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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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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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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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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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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명#4

DUMMY

구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망각하는 일이나, 되뇌이며 집착하는 일 또한 당연했다. 이를 넘어서고 놓친 것을 떠올리며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시오르는 그런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건 과거의 자신이 알고 지켜왔던 신조다. 결코 기억을 잃은 비루한 마법사가 가질 수 없는, 멀고도 험한 깨달음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마력이 온 주변을 뒤집어놓을 때, 시오르는 두 손을 비워놓기 위해 온갖 마법을 쏟아냈다. 날개처럼 펼쳐진 수많은 구체. 그 안에 담긴 원소는 주변에서 뽑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했다. 불과 물, 땅과 바람. 그리고 그 이상의 원소가 에나스의 마법진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에나스!"


시오르가 배운 건 붙잡는 방법뿐이다. 남의 손을 붙잡고 감사할 줄만 알았으며, 그 손으로 겨우 타인을 부여잡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그 정도 다짐에는 앞날이 존재하지 않았다. 책으로만 바라봤던 영웅들을 동경하기엔 현실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충분히 그의 머리로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로지 마법에만 몰두하며 과거의 자신을 뒤쫓겠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게 때를 놓친 시오르는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타협해선 안 될 선을 넘기며, 모든 생각을 한 방향으로 집중해야만 살 수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살리겠다는 오만하고 불가능한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버려야만 했다.


손끝에 나타난 마법진은 네 방향의 가시를 뻗어냈다. 가시 사이를 오가는 마력은 억지로 응축되어서 검은 수정으로 변모했다. 이를 탄환처럼 발사하자, 에나스는 즉시 마법진을 뒤로 한 채로 방어막을 펼쳐냈다. 잠깐 보인 모양만으론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안에는 거대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도사리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평범한 마법이라면 이미 간파당하고 무너졌을 테니까.


시오르가 발사한 구체는 갑작스레 부딪치며 궤도를 틀었다. 검은 수정은 부글거리다가 허공에서 터졌고, 닿지 못한 일격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에나스는 이런 시오르를 깔보듯이 허공에 잔류하는 마력을 통째로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감당할 수 없는 억지력이 육신을 짓누르자, 살점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그가 두르고 있는 마력이 옷의 형태를 하고 있기에, 고깃덩어리가 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팔에 두른 사슬을 부여잡고, 그것을 다시 크게 끌어당겼다. 지면에서 솟구친 검은 기둥은 큰 소리와 함께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에나스는 이런 상황을 간과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럴 셈이지? 대체 언제까지 그럴 셈이냐고!"


점차 격양되기 시작한 에나스의 모습에, 시오르는 속으로 쌤통이라며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나 강하고 대단하다는 종복을 이렇게까지 상대하며 화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은 마법사들만큼이나 대단한 업적일 것이다. 그는 에나스가 마법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과, 그걸 자신이 망가트릴수록 계획은 망가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에나스는 종복들을 끌어다 모았고, 라흐벨은 그들을 저지하기로 했다.


문제는, 거꾸로 솟은 나무 안에 갇힌 가족들이다. 그들을 구하는 게 지금은 제일 중요한 목표였고, 무엇보다 그들이 종복들의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는 건 뻔했다. 어째서 레아가 선택되었는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그가 손을 뻗지 않으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


그는 다시 검은 마법진을 불러냈다. 불길하게 쏟아내는 검은 연기는 어딘가 종복들과 닮아있었다. 라흐벨이 저지른 과오가 이어졌다고 한다면, 룬 또한 자신과 같은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종복들의 움직임이 불안하기만 했다. 만약 자신이 쓰고 있는 마법을 충분히 파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저항은 그저 가여운 재롱에 불과했다.


