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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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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8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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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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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글자수 :
47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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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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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갈라지는 비극#1

DUMMY

"아무런 문제도 없네."


라흐벨은 그의 머리 위에서 부양한 채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녀는 눈동자를 아래로 흘겼다. 꼭 쥐고 있는 주먹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살짝 머리를 두드리자, 시오르는 고개를 들었다.


"오우, 위험했네. 여자가 치마를 입고 있는데 그렇게 팍팍 고개 들면 오해받는 건 알지?"

"...그래."

"간만에 농담 좀 했는데, 맥빠지긴."


처음엔 이해조차 하지 못한 라흐벨이다. 겨우 자초지종을 다 듣고도 농담인 줄 알 정도로 웃겼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도 다른 이들처럼 달려가기 바빴다. 날아가는 게 빠르다는 것도 잊은 채.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서로의 심정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가족에게 공격당한 것과 죽을 위기가 아니기에 알지 못한 것에 누구의 책임도 없다. 아무도 안 웃은 농담 뒤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가서 멀쩡하다고 좀 말하고 다녀봐. 제일 마법 잘 쓰는 사람의 소견이라고."

"...알았어."


그는 말만 하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 쉬는 소리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입증했다. 인간의 시간에 익숙해졌던 정령조차, 견디기엔 답답한 순간이다.


시오르는 노려보는 눈빛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서재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관심 가졌던 것들이다. 저택에 왔던 순간부터 좋아했던 요소다. 그런데 지금은 색만 다양한 종이 쪼가리 정도로 보였다.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를 뿐이다. 그렇게나 자신이 미웠던 걸까 생각하니, 그간의 여정을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 부스러졌다.


창문은 열렸건만 밀려오는 것은 차디찬 샛바람. 이른 아침의 환영치곤 푸근하지 않았다. 시오르는 감기 걸릴까 걱정하며 창문을 닫았다. 맥없이 끊어진 마력은 파란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데 아침부터 찾아온 건 이거 때문이야?"

"반 정도는."

"그럼 나머지 반은?"

"오랜만에 힘이 좀 나는 질문이야."


한 바퀴 돌며 침대 위로 착지한 라흐벨. 자신의 방인 듯이 팔다리를 쫙 뻗은 채로 그를 봤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은 짐작이 가서 말이야. 필요한 사실은 전해주려고."

"무슨 일?"

"너를 두고 싸운다...고 해야겠지. 인기도 좋아."


손가락을 튕긴 그녀는 시오르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 피어오른 마법진은, 배운 그대로 악마의 상징이 가득했다.


"이르미온, 나투르 왕국. 어느 쪽이든 너를 확실하게 하고 싶을 거야. 한쪽은 의뢰받은 일이고 안 그랬다간 정체까지 드러나는데, 누구는 낙인이 지워진다는 사실만으로 머리 아픈 일이거든."

"그런 건 다 알아. 굳이 말해주는 건?"

"이르미온은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너를 죽이려고 하는 만큼, 계약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하지만 문제는 왕국이야."

"난 왕국 사람이잖아. 어떤 결과가 나와도 따르는 게 맞지 않을까?"

"그 결과가 네 죽음이라면 좀 다르거든."


라흐벨의 마법진은 점차 복잡한 구조로 변했다. 원과 글자가 늘어났다. 그녀는 복잡해지는 마법진을 어째서인지 서글프게 바라봤다.


"계약의 의무만이 아냐. 제대로 인간에게 도움도 되지 않았던.... 유일한 내 속죄니까."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마법진은 유리가 깨지듯 사라졌다.


"혹시 계약마법은 다룰 수 있겠어?"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 누나 말대로면 아직도 신호를 주는 정도고."

"큰일이야. 이래서야 내가 그냥 족쇄일 뿐이잖아...."


답답한 라흐벨은 입맛을 다졌다. 당장에라도 입을 열어, 계약마법에 대해 깨우치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시오르는 총명하니까. 하지만 악마에게 마법을 배운다니. 세간의 평이 그에게 칼을 꽂을 것이다.


하지만 라흐벨은 시오르의 마력으로 움직인다. 계약을 통해 강제로 힘을 징수할 수 있지만, 계약 외의 일에는 손을 쓸 수 없다. 자신의 존재만으로 시오르는 거대한 짐을 메고 있다.


남은 건 기억 없는 마법사가 스스로 깨우치길 비는 일. 시오르의 의지대로 자신이 움직인다면 적어도 그가 안전하다고 입증할 작은 증거라도 된다. 정령으로 격이 낮아진 지금은, 온전하게 지켜낼 자신이 없다. 에나스를 짓누르는 데에도 고생하면서 더욱 그리 느꼈다.


