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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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합이 열리는 모래톱은 항구로부터 남쪽으로 좀 떨어진 해안이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절묘하게 깔때기 모양의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졌고 좁은 입구로 빠져나가면 울창한 숲이었다.
열두 가문에서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나와, 그 중 백삼십여 명이 무장한 채로 모래톱 입구에 모였다. 그 가운데에는 야유복 차림의 다피나도 있었다. 공주의 요청이 수락되어 세 명의 기사 외에 메칼로의 부하 여섯 명이 동행하는 중이었다.
그 안에 메칼로는 없었다. 당연히 그도 포함되리라고 생각했는지 다피나가 놀라서 묻자 메칼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은 클라우스 가문의 사람이니까.”
그러나 클라우스 가문의 열 명 가운데 메칼로는 뽑히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래톱에 남겨졌다.
사냥에는 말도 개도 매도 허용되지 않았다. 오직 열 명의 사냥꾼과 그들이 지닌 무기가 전부였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땅에 닿을 정도로 긴 치마를 입고 무기 대신 부채를 든 공주는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저런 옷을 입고 숲을 달리겠느냐며 비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회합 때 아무 것도 사냥하지 못해 창피를 당할 사신단을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모두 사라져 버리고, 사람들의 눈빛에는 수백 년 전 기나긴 항해 끝에 처음 발 디딘 땅을 거침없이 노략했던 선조들의 광포한 기질이 되살아났다.
가장 먼저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은 클라우스 가문이었다. 그 선두는 헬리온 클라우스다. 몸을 보호하는 갑주는 일절 없이 얇은 천 옷만 걸친 채로 손에는 단검 한 자루를 든 것이 전부였다.
뒤를 이어 오비디온 가문이, 다음으로 드라고미르, 퀴넬, 바렌틴 등이 차례로 떠났다.
다른 가문들이 숲을 향해 뛰어가는 동안 공주 일행은 천천히 걸었다. 뛰고 싶어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공주이지만 다른 하나는 메칼로의 부하였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게냐? 사냥에 도움이 될 부하들만 보낼 줄 알았거늘.”
마치 사냥에 방해되는 사람이 그 사람뿐인 것처럼 다피나가 나무랐다. 그러나 타박을 받은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냥에도 생존에도 도움이 안 되는 분보다 낫지 않습니까.”
태연히 대꾸하는 토비아스를 향해 도끼눈을 뜨는 사람은 일행 가운데 공주뿐이었다. 공주도 진심으로 화내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의 안하무인은 메칼로가 허용하고 있었다. 메칼로 자신부터 토비아스의 잔소리를 참고 그의 의견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니 부하들은 말할 것 없었다.
항해 초기에는 토비아스를 싫어하던 아르반 인들도 점차 그의 무례와 신랄한 어조에 익숙해졌다. 거기에는 아르반에서 멀어지고 제한된 공간에 갇힌 그들의 상황도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 토비아스는 옳은 말을 했다. 그것만은 예의를 따지는 아르반 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평민인 주제에 왕족도 귀족도 신경 쓰지 않는 그의 태도를 용납할 수는 없었으므로, 결국 사신단은 토비아스를 ‘궁정의 광대’로 여기기로 합의했다. 광대의 풍자에는 화를 내지 않는 법이었다. 물론 토비아스에게 광대와 같은 익살이나 재치는 없었지만.
“그나저나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 사냥은 신경 쓰지 말라니. 게다가 사냥꾼 중 셋은······.”
나직이 묻던 기사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으로 막 들어섰을 때는 열 명이었던 인원이 어느새 일곱으로 줄어 있었다. 세 명이 언제 사라졌는지 아르반 인들은 전혀 몰랐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위할 인원이 다섯, 다른 가문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숫자잖나.”
게다가 다섯 명 중 엘킨은 아르반 인들에게도 시원찮은 무력의 소유자였다. 테리아 전사들을 상대하기에는 분명 역부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력은 고작 네 명.
“뭘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겁니까. 애초에 전력은 저희측 다섯 명으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만.”
토비아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별로 잘난체하는 것도 아니라서 더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아르반 인들은 발끈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기사라 철들기 전부터 무기를 잡아온 그들이 테리아 인과 한 번도 칼을 부딪치지 않고 두 달을 보냈을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루네 항에 정박한 한 달 동안은 심심해서라도 수련을 핑계로 대련을 청하고는 했었다.
결과는 누구를 상대해도 백전백패. 패배가 거듭되다 보니 지는 것이 분하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기사는 중갑에 마상전투가 기본이라 전투 방식이 다르다고 자위하는 것도 별로 도움은 안 되었다.
“걱정 마십시오. 첫날부터 헬리온 클라우스의 손님을 건드릴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가문은 기껏해야 두셋입니다. 그 정도는 바렌틴이나 라즈반에서 막아줄 테고, 이 회합의 목적도 애초에 헬리온 클라우스가 다른 가문들을 겨냥한 것이니 우리는 구경이나 하면 되는 겁니다.”