짧은 순간 내에 많은 마법을 이뤄내야 한다. 간파당하지 않고, 그들도 처음 볼 법한 마법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 마음이 그를 천천히 마력 속으로 떠밀었다. 손에 붙잡힌 흐름을 끌어당긴 시오르는 손가락을 펼쳤다. 손끝에서 뻗어 나간 마력은 선을 그리고 마법진을 이뤄냈다. 회전하며 채워진 형상은 다시 지워지며, 더 넓고 큰 원을 완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나는...."


영창을 넣으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신력이 온통 여러 마법에 쏠린 탓에, 이 마법을 사용하기엔 견딜 수 없는 한계가 다가왔다. 세 개의 마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마법사일텐데, 어느새 시오르는 열 개가 넘는 마법을 붙잡고 싸워왔다. 레아의 눈동자에는 이러한 모습이 선명하게 잡혔다.


어째서 이런 정황이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식은 많았지만, 그것을 실현할 능력은 모자랐다. 마력을 색적하는 마법은 갖췄지만, 그 이상의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다. 고통 속에 일그러진 시야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분명했다.


서로 견딜 수 없는 표정을 한 탓일까? 시오르는 정신을 집중하여 마력을 끌어모았다. 기존의 흐름과 다른, 너무나도 뚫린 흐름을 제어하자는 생각을 포기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깊은 곳에 담긴 힘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엉망이 된 마력은 시오르의 육신을 찌르고 다른 마법의 상태를 약화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마력이 투자되면서 더욱 견고하고 강력해져만 갔다. 고통은 더욱 멀어져갔고, 에나스가 난사하는 마력은 온통 시오르에게 끌려갔다.


계승 받은 마법을 이용하여 자연마법을 익히고, 소모한 마력을 온전히 끌어모은다. 이러한 발전이 고작 하루 만에 이뤄졌다. 검게 물든 하늘 위로 더 새까만 마법진이 새겨지며,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선사했다. 에나스는 인상을 찌푸리고 방어를 준비했다.


"더한 희생이라도...."


레아는 마력을 빼앗긴 리버스 일가에게 다가가 그들을 끌어안았다. 다가올 마법은 강력한 충격으로 기둥을 무너트리려 할 것이다. 세라스는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무력함과 분함 사이에 선 채로 버티고 있는 정신력은 거기서 끝이었다. 나르시아는 기절한 세라스를 쓰다듬었다. 이런 위기에 내몰리지 않도록 노력해왔던 그녀였기에, 슬프고 괴로웠다.


알렌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시오르는 입가에 새어 나오는 핏줄기를 겨우 끊어내며, 피와 함께 머금은 말을 꺼냈다.


"치루는 자...."


마법진은 완성된 영창을 통해, 그의 내면 안에 새겨진 무언가를 끄집어오기 시작했다. 기억이 묻힌 계약은 단순히 라흐벨을 속박하기 위함은 아니다. 분명 그 안에는 그녀의 힘을 빌리는 것도 포함되었다. 모든 대가는 그가 치뤄야만 하는 부당한 것이지만, 그런 부당함은 절박함 앞에선 먼지처럼 흩날렸다.


허공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검은 사슬. 거대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슬이 서로 얽혀서 거대한 형태를 취한 것이다. 시오르의 떨리는 손이 아래로 향하자, 사슬은 일말의 지체 없이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사선으로 내려온 사슬은 커다랗게 피어난 나무를 직격하며 큰 충격을 일으켰다. 본래 강력한 충격에 휩쓸려야 할 마력조차 탈출하지 못하여 사슬에 말려들고 말았다. 더해진 힘은 그대로 기둥을 금 가게 했다.


한 번의 일격이 끝나고, 필요 없어진 뒷부분은 다시 양 갈래로 뻗어 나오며 기둥의 다른 틈을 파고들었다. 마치 분수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진 공격은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했고, 왕성의 온 지면과 벽에 뿌리내렸다. 거꾸로 솟은 나무는 에나스의 손길에 유지되었지만, 에나스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망할 마법사!"

"서둘러라, 에나스. 때가 임박했다."