"아니야."

"응?"

"우린 서로에게 짐이야. 누나는 내 마력에 기대야 하고, 나는 누나의 행동을 제약하잖아."


시오르는 웃으며 말했다. 슬픈 이야기에 웃는 그의 모습은 익숙하다. 그게 그가 살아왔던 방식이니까. 기억이 없는데도 같은 길로 걸어가기 시작한 시오르.


"그러니까 서로 의지하면 되지."

"좋은 말이야. 일이 바쁜 건 알겠지만, 너도 수고 좀 해줘. 난 방금 그 마법진을 완성해야겠어."

"무슨 용도인데?"

"수틀리면 뒤엎을 마법."


침대에서 일어난 라흐벨은 자세를 낮췄다. 손을 잡은 그녀는 마력의 흐름을 살피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 그러니, 우리 암살자를 조심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자고."

"내가 말했던 얼굴 없는 암살자?"

"그래. 시간이 좀 걸렸지만 대부분 분석했지."


두 팔을 벌려서 두 사람의 사이를 마력으로 채운 라흐벨. 넘실거리는 마력이 비춰낸 형상은, 일전에 봤던 암살자의 형상을 했다.


"주력으로 사용한 마법은 원소마법 중 바람. 바람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반발할 때가 많아서, 바람을 제일 잘 다루는 에비넨 가문도 효율이 그리 높지 못해.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엔 적합하지 않은 마법 선정인 거지. 차라리 효율이 더 구려도, 효과는 분명한 번개가 나았을 텐데."

"암살자라기엔 변변찮다는 소리는 아니지?"​

"내가 보기엔 맞아. 적어도 너한테 갔던 녀석은."


암살자의 형상이 변하여 지도로 바뀐다. 나투르 일대에 그려진 지도는 온갖 장소에 점이 찍혀있었다. 어림잡아 열 개임을 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뭐야?"

"적어도 널 노렸던 녀석들."

"...뭐?"

"신경 쓰지 마. 너한테 도달한 건 결국 우연히 발견하지 못한 녀석이야."


다시 점을 확인해본 시오르는, 황무지 근방에 점이 찍혀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걸 전부 라흐벨이 막았다고 생각하니 감사하면서도 이렇게 노려졌음에 식겁했다.


"전부, 네가 봤다는 녀석과 같았어. 신분을 입증할 게 아무것도 없어. 그나마 너희한테 간 녀석이, 내가 봤던 것 중에서 제일 약해서 다행이야."


조금은 당당하게 말한 라흐벨. 그녀는 마력을 전부 거두고 그를 내려다봤다.


"문제는 이 녀석들의 출발 시기야. 어디서 출발했는지 몰라도, 최소한 일정에 맞추려면.... 아무리 시리아 지역에서 출발해도, 우리가 리든에 처음 도착했을 때 움직였어야 해."

"그럼 그때, 발터라는 사람은?"

"맞춰서 온 게 아니야. 정말, 우연히 그때 있었을 뿐이야."

"이상하잖아. 그 사람들이 날 죽이려 드는 건, 의뢰를 받았을 때잖아."

"그래. 의뢰 내용을 예상하고 움직이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렇게 말한 라흐벨은 시오르를 바라봤다. 시오르는 다가오는 위협에 대비할 수 있을까? 바깥에 내던져진 양초처럼 모든 게 위험하기만 했다.


"이 모순이 해결될 만한 전제는 딱 두 가지야. 하나는 이 녀석들이 칼립소 근방에 있었을 때. 의뢰를 받자마자 포위망을 구성한 거지. 이건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운이 없는 거지."

"그럼 남은 하나는...."


시오르는 두 번째 전제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애초에 나를 노리고 있었을 때?"

"후자면 상황이 많이 이상해. 테사르노만 아는 정보를 쥐고 있는 거야."

"내부의 배신자라고? 테사르노에...?"

"종교인이 다 깨끗한 건 아니지. 아무튼, 이러면 널 네메시스티아로 보내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야."


원래부터 라흐벨이 테사르노를 싫어하는 것은 안다. 원래 인상이 화내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다.


"이 전제도 흠은 많아. 최근에서야 네 위치를 안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어쨌든, 암살자를 조심하는 방법 중 제일 확실한 건.... 수도에도 내가 대동하는 거야."​

"아무도 찬성하지 않을 것 같은데."

