿐인데도, 바깥에서 들어온 빛은 어둠에 익숙해진 나르시아를 괴롭게 했다. 바깥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우연을 붙잡을 시간이.


"그래서 자기 자랑 시간은 끝냈다는 거지?"

"어차피 내가 맡은 일은 여기까지다. 다음은...."


그 순간, 짧은 비명이 솟구쳤다. 나르시아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기에, 고개를 움직여서 근원지를 찾았다.


밝은 빛이 눈을 가려왔지만, 다시 빛에 익숙해진 눈은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왔다. 처음엔 흐릿하던 검은 점이 점차 거대한 원으로 변했다. 나르시아는 그 구체 안에 담긴 것을 보고 목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붙잡을 수 없었다.


"아...아아...."

"저 여자 일이지."


세라스와 알렌, 레아가 그들의 마법 안에 묶여있었다. 그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있는 에나스는 킥킥대며 나르시아를 바라봤다.


"두 번째야. 우리가 만난 거 말이야."


낡아서 찢어질 것만 같은 붕대를 온몸에 감고, 거적이 되어버린 망토를 두른 종복. 에나스를 마주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공허한 보랏빛 눈동자는 이제 두려움을 심어주기엔 충분히 빛을 되찾았다.


"세 번째는 없을 텐데. 너무 슬픈 일이야."

"에나스...."

"에나스 님. 말씀하신 대로 나르시아를 데려왔습니다."

"아, 좋아. 벌써 네 명. 네 명이나 있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구부렸다가 피는 에나스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은 마력에 조금씩 침식되어가는 세 사람 중, 유독 레아만은 과하게 고통받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 모르겠구나. 설명은 첫 번째인데 괜찮으려나? 아니, 말하지 않을래. 들어야 할 사람이 들어야지. 안 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린 에나스. 나르시아는 불현듯 불쾌함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저번에 쏟아내던 마법을 기억하기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괴물을 보는 건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주인님에게 바칠 건 언제나 최고여야만 해."

"에나스 님, 나엘 님이 당하셨는데 이후는 어떻게 해야...."

"주인님을 위해 죽은 거잖아? 분명 제 할 일은 다 했을 테니, 이젠 녀석이 오기만 기다리자."


대수롭지 않게 말한 에나스는 딘의 마법을 강탈했다. 한순간에 딘의 마력이 에나스의 마력으로 변하며, 나르시아의 숨통을 조여왔다. 가슴부터 다리까지 온통 조이는 사슬에 나르시아는 어쩔 줄 몰랐다.


"젠장...."

"준비됐어? 너도 이제 우리와 함께 할 텐데."

"이딴 식으로 죽을 바엔 자살하고 말지."

"다들 그렇게 말해. 지금껏 3천 번은 더 들었는걸?"


나르시아는 온몸이 에나스를 향해 가까워짐을 느꼈다. 팔을 뻗은 에나스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듯이 작게 말했다.


"네가 한 말처럼 쉽게 죽음과 함께한다면, 우리도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다들 죽는 게 무섭다는 둥 변명만 하더라고."


얼음 같은 차가움도, 불꽃 같은 뜨거움도 없었다. 살점의 감각만이 나르시아를 더듬었고, 아무런 감각도 건들지 않았다. 인간과 멀어진 종복들은 모두 이런 꺼림칙함을 가진 것일까? 나르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검은 마력이 정전기처럼 일어나고는 나르시아의 뺨을 파고들었다.


"으윽!"

"부디 네 차례를 기다리길 바라."


순식간에 그녀의 몸 안에 잔류한 마력을 갉아먹기 시작한 마법. 아슬아슬하게 생명에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까지만 없애버렸지만, 조금이라도 마력을 움직이려고 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마력을 건들었다. 나르시아는 연속해서 이어진 무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죽음이 있다고 하더라고. 난 그런 거 모르겠어."


바라봤던 검은 구체가 점차 가까워졌다. 나르시아는 물속에 가라앉는 느낌에 절로 몸부림을 쳤다. 여기서 저항하지 않는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감각이 그녀를 뒤덮었다.


"하지만 주인님이 바라신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따라야지. 그게 종복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에나스는 고개를 돌려서 마력이 크게 비틀리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기다리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 배신자? 그리고 마법사."


라흐벨은 시오르의 어깨를 붙잡고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시오르도 대답하려는 듯했지만, 목이 아파왔는지 목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허공에 흩날리는 드레스는 시오르의 망토처럼 보였다.


"두 번째 만남을 환영해."


작가의말

코로나가 퍼지는 와중에 두 번이나 감기로 쓰러진 기록을 세우고 말았습니다.

하필 지금은 동네에도 떠도는 중이라, 몹시 조심해야겠네요....

다행히 지금은 별 증상 없이 호전되긴 했지만, 못해도 2주간은 알아서 경계하고 살아야겠습니다.


다행히 마감 시간 맞춰서 업로드에는 성공했지만, 과연 다음 주는...?

이번 주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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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3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 마지막 여명#2 20.03.19 66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5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69 잘못된 시작들#2 20.01.16 43 0 15쪽
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65 갈라지는 비극#1 19.11.21 31 0 13쪽
64 정말로 잃어버린 것#9 19.11.14 43 0 19쪽
63 정말로 잃어버린 것#8 19.11.07 56 0 14쪽
62 정말로 잃어버린 것#7 19.10.24 38 0 14쪽
61 정말로 잃어버린 것#6 19.10.17 3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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