검은 갑주에 잠든 마흐니는 푸른 마력을 뻗어 무언가를 불러냈다. 지친 라흐벨은 아차 싶었는지 다급히 마력을 붙잡아보지만, 한 번 끌려간 마력은 그대로 마흐니의 마법을 집행했다.


지면에서 솟구친 검은 마력의 병사들은, 이미 사라진 망국의 문양을 한 갑주와 방패로 무장했다. 거대한 창은 평범한 마법으론 막을 수 없을 만큼 강인했고, 그들이 쥔 칼에는 살의가 가시적으로 흘러나온 것만 같이 불길했다. 결국 소환되고만 마흐니의 군단에 라흐벨은 좌절했다.


"어떻게 막아냈는데...."


솟구친 병사는 얼핏 세더라도 백 명은 넘는 수였다. 라흐벨이 전부 틀어막지 못했더라면, 오랜 세월 전에 있었던 수천만의 검은 깃발이 나투르 대륙을 행군하던 모습을 볼 뻔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안도할 수 없었던 라흐벨은 아래를 바라봤다. 왕성을 향해 걸어오는 마흐니의 군단은, 엽견들을 내세워서 영역을 넓혀나갔다. 저항하던 일부 마법사들의 비탄을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에나스는 마흐니에게 불평을 토해냈다.


"비켜, 마흐니! 이건 내가 주인님께 드리는 일이야."

"아직도 모르나?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우리와 같은 핏줄을 찾고자 그분의 영광을 몇 년이나 지하에 묶어둘 생각이지?"


그때, 라흐벨은 '같은 핏줄'의 의미를 깨달았다. 종복들은 정령과 인간이 섞인 존재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룬이 여러 실험을 거쳤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을 직접 돕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발설하고 만 세계의 비밀이 활용된 건 당연했다. 그 탓에 수많은 인간이 희생당하고, 온갖 정령이 사멸했다. 억지로 뒤섞어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사실상 신의 위업에나 해당하는 일이다.


그리고 룬은 그것을 해냈다. 온전하지 못했던 에나스를 제외하고, 뒤이어 태어나는 종복들은 모두 온전히 룬의 손에 종복이 되었다. 그리고 필요 없어진 존재들은 전쟁 때에 온갖 수단으로 이용당했다.


그들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살아야만 했다. 룬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되찾았다. 여러 대에 거쳐 흐려지는 상처는 그들을 세간에 잊히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됐다. 하지만 에나스라면 분명 그들을 찾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룬의 육신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만큼, 그들도 그것은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그렇다면 육신을 대체할 것을 찾으면 그만이다. 자신들과 같은 존재를 찾아서, 그 안에 룬의 갈기갈기 찢어진 영혼을 밀어 넣는다면 룬은 되살아난다. 룬은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되찾을 마법사다. 그러니 당장 그 어떤 육체에도 만족한다.


거기에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되는 시오르를 무너트리고 부여잡는 데에 얼마나 훌륭한 인질인가? 레아는 그렇기에 지금, 룬의 뒤집힌 나무 속에 갇혀서 고통받는 것이다. 레아가 죽는다면 가장 간단하게 이 계획이 무너지기에, 어떤 계획보다도 견고하고 안전했다. 시오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에 고개를 돌렸다. 프라하에게 도망치는 데 성공한 솔은 마공학을 이용한 포신으로 그녀를 저격했다. 그 아래로 천천히 다가오는 딘과 리아, 그리고 후드를 뒤집어쓴 노파. 아마 저 세 사람이 모두 종복임은 분명했고, 특히 루니르노의 상징을 손가락과 등에 두르고 공허한 눈을 가진 노인은 처음 보지만 짐작이 갔다. 새로이 뽑힌 종복 중, 에나스를 대신하여 루니르노를 이끌었을 종복. 그간 테사르노가 쫓던 존재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나엘 하나만 시오르가 계약으로 제어해둔 상태에서, 이 모든 존재가 에나스를 보좌하게 둬선 곤란했다. 지금도 겨우 마흐니의 힘을 짓뭉개고 군단의 소환을 억제하는 게 전부다. 이 이상의 노력은 그녀조차도 시도해보지 못 한 일이다.