"바로 그거야. 누가 미쳤다고 날 수도로 들여? 몇백 년 전에 있었던 마왕이 누구 때문에 생겼다고 종알종알거릴 텐데. 아무튼 이건 최후의 수단이야. 네가 부르면 즉시 도달할 수 있는 거리까지 몰래 붙어볼 거고."

"차선책은?"

"음...."


라흐벨은 '리버스 가문과 원래부터 우호적인 가문의 도움'을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어제의 일 때문에 그 말은 삼가기로 했다.


"안전한 길로 다니는 거지."

"그건 당연하지 않아?"

"일개 수도 경비병이 지키는 길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럼?"

"테사르노인들. 그리고 왕족을 지키기 위해 선별된 사람들. 테사르노가 타락했어도 일부일 테고, 만약 내부를 파고든 게 아니었다면 더욱 안전해져."


시오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거라면, 주변 사람들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


"그래서 조금만 경솔하게 움직여주면 좋겠는데."

"경솔하게?"

"그래. 내가 과하게 너랑 다니면 분명 의심하고 수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좋은 수가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내가 너한테 마법을 가르치는 것보단 나아. 최악은 면하고 싶은 거니까."


햇살이 조금씩 떠올랐다. 새벽의 잔향이 사라지고 아침의 향기가 스며 올라온다.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 그는 걱정이 들었다. 혹시 나가면 가족들과 어색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외출할 땐 날 불러줘. 너희 집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걱정이 많은 것 같다는 정도만 말해줘도 되고."

"거짓말은 아니네...."

"난 거짓말 잘 못 하잖아, 네 말대로라면. 그럼 모호한 사실로 둘러대자고."


이런 면모를 보면, 그녀는 분명 악마다. 말 그대로 악마일 줄 몰랐던 게, 이제는 웃겼던 시오르는 피식 웃었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은 것 같았다.


"그럼 아침이나 드시러 가세요."

"오늘도 안 먹어?"

"넌 너희 집 식기 바뀌는 꼴 보고 싶냐. 내가 뭘 만지면 인간들이 얼마나 싫어하는데."

"그럼 내 침대도 바뀌는 거야? 이제 좀 익숙하다 싶었는데."

"비밀로 해. 내 흔적은 깔끔하게 치우고 가니까."


기분이 풀린 걸 확인한 그녀는 살짝 웃었다. 순간 뇌리에 자기 표정이 좋지 못하단 사실이 지나갔지만, 그녀는 시오르의 미소를 봤다.


시오르는 라흐벨을 이해했다. 그러니, 살벌한 얼굴도 미소라는 걸 알 수 있다.


때로는 그게 고맙기까지 했다. 자신이 망가트린 인간이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준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냐며 쓴맛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 그리고."

"그리고?"

"문 열 때 조심해."


라흐벨의 조언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한 시오르. 혹시 누가 있는 건가 걱정하며, 그는 문을 무척이나 조심히 열었다.


문틈에 있던 연보랏빛 눈동자가 시오르와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멍하니 있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놀란 시오르는 급히 문을 닫았다.


물론, 방금 마주친 눈동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문을 열자, 레아가 멍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잠깐 넋을 놓고 있던 레아는 다시 나타난 시오르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시온."

"미안. 문 열자마자 보여서 놀랐어...."

"내가 미안하지. 너무 문에 붙어있었나 봐."


만약 라흐벨의 조언이 없었다면, 문을 나서자마자 부딪쳤을 게 분명했다. 그 사실에 고맙다고 말하려던 시오르는 고개를 돌렸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가자. 머리는 괜찮아?"

"응. 아프지 않았어."

"다행이야. 정말."


고개를 끄덕이는 레아는 조용히 먼저 걸어갔다. 시오르가 문을 천천히 열지 않았더라면, 분명 문에 정수리를 찍고 넘어졌을 것이다.


"가자, 시온. 아침은 중요하니까."


게다가 이른 아침부터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그에게 좋게 보일 것 같지 않았다.


작가의말

슬슬 공익이 될 시간이네요

그래도 열심히 써서 완결까지는 내보는 게 목표입니다

...물론 잘 쓰는 게 0순위지만, 일단 완결 내보면 더 분명히 문제점을 짚을 수 있겠죠

아무튼 오늘도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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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3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4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6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5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5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69 잘못된 시작들#2 20.01.16 43 0 15쪽
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 갈라지는 비극#1 19.11.21 32 0 13쪽
64 정말로 잃어버린 것#9 19.11.14 43 0 19쪽
63 정말로 잃어버린 것#8 19.11.07 56 0 14쪽
62 정말로 잃어버린 것#7 19.10.24 38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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