토비아스가 담담히 말했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가는 둘째 치고, 엘킨은 외국의 사신이 온 날을 이용해 수작을 꾸미는 테리아의 왕도 왕이지만 파리 한 마리 못 잡는 몸으로 모략의 한복판을 걸으면서 남 일처럼 시큰둥한 토비아스가 더 한 인간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도, 막상 사냥이 시작되고 공주 일행도 점점 숲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숲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짐승을 몰기 위해 외치는 소리, 휘파람 소리, 무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달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런 것에 섞여 이따금 누군가의 외마디소리가 들려와 공주 일행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것이 더 무서운 의미였는지도 몰랐다. 천천히 걷는 그들의 눈에 핏자국이나 싸운 흔적이 보이는 일이 늘어났다. 나무 사이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사람이 누가 손대기도 전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어디선가 부상당해 도망치다 방향 감각을 잃은 모양이었다.
테리아 인들은 “나올 거면 짐승이나 뛰쳐나올 일이지.”라고 투덜거렸지만 아르반 인들은 그때부터 칼집에서 칼을 꺼내 들고 다녔다. 토비아스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도 눈앞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니 소용없었다.
“어차피 우리 주변으로 바렌틴 가의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을 겁니다. 헬리온 클라우스의 손님을 노리는 머리 나쁜 가문을 걸러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일 테고요.”
짐승 사냥 대신 인간 사냥이 벌어지느라 시끄러운 동안 숲 속의 동물들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걸어도 사냥할 짐승은 보이지 않자 결국 공주가 불평했다.
“이러다 회합의 때가 되어 우리는 남들이 식사하는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겠구나. 토비아스, 이 사냥에는 코스탄딘 가문의 명예도 걸렸거늘 이대로 숲을 산책하기만 하다 돌아갈 작정이더냐?”
“숲이 이미 소란해진 후라 발이 빠른 짐승들은 달아나고 굴이 있는 짐승들은 숨었을 겁니다.”
토비아스가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그때 메칼로의 부하 중 하나가 그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은 잠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메칼로의 부하가 주변을 힐끗거리며 알려주는 말에 토비아스의 혈색 없는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공주님.”
다피나는 그의 연갈색 눈이 묘하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그 의미를 생각할 틈도 없이 토비아스가 말했다.
“바라신대로 사냥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이 숲에서 가장 멋진 짐승을.”
“무어라?”
“잘 달리셔야 합니다.”
그의 말과 함께 울창한 나뭇가지를 헤치고 십여 명의 남자들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메칼로의 부하들 중 하나가 공주의 손을 낚아채서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자리를 지키십시오.”
토비아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르반 인들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허약한 몸에서 나온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박력에 기사들이 움찔했을 정도였다. 뒤늦게 공주가 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적에게 둘러싸인 후였다.
뒤에 남은 사람들을 돌아볼 틈도 없이 다피나는 이끌리는 대로 달렸다.
“지금 어디로······.”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달리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사실을 배우고 입을 다물었다. 메칼로의 부하는 공주가 달릴 수 있도록 나무 사이로 솜씨 좋게 길을 선택했다. 한동안 그대로 달리다가 그가 말했다.
“이 방향으로 곧장 달리십시오.”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생각한 순간 손목을 당기던 힘이 사라졌다.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날카로운 금속성이 바로 옆에서 터졌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과 메칼로의 부하가 맞부딪친 것이 보였다. 보았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걸리는 치마를 무릎까지 끌어올려 휩싸 안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곧 누군가 뒤따라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해질 거라면 메칼로가 사냥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다피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할 수 있다면 소리 내서 말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무리였다. 심장이 갈비뼈에 부딪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섭게 뛰었다.
‘정말로 위험해질 거라면 토비아스가 그렇게 웃었을 리가 없어.’
그러나 무서웠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고 느끼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두려움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저린 감각이 허리와 팔다리로 이어졌다.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니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쩐지 다리가 비틀거린다 싶은 찰나 몸이 기우뚱 쓰러졌다.
이대로 비탈을 굴러버리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순간 허리에 강한 팔이 감기며 몸이 옆으로 휙 쓸려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기도 전에 정수리 위에서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에는 단단한 가슴이 맞닿았고 허리를 꽉 붙들려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등 뒤에서 풍겼다.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몸이 먼저 깨달았다.
“조한 가문이 뜻밖에도 사냥감을 모는 재주가 있군.”
낯선 남자가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분명한데 이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는 낯설지가 않았다.
‘누구······?’
그녀가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려고 할 때 방해라도 하듯 한 명의 남자가 수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다피나를 줄곧 뒤쫓던 사람이었다. 당장에라도 공격할 듯이 달려들었으면서도, 남자는 다피나를 보자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정확히는 그녀의 뒤에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아마도 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단검이 남자의 정수리에 정확히 박혔다.
- 작가의말
토요일 분량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 글의 장르는 로코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미, 믿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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