하지만 시오르의 피로 물든 뒷모습을 볼 때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신이 실패하면 시오르는 엎어지고 만다. 자기가 이끈 파멸의 길에서 책임지는 건 계약보다 더 중요했다. 더 이상의 오만함과 이기심을 버리고, 인간을 올바르게 지켜봐야만 한다. 라흐베르의 이름을 건 이상, 라흐벨 또한 모든 걸 걸고 나서야만 했다.


기둥은 마침내 완전히 갈라지고, 사슬이 다시는 붙지 못하도록 더욱더 세게 당겨댔다. 물방울이 맺듯이 서로 결속하려던 흐름이 억지력의 개입으로 인해 흩뿌려지고, 거대한 충격만을 일으키며 무너졌다. 흐르던 흐름이 완전히 멎어버리자, 시오르는 해냈다며 팔을 뻗었다.


성공을 확신했던 순간, 붉은 물줄기와 함께 팔만 앞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시오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팔이 레아에게 닿지 못한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땅에 처박힌 마력은 하찮으리만큼 적었지만, 그사이에 일어난 충격은 원래 그 마법이 어느 정도의 힘을 담고 있었는가에 대해 납득이 가게 했다. 바닥에 엎어진 시오르는 그대로 전신이 틀어박혔다.


"네가! 네가 뭐라고 감히!"


시오르는 자신의 팔을 가른 일격에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저항의 의지를 약탈당한 듯이 죽어있었다. 고통을 차단한 탓에 몸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괴롭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한 것이다. 팔에 자라나는 검은 핏줄은 마력이 피부를 뚫고 흐르느라 핏줄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피에 젖은 몸은 검은 마력으로 만든 천이 덮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한계임을 알렸지만, 혼자만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다.


겨우 여기까지 성공했는데 레아를 구하는 건 직접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는지 고개를 움직였다. 주변에 넘실거리는 마력 탓에 바닥에 고인 핏물 위로 하얀 수정이 피어오른다. 아마 이대로면 회복하기 전에 상처 위로 수정이 자라서 영원히 불구가 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순수한 마력 결정은 쉽사리 제거되지 않고, 그런 게 체내에 유입되면 마력이 온통 비틀려서 곤란해진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억울하고 두려웠다.


알렌은 그런 시오르의 모습을 바라봤다. 고요한 체념과 희미한 만족은 결코 바라보기에 기쁘지 않았다. 이래서는 그의 어머니가 죽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이 돌아올 거라고 믿던 어머니의 마지막처럼, 우리는 모두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는 게 시오르의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형!"


에나스에게 마력을 온통 빼앗긴 탓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망가진 왼쪽 눈에서 더 많은 마력이 새어나간 탓인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나무 기둥에 갇혀있다가 풀려난 탓에 바깥에서 밀려드는 마력의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알렌은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려고 노력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칼로 찌르는 듯한 압박이 밀려왔지만, 그는 더욱 형에게 다가갔다.


숨을 붙이고 있는 건, 아직 시오르가 마법을 제어할 줄 알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대로 기절한다면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끌려오는 팔은 제시간 내로 시오르에게 닿지 못할 것만 같았다.


분개하여 욕설을 내뱉는 에나스와 이를 저지하는 라흐벨. 지금이라면 기회는 충분했다.


마흐니가 없었더라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몸집만큼이나 큰 대검이 날아들자, 알렌은 반사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대검이 일으킨 파동은 마력을 머금고 다가와, 알렌의 상반신을 망치로 가격하듯이 두들겼다. 고통을 다 토해내지도 못하고 엎어진 알렌은 겨우 균형을 잡았다. 마흐니는 푸른 마력을 더욱 번뜩이며 갑주를 움직였다.


"죽게 두어라. 그의 희생이 헛됨을 바라보며, 너희의 나약함에 자괴하고 자멸해라."


텅 하고 크게 소리가 울러퍼지자, 마흐니의 근방으로 마력이 끌려들어 갔다.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시오르는 방어막이 한 꺼풀씩 떨어져 나가는 걸 느껴야만 했다. 알렌 또한, 더 나선다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력마저 빨려서 죽고 만다.


단순히 죽는다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싸웠던 시오르가, 마지막에 보게 될 장면이 자신들의 죽음인 게 두려웠다. 그리고, 이미 시오르가 죽는다고 생각하고 만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아직도 많은 마법을 부여잡고 모두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체념한 건 자신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지도 않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한 사람이.


"시온!"


레아가 뻗은 손은 어느새, 시오르의 팔을 부여잡고 그에게 달려갔다. 마흐니는 어리석은 인간의 판단에 하찮다는 듯이 강철 손아귀를 꿈틀거렸다. 실타래처럼 뻗은 마력은 에나스와 라흐벨의 마력을 끌어당겨서, 주변을 뭉개버렸다. 공간이 통째로 세계의 법칙을 벗어나, 자기 멋대로 뒤틀리고 무너졌다.


그러나, 레아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하얗게 부스러지는 몸은 시오르와 같이 하얀 마력에 뒤덮여서 천처럼 펄럭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는 세공된 보석이 햇볕에 놓인 것처럼, 죽어가던 시오르의 시야를 뒤덮었다.


의도한 적 없는 상황에 에나스와 마흐니는 당황했다. 분명 레아의 몸에서 나오는 마력은 순수히 그녀의 것이다. 하지만, 방금까지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던 제물이 정제된 마력을 쏟아낸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무채색의 마력은 마치 무언가를 따라 하는 아이처럼 정돈되지 않았다.


"아아.... 실패도 이런 실패가!"

"아무래도 그 녀석의 힘만 일부 넘어온 모양이네."


에나스는 격렬하게 떨려오는 눈동자를 부여잡지 못 했다. 라흐벨은 그런 모습에 끔찍함을 느꼈지만, 아래에서 일어난 일도 그에 못지않은 상황이다. 레아에게 룬의 힘만 일부 잔재하는 게 당장은 유용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녀의 생존은 룬을 죽음 너머에서 끌어내기 위한 좋은 닻이 될 것이다. 위대하고 사악한 마법과 많은 세월을 기다린 준비를, 더욱 단축하고 간략히 할 수 있다. 구태여 그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레아 본인은 머지않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또한,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줬던 이의 목숨이다.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의구심조차 품지 않고,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내고자 손을 끌어모았다.


양손에 모인 마력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만큼 밝고 선명한 백색 빛을 일으켰다. 모두가 그것에 얼굴을 찌푸릴 때, 시오르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자신이 살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고통을 차단하고 있는 탓에 자신이 얼마만큼 죽었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단지 얼굴을 적시는 자신의 피만이 죽을 때를 알려줬다.


그에게 펼쳐진 광경은 아름답고도 슬펐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신을 뒤덮는 하얀 드레스는 너무나도 그녀에게 어울렸다. 살아있는 생명을 새겨놓은 것인지, 그런 것들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그려낸 것인지 화려하게 펼쳐진 문양들이 그의 손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변한 레아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눈물과 괴로움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웃고 말았다.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면 그녀도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넘고 말 것 같았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마지막에 보여줄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며 흐리멍덩하게 바라보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시오르는 끊어져 버린 의식을 놓고 어둡고 메마른 무의식 속으로 떨어졌다. 깨어난다면 분명 그의 시야에는 무너진 왕성이나, 영혼들이 머무는 저편의 세계 중 한 곳임을 되뇌며.


작가의말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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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마지막 여명#2 20.03.19 66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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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5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5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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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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